현대미술과 달리 우리 고유의 미술작품은 시와 회화가 조화를 이룬 완성도를 추구했다. 즉, 문학과 미술이 적극적으로 통섭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읽는’ 그림의 미학이 풍요롭게 꽃피웠다. 본디 우리는 ‘시(詩), 서, 화’에 두루 능한 예술가를 ‘삼절(三絶)’이라 불렀다. 즉, 진정한 예술가의 면모를 이 세 가지에서 찾았던 것이다. 문학은 그림의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우리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에서 화가의 문학적 너름새를 확인할 수 있고, 평면서화가 아닌 도자기, 연적, 촛대에서도 이 같은 미학을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는 시적 감흥을 토대로 하는 미술품이 향연을 벌이는 조화의 시대였던 것이다.

과거 서구의 작가들 역시 미술작품의 문학적 완성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다빈치는 “그림은 말 안하는 시요, 시는 말하는 그림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과거로 거슬러 갈수록 두드러진다.
현대미술의 반(反)문학적 조형미는 모더니즘 이론가들이 주창한 것으로, 오늘날의 주류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화가의 문인정신이 폄하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동양화는 시, 서, 화의 조화에 집중한 나머지 색체의 능력과 기교 넘치는 조형성을 얕잡아 본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여기서 과거와 현재가 소통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시각을 찾아보려 한다. 미술 이론가 그린버그, 스타인버그 등이 거부했던 과거의 것의 의미를 다시 음미하기 위해, 문학과 미술이 통섭했던 우리 옛 그림을 곱씹어 볼 것이다.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로 대중에게 미적 교양의 세계를 열어보였던 손철주. 그가 이번에는 조선시대 우리 그림이 가진 진정한 미적 의미를 전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