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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
철학은 무엇인가? 슬기 맑힘이다! |
엄진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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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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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업이 왜 슬기 맑힘의 철학인지 알겠어요. |
황*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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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 맑힘이라는 제목이 너무 좋아서 신청한 강좌..깨달은 점이 많습니다. 어른이되면 더 슬기로워질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철학뿐아니라 복잡한 사회에 대한 이야기들도 쉽게 설명해주셔서 와닿았습니다. 좋은 강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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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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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상선생님 감사합니다. |
이*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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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구연상선생님께 감사해요. 어쩌면 설명을 그렇게 차근차근 잘 하시는지.. 강의를 듣고 나서 철학에 대한 생각이 좀 바뀌는 것 같아요. 철학하면 우리 생활과는 별개인 것처럼 느껴졌거든요..ㅎ 다음에도 좋은 강의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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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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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수업 두 개를 들었습니다. |
김*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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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듣고 선생님의 수업이 좋아서 이 강의도 듣게 되었습니다. 이 강의는 조금 어렵네요... 뭔가 계속 허공에다 손을 내젓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제가 부족해서겠죠. 기존에 서양 중심으로 생각하던 철학이라는 것을 '슬기맑힘'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게 신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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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철학하기,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
박*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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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 용어들로만 배우던 개념들을 '슬기 맑힘', '나누미', '못나누미' 같은 순우리말로 다시 정립하니 느낌이 완전히 다릅니다. 처음에는 용어가 낯설어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익숙해지니 오히려 더 직관적으로 와닿네요. 특히 '못나누미'로서의 근대적 주체에 대한 비판은 경쟁 사회에 지친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회사 생활하면서 내가 소모품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는데, 4강 소진증후군 부분 들으면서 펑펑 울었네요. 나를 돌아보고 치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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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내용이 너무 좋습니다 |
이*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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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어렵게만 느껴졌는데 구연상 교수님 설명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제 이야기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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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가 좀 갈릴 듯하네요 |
김*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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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사유를 우리말로 풀어낸다는 취지는 좋으나, 기존 철학 용어에 익숙한 전공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용어 치환이 더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강의 중반부 촛불문화제나 광장 문화 해석 부분은 교수님의 정치적 성향이 좀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네요. 저는 뭐 그럭저럭 흥미롭게 들었습니다만, 객관적인 철학사 강의를 기대하신다면 비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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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만 곱씹을수록 맛이 나는 강의 |
최*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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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휴직 중에 머리가 굳는 것 같아서 신청했습니다. 솔직히 1강, 2강 들을 때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포기할까 고민했어요. 붕 뜨는 느낌이랄까? 근데 3강 좋음과 나쁨, 선과 악 파트 넘어가면서부터 몰입도가 확 올라갔습니다.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가늠자'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설명이 딱 맞네요. 완강하고 나니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맑아진 기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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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강의가 기억에 남습니다 |
정*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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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연인과 헤어지고 마음이 많이 힘들었는데, 2강에서 사랑(다솜, 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을 많이 정리했습니다. 서양의 에로스, 아가페와는 다른 우리말 '사랑'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되더군요.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이 가슴에 꽂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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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쏘쏘 |
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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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교양으로 듣기 무난함. 근데 강의 시간이 너무 길어서 뒤로 갈수록 집중력 떨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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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에 대한 통찰력 |
윤*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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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개인주의라고 하면 이기적인 것과 혼동하기 쉬운데, 이 강의를 통해 근대적 '개인'의 탄생과 그 한계를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로크와 루소를 넘나들며 소유적 개인과 정치적 개인을 설명해주시는 부분이 특히 인상 깊었네요.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의 원인을 알 것 같습니다. 대학 때 교양 수업 듣는 기분으로 열심히 필기하며 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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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너무 지루해요 |
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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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목소리가 너무 차분하셔서... 퇴근하고 듣다가 몇 번이나 졸았습니다 ㅠㅠ 내용은 좋은 거 같은데 전달력이 좀 아쉬워요. 그리고 화면에 나오는 자막이나 자료가 좀 더 세련됐으면 좋겠는데 옛날 인강 느낌이라 보기가 좀 힘드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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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주인이 되는 법 |
오*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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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이 강의는 정답을 주지는 않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줍니다. '앎쇠'가 되지 말고 깨어있는 '지중'이 되라는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남은 인생은 나누미로 살고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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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합니다 |
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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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는 인문학 강의를 찾고 있다면 후회하지 않을 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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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의 열정이 느껴집니다 |
송*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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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업으로 삼지 않는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애쓰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특히 우리말 철학 용어를 만드신 노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8강 모차르트와 괴테 부분은 배경지식이 좀 부족해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예술 분야에 대한 식견이 좀 더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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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얘기는 좀... |
임*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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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강의라고 해서 들었는데 중간에 갑자기 촛불시위 미화하는 듯한 내용이 나와서 당황스러웠음. 순수 철학보다는 사회비평에 가까운 듯. 강의 설명에 이런 내용이 포함된다고 좀 더 명확히 써놨으면 안 들었을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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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힐링 강의 |
류*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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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악'에 대해 알고 싶어 신청했다가(ㅋㅋㅋ) 오히려 제 마음을 다스리고 갑니다. 칸트의 악성 개념 설명하실 때 무릎을 쳤습니다. 악이 거창한 게 아니라 도덕적 법칙을 따르지 않는 나약함에서 온다는 것... 결국 저 사람도 나약한 인간이구나 생각하니 미움이 좀 사라지네요. 정신과 상담보다 낫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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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네요 |
권*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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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알차고 재미있습니다. 교안도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복습하기 편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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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난이도가 있습니다 |
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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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용 강의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룹니다. 하이데거, 아렌트, 푸코 같은 철학자들의 사상이 배경에 깔려 있어서 철학 초보자라면 조금 버거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끈기 있게 들으면 얻어가는 게 분명히 있습니다. 특히 6강, 7강 개인 개념 파트는 현대인이라면 꼭 한 번쯤 고민해봐야 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긴 글 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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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접근의 철학적 사고... |
황*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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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사유를 넓히고 깊게 하는 방법으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아주 색다른 방식이었다. 특히 우리말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톡창적인 접근방식으로 주제별로 배경과 이해를 깊이 쌓도록 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단지 지나칠정도로 언어학적 접근 방싱에 앍매여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철학적 지식을 쌓는데는 다소 미흡하지 않았나 하는 개인적 생각을 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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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를 맑히는 철학 이야기입니다. |
정*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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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쟁점들을 다루고 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한 권의 바른 책 같은 느낌이에요. 정석 같은 강의라는 생각도 들고...특히 그리스 비극을 다룬 강의가 기억에 남습니다. 힐링 강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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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선택하며 스스로 책임지는 자유인'이다 |
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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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자유>
루이 뒤몽(<개인주의론>1983)은 개인주의가 서구 세계만의 특유한 근대적 현상이라고 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평등한 사회였고 '개인주의의 제도화'는 이런 기독교적 바탕에서 시작했다. 그것은 자율적인 존재인 각 개인들의 연합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타자를 의식하고 살아가며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하지만 타자의 욕망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며 타자 또한 결여된 존재일 뿐이다. 결국 개인은 환상을 통해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르네상스 이전에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인종, 민족, 정당, 가족' 등의 일반적 범주로 인식했지만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세상의 만물과 그 상태에 대한 객관적 대처가 일어나면서 그와 동시에 인간의 주관적 측면도 강조되기 시작했다. 자유로운 '개성'이 탄생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1868~1889)을 통해 천황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와 자본주의 사회가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서양의 '개인'이 번역되었다.
개인은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선택하며 스스로 책임지는 자유인'이다. 하지만 선택은 이미 사회적으로 정해져 있다. 나는 나쁜 것보다는 좋은 것을 선택한다. 나쁘거나 좋은 것은 이미 사회적 규범이고 도덕이다. 인간은 무엇도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 이것은 내게 모순으로 보인다.
1830년대 영국에서 '개인주의'라는 말은 비난의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공동체나 집단, 또는 사회에 대한 반대자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는 개인을 말살시킨다고 오귀스트 블랑키는 말했다.
존 롤스가 말한 것처럼 사회는 개인과 조절하면서 사회 정의를 실현해간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의자뺏기 싸움과 승자 독식주의만이 난무하고 있다. 성공신화는 여전하고 1등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삼성은 아직 독점적이고 이 사회에 사회 정의는 증발해버린 것 같다. 개인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고 사회는 개인이 없이 유지될 수 없다. 끊을 수 있는 것은 끊고 가야한다. 신자유주의, 독점, 성공신화, 또 뭐가 있을까. 너무 많다. 아트앤스터디에서 구연상 선생님의 여섯 번째 강의가 있었다. 근대 개인 신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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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광장'이나 '마당'의 역사가 깊다 |
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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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없는 사회를 위하여>
아트앤스터디에서 구연상 선생님의 다섯번째 강의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광장'이나 '마당'의 역사가 깊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 대학에서부터 거리, 광장으로 퍼졌고 1960년대 학생 봉기도 그랬다. 마당은 신분이 파괴되고 계급이 하나가 되는 장소로 기능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분이 잉여 향락인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등으로 나타난다면 폭력적으로 변질될 수 있다.
2008년 한미 소고기 현상 타결 문제로 대규모 촛불 집회가 있었다.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의 권력에 의존해 진실을 덮어 버렸다. 촛불 집회는 한국 정부에 대항했던 것이다. 그러나 촛불 집회는 드러내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 뜻을 성취하지는 못했다. 사회적 합의, 정의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어쩌면 사회는 합의되거나 통합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의사소통되고 합의되는 사회는 사회적, 인간적 관계를 물화시킨다. 사회 안에서 주체들은 소외되고 객체화되며 물화된다.
사회에 합의가 없다면 투쟁과 갈등만 있을까. 나는 어느 정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의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와 생산의 사회적 성격 사이의 모순과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 한 말이다. 하늘이 두쪽 나도 이건희가 삼성을 사회에 내놓지는 않을 것이다.
주체들의 자율성에 기초하여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해가자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푸코는 근대 자율성의 신화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근대 자본주의는 노동하는 신체를 필요로 했다. 신체를 공장 기계에 맞추어 규율하고 감시, 관리 했다. 이 타율성을 내면화 한 근대 주체는 이제 스스로 자신을 규율하고 감시하게 되었다.
이제 주체는 죽었다. 하지만 주체는 죽은 것이 아니다. 산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기괴한 신체가 되었다. 아감벤은 현대인이 이렇게 기괴하게 존재한다고 말했다.
용산 참사에서 죽은 사람들. 그들은 죽었지만 그 죽음에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주체인가. 주체가 아닌가. 그들은 죽어도 되는 사람들인가. 아닌가. 오늘 '법'은 그들을 뭐라고 부르는가. 이도 저도 아닌 기괴한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국가의 국민이고 개개인이 주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국가는 우리를 보호하며 동시에 관리, 감시 한다. 이제 사회는 치안 사회로 돌입했다. 감시 카메라에 내가 하루 평균 8번인가 찍힌다고 한다.
불편 불만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싱겁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비판적으로 보아야 하며, 공부하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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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에 따른 행위의 무오류성 |
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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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에 따른 행위의 무오류성>
칸트는 양심에 따르는 행위는 오류가 없다 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어떤 효자가 어머니에게 어렵게 버섯을 구해 먹였다고 하자. 그리고 그 다음날 어머니는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양심에 따르는 행위가 언제나 오류에 빠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칸트는 양심을 중시했지만 이로써 근대인은 외부의 강제적 법과 제도를 내면화하고 스스로 (양심적으로)그 법에 복종하게 되었다. 언제나 자율적 근대 주체의 이면에는 이렇게 초자아의 덫에 걸려 허우적대는 모습이 있다.
법을 존중하고 따르자. 하지만 그것이 따를만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 사유 방식은 어쩌면 새로운 것일지 모른다. 국가나 법, 제도 등이 억압적이라고 해서 그것을 타도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행위하지 않기'의 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바로 이 수동적인 행위 속에서 적극적인 것으로의 이행하기이다. 그동안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였지 패자의 역사가 아니었다. 패자는 잊혀졌던 것이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졌다고 해서 그 모든 노력들이 망각되어야 하는가. 벤야민의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벤야민도 지적한 바 있지만 '무위의 공동체'에서 장 뤽 낭시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오늘은 아트앤스터디에서 구연상 선생님의 네 번째 강의가 있었다. '악'의 유래에 대해 그리고 대중사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칸트는 개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 책임을 지웠다. 이것은 현재까지 근대법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자유롭게 살인인하기를 선택한 자는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보면 여러 사회적 문제나 범죄들에 대한 법적 공방이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민중은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다' 얼마전 맑시즘 축제가 있어서 다녀왔다. 김수행 선생님 강의도 들을 수 있는 유익한 기회였다. 선생님께서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면서 자본주의가 기술 혁신을 계속 필요로 하며 이를 통해 잉여가치가 증가하는 한편, 생산 수단의 발전은 해고를 낳고 그것은 다시 대량 실업을 발생시킨다고 설명하셨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당연히 임금 하락일 것이다. 선생님은 강의 마무리에서 이 구조를 깰 수 있는 것은 민중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민중이 '사회적 저항의 진앙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저항이 단순히 체제를 인정한 후라면 체제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것은 어떨까. 전 세계 노동자가 단결하여 무기한 파업에라도 돌입해야 하는 것일까.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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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실천하는 것 |
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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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음 vs 나쁨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안을 안다는 것은, 그 사안에 관해 사유하지 않아도 된다는 함의를 갖는다.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벤야민이 그랬던가. 당파를 정하지 못하는 자는 침묵해야 한다 - <일방통행로>
우리는 어쩌면 불확실하고 모호한 세계에 살면서 그 불안과 공백을 견디지 못하고 내용으로 채우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성과 합리성의 이름으로 체계를 만들고 모든 것(계산 불가능한 것)을 계산 가능한 것으로 탈바꿈 한다. 그렇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규정하고 선악을 명명해왔다. 이렇게 해서 알게 된 세상은 이제 더이상 알아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아마 니체가 빈정거렸던 학자들의 무리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니체는 도덕적 현상은 없다고 했다.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이 있을 뿐. 한 시대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른 시대에는 '선'이었다. 이전 시대에 이상이었던 것은 시대가 바뀌면서 정반대가 되기도 한다. 한 사회에 위협이 되는 것은 모두 악으로 불렸던 것이다.
좋음과 나쁨, 혹은 선과 악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회적, 관습적 사유의 틀이 만들어 낸 것일까. 좋음과 나쁨의 본질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태초에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이 좋은 것이고 손해가 되는 것이 나쁜 것이었다. 이 기원이 망각되고 지금 우리는 선악을 도덕적, 사회적 규범처럼 인정하고, 이해하고 있다.
오늘 아트앤스터디에서 구연상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좋고 나쁨은 절대적이지 않다. 완전히 무르익은, 활짝 핀 꽃은 그 자체로 '좋은 꽃'이다. 그러나 그 꽃이 누군가에게 비염을 일으킨다면 나쁠 수 있다.
좋고 나쁨은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대립자에 의존적으로만 존재한다. 그것은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칸트의 '악'에 대한 개념을 공부하기로 했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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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사랑에 대한 뜻매김부터 동서양의 지혜를 더듬어 |
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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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사랑이란 무엇일까. 무엇보다 사랑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나와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존중하는 것. 하지만 그 일이 쉽지는 않다. 어쩌면 가까운 누군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가깝다는 것일까. 멀다는 것일까. 가깝다는 것은 멀다는 것의 다른 말일까. 나와 같지 않은 누군가를 바로 그 이유로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와 같아지기, 하나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권력 의지 아닐까.
어떻게 하는 것이 소위 진정한 사랑일까. 어느 책에선가 아도르노는 말했다. 사랑하라. 그러나 각자여라. 우리는 지나친 간섭과 무관심 사이에 적절히 서 있을 수 있을까.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말인 것도 같다.
어느면 우리 모두는 쉽게 사랑하고, 시간이 지나면 또 쉽게 그 사랑에 익숙해진다. 익숙한 채 살아가지만 사실 그 익숙함은 낯선 것일지 모른다. 낯선 타자와 익숙한 순간 그 안에 낯선 타자성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여기에 우리의 '불안'이 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불안'에 맞서 오히려 그 낯선 것, 부정성을 받아들여 보는 건 어떨까. 아주 적극적으로.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타자의 타자성까지 적극적으로 떠안기. 둘 사이의 부조화, 불일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와 함께 머물기. 겉모양의 조화, 편화, 합일을 넘어서서 그 안에 있는 불일치성을 승인해 보는 것 말이다.
아트앤스터디에서 구연상 선생님의 두번째 강의가 있었다. 오늘은 '사랑'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했다. 우리는 왜 조건적으로 사랑할까. 사랑에 대한 뜻 매김부터 동서양의 지혜를 더듬어 보았다.
동양의 불교적 상상력에서는 자비, 베푸는 사랑을 강조했다. 유교에서는 어질고 슬기로운 사랑을 말했다. 서양의 경우 성스러운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다. 니체는 자비나 동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그것은 강자의 도덕으로 약자를 더 약하게 하고, 약자를 약자로 규정지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약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적극적으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고 타자에 의존하여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동서양의 사랑을 대하는 방식이나 성격이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서양이 사랑의 '대상'에 대한 강조라면 동양은 사랑의 대상을 설정하고 그에 종속되기 보다 능동적으로 베풀고 실천하는 사랑을 강조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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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단순히 진리 증명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며 '좋은 삶'을 향해 가야 |
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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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의 붕괴와 그 불만
대중이 독재를 무너뜨렸다면 이제 촛불의, 대중의 독재가 시작된 것일까. 다원성의 시대, 차이의 시대. 그럴듯도 하지만 '차이'만 난무 한다면 그것 또한 문제일 듯 하다. 지젝은 '차이'가 어쩌면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모순과 갈등 구조를 은폐한다고 우려한 바 있다.
촛불집회 : 2002년 6월 주한미군의 장갑차량에 깔려 숨진 두 여자 중학생의 사인 규명과 추모를 위해 같은 해 11월 처음 열린 이래 한국의 대표적... (출처 : 두산백과사전 EnCyber)
오늘날, 철학의 과제는 무엇일가. 우선 천천히 가자. 철학하기, 사유하기가 중단된 시대에 차분하게 물어가 보자. 철학은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철학은 과학화의 길 또는 고고학의 길을 걸어왔다. 과학은 철저한 증명을 요구하고 고고학은 끈질긴 고증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철학을 숨막히게 할 뿐이다. 철학에게는 마음껏 생각할 자유가 무한히 허용되어야 한다' -구연상, <철학은 슬기 맑힘이다>, 머리말
철학은 현실 세계에 질문해야 하고 변혁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고 철학서를 읽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철학적 용어들이 생소할 때가 많다. 번역의 과정에서 왜곡된 것도 많다. 새로운 번역어를 고안하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우리말로 쉽게 풀이해서 쓰기. 하지만 '우리 것'을 배타적으로 고집하는 일도 철학함에 어울리지는 않는다. 모두에게 무한히 열려 있는 것이 철학일 것이다.
아트앤스터디에서 구연상 선생님의 첫 강의가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철학이 단순히 진리 증명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며 '좋은 삶'을 향해 가야한다고 말씀하셨다. 주체가 사형 선고 받은 시대에 선생님과 함께 '좋은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봐야겠다.
과거, '권위주의'를 무너뜨린 주체는 그 권위(억압과 금지)로부터 이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주체가 되지 못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일까. 포스트모던 주체는 '나는 나야'라면서 왜 티비 스타와 '같아지려고' 꾸미고 수술까지도 감행하는 것일까. '아버지'(억압)라는 권위, 주인기표를 중지시키면서 우리는 다시 '티비 스타'를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 인간은 '권위' 없이 살 수 없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가짜로 권위를 부정해왔는지 모르겠다. 지젝이 이야기 하듯 중심에 대항해 주변부, 소수자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해체하기. '중심'을 인정한 후에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 그 자체의 불가능성, 불완전성을 드러내기가 가능할 것인가. 언제나 새로운 시도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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