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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이란? 인문학은 흙이다. 내게 모든 생각의 토양을 마련해주는, 인문학은 내게 흙이다. 흙 속의 숨이다.

▷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아트앤스터디를 어떻게 알게 되었나?
인문에 대해선 로망이 많죠. 학부 때에도 인문대 수업은 종류별로 안 들어본 게 없던 것 같아요 청강이든 수강이든 계속했어요. 생각의 근원을 캐고 싶은 기본적인 욕구. 그게 그때고 지금이고 항상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아직 로망에 비해 아는 바는 지극히 없다는, 불균형. 철학아카데미에서 몇 번 수업을 듣고 있던 중, 메일이 왔었는지 우연한 기회로 아트앤스터

신자유주의의 도덕,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폭력과 야만의 시대, 신자유주의 그 이후] 엄기호

코난의 서사적인 만화보다는 원피스의 단편적이고 롤 플레이게임 같은 만화가 주류가 되는 세상. 그 안에서 긴 시간 동안의 통찰력이나 멀리 보는 안목보다는 단기적인 아이템만을 쫓는 동물적인 사람들, 그리고 그게 아닌 걸 알면서도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 more

미치기 혹은 사랑하기

[M. 프루스트, 생의 기표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진영

첫 강의에서 말랑말랑한 사랑이야기로 생각하지 말라던 위협은 불과 다섯 강의를 지나고 나서 롤랑 바르트의 ‘ㄹ’이 많이 들어간 혀가 꼬이는 부드럽고 감칠맛 나는 이름을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사랑의 주체’가 되는 순간이 올까? more

연암이 들려주는 걸쭉한 사람이야기

[5천 년래 최고의 문장을 읽는다: 박지원의 『연암집』 읽기] 전호근

연암의 글은 재미있다. 물 흐르듯 길고 유려하게 이어지는 문장도 재미있고, 무엇보다 그가 맛깔나는 입담으로 시원시원 쏟아내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이번에 연암은 한 성깔 하는(했던) 걸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역시나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는 more

철학적 테제들의 음악적 사상사

[크로스오버 인문학 – 지적 해방을 위한 가이드] 최정우

어느 술자리에서 오랫동안 잠적하고 있다가 최근 아리랑이라는 영화로 이슈가 된 김기덕 감독 이야기가 나왔다. 우선, 한국에서 김기덕이라는 감독의 위치는 매우 특이하다. 가장 한국적인 작품을 찍는 감독임에도(적어도 내 생각에는) 한국에서는 전혀 인정 more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김진영 <소설들 혹은 봉인된 혀들 Ⅱ> 카레닌의 침묵 사건 테레사는 '사건'이었다. 그 효과는 토머스 뿐 아니라 사비나에게까지 미쳤다. 사비나는 이전까지는 토머스의 절친한 섹스 프렌드였다. 필연성에 얽매여 '진리'... more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김진영 <소설들 혹은 봉인된 혀들 Ⅱ> 카레닌의 침묵 사건 테레사는 '사건'이었다. 그 효과는 토머스 뿐 아니라 사비나에게까지 미쳤다. 사비나는 이전까지는 토머스의 절친한 섹스 프렌드였다. 필연성에 얽매여 '진리'라 여기고 그 규범대로 사는 걸 선택하느니 그 규범을 곯리듯이 넘나들겠다는 토머스의 행동에 대해 '키치가 아니라서' 좋다고 했다. 키치는 바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아이와 놀 강아지 한 마리쯤은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만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여기는 것, 리빙센스의 인테리어만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가져다 준다고 여기는 것이다. 반면 토머스는 그 '키치-도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에게 아들이 있지만 아들과의 인연은 아내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끊어버렸고 여자와의 잠자리에서 잠은 자지 않되 성적인 관계만은 유지한다. 그리고 한 여자에게 정착하는 대신 '공평하게' 모든 여자와 이 '가볍고 덧없는 것'을 향유하고자 한다. 그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을 때부터 그 숭고한 '관계'라는 것, 일부일처제의 도덕은 이미 그 위력 속의 텅빈 공허를 내비쳤기 때문이다. 사비나는 그런 토머스를 좋아했고, 어쩌면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성감대'는 바로 그런 '배반'에서 오기 때문이었다. 토머스는 세상의 '도덕'을 배신하며, 동시에 성적 관계를 맺는 여성이 지니고 있던 '도덕'마저 파괴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캉의 명제처럼 '진정한 섹스'란 없듯, 토머스는 여성과의 성적 교합을 통해 그 자신을 재발견할 뿐 여성의 존재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가 잔 여성이란 그저 티슈 한장처럼 쓰고 나면 구겨서 버리는 존재나 다름없다. 그리고 토머스 또한 상대여성이 자신을 그렇게 여기길 바란다. 하지만 테레사는 다르다. 테레사는 그를 떠나지 않는다. 토머스가 테레사의 손을 놓고 잠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했을 때도 테레사는 끊임없이 토머스를 따라다니며 옭아맨다. 이 '사건'에 대해, 토머스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이 사건은 지극히 우연적이고, 필연에는 '어떻게 하면 된다'는 가이드 북이 있는 반면 우연에는 어떤 답도 만족할 만한 답이 되지 못한다. 결국 토머스는 테레사를 자신의 '운명의 여자'로 여기며, '필연'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테레사가 '우연'히 당신을 만났다고 말했을 때, 토머스는 절망한다. 그가 벗어나고자 했던 '일회성'에 또다시 얽매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비나는 토머스를 위해 테레사에게 일자리를 구해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녀는 토머스의 '친구'로만 남아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중절모를 쓰고 토머스 앞에 나타난다. 그의 기존 '향유'를 다시끔 되살리게 하기 위해서. 하지만 결국 사비나는 토머스를 테레사에게 빼앗기고 만다. 소설 속에서 '쿨'해 보이는 사비나의 질투는 칼처럼 날카롭게 드러나는데, 토머스의 양말을 숨기고 대신 여성용 스타킹을 던져주는 장면에서 특히 그렇다. 그녀가 프란츠와의 관계를 시작한 것 또한 그렇다. 그녀는 토머스가 테레사에게 '안착'했듯이, 그녀 또한 프란츠에게 안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는다. 그래서 프란츠가 내보이는 모든 '꼴불견'에도 묵묵히 참고 견디지만, 그녀는 그 '존재'의 무거움을 떠맡을 용기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프란츠를 떠난다. 나비처럼.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맞다는 것을 증명받길 원했다. 토머스와 테레사가 헤어지게 된다면, 그녀의 선택은 맞을 수도 있었다. 어차피 모든 것들은 무상하며 덧없고, 이 거대한 풍랑에 휩쓸려 가지 않도록 둘이 손을 잡아 봤자 파도가 그 위를 덮칠 것이기에. 하지만 토머스와 테레사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둘은 풍랑을 맞는다. 이겨내지는 못한다. 그들에게 너무 거대하기 때문이다. 다만 둘은 '함께' 그 파도에 휩쓸린다. 죽음이라는 파도. 테레사가 토머스에게 '사건'으로 나타난 것처럼 둘의 죽음 또한 '사건', 당혹스러운 우연으로 끝나고 그 '사건'은 이제 사비나에게 잔물결처럼 와서 스친다. 농담 프란츠의 세상은 사실 테레사, 토머스, 사비나의 세계와는 동떨어져 있다. 사실 프란츠야말로 현재 이 소설을 읽는 다수의 독자들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 그는 체코의 상황에 대해 '낭만적'이라고 여기며 사비나와 헤어진 후에는 그걸 '여운'으로 느끼기까지 한다. 그의 세상은 사실 체코와는 '떨어져 있다'. 그래서 그는 차마 체코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전선', 그 전쟁의 가장자리에 살짝 발을 댄 순간 그는 깨닫게 된다. 여배우는 그 상황을 즐기기 위해 지뢰밭에 뛰어들어 온갖 퍼포먼스를 취한다. 마치 이 전쟁이 축제로 바뀔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사진기자가 지뢰를 밟아 '터져버린' 순간, 그 농담과 우스갯소리의 순간은 깨지고 만다. 결국 여배우는 여교사에게 뺨을 한대 맞는다. 정신 차려! 프란츠 또한 그 순간 '뺨을 얻어맞은 여배우'처럼 깨닫게 되는 것이다. 현실이란 무겁고, 인간이란 존재는 그 무거운 현실 앞에서 '가볍기에' 어떤 제스쳐도 하지 못한다는 걸. 사진기자의 죽음이 우연이었듯 그의 생 자체도 우연일지도 모른다는 것, 사비나와 그의 사랑 또한. 사비나는 그 '우연'이 두려웠기에 떠난다는 것을. 밀란 쿤데라는 끊임없이 소설 내에서도 자기 부정을 일삼고, 이 때문에 읽는 독자로 하여금 의문을 품게 한다. 저자가 저렇게 확신이 없어서야 어디 믿고 읽겠는가. 여태까지 그 난해한 서술을 꾸역꾸역 참아오며 읽어왔건만 갑자기 냉소적인 태도로 바뀌다니. 그래서 이 소설 내에서 불필요한 부분이 많아 보이기도 한다. 밀란 쿤데라의 작품들 중에서 제일 많은 것 같다. '농담'이나 '생은 다른 곳에'에서도 전반적인 부정을 일삼으면서 계속 텍스트를 써내려갔다. '생은 다른 곳에'서는 '시인-뮤즈'라는 환상에 대해 체계적으로 쌓아올렸다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풍경을 보여주면서 그 '넋두리'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했다면 사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묘하게 '넋두리'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밀란 쿤데라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 단순히 영화화되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는 아마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 자체가 가볍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농담 따먹기처럼 얼추 가려질 수도 없고 어떤 명확한 답을 한순간에 내놓을 수 없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진다. 이게 '진짜'인가? 내가 정말 사랑을 하고 있는 건가. 내가 이렇게 비참하고, 초라하고, 연약해졌는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란 텍스트는 끊임없이 쓰여진다. 이 소설의 마무리가 묘하게 '억지'스러운 것은, 어쩌면 밀란 쿤데라가 '사랑'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결론 앞에서 연약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사와 인물들이 작가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면, 그건 난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결국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스스로 밧줄을 끊어 이 무대의 막을 내리는 수밖에는 없다. 그래서 그는 결국 '말'하지 못하는 동물, 카레닌을 선택한 것이다. 동물의 미덕인 '침묵'에 기대어, 그리고 그 '침묵'을 이용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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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김진영 선생님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7강 정리+리뷰]이 애잔하고 무력한

정지혜

2015-06-01



 이 애잔하고 무력한
 -김진영 선생님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7강
  김훈의 '화장', '언니의 폐경', '강산무진'을 중심으로-

 


 

 말라붙은 시체와 퉁퉁 불은 시체

 자연은 잔인하다. 귀농을 통해 공동체를 회복하고 꿈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을 비웃은 한 일본의 소설가처럼, ‘만만하지 않다’. 문명사의 발전은 순응이 아닌 거스르기였고, 언니가 바라본 강줄기의 부딪침은 그 자체로서 생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한때 우리는 자연을 정복하면서 그 자체로 생의 기쁨을 맛볼 수가 있었다. 이 또한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것을 관념화하고 가치를 매기면서 그걸 획득했다고 쉽게 생각한다. 이는 착오다. 모든 관념은 주관적이고, 어리석고, 그래서 슬프다. 객관적인 미라는 건 존재할 수 없다. 김훈의 서술태도와 바라보는 대상에 대한 애잔함은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전혀 감성적이지 않은 문장이지만 정확하고 무미건조하게 써내려가는 것, 그러면서도 놓치지 않으려는 ‘간극’. 거기에서 김훈의 문학성이 빛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니의 폐경’에서 언니는 비행기로 출장가던 남편을 잃는다. 두 아들을 잘 키워냈고 성공적인 삶만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화장’의 나는 상무이고, 자수성가한 사장에게 믿음직한 파트너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언니는 자식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돈을 뺏기고 밀려나 버리며, ‘화장’의 나는 아내가 없는 텅빈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는 전립선암으로 소변을 제대로 누지 못하고 모든 걸 꾹꾹 참고 눌러왔다. 그는 사회적 현실, 이 모든 억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받아들여야 하는 제2의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그는 이 제2의 자연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도 못하고 점점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는 익사한다. 반면 언니는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들로부터 다 버림을 받는다. 그녀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다 빠져나가버린다. 마치 타오르듯이, 다 재로 부셔지고 피부는 바짝 말라버리듯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어쩌면 김훈이 인지한 죽음의 종류는 거칠게 이분화될 수 있다. 버티는 자와 쏟아 부은 자. ‘언니의 폐경’에서 언니의 폐경을 지켜보고 있는 나는 어떤가. 그녀는 모든 것이 빠져나가려고 할 때 새로운 삶을 도모한다. 새로운 삶에서만 살아갈 수 있을 어떤 사람과 함께. 그 순간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면, 너무나도 초라하지만 아름다운 구원일 수 있다.



 부드러운 뼈

 단순한 불륜, 비행, 폭행, 포기, 체념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훈의 소설에는 초라한 삶을 이루는 조건들이 다 모여 있다. 김훈은 어떤 가치라도 있다는 듯이 이 조건들을 끌어안은 채 놓지 않는다. 작가가 바라본 현 시대에 대한 고찰에서 이 초라한 조건들은 어떤 빛을 발하는가. 나이가 들었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은 앞으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잃을 수 있는 것들을 헤아릴 때다. 몇 살이든 상관없다. 이러한 수학적 계산-역은 어떤 절망에서 비롯된다.
 ‘화장’의 상무가 아내의 죽음에서 차마 도피할 수 없었던 것은 아내의 절망이 그의 절망이 되었을 때부터였다. 아내는 모든 음식들을 다 역하다고 말한다. 특히 그녀가 남편을 위해 내내 지어왔던 하얀 쌀밥의 비린내가 제일 싫다고 말한다. 뇌종양 때문에 신경 회로가 착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묘한 의심을 품게 된다. 어쩌면 그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던 삶의 조건들이 그녀에게는 하나의 절망으로 다가오지 않았는지. 영화에서는 이를 하나의 죄책감으로 마무리하지만, 소설의 그에게는 다르다. 그에게는 그의 삶도 뇌종양으로 먼저 떠난 아내처럼 절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환기하게 해준다. 그는 아내의 성기와 항문을 닦고 아내의 똥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야 한다. 아내는 그에게 거듭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그 미안함은 단순히 어떤 귀찮은 일을 수행해야 하는 그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는 미안함이 아니다. 그건 바로 그녀가 그에게 선사한 지옥의 풍경, 절망 때문이다. 그는 그녀에게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절망이 그에게 절망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가 아직 남아 있다고, 이 절망을 함께 나눌 누군가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건 하나의 어설픈 위로이자 맹렬한 비판이다. ‘강산무진’에서 화자는 퇴직금을 한푼이라도 더 많이 받기 위해 온갖 술수를 쓰고 다행이라고 여기며, 아파트 시세를 알아보고 주식을 정리한다. 그것들은 다 그가 죽은 뒤에 일정한 금액으로 환산될 것이다. 그는 아들에게 줘야 할 돈에 대해 어떤 미련도 갖지 않는다. 이미 그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생에 대해 어떤 분노도 느끼지 못한다. 이미 수없이 절망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무미건조한 묘사들은 절망을 함축한다. 그 절망은 이미 지쳐버렸고, 분노도 사그라들고 하얗게 재로 남은 절망이다. 그들은 농담할 기운조차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책임들

 텍스트의 숨 쉴 구멍, 정확한 정보들은 객관성을 요구한다. 그 정보들은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어디서든 쓰일 가능성이 있다. 알레고리적 비유가 향하는 건 바로 이 중의성이다. 하지만 김훈의 소설에서 이 중의성은 양측 사이에서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 공간은 결국 어떤 선택도 무의미하다는 걸 거듭해서 강조하는 중의성의 공간에 불과하다. 이도저도 아닌 것이다. 인간은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다. 그의 소설에서는 자살하는 사람이 없다. 이미 자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살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생을 살 기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다가 끝내 세계와 불화하고 죽는다.
 이러한 절망의 색채를 어떻게 해석해야 좋은가. ‘화장’과 ‘강산무진’의 경우 어떤 유미성으로 치닫거나 현실의 절망을 다시금 확인하게 해주는 것으로 끝난다면, ‘언니의 폐경’에서는 전화하면 전화를 받고, 올 수 있냐고 물으면 오겠다고 말하는 양측의 운동이 있다. 그들은 가운데로 서로를 향해 달려간다. 그 사이에서 충돌해 어떤 빛이 발생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떤 구원의 가능성일 수 있다. 절망하는 것은 개인이고, 살아내려고 하는 이들은 개인과 개인이면서 개인이 아닌 어떤 묘한 ‘중의성’의 관계를 형성한다. 한 인간의 성찰은 그를 구덩이 속으로 처박는가? 어떤 결단은 그 위에 흙을 뿌리고, 제목을 붙이고 책장으로 덮는 순간 묘비명을 적고 묘비를 세우는 것과 같은가? 그의 소설에서는 꽉 막힌 답답함과 함께, 첩첩이 쌓인 외로움이 드러난다. 그 외로움은 자신이 외로움이라는 걸 잊어버렸거나 외로움이라는 걸 호소하는 대신 입을 닫고 천천히 스며들어간다. 마치 노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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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김진영 선생님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6강 정리+리뷰]사방의 벽

정지혜

2015-05-22


 사방의 벽
 -김진영 선생님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6강 정리+리뷰




 

 나는 네게 파괴당할 권리가 없다
 
  소설의 화자는 자살 안내인이다. 그는 그의 손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 작가의 시점이 의인화된다. 이어 미미와 유디트가 나온다. 그녀들은 그의 손님이다. ‘라 보엠’의 미미와 클림트의 ‘유디트’를 떠올리게 하는 이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낙인을 받거나 내몰린 이들이다. 유디트는 C와 K 사이에서 맴돌지만 좀처럼 그 출구를 찾지 못한다. 추파춥스를 먹을 때까지, 어떤 즉흥적인 기준으로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사실상 C에게서도 K에게서도 살지 못한다. 그녀가 바라는 곳은 바로 북극이다. C와 K, 그들 중 아무도 없는 곳. 미미는 머리카락으로, 온몸으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 행동으로 미미는 세상의 구속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난다는 ‘숨구멍’을 찾는다. 하지만 C는 미미의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찍는다. 미미는 그와 소통하고자 했다. 미미는 C에게 그 영상을 지워달라고 명령한다, 부탁한다, 간청한다. 하지만 C는 미미의 영상을 ‘소유’함으로써, 미미의 부탁을 압살한다. 미미가 그녀 자신의 존재를 지키려고 했던 권리는 사라지고 만다. 여성들은 ‘대상’에 불과하다. 미미와 유디트라는 별명이 붙은 것, 이러한 이미지는 묘하게 들어맞는다. 어쩌면 자살 안내인이 여행을 다니면서 얻은 ‘보존해야 할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가장 아름다울 때 죽는다.
 사르다나팔루스 왕의 죽음이라는 그림이 말해주는 것처럼, 미미와 유디트는 자살 안내인에게 ‘소중한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대상’으로만 머무른다면, 그들은 죽어서도 살지 못한다. 안내인이 자신의 역할을 소상히 설명하는 것은 그러한 오류에서 최대한 벗어나기 위한 제스쳐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살을 강요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선택권을 주고, 그들이 거부하면 계약금을 돌려준다. 친절하고 부드럽다. 그러나 그들 중 태반은 결국 그에게 되돌아온다. 그들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세상의 공격에 저항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살한다.’

 

 공허한 계시

 자살 안내인은 선택의 권리가 없었던 여성들에게 선택할 권리를 되돌려 준다. 계약이냐, 아니면 계약 파기냐. 그들은 죽을 수도 있고, 살기 위해 몸부림칠 수도 있으며, 회피할 수도 있다. 미미와 유디트는 끊임없이 몸부림치지만, 결국 죽음에 그치고 만다. 홍콩에서 온 여자는 자신의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고, 자신을 하나의 성적 도구로 만들었던 사람을 ‘대상’으로 만든다. 정액을 모아 그에게 마시게 하는 것이다. 그는 홍콩에서 온 여자가 잠결에 에비앙 생수를 마시는 것을 알면서도 말리지 않는다. 그 생수를 마시면서 토하고, 그 생수의 역겨움과 함께 그녀가 벗어나고 저항했던 모든 순간을 기억하면서 그녀는 다시 생을 선택하게 되기 때문이다. 
 미미와 유디트의 저항은 가로막힌다. 유디트는 K에게 세연이자 소유물로서의 여자였고, 미미는 C와 자신이 같은 종자라고 생각하지만 C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유디트는 C에게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했지만 C 또한 K보다 더할 것이 없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미미는 C처럼 자신의 ‘가상성’에 의문을 품지만, 동시에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다. 
   



 K에 대하여

 C는 어렸을 적 나비들을 잡고 그 몸통에 핀을 꽂아 모았다. 그는 ‘나비보다 포획’의 과정에 매혹되었다고 고백한다. K는 그에게 자신이 나비를 태우다가 집도 태워버렸다고 고백한다. C는 K에게 어떤 원망을 하는 대신, “어차피 죽은 나비들인데, 마음 쓰지 마라.”라고 대답한다. C는 K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K는 C를 원망한다. K는 C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가 아끼는 것을 태우지만 C는 그것에 대해 애착이 없었다고 고백하며 K의 행동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돌려버린다.
 K는 총알택시를 몰며, 도박을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집에서 유디트와 성관계를 맺는다는 행위는, 그가 ‘죽음’ 앞에서 흥분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총알 택시는 그를 죽음으로 몰 수 있고, 도박은 그를 자본적 죽음으로 떠밀 수 있다. K 또한 C와 마찬가지로 성적 불구자다. 그는 자신이 억눌려 있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한 해방구가 ‘죽음’ 근처에서 노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 어떤 위험을 향유한다는 것은 그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K는 자신이 까닥하면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으며 그래서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착각에 불과하다. 그는 죽음을 소유하는 대신 죽음을 회피한 것이다. 굳이 K라는 맥락을 읽어본다면, 이렇게 읽어볼 수도 있겠다. 유디트가 C와 K, 그들 중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제설차를 타고 떠나버린 건 그들이 결국 모양만 다를 뿐 비슷한 ‘벽’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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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김진영 선생님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5강 정리+리뷰]별을 먹는 사람들

정지혜

2015-05-10



 별을 먹는 사람들
 -김진영 선생님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5강 정리+리뷰
  황석영 '섬섬옥수'-




 
 장환의 유리구두

 중상류층은 스스로를 귀족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더 많은 교양과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도덕과 윤리를 칭칭 두른다. 교만은 벼락부자의 낮은 수준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도 선을 긋고 자신을 영원한 우상으로 만든다. 노력하고 패기가 있는 젊은이들을 환영한다고 상냥하게 말하지만 이들은 이종교배를 원하지 않는다. 오로지 같은 동종끼리 교배를 통해 피를 안전하게 지키고 싶어 한다. 하지만 동족끼리 교배할 경우 면역체계는 변형되고 뒤틀린다. 과학은 그들에게 냉정하게 판결을 내렸지만 그들은 봉건 시대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역사는 진보하는 대신 과거에 잠식당한다. 김승옥이 도시로 진입한 농촌의 청년들을 그렸다면 황석영은 그 청년들 이후 또다시 메트로폴리스를 지향하는 청년들의 한계를 넌지시 언급한다. 장환은 ‘열렬한 사랑’을 표방하며 미리의 기숙사에 쳐들어오는 등 온갖 구애를 펼친다. 영화와 소설에서 나올 법한 ‘운명적인 사랑’을 운운하며, 그 순간 미리는 장환을 ‘원망하지 못한다.’ 그의 약혼자 만오는 세련되고 단호하게 ‘장환’을 잘라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영화 주인공에는 사실 만오보다는 장환이 더 어울린다. 다만 장환의 한계라고 한다면 영화 주인공의 그런 ‘포즈’를 취하기에는, 장환에게는 설득력이 부족했으며 미리는 그 영화의 허위성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는 점이다. 장환은 미리와의 결혼을 ‘유리 구두’로 삼아 계급 상승을 이루고자 했다. 그가 한 학기 등록금을 부모에게 받아 쓰면서도 죄책감을 덜 느꼈던 이유는, 그가 서울에 올라온 목적이 계급 상승이었던 만큼 그 금액은 일종의 투자금이었기 때문이다. 미리는 그 ‘허위성’을 꿰뚫어 보는 한편, 부르주아 여성들의 환상에 대한 욕망을 채워주는 장환을 미워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장환을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게 되어버린다. 그를 미워한다는 명분을 만들어 내기에는 장환은 만오와의 약혼에 장애물도 되지 못하며 그녀가 만오를 절절하게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장환은 개츠비처럼 ‘노력’을 통해 성공하고자 했으나 개츠비가 결국 그가 성공한 수단에 의해 부르주아 모두에게 외면당했듯이, 그는 그들의 기만에 의해 역으로 공격당한다. 그는 순진하지만 결국 그들의 기만적인 면을 이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순수하지 않다. 

 
 홍천

 반면 상수는 장환과 다르게, 순순히 그 기만에 당할 생각이 없다. 그는 미리에게 순수하게 사랑을 고백하고 잡종개처럼 무작정 따르기보다는 미리에게 ‘댁에하고 자구 싶은데, 그냥 갑니다. 혼자서 기분 많이 내슈’라고 말한다. 미리가 만들어낸 극본에 순순히 응할 생각이 없다는 선전포고인 셈이다. 상수는 이미 그런 여자들의 허위의식을 알아챘기 때문에 그들에게 농락당하다가 버려질 생각이 없다. 미리는 분해서 상수에게 데이트 신청을 먼저 하고, 홍천에 간다. 그녀는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상수에게 스스로를 ‘내던진다.’ 
 그러한 ‘내던짐’은 그녀 자신이 안전하게 돌아올 것이며, 승리를 거머쥘 것이라는 묘한 확신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미리를 교양있고 예쁜 상류층 여인으로 봐줄 사람들이 홍천의 자연 공간에서는 없었다. 도시 공간에서만 미리는 ‘유효하다.’
 
  가엾은 미국 여자는 그 일을 잘 소화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아무 경험도 없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게다가 그녀는 끊임없이 아이오와에 계시는 할머니 얘기를 했고, 그곳의 대학에서 언어 관련 학위를 땄다는 것을 불쌍한 표정으로, 얼굴을 손수건에 묻고 흐느끼며 말했다. 택시 운전사가 강간을 했어야 하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할머니도 학위도 없는 다른 누군가였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듯했다. 호세와 바텐더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로맹 가리, ‘별을 먹는 사람들’ PP.184

 상수의 애무는 입맞춤이나 쓰다듬기, 끌어안기와 같은 어떤 과정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저 몸과 몸, 두 만남을 향해 죽 달려갈 뿐이다. 미리에게는 예상할 수 없는 미래가 두렵기만 하다. 미리는 ‘감정의 결핍 상태’로 깨어난다고 하지만, 사실상 그러한 결핍은 그녀가 늘 마주했던 부르주아적 감정과 거리가 먼 ‘감각’ 때문에 발생하는 난처함에서 부각된다. 미리의 삶은 늘 일정한 과정이 있었고, 예상하고 대비할 수 있었으며, 때문에 권태롭고 재미없었다. 하지만 상수와의 만남은 그녀에게 어떤 예측이나 대비도 불가능하게 한다. 미리의 생은 섬세한 감정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이는 늘 어떤 과거의 코드로 귀착한다. 상수는 잡종개로 머물러야 한다. 상수가 온순하고 덩치가 큰 잡종개에서 벗어나는 순간, 미리는 ‘당황한다.’


 그물을 헤치고

 부르주아 계급의 힘은 총체성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보이는 것은 모두 해석과 각주를 붙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세상은 그들에게 ‘익숙한 것’이 된다. 그들은 새로운 상품들이 나올 때마다 사고, 그걸 자랑하고,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 건 사실 새로운 것의 풍요로움이 아니라 쓰레기의 풍요로움이다. 쓰레기는 그들에게 어떤 감정보다는 혐오와 권태를 불러일으키는데, 쓰레기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결핍’을, 텅빈 구덩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상수는 미리에게 ‘겉멋만 잔뜩 든 똥치’라고 말한다. 미리는 사랑놀음은 하고 싶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에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장환은 그런 사랑 놀음에 적극적으로 응해주었다. 하지만 미리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다다를 수 없었기 때문에, 약혼자에 대한 환상에도 빠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미리를 정복하지 못한다. 하지만 상수는 미리를 온전히 다 파악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는다. 
 객지의 노동자들이 혹사로 인해 육체를 박탈당했다면, 미리는 노동의 면제를 통해 육체를 박탈당한다. 그녀는 장환이 맞을 때 자신도 맞지 않았으며, 상수가 멍키 스패너를 가르쳐 줄 때 스패너가 뭔지 모른다. 그녀는 유리틀에 갇힌 인형이나 다름없다. 파혼을 통해 그녀는 삶이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파혼 이후에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녀는 이전부터 삶에 진력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인형놀이를 하고, 그 상대방을 찾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상수는 인형 놀이에 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놀이판은 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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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김진영 선생님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3강 정리+리뷰] 도시의 아해들

정지혜

2015-05-05


 

 도시의 아해들 
 - 김진영 선생님의 강의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3강 정리+리뷰





 바다는 안개가 되어

  김승옥의 작품에서는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시적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인물들의 고뇌가 드러난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세 남자들은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시적 인간이 되었고, 어떤 범죄 경력도 남기지 않기 위해 애써왔으나 결국 그들은 아내의 시신까지 내다 판 뒤 빈손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이렇게 되어버린’ 현실 앞에서, 그들은 스스로에게 물어볼 틈도 없이 경찰이 오기 전에 여관방을 떠나야 한다. ‘생명연습’에서 바다가 순수로서의 형을 결국 삼켜버렸듯이 모든 순수는 버려지거나 원래 있던 곳으로 환원한다. 생의 충동은 곧 죽음의 충동이며, 바다는 생이자 죽음을 상징한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해풍은 죽음과 더불어 삶을 충동질한다. 이 삶은 현실에서의 삶과 반대되는 삶일 수 있다. 남매는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형을 바다에 버린다. 이 버리는 행위는 형이 살아 돌아왔다 치더라도 결국에는 형-순수도 그들을 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능하게 한다. 바다는 원래의 순수를 다시 자신의 몸 안으로 받아들인다. 이 때의 바다에서 부는 짭짜름한 ‘미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생의 바람은 이내 안개가 된다. 안개는 시야를 가로막지만, 온전하게 막지 않는다. 안개의 치명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안개 너머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안개가 온전하게 막지 않기 때문이다. 안개 너머의 사람들은 흐릿하나마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있다. ‘알 수 있다’는 자신감은 ‘무진기행’에서의 윤회중에게 묘한 자기 확신으로 다가온다. 윤회중이 하인숙에게 약속하고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일 때, 이 소설이 쉬운 불륜의 클리셰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윤회중의 자기 확신 때문이다. 윤회중은 분명히 하인숙을 사랑하며, 그녀를 ‘서울’로 데려가 ‘서울’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바꾸고자 한다. 그 공간은 그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죽이는 공간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살리는 공간이 될 것이다. 하인숙은 그에게 구명 보트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윤회중의 ‘확신’은 ‘회의’로 바뀐다. 그는 이미 하인숙과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내의 전보는, 그가 이미 하인숙에게 가기는 늦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윤회중은 쪽지를 전하는 대신 찢는다.



 비순수의 칼

 두 순수 중 어느 하나를 택한다면, 그 순수의 선택지는 여전히 순수로 남아 있을 것인가. 두 층위의 현실 앞에서 인간은 괴로워한다. 자본주의에서는 하나만 선택하는 대신 둘 다 가지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둘 다 가질 수 있는 이유, 그건 바로 ‘자본’ 때문이다. 자본의 의의는 본래 단순한 교환과 약속의 의미였으나 이제는 그런 의미를 넘어선다. 
 김승옥의 인물들은 한없이 치기에 어리고 헛소리처럼 들리는 말들을 지껄이나, 그 말들이 유효한 이유는 그들의 자기 배반에 잇따르는 죄의식 때문이다. 죄의식은 그들을 악당이라는 이름과 분리시키는 대신 결합시키고, 이는 그들의 죄를 합리화할 시간을 배제한다. 모든 죄의 합리화는 거리 두기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이런 짓을 저질렀지만, 사실 나는 그런 짓을 저지를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은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는 다르다는 간극을 알려주고 있다. 그 간극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소설에서 나타나는 모든 회상은 무기력한 것이 된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행상은 아내와 함께 한 추억이나 그동안 그가 한 고생들을 읊어놓지만 정작 아내의 시신을 팔아넘겼다는 자기 배신과 죄의식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는 자본의 위력에 대해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자본을 최대한 빨리 써버리기 위해 모르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여관비를 내려고 한다. 자본은 그에게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외로움, 쓸쓸함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수단은 될 수 있지만 그 쓸쓸함을 완전히 가시게 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은 다시는 살 수 없다. 결국 그 또한 아내와 마찬가지로 죽음으로 치닫게 된다.  
 낭만적 회귀의 가식이 위악적이라거나 수치스러운 것보다는 하나의 비극성으로 다다르는 점이 바로 여기에서 가능해진다. 과거 자본주의는 평등한 기회와 권리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 자본주의는 평등한 상실과 영원한 상실을 가능하게 했다. 그들은 획득하기 위해 자본주의에 다가갔으나, 정작 그들이 획득하고자 했던 것에 대한 이유는 영영 상실하고 만다.   



 도시의 밤

  ‘야행’의 여자는 자신을 일탈로 이끌어줄 남자를 찾지만, 사실상 그녀 자신이 다른 누군가를 일탈로 내몰 수 있는 세이렌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잊고 있다. 그녀는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존재이며, 때문에 남자들은 그녀에게 다가가다가 물러선다. 김승옥의 화자들이 대부분 남자들이었고 여성은 도시에서 피해를 입은 뒤 귀환하는 존재였다면, ‘야행’의 화자인 여성은 다르다. 
 도시에 밤이 가능해진 것은 가스등의 발명 덕분이었다. 과거 유럽에서 밤은 하루에서 삭제되는 시간이자 안전을 위해 집안에 스스로를 가두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가스등의 발명으로 밤은 낮이 되었다. 밤은 도시의 왜곡된 모습이 되었다. 실제로 도시의 뱀파이어들은 해를 대신하는 가스등 앞에서 무력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가스등 덕분에 더 인간처럼 행세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밤에 나돌아다니는 건 그들뿐만 아니라 인간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가스등으로 인해 사람들은 오히려 잠들 수 없게 되었으며, 하루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 시간에도 떠오르는 생각들로 인해 불안해지게 된다. 불안은 낮에 찾아들지 않는다. 밤에 찾아든다. 
 냉소적인 주체들은 무력하기에 냉소한다. 이미 패배해 버렸다는 열패감과, 열패감을 숨기고 우월하게 모든 것을 바라볼 줄 아는 존재로 남고자 한다. 이들은 어떻게든 이 ‘서울’에서 떠나고 싶어한다. 안과 나는 파리를 바라보고, 서울을 바라본다. 파리는 과거의 서울이었고 문화의 중점이었지만 결국 ‘타락했다’. 그들의 문제점은 바로 ‘혼자’ 고립되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어떤 ‘동반’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다. 안은 남자와 함께 자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들이 배운 생존의 법칙은 적자생존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자본주의.
 그러나 ‘야행’의 여자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갈 누군가를 찾는다. 그녀는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알며, 어떤 충동만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안다. 그 충동이 구체적인 모습이 되는 것은 바로 타인을 통해서다. 바르트가 말한 ‘사랑의 주체’는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타인을 끝없이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들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회에는 주체가 자리하는가, 아니면 나를 사랑하는 타자라는 거울의 환상을 통해 타자를 사랑할 타당성을 찾고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아이러니한 결과에 도달하게 되는가?

463

[김진영]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김진영 선생님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2강 정리+리뷰]지식-인간의 한계

정지혜

2015-04-23


 지식-인간의 한계
 -김진영 선생님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2강 정리+리뷰





 텅 빈 필통

  최인훈의 ‘광장’은 시대적 행운을 타고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잠잠해지고 자유가 올 것이라는 들뜬 분위기 속에서 끼얹은 냉수, 최인훈은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온전한 답이 될 수 없다고 답한다. 명준은 밀실과 광장의 공존을 원했고, 책에서는 단 몇줄로 그 공존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든 책들은 전지전능하고 전지무능하다. 이는 저자가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그 위험성이 더 커지게 되는데, 그는 어떤 현상에 대해 해결책을 내놓았지만 역사는 끊임없이 폐허를 번복해 왔다. 끊임없이 결론을 유보하고 탐색하는 책은 확신의 불온함을 인지한다. 혹은 어떤 결론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는 회피일수도 있다. 이명준은 책 한권을 써내야 했던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쓰이는 인물로, 책이 아닌 육체성으로 건너간다. 그는 북한으로 간 아버지와 그의 사상 검증을 요구하는 경찰서에 의해 육체와 이성 간의 간극을 깨닫는다. 아무리 그가 이성적으로 그들을 설득하려 해도 그들은 그에게 고문을 가하고 협박을 할 것이다. 남영동에 관한 영화에서 인물이 마주했던 현실은, 지금껏 그가 알던 것들이 한순간에 부서져 내리는 폐허였다. 영리한 사람이었고 스스로 똑똑하다 믿었으나 그 곳에서 그는 어리석고 가엾고 멍청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명준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는 어쩌면 벤야민의 이동과 비교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벤야민은 어떤 인내의 의지를 가지고 그 곳에 머물렀다. 그 머무르는 힘은 파리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이 아니라, 현재의 부정적 파리를 되살리겠다는 의지이자 지식인 개인의 책임감이었다. 명준은 끊임없이 남한과 북한, 중립국으로 가는 배를 오고 가며 나름 탐색의 의지를 불태우고 인내하나 그는 깨닫지 못한다. 그는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찾아다닐 뿐 그 어떤 현실의 간극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다는 것을. 갈매기 두 마리와 마주하고 그들을 은혜와 아이로 느꼈을 때, 어쩌면 환상적이고 미쳤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명준은 세상의 상식 대신 그의 이상을 좇기로, 그곳에 합일되기로 마음 먹는다. 그에게 부재했던 건 사실은 광장에 대한 어떤 사명감이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밀실밖에 없었다. 밀실의 존재였던 그에게 광장은 그의 편의대로 짜맞춘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았다. 그 곳을 폐허로 보느냐 공사장으로 보느냐는 그의 시각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태식
 
 영미와 같은 부르주아의 자식이지만 자유주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태식은 저항 운동을 하는 투사로 변모한다. 이러한 그의 ‘변화’가 갑작스럽다고 명준은 말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명준과 태식이 권투선수를 본 뒤, 태식은 권투선수의 고독함에 대해 말한다. 명준은 타인을 이해하는 대신 스스로의 잣대로 판단하고 ‘광장’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밀실에 스스로를 가둔 채 나오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태식은 다르다. 그는 타인의 고독에 대해 ‘이해’하는 대신 공감한다. 비록 명준에게 태식은 지식이 부족하고 그에 비해 ‘사명감’이 없다고 느껴질 수 있으나, 태식은 그 누구보다도 사명감을 지니고 있을 존재다. 태식은 분명히 그 고독이 있다는 걸 인지하며 그 고독에 침해받을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 의미없는 주먹 싸움도, 한 주체가 자신을 주장하려는 어떤 몸부림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고독은 고독을 해결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내포한다. 
 명준이 끊임없이 회의하는 한편 윤애와 은혜를 찾아가는 것도 그러한 고독의 표현이다. 본래 그 혼자 사색해야 할 밀실에 은혜를 데리고 오고, 동굴 공간은 아주 작은 광장-가정집으로 변모한다. 이전에 명준은 윤애를 겁탈하려고 했지만, 태식과 윤애 부부를 풀어주고 만다. 그들은 이미 명준이 바라던 어떤 ‘다르지만 공존하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명준은 윤애와의 결합을 통한다면 그 결합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공동체를 깬 이상 그가 또다시 윤애와 합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로지 폭력으로 누르고 압제하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그는 무력하게 그들을 풀어준다. 그 끝이 ‘휴머니즘’으로 포장된다면, 이는 명준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어떤 초석인 셈이다. 


 가라앉는 오필리아

 지식인 소설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관찰과 사유 끝에 내놓는 결말을 조심스럽게 여러 겹의 보자기로 싸서 내놓는 것인가. 한국에는 지식인들이 많지만 그 지식인들은 소설을 쓰지 않거나 팩션을 쓴다. 팩션이란 무엇인가. fact와 fiction의 합성어로 현실을 배경으로 한 픽션이다. 사실상 현실을 가리키나 픽션으로 치닫는 팩션과 픽션을 가리키나 현실로 치닫는 픽션, 둘 중 어떤 것이 지식인 소설에 걸맞는가. 모아둔 지식들의 자랑으로는 전자가 맞을 테지만 후자야말로 적합한 형식이 아닐까 한다. 중국의 고전들은 주로 어떤 개념을 이야기로 바꾸어 왔고, 최인훈이 후에 쓴 미학에 관한 에세이들은 동서양을 막론한 사유를 보여준다.
 다만 이 ‘광장’의 경우, 명준이 향할 수밖에 없는 곳이 ‘광장의 가능성’이 아닌 죽음이라는 지점은 지식인으로서의 소명 대신 지식인이 택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고 보여진다. 만약 실제의 인간이었다면, 어떤 이념적으로 편재된 현실로 인하여 쉽게 죽을 수 있었겠는가. 명준은 실제의 인간이 아닌 관념으로 뭉쳐진 인간이었고, 그렇기에 그의 죽음은 비교적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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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김진영 선생님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1강 정리+리뷰] 미해결의 현재

정지혜

2015-04-19



 미해결의 현재
-김진영 선생님 '소설들 혹은 문제적 인간형' 1강 정리+리뷰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전쟁 후 찾아온 것은 해방의 기쁨만이 아니었다. 전범 일본에 대한 원망이 끊기지 않는 것은 어떤 뒷심 때문만이 아니다. 일본과 수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로 삼은 국가의 문화유산을 짓밟은 동시에 그 문화의 근간을 자신들의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주 조그만 나사를 바꿔 끼운 것만으로도 작동은 달리 돌아가고, 생산되는 것 또한 다르다. 한국 전후 문학의 대부분은 일제의 청산을 부르짖고 있지만 그들을 억압하는 것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는 일제 경찰 체제이며 일본 학문을 배운 이들의 사유적 한계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함정으로 뛰어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의해 ‘안전’을 택하고, 그 안전은 일본이 파괴한 것이 비단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참담한 현실을 자각하게 한다. 손창섭의 경우 잇따른 전쟁에서 우리가 마주한 ‘분단’과 공황 앞에서 행동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해 쓰고 있으나, 이는 어떤 시대의 특정한 ‘문제적 인간형’이라고 할 순 없다. 여기서의 ‘문제’는 특출난 경우의 문제를 뜻하고 ‘보편적인’ 것에 반대되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나, 실제로 ‘문제적 인간형’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으며, 공동의 문제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문제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이 돌아오는 것을 꺼리면서 어떤 인간을 ‘문제적 인간형’이라고 지적하고, 자신은 안전지대에 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 안전지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애쓴다. 손창섭의 ‘비오는 날’과 ‘미해결의 장’, ‘잉여 인간’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은 각기 다르지만-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 안전지대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인간들이라 할 수 있다. ‘비오는 날’에서 원구는 불신의 늪에 빠지고 오빠에게까지 버림받은 동옥을 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나, 그녀를 구해주면 결혼해서 책임질 수 있을지 근근히 따져보면서 ‘자신의 안전’을 꾀한다. 그는 동옥을 구해주고 싶어도, 빗물이 떨어지는 방 구석에 동옥과 함께 앉아 있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해결의 장’에서 화자는 한때 사랑했으나 매춘녀가 된 광순으로부터 쉽게 떠나지 못한다. 광순을 잃어버린 뒤의 자신이 안전할지 판단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택하는 것이 최선책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잉여 인간’에서도 이러한 번복은 되풀이된다. 모든 것에 질리고 해탈한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은, 실제로는 끊임없이 선택을 주저하고 주저하다 끝내 자신이 위치한 안전지대에 머무르기를 택하게 되는 ‘안전주의자’의 한계에 부닥치게 된다. 우리는 과연 이들을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종이접기
 
 손창섭은 과연 한국 근대문학의 작가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현대 문학의 작가라고 할 수 있는가? 이광수의 ‘무정’은 한국 근대 문학의 시초로 일컬어지지만 어느 누구도 ‘무정’을 읽은 적이 없다는 농짓거리마냥, 손창섭 또한 읽음으로서 판단되기보다는 이름으로 존재할 뿐이다. 현대는 근대와 단절된 것으로 여겨지며, 현재 바로 이전까지도 과연 현대로 명명할 수 있는지 의문을 품는다. 서로 다른 극과 극처럼 사회는 빠르게 변모해 가고 유행도 지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서양 문학의 유입으로 인해 점차 한국 문학이 세련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한국 문학은 세련되어지고 있고, 점점 나아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왜 이 사회는 나아지지 않는가?
  흔히 과거에 대한 언급에 대해 사람들은 ‘꼰대들의 발언’이라고 폄하하고, 귓등으로 흘려 듣는다. 과거는 옹호되기 위해 언급되어서는 안 되며, 과거는 과거의 실수에 대한 반면교사를 통해 현재를 구원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현재 문학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언급-가라타니 고진의 문학의 종언이 지지부진하게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가 떨쳐내야 할 것은 ‘과거’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과 탈피가 아니다. 지금 이 문학적 발화가 무력해진 문제의 원인을 짚어내야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닌가. 
 네모난 종이의 각과 각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반으로 접으면 된다. 설령 그 반이 다른 각들을 엇나가게 하고, 모양을 삼각형으로 바꿀지언정 각과 각이 만나는 순간 새로운 모형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손창섭의 인물들은 과연 과거의 존재로만 정의되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에서 억지로 끼워 맞춰야 할 것인가? 그게 아니라 이 인물이 어떤 양상으로 변질되었는지를-그 균의 결말을 예측해 볼 수 있겠다.


  
 헛도는 바퀴

 현대인들은 바쁘다. 끊임없이 움직인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하루의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분으로 나눠쓰고, 택시를 타고, 버스가 1분이라도 늦어지면 화를 내며, 도착할 시간을 알리는 어플리케이션을 계속 켰다 끈다. 이마저도 모자라 야근을 한다. 손창섭의 인간들은 지금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답답하고 부러워보이는 ‘게으름 피우는 인간’으로 보일 수도 있다.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빠르게 움직이고 대처할 것을 강요받고, 그들 자신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은 행복으로 넘쳐야 할 것인데, 왜 현대인들은 불안하고 두렵고 불행하다고 느끼는가. 누가 그들의 삶을 낭떠러지로, 예정된 파국으로 명명하는가. 우리는 신문에서 낙관적인 미래를 보는 대신 비관적인 미래를 읽는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를 매일 읽는 셈이다.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에서 채플린은 공장의 나사와 태엽을 조이는 일을 한다. 그러나 어느새 보면 그 자신이 태엽 속에 들어가 함께 돌고 있다. 태엽을 멈추고 기계로부터 빠져나오려고 하지만, 기계는 멈추지 않는다. 이보다 더한 악몽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움직이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바쁜 게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지만, 생존을 위한 바쁜 움직임은 동시에 존재의 불안함을 더 깊게 만든다. 사람들은 멈추는 것을, 가만히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면서 시간을 일일이 체크하는 것 뿐만 아니라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먼저 예상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진다. 혼자 있는 순간 찾아올 존재적 의문에 대해 대답하기를 거부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려고 하고, 단체로 움직이고자 하며, 그래서 혼자 있는 사람을 부정적인 인간형으로 포장한다. 그들은 자신의 불안을 가리고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고독을 외면한다. 진지함과 사유 또한 공격의 대상이 된다. 원구가 끊임없이 동옥에 대한 애정이자 심적 끌림보다는 생활고에 대해 걱정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의 마음보다는 우리의 생존 조건에 대해 고민하고 이에 기반해 선택할 것을 강요받는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더 많이, 더 빨리 움직이지만 사실상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셈이다.’ 찰리 채플린은 결국 그가 사랑하는 소녀와 함께-태엽으로부터 빠져나가-손을 잡고 뛰어갈 수 있었지만, 과연 현대인들에게는 어떤 결말이 가능할 것인가?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원구는 동옥을 팔아넘겼을 것이라고 새로 이사 온 남자를 ‘비열한 인간’으로 바라보지만, 그는 결국 그 자신에 대한 ‘책임’을 간과할 수 없게 된다. 동옥을 불신의 늪으로, 끝내 그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은 바로 원구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움직이고’, 그 움직임으로 인해 어떤 ‘부름’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 부름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타자의 뜻으로 분리하고, 자신을 존중해 달라고 주장하며 그 타자의 목소리를 회피하거나 무감각하게 지나쳐 버리지만 이는 그들 자신을 외면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에 조심해야 할 것은 원구와 같이 ‘피해자’의 입장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피조물로서의 자신을 외면하고 이성적 판단에 의거해 ‘이 상황까지’ 이르게 했다. ‘가해자’의 숨쉴 권리와 ‘가해자’의 속죄는 다른 문제가 아니다. 속죄하지 않는 이상 가해자는 끊임없이 가해자의 위치에 얽매일 수밖에 없으며, 그들은 ‘진정으로 숨쉴 수 없다.’ 인간도 어류도 아닌-양서류로서의 삶을 지속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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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멜랑콜리와 철학 : 우울의 철학 혹은 철학의 우울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9강 정리+리뷰] 인류

정지혜

2015-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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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9강 정리+리뷰-


 

 홀로 남는 왕

 크레온은 안티고네에게 피조물로서의 사형을 내리면서 역설적으로 안티고네의 승리를 인정하게 된다. 그는 법과 도덕에 대해 안티고네에게 끊임없이 설교하며 그녀가 저지른 죄의 무게를 체감하게 하고 그가 느끼는 당혹감에 대해 ‘공감’을 요구하지만, 안티고네는 그에게 끊임없이 반박하고 그녀 자신의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든다. 크레온은 그의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 안티고네를 끝내 제거하게 된다. 그는 가족의 법도를 지키기 위해 안티고네를 제거하지만 결국 그 자신의 아들과 아내를 잃으면서 ‘가족’을 무너뜨리게 된다. 안티고네는 스스로의 도덕과 윤리를 보존하기 위해 ‘무덤-신혼방’으로 가버리고, 크레온은 폐허가 된 현실 앞에서 절망한다. 권력으로서 작동하는 혈통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 규범과 도덕을 지킬 것을 강조하며, 그로써 그들의 권력이 계승되고 보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위 재벌집 드라마에서 ‘감히 네가’ 운운하는 것은 그들의 보존과 안전한 계승을 위한 ‘짝짓기’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주디스 버틀러는 권력의 계승과 혈통의 보존으로 지속되는 한 ‘가족’의 찬란한 영광보다 가족에 속한 한 주체의 존재를 중시한다. 이는 한 재벌집-왕가 뿐 아니라 사회 전체, 남녀의 체계를 통해 ‘인류’의 보존과 번식을 주장하는 ‘인류’라는 권력에 대한 저항에 대입해 읽을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생산’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부과받고, 때문에 인간의 최종형은 기계가 되어버린다. 왕은 혼자 남아도 왕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곁을 떠나도 그 자신은 떠나지 못하고 옥좌에 남아 있어야 한다.


  
 나는 당신과 자지 않았어요

 최근 한 방송인의 막말로 인해 페미니즘 논쟁이 다시금 끓어오른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기다. 과거에 이미 사과한 일인데도 굳이 화두로 끌어 올릴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고 그의 사고가 남녀 평등 정신에 위배될 뿐 아니라 휴머니즘의 측면에서도 윤리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사실상 한국에서 가장 붙이기 쉬운 싸움은 남녀의 싸움이며, 이들은 서로에 대한 공격을 통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자 한다. 
 이에 대항하는 페미니즘의 초기 양상은 ‘여성’이 아닌 다른 물적인 것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아브젝시옹, 혐오적인 것으로 외면되고 방어대상이 되어버린 것의 ‘패배 정당성’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 것을 늘 배제해 왔으나, 그 배제 기준이 과연 ‘생존’을 위한 것이었는지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생존’이었는가, 아니면 ‘죽음’이었는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고심해 왔으나, 결국 제자리 걸음이었다는 결론 앞에서 인간에게 남은 건 자결 뿐인가?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편견으로, 페미니스트는 연애에 실패해 패배 의식에 차 있는 못 생긴 여자로 규정되곤 한다. 혹은 다른 ‘정상적인 여자’들과 다른 모습, 레즈비언으로 취급된다. 이에 페미니스트들의 대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레즈비언’의 배척으로 이어지고, 여성적 가치를 보존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남성과 싸우기 위해 소위 남성적인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즐기는 척하거나 그들과의 구분이 없고, 혹은 그들의 도덕을 계승하고 있다는 듯이 ‘레즈비언’의 배척을 주장하나 이는 그들 자신을 공격하는 것을 역순으로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는 그들의 나약함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십여년 넘게 그들은 어떤 ‘규범’을 되풀이 해 배워왔고, 무의식에 뿌리박은 이 편견은 쉽게 사라질 수 없다. 끊임없는 사유와 토론, 성찰만이 ‘페미니즘’과 ‘휴머니즘’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게 해줄 수 있다. 스테파니 스털의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는 책을 읽고 공부하며 토론하는 페미니스트들, 한 인간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한 인간을 보여준다. 그녀는 ‘노란 벽지’의 여주인공처럼 미쳐 버리기 전에, 그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기 위해 ‘공부한다.’ 그녀가 자신의 딸을 사랑하고 남편과 함께 사는 삶을 택했다 해서 그녀를 ‘좌절한 페미니스트’-순응자로서 읽는 건 지나친 오독이다. 그녀는 자신을 어떤 존재로 규정짓는 사람들에 대해 ‘자신’을 알지 못한다고 자신있게 지적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녀의 독서 편력 뿐 아니라 성찰, 그리고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콜비츠와 인류
 
 그렇다면 그녀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끊임없는 자기 존재에 대한 낙관이나 아이에 대한 사랑 때문일까? 그녀의 책에는 딸에 대한 사랑보다는 딸의 칭얼거림, 갑작스런 병에 대한 불평과 한탄이 더 많다. 그녀는 딸에 대해 무작정 찬양하는 대신 ‘핑크’를 주장하는 딸에 대해 의문시하고 짜증을 느끼기까지 한다. 딸은 그녀의 분신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작고 거대한 타자다. 그녀의 존재에 의문을 던지고 그녀가 ‘자신으로서 분명히 살고 있는 것인지’를 묻게 한 계기이기도 하다. 
 최근 번역된 로베르 앙텔므의 ‘인류’의 표지에는 케테 콜비츠의 그림이 실려 있는데, 이 그림은 사람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거나 껴안으면서 하나의 원을 유지하고 있는 ‘단단한 그림’이다. 원 속에서 고개를 내미는 아이들은 밖의 상황을 궁금해 하는 ‘천진난만’한 표정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원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결심에 찬 비장함 뿐 아니라 두려워하고, 끊임없이 밖을 살핀다. 그래도 그들은 그 결속을 풀고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그림은 단단하면서도 불안하다. 
 타자성은 어떤 기호로 환원될 수 없는 불확실한 것으로 존재의 견고함에 위협을 가하는 ‘치명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타자성은 동시에 상실될 수 있는 ‘연약한 것’이기도 하다. 스테파니 스털은 딸이 그녀의 인생을 망치고 방해하는 ‘치명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동시에 딸이라는 존재가 순간 상실되어 버릴 수 있을 만큼 ‘연약한 것’이며, 그녀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고 있는 근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녀는 ‘딸’과 함께 살아나갈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슬픔의 공동체’인 동시에 ‘기쁨의 공동체’일 수 있으며, 불가능한 삶과 애도를 지속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460

[김진영]

멜랑콜리와 철학 : 우울의 철학 혹은 철학의 우울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8강 정리+리뷰]버티는 성실함

정지혜

2015-04-19


 버티는 성실함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8강 정리+리뷰-



 

 무서운 자화상

 발터 벤야민은 어렸을 적 아버지와 동반해 간 파리에 매혹되는 한편, 나치의 탄압을 피해 도망쳐 온 파리를 경멸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 자연사는 시간에 의해 그를 매혹했던 모든 것-보들레르의 파사주는 퇴색하고 아름다웠던 과거-들이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점점 갈수록 나아질 수 있다고 점진적 진보를 주장하는 보수주의와 온건한 부르주아 마르크시스트들의 논지와 점점 갈수록 폐허로 치달을 뿐이라는 벤야민의 예언은 이 점에서 일치한다. 보통 예언은 앞으로의 운명을 순응하고 받아들이라는 징조인가, 아니면 그 운명을 거부하라는 충고인가? 사람들은 예언의 실현으로 인해 얻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치를 다하거나, 혹은 그 예언을 실현시키지 않기 위해 애쓴다. 오이디푸스는 예언을 실현시키지 않기 위해 양부모 곁을 떠나고 스핑크스를 물리쳤으나,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한 노인의 살해로 인해 예언을 현실로 만들고 만다. 어떤 ‘저항’ 또한 예언의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결국 예언은 절대적인 것이 되며 우리의 저항은 사실상 무력한 것이 되고 만다. 사실상 어떤 안전책도 결국 ‘안전하지 않다.’ 배가 가라앉은 것은 그 배의 안전성이나 경영진의 부도덕이 직접적인 원인일 수 있지만, 간접적인 원인 또한 그 운명을 재촉하는 꼴이 되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고, 사람들은 그 파멸의 전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신뢰’의 파멸이 실제로 드러나자 사람들은 일제히 불신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향한, 불신을 위한 불신이 바이러스처럼 매복해 있다가 따뜻해지면 피어오르는 꽃처럼 일제히 터져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벤야민은 혁명을 위해서는 기존의 자연사적 시간관보다는 새로운 시간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시간은 바로 순차적 시간을 방지하는, 파우스트가 외쳤던 ‘이대로 시간이 멈춰라’라는 외침과 같겠지만-그러나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으로 인해 ‘시간’에 의해 패배하며, 그에게 남은 건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의 신 밖에 없다.-동시에 과거와 현재, 미래의 가치 판단을 없애는 ‘판단의 중지’와도 같다. 그림과 사진이 위력을 지니는 이유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바로 ‘초상화’다. 초상화는 이미 몇백년 전에 죽은 이를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우리는 그 시선 앞에서 허둥거리다가, 그들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자연사적인’ 안심을 촉구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한없이 냉정하다. 이는 모든 그림과 사진이 사유 이미지로서 작동할 계기를 부여한다. 파리의 거리를 찍은 사진이나 클레의 천사 그림은 우리가 망각하고 지나쳤던 것, 우리가 잊어버리고 해몽책이나 뒤적이며 ‘미래’를 알려고 하는 꿈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메시아를 기다리지만, 그 수동적 기다림은 ‘고도를 기다리며’와 달리 끊임없이 준비하는 데에서 능동적인 움직임으로 변모될 수 있다. 벤야민은 계속 파리에서 ‘기다렸으나’ 그 기다림은 좌절에 의한 멈춤이 아니라 적극적인 ‘기다림’이었다.


 광해

 ‘광해’의 왕은 자신과 꼭 닮은 광대와 독대하며 흥미로워하는 한편 그를 철저하게 증오한다. ‘광해’는 늘 혼자 있으며, 모두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한다. 그는 아무 것도 믿지 못하며, 그 자신이 입은 용포의 위력조차도 의심한다. 모든 미친 왕들은 다 혼자 있고 싶어했다. 그들은 어떤 누구에게도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국 그의 질문을 대답으로 되풀이할 것이며, 그의 결정을 촉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신은 그들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폭군 앞에서의 신하들은 폭군에게 쉬이 말하지 못하지만, 그 침묵은 폭군을 의기양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미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성군’들은 가신과 함께 다니며, 그 가신은 그에게 조언을 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폭군과 성군의 연출 차이가 드러나는 지점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사극에서의 ‘간신’들은 재물에 눈이 먼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 재물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존재적 ‘비극성’이 드러나게 된다. 그들이 무릎이 닳도록 빌고 굽실거린 왕은 그들을 구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들은 ‘재물’을 모은다. 소위 ‘개미’가 늘어나고 소비가 줄어드는 현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끊임없이 스스로의 이념을 배신하고 살아남기를 택한다. 동전 한 닢은 그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고, 더 오래 돌아다닌다. 자본주의의 최종점은 형체가 없는 ‘사이버 머니’라고 하지만, 결국 이는 자본주의의 이념의 최종에 다다른 것에 불과할 뿐, 자본주의의 폐지를 뜻하는 게 아니다. 완전한 이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신’으로서 자본은 격상되었고, 이제 인간은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배반할 일만 남았을 뿐이다.


 우울할 때는 벤야민

 모순적이게도, 벤야민의 멜랑콜리와 함께 대두되는 것은 알레고리다. 멜랑콜리는 그 자리에 멈춰선 정지라면, 알레고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생성되는 어떤 것을 표현한다. 로마와 그리스, 어떤 시대가 ‘어떤 시대’로 명명되었고 그 시대가 후일에 모범의 사례가 되듯 이 파국의 전조도 어떤 반면교사의 사례로 언급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제목은 이제 소망이 되어버린다. 도시의 꿈은 이제 꿈의 끝에서 깨어나기 위해 파국을 맞이해야 한다. 호접지몽은 꿈의 혼란을 뜻하기도 하나 동시에 꿈에서 비롯되는 존재의 자유로움, 한 고유명사 안에 갇힐 가능성과 한계를 뛰어넘는 데에서 온다. 
 벤야민의 멜랑콜리는 분명히 철저하게 파리의 통속적인 모습과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면들을 해부해내나, 이는 단순한 ‘관찰’만이 아니다. 미국으로 간 아도르노의 청에 불복했던 것은 그의 단순한 낙관주의나 깊은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는 스탈린과 부르주아들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타협하지 않는 미래’에 스스로를 주어버린 것이다. 만약 그가 그 국경을 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절망’해야 했다. 그의 극단적 선택은 그의 병리적인 면에서 비롯된 게 아닐지도 모른다. 혹은 어떤 담론으로 이상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병리적인 면’으로 치우쳐 그의 결말을 해석하는 것 또한 과도한 시각에 해당할 수 있다. 니체가 우울증과 진지한 사람들을 위한 철학으로 쉽게 오해되고, 그의 디오니소스에 대한 해석만이 대두되는 데에 비해 아폴론적인 면에 대한 시선이 축소되는 이유는-그가 전자에 치우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확한 것 하나는 그들은 자신의 담론이 예언으로 축소되거나 확대되는 것을 경시했고, 그래서 그들의 현재에서 끊임없이 그 ‘기미’를 찾아내고자 했다. 그 기미는 수많은 재료들 끝에서 태어나는 한줌의 황금처럼-혹은 그 황금의 기미를 드러내는 다른 어떤 것처럼 희미했을지도 모르며, 때문에 다른 재료들에 비해 덜 주목받을지도 모르고 별다른 성과가 아닌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어떤 것’, 기나긴 관찰과 좌절 끝에도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그들의 명랑성이 단순한 조울증 증세로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을 환기하게 한다.

459

[김진영]

멜랑콜리와 철학 : 우울의 철학 혹은 철학의 우울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7강 강의 정리+리뷰]인간에 대한 예의없음

정지혜

2015-03-08



 인간에 대한 예의없음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7강 강의 정리+리뷰-


 
 여우와 포도

 모더니즘은 멜랑콜리를 엘리트 계급의 특권으로 받아들였다. 지적인 분석과 심미화를 통해 멜랑콜리는 아름답고 퇴폐적인 것으로 무마되었다. 멜랑콜리는 정형화되면서 멜랑콜리적인 것으로 추방되었다. 리오타르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장선상에 속한, 시간적인 구분으로 보았으나 그러한 정의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미국의 유용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었다. 상품의 매력은 새로움과 휘발성에 있다. 멜랑콜리는 멜랑콜리적인 흔적을 남겼고, 그 흔적은 자본주의 시장의 건강한 유동성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멜랑콜리적인 것은 그로 인해 추방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건강하고 자유로운 생, 히피 문화의 대두로 이어진다. 히피 시위대는 그들을 제지하는 경찰의 총에 꽃을 꽂는다. 하지만 총알은 꽃을 짓이기도 발사된다. 꽃으로는 그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 평화와 자유는 우롱당하고 그들의 무력함이 증명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멜랑콜리적인 것, 우울증을 치료의 대상으로 보고 이를 치유하려고 했지만 그 결과 마주한 건 전기충격과 그 충격으로도 치료되지 못한 사람들을 격리하는 정신병원이었다.
 멜랑콜리적인 것은 일종의 포도라고 볼 수 있다. 이솝 우화의 여우는 포도를 따먹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포도가 이미 자신의 것인양 그 맛을 상상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포도를 따먹기 위한 시도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여우는 포도의 맛이 분명 시큼털털할 것이라고 비난하며, 포도를 따먹는 건 쓸데없는 짓이라고 스스로를 비판하기까지 이른다. 포도의 맛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포도라는 열매를 맺게 한 건 다름 아닌 여우의 바로 옆에 있는 나무다. 나무는 포도를 높은 곳에,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매달아 놓았다. 여우가 만약 그 나무를 제대로 타고 오를 수만 있었다면 포도를 따먹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허공에 매달린 포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포도는 분명히 ‘나무에 달려 있다’.

 
 파 한 줄기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증언을 시도하는 자와 증언을 거부하는 자. 프리모 레비는 그와 수용소에서 면식을 나누었던 이들이 ‘생존하는 줄’은 알지만, 그들의 현재 상황을 언급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증언을 시도하는 자들은 또다시 두 반응으로 나뉜다. 그들은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노하우에 대해 말하거나, 혹은 자신이 살아남은 데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한다. 프리모 레비는 증언을 택했으나 베텔하임과 같이 자신이 살아남은 노하우를 말하는 대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짓밟아야 했던 무언가를 말한다.
 그 무언가란 말할 수 없고, 입증될 수도 없으며, 믿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귀환’에서 레비는 끊임없이 그의 곁에서 죽어간 어떤 인물들의 이름을 되새기며 그들을 잊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에 대비되어 부각되는 건 레비가 신곡을 읊조리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도움을 행했던 일들이다. 한 욕심쟁이 노파가 지옥에 떨어졌을 때, 그녀가 행한 파 한줄기의 적선이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로 내려왔던 것처럼 레비의 서술은 급박하게, 그 파 한 줄기를 향해 쓰인다. 
 하지만 노파가 끝내 뉘우치지 못하고 천국에 다다르지 못한 것처럼, 레비 또한 증언에 실패한다. 그를 가라앉힌 욕심은 다름 아닌 주변인들의 무관심과 그에 대한 회의였다. 사람들은 그의 증언에 대해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궁금해 했으며, ‘나치’를 언급하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금수령은 그의 상처를 치유하는 대신 오히려 곪고 터지게 만들었다. 또한 이스라엘에 대해 레비의 의견을 물어본 것처럼 그들은 무슬림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인권단체가 논하는 ‘인권’의 대상은 일정한 단계에 이르른, 그들이 이해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 어떤 대상들을 뜻한다. 이 스펙트럼에서 제외되는 이들은 태아라는 생명 초기와 무슬림이라는 생명 말기의 대상들이다. 그들이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들이 포기하게 되었고 포기당하게 되었는지를 거부한다. 인간의 주체성과 선택의 권리를 믿는 한, 인간의 ‘영웅주의’를 주창하고 인간과 동물을 위계적 질서로 편입하는 한 이런 무력한 사고는 그치지 않고 순환할 뿐이다.


 헥토르의 홍조

 로베르 앙텔므는 수용소 시절 그가 마주했던 홍조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아주 당황했을 때,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과 마주할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수치, 최소한의 수치를 정해 놓고 이에 대해 뿌듯함을 느끼던 인간은 아주 쉽게 미끄러지고 만다. 현대 사회에서는 ‘무엇이든’ 해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며 아름다운 결과는 추악한 과정을 아름답게 만든다. 인간의 최소한은 무너지고, 그제서야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어떤 시선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메두사다. 
 메두사와 눈이 마주친 사람은 돌로 변한다. 이런 법칙 하에서면 사실 메두사는 그려질 수 없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림 속의 메두사는 정면에서 우리를 본다. 우리는 타자의 시선이 느껴질 때, 그 타자를 바라보고 그 타자를 자신의 시선 하에서 재편할 때 안도감을 느낀다. 다시 주체로 되돌아 온 것이다. 하지만 메두사는 우리에게 판단의 기미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순식간에 돌로 변해버린다. 메두사는 우리를 일방적으로 ‘판단’해 버리고, 돌과 같이 딱딱한 ‘개념’ 안에 가둔다. ‘한니발’이 연쇄 살인마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대상으로 언급되는 것은, 단순히 그가 벌이는 살인이 끔찍해서가 아니다. 그는 인간을 하나의 ‘고기’로 보며, 이러한 ‘피조물성’에 의해 인간은 그가 믿던 가치를 잃고 해체된다. 한니발이 인간에게서 바라는 건 오직 ‘피조물성’일 뿐, 그가 입은 옷이나 지위에 대한 고려는 없다. 그와 나누는 대화가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운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던 어떤 것, 그들이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실재와 직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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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멜랑콜리와 철학 : 우울의 철학 혹은 철학의 우울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6강 강의 정리+리뷰]타버린 자유

정지혜

2015-03-03



 타버린 자유
 -김진영 선생님의 멜랑콜리와 철학 6강 강의 정리+리뷰




  비평의 순간
 
  문화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창조물’이다. 자연에는 문화가 없다. 인간의 ‘문화’는 자연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자연을 인간의 관점대로 해석하고 편집한 것으로, 결국에는 반자연적 성향을 내재한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고 생존의 문제 대신 자유를 선취하고자 했다. 문화는 그러한 시도를 영웅의, 소시민의 역사로 만들었다. 하지만 자유를 지향하던 문화는 점차 사회 시스템에 의해 재편되면서 모순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부자유라는 결말로. 사회는 철저한 제도화를 기반으로 한 합리적 시스템으로 변모했다. 문화는 이러한 부자유를 부각하는 대신 사회의 폭력을 가리는 ‘현혹’으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의 나사나 태엽이 되어 돌아간다. 사회라는 모습 전체를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그들은 계속 설국 열차에 갇혀서 어디론가로 향해야만 한다. 열차에 타고 있는 한, 그들은 자신이 달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달리는 건 그들의 의도가 아니다. 열차가 달리는 것 뿐이다. 그들은 자신이 이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어떤 중요한 부품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편집해 나가려고 한다. 어쨌거나 ‘퇴직’은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사가 다 돌아가면 또다른 나사가 대기하고 있다. 다 쓰인 나사는 또다른 곳에 쓰이거나 버려진다. 현대 사회의 경우 후자에 처할 확률이 높다. 
 문화비평의 등장은, 사실상 그 장르가 모호하다는 점에서 의문을 품게 한다. 기존의 대중 매체를 분석할 것인지 아니면 영화나 문학과 같은 고유한 예술 장르를 통틀어 바라볼 것인지. 문화는 사회와 유리된 어떤 창조물의 대상, 사회와는 연계되어 있지 않은 어떤 중립지점으로 언급되어온 만큼 그 비평 또한 현실도피에 속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문화 비평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으려고 하는 사회의 전체상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설령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게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일부분에 불과할지라도, 낙관적으로 판단하는 대신 냉철하게 분석하고 판단하려 한다. 
 그러나 과연 현대 사회에서 문화비평은 그 의의를 다하고 있는가? 문화비평을 쓰는 주 계층이 현실의 미미한 ‘미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풍부한 지식을 지닌 부르주아 계층이라는 점은-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문화 비평의 한계를 지적한다. 문화 비평은 모순에 대한 무기가 아니라 하나의 방패가 되어버리고, 난해함은 그들의 우월감과 오만에 대한 정당화로 귀결된다.
  



 붕대 클럽

 트라우마란-그리스어에 의하면-어떤 무기에 의해 입은 깊은 상처를 의미하는데, 이 때의 상처는 상처를 입힌 자가 죽일 의도가 있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출생의 트라우마는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왔다는 충격에 의한 상처일 수도 있는 한편, 강제로 떨어지고 평온 대신 차가운 손에 의해 엉덩이를 맞아야 한다는 폭력에서 의거할 수도 있다. 아기는 이제 이성적인 보살핌을 받고 이성적인 발달을 거쳐 이성적인 정상인이 되어야만 한다. 아기는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처럼 보인다. 어른들은 아기들을 끊임없이 건드리고 때리면서 가르친다. 아기들에게 상냥하게 가르친다는 말은, 너무나도 쉽게 남용되고 있다. 아기들은 당신들의 말을 모른다. 끊임없는 보살핌이 필요하고,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다. 한 덩이의 햄을 만들기 위해서는 돼지를 죽이는 과정뿐 아니라 양념을 하고 노끈으로 단단히 묶는 행동이 필요하다. 햄은 기존의 ‘돼지’와 분리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인식의 분리는 보신탕이나 다른 애완 동물들을 먹지 말자는 사람들의 논리와 상충되는 바, 그들의 논지는 이렇다. 사람들이 정을 붙인 동물들을 어떻게 먹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들이 제시하는 먹을 수 있는 짐승은 그들이 정을 붙이지 않았으며 살아 있었던 과거를 모르는 동물들로 한정된다. 아이들은 애완동물이 될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애완동물들의 경우, 우리는 애완동물에게 어떤 발전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아주 최소한의 것을 기대하고 말 뿐이다. 하지만 아기는 언젠가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 그들 또한 오딧세우스처럼 유혹을 끊어버리고 이성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고, 구강기의 욕망은 잊어버려야 한다고 강요될 때가 올 것이다. 다만 가끔씩 탯줄을 끊어낸 상처를 보면서 그들은 묘한 상실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기억의 흔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자살의 자유로운 허용

 모더니즘 사회에서 댄디즘은 멜랑콜리의 합법화이자 멜랑콜리를 통한 자기 도취, 나르시시즘의 지향이었다. 그들은 산업 사회와 인간의 사물화에 대해 반항하고자 했으며, 그 자신이 이러한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격차를 느끼고 슬퍼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다면 그들은 그 변화를 따라가야 하나, 그랬다가는 그들이 으깨지고 말 것이었다. 카렌 블락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에 정착하고자 하는 사람들, 저자를 비롯한 버클리, 데니스는 너나할 것 없이 사회로부터 도망쳐 나왔다고 자조하지만 사실상 그들을 아프리카로 추방한 건 그들 자신이 아니라 사회였다. 사회는 그들의 시간을 더 이상 받아들여 줄 수 없었다. 뛰어가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흰 토끼를 따라 토끼굴로 들어간 앨리스는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환상 속에서 대처하고, 실수하고, 목이 잘릴 뻔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울에의 집착은 멜랑콜리적인 것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모순에 빠진다. 어떤 기질로 보고 ‘어쩔 수 없는’ 불치병으로 판단한다는 것, 이는 사회의 멜랑콜리적인 것을 회피하는 태도와 같다. 자기 자신의 우울은 조그만 돌멩이처럼 주머니에 넣고서 만지작거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의 우울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공중에 뜬 구름처럼 두려워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채, 땅만 보고 걸어다니는 것이다.
 ‘자살의 자유로운 허용’이라는 말은 어찌 보면 모순이다. 자살은 본래 자신의 선택이며, 마지막 ‘자유’를 표방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 아메리가 비꼬듯이 말했던 ‘자유 죽음’이 바로 그 일환이다. 하지만 ‘허용’은 부자유를 의미한다. 댄디즘의 모순은 그 자신으로 남아 있으려고 했던 시도가 결국에는 자신의 왜곡을 초래한다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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