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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
당신의 사고에 오류는 없는가? |
정수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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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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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 입문 |
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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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하 선생님 논리학 입문이 이름만 논리학 입문이지 논리학만 다루는 강의가 아니죠. 수사술과 철학 입문을 포괄하는 강의로서 재미있는 강의였지만 '논리학'기초를 얻길 기대한 사람에게는 예상과는 너무 다른 강의였습니다 이 강의는 정상?적인 논리학 기초 강의입니다^^
ps:수업중에 경험과학과의 논리학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자연과학적 방법론도 자주 말씀하시는데 교수님의 과학사 강의도 듣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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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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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는 만드는게 아니였다~ |
박*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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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전에것은 그래서 그랬으니 앞으로 이건 이렇게 하는게 논리에 맞지않을까요? B: 그건 당신 논리가 그런거고 내 논리는 이러이러하니 앞으론 요렇게 합시다
사회에서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할때 자주 일어나는 모습들이다 지금껏 이런말이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강의를 듣고나니 무수히 많은 오류들이 내 삶에서 일어나고 있다는걸 알게되었다 모든게 다 내입을 통해서 나온 오류들이라 이제라도 고쳐나가야 겠다고 생각하니 자그마한 지적 흥분을 느끼게된다 논리는 만드는게 아니였다 논리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우린 거기에 따를뿐이다 흥미있는 강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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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논리란 그때 그때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닌 이미 우리 안에 생성되어 있는 것들일수록 그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강의평 감사합니다. ^-^ artboy (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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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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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죽자살자 상대방을 이겨먹으려고 달려들었던 내 모습이 조금 부끄러웠다 |
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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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 . 논리 . 논리
살면서 많은 논리적인 사람들을 보았다. 논리를 앞세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앞섰다. 나도 저러한 논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당당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정일 선생님의 <논리 IN LIFE>는 이렇게 논리와 논쟁을 헷갈려 하는 나같은 사람들을 위해 논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의로부터 강의를 시작하신다.
우리가 먼저 합리적사고/ 비판적 사고/논리적 사고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언뜻 보면 그게 그거 같고 비슷한 말 같지만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합리적 사고란, 행위의 목적 지향성과 연관된 사고를 의미한다. 즉, 어떠한 행위의 목적과 합치하는지 불합치 하는지에 관련된 것이다. 비판적 사고는, 한계를 설정하고 또 그 한계를 뛰어넘는 창의적인 사고이다. 논리적 사고는 규칙을 따르는 것이다. 규칙을 잘 따라서 사고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구분해야할 또 다른 개념은 바로 논증과 논쟁이다. 논증은 추론의 타당성과 부당성을 검증해보는 작업이다. 이 추론은 전제로 시작하여 결론으로 끝이 난다. 전제로 시작하여 결론을 내리는 그 과정 사이에서 규칙을 잘 따라서 문제를 해결했는가를 검토해보아야 한다. 이러한 from 전제 to 결론의 사고 과정을 연습하는 것이 논증이다.
선생님께서는 '논리학은 심리학이 아니다'라고 강조하신다. 즉, 논리는 이러한 규칙에 올바르게 맞게 사고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마음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논쟁이란 무엇인가? 논쟁의 전제는 '다름'이다. 서로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논쟁의 정의를 듣고나니 수많은 사람들이 논쟁으로 서로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도 결국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달라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논쟁의 합의점을 강제로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내 한계를 파악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잘 알게 되는 데에 의의가 있다는 점이다. 전략적으로 상대방을 이겨야겠다!!! 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주장, 내 입장의 한계를 알고 상대방의 입장을 잘 알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그 논쟁은 의의가 있는 것이다. 논쟁이라고 해서 늘 죽자살자 상대방을 이겨먹으려고 달려들었던 내 모습이 조금 부끄러웠다 ^^*
사실, 1강인데도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만큼 내가 아직 진짜 논리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누군가가 나를 보고 '논리적이다'라고 말할 때 어깨가 우쭐우쭐 했었는데 1강을 통해 논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명확하게 내리고 나니 나는 결코 논리적인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과연 논리적인 것이 옳은 것인가? 에대한 문제도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었다. 논리적이라고 해서 늘 옳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옳은 것처럼 포장이 될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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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라는 뼈대를 세우는 시간 |
박*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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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기획안을 발표할 때마다 상사에게 "그래서 논리가 뭔데?"라는 지적을 자주 받았습니다. 주눅이 든 상태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강의를 신청했네요. 사실 처음 1강, 2강을 들을 때는 이게 당장 내 업무에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습니다. 칸트 이야기가 나오고 연역논증이 나오고 하니까요. 그런데 4강 인과율 파트를 넘어가면서부터 제가 평소에 얼마나 감정에 치우쳐서 사고했는지 깨닫게 되더군요. 특히 '논증'과 '논쟁'을 구분해주신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늘 이기려고만 했던 것 같아요. 타당함을 증명하는 것과 남을 굴복시키는 건 다른 문제라는 걸 배웠습니다. 덕분에 이번 주 회의에서는 좀 더 차분하게 제 생각을 정리해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머릿속에 흐릿하던 생각들에 뼈대가 생긴 기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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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 학습이 도움이 됩니다 |
김*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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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 중요한 개념을 계속 반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처음엔 왜 했던 말을 또 하시나 싶었는데, 강의를 다 듣고 나니 그 반복 덕분에 따로 복습을 안 해도 머리에 남는 게 많네요. 논리학 입문자에게 적합한 스타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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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네요 |
최*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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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말을 잘하는 스킬, 그러니까 처세술이나 화술을 기대하고 들어왔습니다. 쇼펜하우어의 논쟁 기술 같은 걸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학문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논리학 자체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좋겠지만, 당장 말싸움에서 이기는 법을 알고 싶은 분들에게는 좀 지루할 수도 있겠습니다. 내용은 유익하지만 실용성 면에서는 약간 아쉬움이 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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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정화되는 느낌 |
이*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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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개인적인 일로 마음이 많이 복잡했습니다. 감정이 앞서다 보니 판단력도 흐려지고, 사람들과 대화할 때 자꾸 꼬투리를 잡게 되더라고요. 이 강의를 들으면서 제 사고 과정에 어떤 오류가 있었는지 차분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논리라는 게 차가운 이성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오히려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줄여주는 도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밤에 조용히 강의 듣는 시간이 저에게는 힐링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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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 않게 잘 설명해주심 |
정*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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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전공자가 아니라서 걱정했는데 예시를 들어서 쉽게 설명해주십니다. 필기도 깔끔하시고요. 8강까지 부담 없이 완강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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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이론 위주입니다 |
강*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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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제목이 라이프라서 실생활 예시가 많을 줄 알았는데 칸트나 철학자들 이야기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좀 더 현실적인 예시가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듣다가 몇 번 졸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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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와 외연, 이제 확실히 알겠어요 |
오*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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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에 얼핏 배우고 지나갔던 개념들을 다시 배우니 새롭습니다. 그때는 그냥 시험 보려고 외웠는데, 선생님 설명을 들으니 이게 왜 필요한 개념인지 이해가 가네요. 교안도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나중에 찾아보기 좋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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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목소리가 좋습니다 |
송*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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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둘째치고 선생님 톤이 차분해서 집중이 잘 됩니다. 퇴근하고 지하철에서 오며 가며 듣기 딱 좋아요. 논리학이 딱딱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재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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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 사고의 기초를 다지기에 최적 |
류*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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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논문 쓸 때 도움이 될까 해서 수강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특히 오류론 부분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범하는 논리적 비약들을 짚어주시는 게 좋았습니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사고하는 훈련을 시켜주시는 느낌입니다. 글을 쓸 때 문장 간의 연결이 느슨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었는데, 이 강의를 듣고 나서 문단 구성할 때 인과관계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깊이 있는 내용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시는 내공이 느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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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래요 |
백*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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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강의라고 해서 들었는데 저랑은 좀 안 맞는 것 같아요.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시는 느낌? 나쁘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엄청 좋은지도 모르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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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강의 |
윤*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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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머리가 똑똑해지는 강의가 아니라, 겸손해지는 강의입니다.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얼마나 빈약한 근거 위에 서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친구랑 정치 문제로 크게 다퉜는데, 강의 듣고 나서 제가 범한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가 생각나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논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건 타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선생님 말씀이 기억에 남네요. 삶의 태도를 교정받은 기분입니다.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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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가 알찹니다 |
한*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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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내용도 좋지만 제공되는 교안이 정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따로 필기할 필요 없이 교안만 봐도 흐름이 잡힙니다. 입문용으로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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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말 반복이 너무 심함 |
임*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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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내용을 강조하시는 건 알겠는데, 한 강좌 내에서 했던 말을 너무 여러 번 반복하셔서 진도가 안 나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5배속으로 들어도 답답할 때가 있었어요. 핵심만 딱딱 짚고 넘어가면 30분이면 끝날 내용을 1시간으로 늘린 것 같습니다. 시간 없는 직장인들에게는 좀 비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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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 입문으로 강추 |
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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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만 느껴지던 논리학 용어들이 친숙해졌습니다. 선생님이 판서하실 때 글씨도 너무 예쁘셔서 보기도 편해요. 완강하고 나니 뿌듯합니다. 다음 단계 강의도 있으면 듣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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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했습니다 |
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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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책을 읽을 때 내용 정리가 잘 안되는 편이었는데, 이 강의 듣고 나서 저자의 주장을 전제와 결론으로 나누어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독해력이 조금 좋아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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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논리학 |
이*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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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었습니다. 논리에 대해서 여러가지 알게 된 것들이 많네요. 워낙 문외한이지만, 재미있었고, 책으로 더 깊게 공부하고 싶은 욕심도 납니다. 철학과 자연과학까지 해박하시고, 글씨를 너무 깔끔하고 모범적으로 쓰시고,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경향이 있으시고(거슬리지 않습니다). 이해가 됐는지 여러 번 물으시는데, 모니터에다 대고 항상 "네"하고 대답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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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논리의 중요성 |
이*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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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 얕은 시대에 살고 있어서 있지 언론 매체조차도 논리적인 사고 없이 편협적으로 대량 생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논리 in life는 정말 유익한 강의였습니다. 감사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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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이 기대게 되는, 온기가 느껴지는, 표면적인 위로같은 한편의 강의 |
홍*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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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 강의. 그때그때 웅덩이에 빠진 감정이 약한 나를 구원하는 것은 쉬이 기대게 되는 온기가 느껴지는 표면적인 위로, 그거 사실 아니었고 그저 나에 앞서 걸어간 사람들의 참으로 찬란한 생각의 정리. 에피파니의 포착, 집착스러울만치의 파고듦. 공감에 호소하는 그들의 예술적 솜씨. 그리고 비로소 나에게까지 배달되는 그 어떤 따뜻한 일상의 순간.임을 알아간다.
예술이라는 것을 그토록 추구하고 싶은 사람에게조차 여전히 재미없게 달라붙어 있는 스놉적 기질. 하지만 그 예술가를 예술가로 만드는 것은, 작품의 만들면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제3의 퍼스낼리티. 그것은 완전히 밑바닥으로 침잠한 후 어느순간 돌연 솟아나와 마주하게 되는 '첫번째 지각'(선생님의 표현으로라면 마음의 원전)을 향해야 한다. 그러한 예술이라야 비로소, 내 인생이 나에게가 아닌 내가 내 인생에게, 예술이 예술가에게가 아닌 에술가가 예술 속에 속한 즉, 거대한 질서의 일부로 서있음을 그 작은 발목의 좋은 힘줄을 꿈쩍 느낄 수 있으니. 가장 낮은 겸허는, 참된 겸손은 어찌된 것인지, 지고의 순수를 획득한 사람만이 닿을 수 있게 오히려 가장 높이 놓여있는 그것은 아닐지.
나를 온통 쏟아내고 싶은 대상을 찾고자 하는 그 모든 희망의 몸짓들. 그 내뻗는 손이 소중한 미지의 대상에 비로소 닿을 수 있는건, 그 멋진 겸손이 내게도 추구될 그때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이미 있는 그 모든 질서에 귀기울여 듣는다. 받아적는다. 덧붙여 내게 떠오르는 몽상 하나. 스놉적 기질은 몇몇의 구심점을 만들고 그 표면적인 중심에 모여들고저 많은 이들의 많은 피곤을 자아내지만, 첫번째 지각. 생생한 환희. 참된 질서의 깊은 순종은 조용히 각자의 위치에서 일어나는 듯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몇몇 중심이라 불리는 것들에 대해 웅성거리지만, 실제 우주를 매일 미세한 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요즘 왠 다른 감각으로 나는 그것이 느껴진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곳, 사실 그곳에 화제의 주인공은 없다. 주인공은 모두거나 아니면 아무도 아니거나. 각자 자기 삶에서 첫번째 자각을 마주하며 매일매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 모든 사람들. 나는 요즈음 그 사람들이 더욱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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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간헐이 탈피하는 애벌레 기둥 |
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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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간헐이 탈피하는 애벌레 기둥.
할머니를 '완전히 추억'하게 된 것은, 일상적 시간의 흐름이 끊기며 마음의 간헐 속에서 오히려 마주하게 된 할머니에 대한 참다운 기억이라는 것이 나에게 던진 잔상은 꽃들에게 희망을. 찬란하진 않지만 화려해 보일수는 있을 주변의 욕망에 휘둘려 이유조차 모른 채 기어올랐던 애벌레 기둥에서 내려와, 다시 내려와, 자신만의 고치 속에서 인내의 고통으로 스스로 '망각'의 찬란한 인상을 결국 만들어내었던 나비. 그렇게 나비가 되었던 애벌레 한 마리.
<우리들 자신에게 알려지지 않는, 우리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런 장소일 수 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버린 모든 삶의 내용들이 간직되어 있는 이 장소는 우리 안에 있으면서도 까맣게 잊혀져있는 그런 미지의 장소이다. 그러나 어느 계기가 있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체 전체를, 우리의 감정들 모두를 다시 만나게 되면, 이 알려지지 않았던 장소는 돌연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 그때까지 우리의 주인이었던 '나'를 밀어내고 우리의 육체 모두를 장악하면서 또 다른 우리들 자신의 '나', 예기치 않게 새로 태어나는 '나'가 된다. (강의록)>
그렇게 마음의 간헐 속에, 일상의 예기치 못한 시간의 구덩이 속에 참다운 기억을 상기해내지만, 그것은 고통의 독자성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고통을 통해서만 그러한 기억의 생생함을 간직할 수 있기에, <때문에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내 안에 고정시키고 있는 못이 아무리 아픈 것이라고 해도 나는 차라리 그 못이 더 아프게 내 마음에 박히기를 바랄 뿐이다.(강의록)>
할머니에 대한 온전한 기억을 통해, 고통의 독자성을 이렇게 발견해내어, 꼭 붙들어내고, 전달해내는 그 시선과 글의 힘이 무엇보다 놀랍고 또한 그것을 전달받을 수 있는 일주일 속 간헐의 지점. 예기치 못한 별자리와도 같은 인상의 풍경, 보석을 쏟아부어 주고 있는 그것이 감격스럽다. 여유라는 것, 그것을 the rest of it이라기보다 정신의 빛으로 미지의 것을 용기있게 비추는 것으로 알아가기를 바라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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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존중이란 ? |
이*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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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께 늘 감사드리며 .....
"신의 은총이 그대와 함께 하기를 "
존중이란 사랑보다 깊은것 .
교수님의 가르침으로 그 어려운 인간에 대한 존중을
배우게 되어 었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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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
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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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상 읽어보고 싶었는데 엄두를 못내고 있다가 선생님 강의를 보면서 많이 도움 받고 있습니다 조이스의 율리시즈도 강의해주시면 좋겠다는 바램이 드네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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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오긴 오는데 이것이 어떻게 오는지를 알아야 겠다고 |
유*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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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파악이 안 된다는 어려운 고백. 항상 하는 것이지만 요즘 들어 더하다.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렇다. 조합의 방향과 방식에 따라 다른 내가 만들어지고, 그걸 그 당시 그 순간만큼은 가장 나인 것이라 여긴다. 계속 해부하면 그만큼은 답이 나오겠지 하며 그렇게 분석한다. 알고싶다는 강박에 휩싸인다. 오늘 강의에서 들은 풍월처럼, 나 역시도 "행복이 오긴 오는데 이것이 어떻게 오는지를 알아야겠다고" 한다.
Object of Love를 찾는다. 그것이 어디있을지 끝없이 탐색한다. 상대의 존재방식의 어떠한 특징으로 인하여 의식적 자아(문제항) 아닌 육체적 자아(대립항)가 내 안에서 튀어올라 트립자아와 만난다. 그리고 그 트립자아를 상대(Object of Love)에 투영한다. 그렇게 자기애는 계속하여 증식하고 생성된다. 그것은 불연속이고, 무한히 증식하며, 정체되지 않는다. 상대에 있지도 않다. 다만 상대에 있을 것이라 착각하며 연애는 맺어져간다. 하지만 빠져들수록 잡히진 않는다. 그런 허송세월의 통과의례속에 글쓰기는 또 다시 한번 자아의 외침으로 솟는다.
'그리고 마침내 알베르틴의 잠이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서 더는 의식의 암초들에게 부딪힐 위험성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안심하고 침대 위로 올라가서 그녀 곁에 몸을 눕히고 알베르틴의 잠 속으로 함께 실려 내려갔다. 완전히 순수하지만은 않은 기쁨이 나를 감쌌다. .. 나는 그야말로 말을 알지 못하는 자연, 그 어떤 의식도 저항도 없는 자연 한 조각을 완전하게 소유한 것만 같았다.(강의록)'
가장 사적인 영역인 intimacy의 연애를 통하여 트립자아를 알아간다. 트립 자아의 가동으로 쓰는 동력을 부여받는다. 트립 자아의 활동으로 불완전하지만 가장 완전을 지향한다. 이 엎치락뒤치락한 운동이 어떠한 몰아가는 힘을 만들며 어느 방향에서 좌우받지 않는 그 고유의 방향을 정하는 듯하다. 그 지점을 찾는 순간, 찾아지는 순간 "이제서야 나는 알겠다"고 하는 허송세월의 통과제의를 이룩한 정리 그리고 기록이 선다. 그것을 바삐 기록한다. 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으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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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아, 나는 당신의 촌스러움이 사랑스럽습니다 |
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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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지껏 본 사람중에 가장 제대로 대단하게 '촌스러운' 사람을 알아가고 있는데, 그로부터 받는 감동은 삶의 변화라는 것에 대한 선생님의 표현처럼 '매우 은밀하고도 정확하다'. 한편 순수한 갈망을 자아냈다고 여겨졌던 세련됨은 보기는 산뜻하나 닿아지지 않았는데, 그랬던 것은, 그것이 멀리 있어서가 아니라(멀리 있는 줄 알고 더 다가서려 하였던 적도 있었으나) 실체없이 단지 그렇게 보였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이제는 담담히 짐작한다. 존재가 현실 속에서 숨쉰다면 육중히 내리고 서 있는 그 무게감에 의해서라도 세련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 무게의 어쩔 수 없는 촌스러움. 그리고 그 촌스러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바른 마음씨. 요즈음에는 그것이야말로 내게 genuine frontier. 아, 나는 당신의 촌스러움이 사랑스럽습니다. 당신의 에너지는 가장 촌스러운 용암에서 흘러넘치는 것이었네요
프루스트 네번째 수업. 집단 무의식을 읽어내려가는 살롱에 대하여. 귀족 살롱과 부르주아 살롱, 우리 안에 이제도 철저히 내재되어 있을, 웃기고도 웃기지만은 않은 스노비즘에 대하여. 속으로 그 누구보다도 철저히 변별하나 .. 그러나 그러지 않은 척. 자신 안의 이중성을 가지고 세련되어 보일 어떠한 분위기에 편승하는 존재의 초라함.. 진실다운 진실은 외면한 채 그저 조류와 세태만이 남는 어느 역사의 한 장면. 그들 간 전혀 다른 안티드레퓌스의 입장.
단순히 한 개인의 무의지적 기억을 넘어선 사회역사적 맥락이 부여하는 생동감, 그 씨실과 날실의 결합 속에 작품이 .. 시간 속에 명멸하지 않는 작품이 탄생한다. 선생님 말씀대로 '명명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명멸을 붙잡아내는' 실로 섬세한 고요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목요일 저녁 조금이나마 전달받을 수 있는 그 고유의 시간에 감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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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불편한 잠들기에 대한 우연과도 같은 수업 |
양*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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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들짝 새벽 4시 50분께 깨어난 목요일. 불편한 잠들기에 대한 우연과도 같은 수업.
요즈음의 불편한 잠들기를 통해 알아가는 육체적 시간. 그것은 오히려 의식의 시간보다 더한, 순수 의식의 시간. 의식 원형의시간. 의식의 원초적 단계와도 같은 시간. 그 시간은 의도적이지 않아서 불연속적이고, 역사적 시간을 뚫고 튀어올라오는 시간. 하지만, 원하는 바까지도 사회적인 욕망과 인정에 맞추어 함께 길들여져야할 것 같은 그 지점에서 나의 고요하고 원액같은 외침을 발견하는 것. 내 속의 감각덩어리. 삶덩어리에 닿는 시간.
그래, 내 의식적인 시간 안에 나를 통제하고 발전이나 하려 했던 의도와 의욕만 다분했던 그 시간이 분명 진보만으로 흐르진 않았지. 아니 오히려 상대적으로 밀려드는 반작용에 퇴보하듯 나를 더 안달나고 좌절하게만 만들었지. 그래서 나는 다른 시간의 축을 찾아야만 했지. 진보의 시간을 방해하는 내 안의 moment와도 같이. 그것만이 내게 정말 거창하지 않은 작은 구원. 그리고 마저 그 유한성의 한계에 스러져가지 않도록 나를 옮긴다. 내안의 육체적 감각을 통렬히 깨워 나의 순수자아를 바친다 가장 생생하게.
"돌연 잠이 온다. 나는 무거운 잠 속으로 빠진다. 잠의 휘장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간다. 유년으로, 흘러간 세월로, 사라진 감정들로 돌아간다. 그리고 육신을 이탈해서 영혼의 세계, 망자들의 세계, 광기의 환상들이 있는 가장 원시적인 자연계 속으로 되돌아간다. 꿈 속에서는 확실함 대신에 모호함만이 있어서 마치 환등의 마술처럼 앞의 현실은 뒤따르는 현실로 바뀌면서 사라지는 것이어서 눈앞의 광경은 끝없이 변화하는 환등의 세계를 닮는다. 우리는 자주 꿈 속에서 동물을 만났다고 말하지만, 그 동물은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이 아닌가. 우리는 매일 밤 침대 안에서 이렇게 사멸과 부활의 신비를 전수받는 것이다.."(강의록)
내 껍데기 속 껍데기 속 껍데기를 끝없이 캐내어주는 또 한번의 목요일 저녁 시간을 보내고, 조용한 감격과 감정, 생각을 그대로 봉인한 후, 또 며칠이 지나 이렇게 기록한다. 이렇게 내 시간의 일부로 계속하여 차지하도록 한 후엔 가장 고요하고 과장 없이 어느 순간 쏟아내어 그에 합당한 무언가를 생성해 내기를 기억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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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야, 실로 보살이라 말할 수 있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
서*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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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야, 보살도 그와 같다. 만약 다음과 같이 ‘나는 반드시 무량한 중생을 멸도시키리라’ 고 말한다면 곧 보살이라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보살이라 말할 수 있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나는 반드시 불토를 장엄하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보살이라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장엄불토는 곧 장엄이 아닌데 그것을 장엄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무아법에 통달하면 여래는 그를 참으로 보살이라 말한다.”
금강경의 <제10단의> 중 한 대목이다. 불교 쪽에 몸담고 있는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하루에도 불교 경전을 몇 차례씩 접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아무리 금강경이 불교 최고의 경전이라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쉽게 받아들이기는 힘든 말들이다. 한 마디로 오류투성이의 말씀들이다. 논리적으로 전혀 수긍이 가지 않는다. 덧붙이자면, 금강경을 비롯한 유명한 대승경전과 그 해설들에는 이런 ‘말이 안 되는’ 말들이 철철 넘친다.
보살은 무량한 중생을 멸도시키고 불토를 장엄하는 존재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존재라고 말하는 순간, 그런 존재인 보살이 아니게 된단다. 내가 나를 ‘나’라고 정의한 순간 내가 아니게 된다는 요상한 역설이 여기에 있다. “여래가 설한 장엄불토는 곧 장엄이 아닌데 그것을 장엄이라 말하기 때문”이란 부분에 이르러서는 이게 도대체 뭔 소린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부처님이 분명 ‘장엄불토’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장엄이 아니라니!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난 아트앤스터디 이정일 선생님의 <논리 in Life - 모든 것이 논리학이다> 다섯 번째 강의 ‘오류’(fallacy)의 리뷰를 눙치려고 하고 있다. 그러니 내가 금강경의 예를 든 건 별로 합당한 논쟁은 아닐 것이다. 강의 시간, 이 선생님은 애매함의 오류, 모호함의 오류, 복합질문의 오류, 거짓 딜레마의 오류,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 등을 비롯한 무려 17가지의 논리적 오류들을 설명했다. 선생님은 도중에 칼 슈미츠, 토크빌, 그리고 여러 그리스어의 어원을 예로 들며 강의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애쓰셨지만, 그래도 별 수 없이 외워야 할 건 외워야 하는 거였다. 무슨 덧붙일 말이 없었다.
이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논리학은 진위 검증을 하는 학문이 아니다. 논리학은 오직 논증의 타당성과 부당성을 가리는 것일 뿐이란다. 여기서 오류는 전제와 결론의 연결이 잘못된 것을 말한다. 오류는 전제와 결론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오류’는 (‘참’과 대비되는 관념으로서의) ‘거짓’과는 다르다. 저 금강경의 구절들은 당연히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종교적 차원에서 설해진 말일 것이며,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읽는이들의 머릿속을 꽝 치는 무언가가 있다. 이제, 이정일 쌤이 다음 강의에서 ‘논리’의 영역을 뛰어넘는 ‘논쟁’의 영역을 설명하는 차례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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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세상은 불연속적인 세상이고, ‘확률적 통계’만이 지배하는 세상” |
김*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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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일 선생님의 <논리 in Life – 모든 것이 논리학이다> 네 번째 강의까지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논리학의 역사는, 세계를 명백하게 ‘논리적으로’ 파악하려는 철학적 욕망과 함께 흘러왔던 것 같다고. 논리학에선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필연성, 무제약적으로 타당한 사고형식, 그리고 대전제는 언제나 결론을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조화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그 위대한 지적 욕구, 다시 말해 서양의 모든 사상사와 철학사는 가볍게 여길 만한 것은 아닐 터이다.
네 번째 강의에서는 ‘인과율’을 배웠다. 인과율은, 한 마디로 말해 논리학이 아니다. 논리학이 아닌 것을 다 ‘제껴 둔’ 후 논리학이 무엇인지를 파악한다는 이 선생님의 방법론이었다. 마치 연역 논증에서 필연성의 부정을 통하여 참과 거짓을 밝히는 ‘귀류법’처럼 말이다. 이 선생님 또한 <논증과 논쟁>이라는 논리학 저술을 펴냈음에도, 논리학적 세계관을 그다지 신봉하지 않는 듯했다. 논리적 추론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세계는 논리적 추론만으로는 증명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뜻이다.
최종덕 상지대 교수는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의 논쟁이 이후 후학들에게 남긴 영향을 바라보며 "그 정도로 전통 실재론의 철학은 서구인들의 마음에 깊이 도사리고 있다"고 말한다.
인과율은 과학의 영역이다. 인과율은 선행하는 사건과 후행하는 사건이 있을 때, 어떤 근거에서 전자가 후자에 대해 원인일 수 있는가를 해명하는 개념이다. 인과율의 ‘사건’은 시간상 선후관계를 전후로 한다. 때문에, 두 사건은 비가역적이고 동시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예컨대 엔트로피의 증가 법칙(열역학 제2법칙)과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인과율의 비가역성과 비동시성은 자연과학의 ‘법칙’을 성립시키는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가역적>이고 <동시적>인 사건들은 과학이 될 수 없다.
인과율은 실제로 발생한 사건들을 규칙성에 따라 결합시킨다. 그러나 그 규칙엔 (논리적 추론과 다르게) 예외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예외’들이 모여 새로운 기존의 이론적 체계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이론을 낳는다는, 자연과학의 ‘패러다임’ 개념이 등장할 수 있는 이유다. 또한, 이 선생님 말마따나 “자연의 세상은 불연속적인 세상이고, ‘확률적 통계’만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미시영역과 거시영역에서 서로 다른 인과율이 적용될 수밖에 없으며, 하나의 이론으로 세계를 파악할 수는 없다.
요컨대, 인과율은 세계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이 말은 특정한 결정론적 과학 이론이 세계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과학 영역의 인과율을 <논리학적 세계관>으로 격상시키려는 부정적 사례로 아인슈타인이 등장해 놀라웠다. 1927년 솔베이 사고 실험의 해석을 둘러싸고 닐스 보어와 논쟁하며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아인슈타인. 그는 양자역학의 물리적 실재 역시, 고전역학의 사유체계처럼 본질적 대상(리얼리티)이 실재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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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가 옳으면 ‘결론’은 필연적으로 옳을 수 있는 것일까 |
안*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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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일 선생님의 <모든 것이 논리학이다> 세 번째 강의는 논리학에서 가장 재미없으면서도, 또한 가장 ‘논리학적’이라 부를 수 있는 내용을 다뤘다. 바로 연역논증(deductive argument)이 그것이다. 우리가 흔히 논리학 하면 떠오르는, 전제와 결론, 연역과 귀납, 전건과 후건, 전칭과 특칭, 긍정과 부정, 삼단논법, 귀류법과 딜레마…. 등을 배웠다. 솔직히, 재미가 없어서 괴로웠다. 선생님도 좀 괴로워하신 것 같다.
LEET 시험 개론서에 줄창 등장하는 도식들로 채워진 강의안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한숨이 나오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강의를 듣고 난 지금도, 리뷰에 무슨 말을 적어야 하나 고민하며 강의안과 필기를 뻔질나게 들여다보고 있지만 답이 안 나온다. “필연적으로 타당한”, “예외와 대안을 인정하지 않는”, “전제의 참이 결론의 참을 필연적으로 보장하는” 등등의 모든 ‘형식주의’는 체질상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연역논증은 귀납추리와 다르다. 연역적인 논증이란 (판단을 목적으로 하는) ‘논쟁’과 달라서,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타당하거나 타당하지 않은 것을 나눌 뿐이다. 논리학에서는 논리를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않는 사람’ 딱 두 사람이 있다거나, 또는 비트겐슈타인이 논리학을 “규칙을 따르는 학문”(following the rule)이라 부른 것도 이런 맥락이다. 연역논증은 확률적으로 “all or nothing”이라는 것이 이정일 선생님의 설명. 연역의 세계에서 예외란 없다. 단지 옳거나 그를 뿐.
지루함에 입술을 깨물고 있던 그때, 다시 칸트가 짜잔 등장하여 강의 내용에 흥미를 불어넣어 주었다. 칸트의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잘 알려진 개념. 칸트는 행위의 결과에 구애되지 말고 선한 행위를 수행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론을 강조했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일반적인 법칙에 타당하도록 행동하라”는 것이 칸트 도덕철학의 대표적인 문장이다. 이 선생님에 따르면, 여기서 ‘정언’이란 바로 논리학적으로 “무제약적 ‧ 무조건적으로 타당하다”는 개념이란다. 칸트의 연역적인 철학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연역논증에서는 “전제에 없는 것은 결론에 있을 수 없고, 결론에 있는 것은 이미 전제 안에 다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전제란 무엇인가. 아마도 플라톤에게 그 전제란 이데아였을 것이고, 사도 바울에겐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였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토마스 아퀴나스나 라이프니츠에겐 이성과 조화의 옷을 입은 신(神)이었을 터이며, 칸트에게는 인간의 본원적인 이성이었을 것이다. 칸트의 철학대로,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내재한 도덕 감정을 끄집어내어 세계를 구원할 수 있을까, 없을까. ‘전제’가 옳으면 ‘결론’은 필연적으로 옳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 세계에는 정말 어떤 ‘전제’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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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은 마음에 의존하지 않지만, 마음을 강제한다” |
정*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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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또는 “~하다”라는 말은 술어다. 술어(述語)란 무엇인가. 술어의 정의를 살펴보면, ‘한 문장에서 주어의 움직임, 상태, 성질 따위를 서술하는 말’이라고 나온다. 논리학적인 정의에 따르면 ‘논리의 판단에서 주사(主辭)에 대하여 긍정 또는 부정의 입언(立言)을 하는 개념’이 바로 술어다. 술어는 주어를 설명하거나 판단한다. 술어는 언제나 자신의 ‘주인’인 주어 뒤에 그림자처럼 버티고 있는데, 때론 그림자가 주인을 집어삼킬 수도 있는 법이다.
‘술어적 사고’라는 말이 있다. ‘술어의 동일성으로 대상(명제)의 동일성을 결론하는 논리적 오류 형태’가 바로 술어적인 사고다. 일전에 사이버 공간의 격한 논쟁이 벌어지던 자리에서, 누군가가 이 논리학의 개념을 끌어당겨온 적이 있다. 쉽게 말해 “OO는 XX이다”란 말이 그 자체로 지니는 오류가 있다는 것이 바로 술어적 사고다. 예컨대 “나는 가수다”라는 문장이 있다 치자. 이때 ‘나’라는 주격과 ‘가수’라는 개념 사이에 존재하는 기다란 격절을 무시하고 ‘나=가수’라는 동일성만을 강조한다면. 그게 바로 술어적 사고인 것이다.
술어적 사고는 언제나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OO는 절대로, 오로지 XX일 수 없기 때문이다. OO는 XX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 것이다. 나는 ‘가수’이면서도 동시에 ‘누군가의 애인’일 수 있고, ‘공인’이면서도 ‘사인’일 것이며, ‘한국인’인 동시에 ‘포유류’이기도 할 것이고. ‘아름다운’ 동시에 ‘추악할’ 수도 있다. 나는 술어로 묶어놓을 수 없는 존재며, 결코 단정적으로 설명되거나 판단될 수 없는 존재다. 주어는 술어로 저를 지탱하지만, 술어는 영원히 주어에 가 닿지 못한다. 술어는 가짜다.
어쨌거나 모든 ‘단정적인’ 설명과 판단에는 그 자체로 오류가 숨겨져 있다는 ‘술어적 사고’란 지식은 매우 신선했고, 이 개념을 접한 후 논리학을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들기도 했다. 이정일 선생님의 <논리 in Life – 모든 것이 논리학이다> 두 번째 강의를 들으며 다시금 술어적 사고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어 즐거웠다. 우리의 언어를 이루는 개념들이란 공통을 대표하는 보편규정일 뿐이며, 정말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There is no identity without entity”라는 말도 있단다. ‘존재’하지 않으면 ‘동일화’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술어를 남발하기 이전에, 진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찬찬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존재'는 언제나 변화하므로.
버트런드 러셀은 “프랑스의 현재 왕은 대머리다”라는 그럴듯한 문장이 왜 기실은 ‘가짜 문장’이라고 말했는지, 비트겐슈타인은 왜 논리학을 ‘언어의 해방의 과정’이라고 말했는지, 그리고 이정일 선생님은 “논리학은 마음에 의존하지 않지만, 마음을 강제한다”라는 말을 첫 번째와 두 번째 수업 시간에 그렇게 자주 강조하셨는지를, 수업을 들으며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나의 경우엔 강의를 들은 후, 흐지부지한 철학 지식으로(빌 클린턴의 말을 빌려), “문제는 플라톤이야!”라고 되뇌고 싶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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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는 훈련이다. |
j*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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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면 1학년정도는 논리적 사고를 위한 훈련만을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논리적 사고의 바탕이 서있지않으면 철학도, 논쟁도 ,,자칫 무의미할수 있음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기도 하구요.
사실 논리적 사고란 그저 논리학 책을 많이 읽는다고해서 키워지는 것만은 아니고 평소에 논리적으로 생각해보고 글을 쓸때도 그것을 철저히 검토해보는 작업이 더욱더 필요한것 같습니다.
특히나 저처럼 아직도 논리적사고가 좀 부족한 사람에겐 여기서 한번쯤 전문적인 코치의 제대로된 훈련을 받아 바로잡아보는 기회로 삼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철학을 좋아하고 공부해보길 원하는자. 논리적사고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아는자. 함께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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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어린 시절로 돌아가 셜록 홈즈를 펴드는 것과 같다는 |
유*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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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에 빠졌던 적이 있다. 책 대여점에서 빌려온 뤼팽의 책들을 쌓아두고 맛있게 읽어 내려가던 기억이 흐뭇하다. 지금 그 시리즈에서 기억나는 건 프랑스의 고풍스러운 분위기, 매혹적인 남성미를 풍기던 뤼팽과 그를 둘러싼 아름다운 여인들, 선과 악의 경계가 흐릿한 쌉싸름한 등장인물과 사건들… 정도가 되겠다. 뤼팽을 좋아했지만 내가 추리소설 매니아가 된 건 아니었으니, 나는 뤼팽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그 유명한 셜록 홈즈조차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다분히 ‘도둑’의 이미지를 좋아해왔던 것 같다. 이를테면 그리스 신화를 읽으면서는 도둑질과 상업을 관장한 신이었다는 헤르메스에게 왠지 모를 애착이 갔고, 언젠가는 실존철학자들이 예찬했다는 ‘위대한 도둑놈’ 장 주네에 덩달아 존경의 염을 품었으며, 또 언젠가는 정의로운(정당한) ‘도둑질’을 통하여 세계를 보다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를 섭렵하려 꽤나 노력했다. 기존의 체제와 굳어버린 관습을 벌거벗기는 모든 ‘일탈적’ 행위들이 나를 끌어당겼던 건지도 모르겠다.
대학 때는 논리학 강의를 꼭 한 번 체계적으로 듣고 싶었는데, 결국 졸업 때까지도 이루지 못하다가 이번에 아트앤스터디 인문숲 강좌를 통해서 이정일 선생님의 <논리 in Life - 모든 것이 논리학이다>를 듣게 됐다. 조금 우스운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 내가 논리학 강의를 듣는 건, 다시금 어린 시절로 돌아가 셜록 홈즈를 펴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뭐랄까… 예전부터 내게는 세계의 규칙과 규범을 ‘깨기’ 이전에 그것을 (마치 홈즈처럼) 냉철하게 ‘알아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었다. 난 별로 ‘논리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의에선 선생님이 오랫동안 칸트를 전공해 오셨던 만큼 임마뉴엘 칸트의 냄새가 물씬 묻어있는 느낌이었다. 그게 좋았다. 자주 인용하시는 칸트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쌓여온 서양논리(철)학사가 근대의 칸트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완결되어 온 과정이 담긴 듯했다. <모든 것이 논리학이다> 강의는 크게 재미있거나 ‘튀는’ 스타일로 진행되진 않았지만, 적어도 재미가 없거나 지루하지도 않았다. (논리학 강의인데!) “나는 하버마스에 동의하지 못하겠다”. “공자와 샤론스톤이 만난다면?”, “간디가 영국이 아닌 독일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등 논리학을 쉽게 전달하려는 선생님의 노고도 엿보였다. 직접 확인해보기 바란다.
그건 그렇고, 정말로 셜록 홈즈를 좀 읽고 싶다. 셜록 홈즈에서 캐릭터를 ‘훔쳐왔다’는 평도 받는 미드 <하우스>는 정말 대단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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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 강의를 통해 '글을 보는 데 새로운 시각을 갖춘' 국문학도가 되고 싶습니다 |
정*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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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는 규칙따르기라는 학문이고, 논리학은 논증을 다루며,
논증이 성립하려면 전제와 결론이 있어야 한다."
1. 논리학이란
논리학은 추론의 타당성/부당성을 밝히는 작업.
그런데, 논리적사고와 합리적사고, 비판적사고가 같은 말일까요?
합리적 사고 = 행위가 목적에 잘 부합하여 이루어지는 것
비판적 사고 = 한계를 설정하는 것
그리고 논리적 사고는 '규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이 셋은 다른 말입니다.
2. 논증과 논쟁
[논증]=논리적 타당성->논리학->맞거나/틀리거나
추론의 타당/부당성을 밝혀내는 작업.
추론에는 전제와 결론이 필요. 전제가 결론을 필연적으로 보장해 줄 때 그 추론이 '타당하다'
그런데 논리학은 심리학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규칙을 지키기 때문에 규칙이 성립하는것이 아니라,
이미 성립된 규칙을 우리가 지키도록 강제당할 뿐
[논쟁]=설득 목적->커뮤니케이션 관련->다름의 인정
논쟁이 성립하려면 반드시 서로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반면, 논증에서는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all or nothing.
3. 추론에 대하여
연역적추론= 100% 맞거나 틀리거나.
귀납적추론= 지금까지 봤더니 '경험적으로' 이렇더라!
과학적추론=유추를 통한 발견
자연과학에서는 (가끔 예외가 있기도 한) 법칙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지만,
논리는 세상을 설명하지 않는다.
4. 내포와 외연
내포=어떠한 성질 (큰것안에 작은것을 '포함한다'는 것이 아니라 '공통규정')
외연=그 개념들이 가리키는 '지시대상'들 전체
5. 개념과 판단
개념= 참/거짓을 말 할 수 없음
판단= 참/거짓을 말 할 수 있음
논리적, 합리적, 비판적.
논증과 논쟁, 개념과 판단.
국문학도의 입장에서 보면 참 말장난 같기도 한 단어들의 나열입니다.
실로 이전까지는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세밀히 따져보지 않았더랬죠.
논리학 강의를 통해 '글을 보는 데 새로운 시각을 갖춘' 국문학도가 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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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의 개념에 대해 확실히 잡아주는 강의 |
장*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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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의 개념을 확실히 잡아주는 강의 였습니다. 매 강의마다 반복적으로 개념을 잡아주시기때문에 오래 머릿속에 남을 것 같아요. 오히려 저는 너무 반복해주셔서 살짝 지겨울때도 있었어요.
논리 in life 라는 제목과는 좀 다르게 실생활에 논리가 적용된 예시를 들어주는 건 거의 없었던것 같아요. 저는 실생활에서 논리의 도구적 사용을 훈련할 수 있을까해서 들어본건데 구체적 사례를 통한 훈련보다는 이론적인 논리학에 대하여 공부할수 있는 강좌였습니다.
논리학이란 무엇이고 다른 학문(논쟁이나 자연과학영역 등)과의 차이가 무엇인가, 논리학의 영역엔 이러이러한 개념이 있다(외연/내포, 연역/귀납 등)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실습은 저의 몫이겠지요 ㅎㅎ.
마지막 8강에서 이성관련해서 철학강의 잠시 하시는데 재미있었어요. 오히려 철학강좌 뽐뿌받고 갑니다. 좋은 강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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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는 강의 |
오*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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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에 치중한 철학을 추구하기 보다는 삶 속에 나름의 논리를 추구하기 위한 기초 한 걸음이라고 생각하고 중간에 EX) 들이 참신하고 좋습니다. 한가지 오류라고 할까요? 논리 in Life 제목 옆에 그림이 다른 강의 그림인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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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에게 좋은 강의 |
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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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긍정이니 후건긍정이니 하는 어려워보이는 논리학의 용어를 정리하기 너무 좋은 강의입니다. 개인적인 관심과 더불어 논리학 관련된 시험을 봐야하는 처지여서 듣게되었는데 상당히 정리하기 좋습니다. 반복적인 설명, 반복적인 강조 좋은 예시 등이 이 강의의 장점입니다. 강의료가 아깝지 않은 최고의 강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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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 마음을 강제하는 과정 |
l**w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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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사고, 비판적 사고, 심리적 사고를 미리 구분해주며, 논증과 논쟁을 구분하는 것을 시작으로 논리에 대한 오해를 없애주는 강의로 시작됨에 도움이 많이 된다. dispution → 설득성, 논쟁, 변증론, to discourse, 생각을 달리 하는 자, 상대방의 입장을 확인하는 의의부터 찬반양론으로 결정, 합의 과정 등등 멋진 강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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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은 수학 같이 규칙을 따르는 학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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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의 정의부터 논리학에 등장하는 여러 개념들(연역, 귀납, 추론, 내포, 외연 등)을 분명하게 규정짓게 해주는, 나아가 우리들의 논리적 사고 훈련의 방향을 제시하는 강의였습니다! 진정한 논리학의 기초를 얻기 바란다면, GOG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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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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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공부하면서 풀리지 않았던 부분이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해결되는 느낌입니다.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전에 들었던 논리학 강의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설명도 잘하시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강의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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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마리를 발견한 듯한 기분 |
h**and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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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언어학의 의미론 분야를 공부하면서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들이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나니 조금씩 이해가 되고 있습니다. 역시 논리는 모든 학문의 기초군요. 좋은 강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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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의 아웃라인을 그려주는 강의 |
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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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잘못된 개념들을 바로 잡아주고 그 정의와 한계를 알게 해주는 강의였습니다. 반복되는 개념설명이 짜증날때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머리속에 확실히 기억된다는 사실,이정일 선생의 열성적인 강의도 기억에 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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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
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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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며 같은 말을 많이 반복하신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다른 분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나중에는 머리에 확실하게 박혀서 후반부 이해하기가 쉬웠어요. 논리학하면 막연하게 복잡하고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깔끔한 설명을 반복적으로 듣다보니 개념이 어느 정도 잡힌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막판에 신에 대한 언급하신 부분은 저와 좀 생각이 다르지만요..^^ 논리학이 무엇인지 맛을 제대로 본 것 같아 뿌듯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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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는 강의 |
강*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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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의 핵심 개념들을 반복적으로 확인해 가면서 주제마다 관련된 철학자들의 사상을 폭넓게 연관지움으로써 강의의 깊이를 더 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자연과학, 철학, 언어학, 논리학의 특징들을 상호 비교하여 설명함으로써 지루하기 쉬운 논리학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명강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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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잘 들었습니다. |
김*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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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들어면서 철학 공부를 할 때 있어서 논리학이 굉장히 많은 중요성을 차지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사님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초반부터 같은 말을 많이 반복하시는데 그 덕분에 후분에 가서도 그 내용이 아주 머리에 박혀버려 이해가 편한 이점이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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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임새있는 강의 |
주*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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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선생님의 칸트 관련 강의를 들으면서도 굉장히 잘 짜여진 옷감같은 착용감을 느꼈는데, 이번 강의도 변함없이 짜임새있게 강의주제를 잘 정리해 주셔서 잘 들었습니다. 좋은 강의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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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의 필요성... |
김*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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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의 필요성을 느끼고 강의를 들은 목적에 정말 부합하는 명강의였습니다..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논리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조금 더 철학적 사유에 근접하고픈 욕심을 충족시켜주셨네요..그런데 이시대 몇명 안되는 우뚝선 그철학자들은 누구신지 가르쳐주셔야죠..교수님!!ㅎ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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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강의 |
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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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도 재미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지난 번 여기서 다른 분 것을 듣다가... 논술이라는 사실에... 조금 실망했는데...(그것도 사실 좋았습니다. ) 재미있습니다.. 시원시원하게 강의하셔서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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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회원님의 강의평으로 더욱 풍성한 논리학이 될 것 같네요. ^-^ 아트걸 (11.1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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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는 훈련이다 |
로*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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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면 1학년정도는 논리적 사고를 위한 훈련만을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논리적 사고의 바탕이 서있지않으면 철학도, 논쟁도 ,,자칫 무의미할수 있음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기도 하구요.
사실 논리적 사고란 그저 논리학 책을 많이 읽는다고해서 키워지는 것만은 아니고 평소에 논리적으로 생각해보고 글을 쓸때도 그것을 철저히 검토해보는 작업이 더욱더 필요한것 같습니다.
특히나 저처럼 아직도 논리적사고가 좀 부족한 사람에겐 여기서 한번쯤 전문적인 코치의 제대로된 훈련을 받아 바로잡아보는 기회로 삼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철학을 좋아하고 공부해보길 원하는자. 논리적사고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아는자. 함께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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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셜록 홈즈를 펴드는 것 같은 |
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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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에 빠졌던 적이 있다. 책 대여점에서 빌려온 뤼팽의 책들을 쌓아두고 맛있게 읽어 내려가던 기억이 흐뭇하다. 지금 그 시리즈에서 기억나는 건 프랑스의 고풍스러운 분위기, 매혹적인 남성미를 풍기던 뤼팽과 그를 둘러싼 아름다운 여인들, 선과 악의 경계가 흐릿한 쌉싸름한 등장인물과 사건들… 정도가 되겠다. 뤼팽을 좋아했지만 내가 추리소설 매니아가 된 건 아니었으니, 나는 뤼팽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그 유명한 셜록 홈즈조차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다분히 ‘도둑’의 이미지를 좋아해왔던 것 같다. 이를테면 그리스 신화를 읽으면서는 도둑질과 상업을 관장한 신이었다는 헤르메스에게 왠지 모를 애착이 갔고, 언젠가는 실존철학자들이 예찬했다는 ‘위대한 도둑놈’ 장 주네에 덩달아 존경의 염을 품었으며, 또 언젠가는 정의로운(정당한) ‘도둑질’을 통하여 세계를 보다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를 섭렵하려 꽤나 노력했다. 기존의 체제와 굳어버린 관습을 벌거벗기는 모든 ‘일탈적’ 행위들이 나를 끌어당겼던 건지도 모르겠다.
대학 때는 논리학 강의를 꼭 한 번 체계적으로 듣고 싶었는데, 결국 졸업 때까지도 이루지 못하다가 이번에 아트앤스터디 인문숲 강좌를 통해서 이정일 선생님의 <논리 in Life - 모든 것이 논리학이다>를 듣게 됐다. 조금 우스운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 내가 논리학 강의를 듣는 건, 다시금 어린 시절로 돌아가 셜록 홈즈를 펴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뭐랄까… 예전부터 내게는 세계의 규칙과 규범을 ‘깨기’ 이전에 그것을 (마치 홈즈처럼) 냉철하게 ‘알아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었다. 난 별로 ‘논리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의에선 선생님이 오랫동안 칸트를 전공해 오셨던 만큼 임마뉴엘 칸트의 냄새가 물씬 묻어있는 느낌이었다. 그게 좋았다. 자주 인용하시는 칸트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쌓여온 서양논리(철)학사가 근대의 칸트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완결되어 온 과정이 담긴 듯했다. <모든 것이 논리학이다> 강의는 크게 재미있거나 ‘튀는’ 스타일로 진행되진 않았지만, 적어도 재미가 없거나 지루하지도 않았다. (논리학 강의인데!) “나는 하버마스에 동의하지 못하겠다”. “공자와 샤론스톤이 만난다면?”, “간디가 영국이 아닌 독일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등 논리학을 쉽게 전달하려는 선생님의 노고도 엿보였다. 직접 확인해보기 바란다.
그건 그렇고, 정말로 셜록 홈즈를 좀 읽고 싶다. 셜록 홈즈에서 캐릭터를 ‘훔쳐왔다’는 평도 받는 미드 <하우스>는 정말 대단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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