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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
평생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존재, 인간 |
엄진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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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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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
정*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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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해서 몇 번이나 고민했던가. 피상적인 질문밖에 던지지 못했는데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물론 어려운 부분도 있긴 했어요. 그래서 저는 다른 이차 문헌 같은 거 찾아서 읽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더 도움이 된 거 같을 수도 ^^;;;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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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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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에서 수강~ |
이*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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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되었는데 다른 강의평 남기다가 생각나서 후기 남겨요. 선생님 실제로 뵈도 멋지시고 되게 젠틀하세요 수업 중간 음악도 들려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편안한 분위기 좋았어요. 어렵게 이야기안하시고 편하고 재미있게 들엇습니다. 주제별로 개론적인 지식을 보유하고 계신 분이 듣는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깊이 들어가기도 하니까요. 어려울 수도 있는 주제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강의 해주셨던 거 같네요. 저도 이제 다시 가물가물 해서 다시 들어볼까 고민이 되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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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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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운덕 선생님 존경합니다~ |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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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운덕 선생님 존경합니다~ 덮어놓고 위 한 줄 쓰고, 덮어놓고 수강을 시작할만큼, 양운덕 선생님 강의는 최고인 것 같습니다.
(기~인 시간 정지해뒀던 VIP 회원권, 드디어 빛을 보는건가요;)
'서태지' 세대로 불리는 나이대임에도 비켜나기 어색했을 대다수 신드롬들에도 별 감흥이 없었을만큼 무던했던 저인데, 철학 선생님 관련해서 '빠순이' 논조의 글을 난생 처음 남기게 되네요;
아트앤스터디에서 앞으로도 많은 강의를 통해 양운덕 선생님을 뵙게 되기를 고대하겠습니다.
필로소피아의 세미나까지 오픈 강의 형태로 열어주신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습니다! (니체/프로이드/라깡/푸코/그리고 문학 강의 ㅡㅜ 양운덕 선생님께 듣고 싶었던 강의가 얼마나 많은지! 지역적 괴리(제주도에 살고 있습니다 ㅡㅜ) 때문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아트앤스터디에서 길을 열어주시면 정말 좋을 것 같네요!)
기쁜 마음으로 수강하며, 또 다른 양운덕 선생님의 강의들을 기다리겠습니다.
좋은 수강기회 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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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운덕 교수님 강의 너무 좋아여 |
김*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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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주제의 내용을 핵심으로 다가가서 정말 쉽고 풍부하게 명료하게 설명해주십니다. 강의 너무 잘 하십니다. 양운덕 교수님의 강의를 빠른 시일 안에 섭렵할 생각입니다.앞으로도 많은 강의가 올라왔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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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좋은 강의입니다 |
변*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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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온화하신 미소와 은근한 유머 감각으로 근현대에 발생하고 발화됬던 여러 철학들을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특히나 기생하는 인간이라는 낯선 개념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들을 수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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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적이라 좋았어요 |
정*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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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듣고 싶어 찾아들었는데, 체계적으로 설명해주셔서 잘들었습니다. 예전엔 듣고싶어도 약간 어려운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다시 접하니 수업이 군더더기 없이 좋네요.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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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내용을 쉽게 해주시는 강의입니다 |
박*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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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은 철학자들끼리 사용하는 언어로 강의하시는 분들이 있다. 대중들은 그때 철학에 거부감을 갖는다. 그런데 양운덕 선생님은 대중적인 언어로 강의를 하셔서 철학에 관심을 갖게 만들어 주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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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호 님:)
네.. 맞습니다. 어떤 강좌이든 언어부터 막히면 거부감이 드는데.. ㅎㅎ 양운덕 선생님의 강좌는 초보자들도 쉽게 들을 수 있는 것 같아요.
밖에 비가 많이 와요! 빗길 조심하세요 :) admin (14.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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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운덕 선생님 완전 좋아요 |
장*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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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운덕 선생님은 오프라인 때도 뵙고 좋아서 온라인 강좌도 신청했어요. 젠틀하고 부드러우신 모습에 반했답니다. ㅋㅋ 어려운 내용도 쉽게 잘 설명해주셔서 이해도 잘 되구요. 덕분에 지식이 늘어가는 것 같아요. 팬될수밖에없네요 ㅋㅋ 앞으로도 좋은 강의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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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
박*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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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하는데..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네요. 인간이 지닌 여러가지 문제들을 다룰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근데 주체에 대해서도 고민해보구... 조금 어렵기도 하지만 저는 다른 자료들도 찾아가면서 공부를 해서 그런지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ㅎㅎ 양운덕선생님 강의 두번째로 듣거든요. ㅋㅋ 실제로도 뵙고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실제로도 멋지실것같음..ㅎㅎ 양운덕선생님 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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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쉽게 재밌는 강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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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고 쉽게 말씀하시는 것같아.. 좋습니다. 열심히 배워 보겠습니다. 오늘은 첫 시간인데..근대와 인간을 함께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화면도 다른 강의와는 달라 아주 깨끗하네요.. 열심히 반복해서 들어야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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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잘 들었습니다. |
김*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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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주체에 대한 강의 잘 들었습니다. 주체라는 주제가 쉽지 않은 주제인데 다만 여러 철학자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만 그쳐 조금 아쉬움이 남네요 아무튼 공부를 시작하는 분들에게는 도움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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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의 늑대와 양 |
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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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 낯설다. 하지만 그는 현대 사회를 기식자, 기생하는 인간들(노동하지 않는 인간들)의 사회로 규정한 중요한 인물이다. 기생하는 인간 부류가 오히려 인정받는 전도된 사회('이상한 나라'쯤 되려나). 우리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작곡가보다 연주자가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안다. 예쁜 여배우는 한 번의 포즈로 월급쟁이들은 상상도 못할 페이를 받고 있다.
세르는 이 이상한 사회, 무엇인가 전도된 사회를 라 퐁텐느의 우화를 통해 분석해낸다. <늑대와 양>우화에서 늑대는 교활한 논리로 양과 자신의 입장을 전도 시킨다. 약자(양)를 강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아무 명분 없이 양을 해치면 비난받을 여지가 있다.
늑대는 양이 상류에서 자신이 먹는 물을 흐렸다고 주장한다. 양을 상류의 강자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이분법은(강자와 약자를 구분하는) 그물에 갇힌 사자를 구해주는 생쥐 우화를 통해 무색해지기도 한다. 이때는 대체 누가 강자인가.
아무튼 이런 식으로 세르는 늑대의 전략이 서구 고전 시대 이성의 논리와 연결시킨다. 그 대표적 인물은 데카르트다.
데카르트는 경험주의적 접근 방식의 불명확성을 버리고 연역적 방법을 채택한다. 백조가 하얗다는 전제는 경험적으로 검은 백조가 나타났을 때 무너지는 것 아닌가. 데카르트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확실한 것' 만 추구했다. 언제나 확실하고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 사상(전체주의와 같은 '이상한 나라'를 만든)이 위험하다는 것은 이제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무오류와 절대적이고 항상적인 최적화 모델을 추구했다. 서구의 이런 사상적 전통에서 헤겔도 '절대적 인식'(절대정신)을 추구했다. 인간이 자연을 완벽하게 알고 지배할 수 있을 때, 자연과 인간 사이에 절대적 합일, 주체와 객체는 통일되는 것이다. 그 사이에 분열이나, 모순은 없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이런 생각에 반대한다. 주관과 객관이라는 세계는 화해할 수 없는 세계이며, 모순을 안고 긴장 상태에 있다.
이 모순, 두 세계의 화해 불가능성(부정성-헤겔은 부정했을)이 오히려 세계의 존재 방식이다. 그것을 조화와 통일의 이름으로 강제할 때 세상은 위험해 진다. 합일된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는 '실현'될 수 없고 실현되어서도 안 된다.
아도르노는 그 부정성이 유토피아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고 믿었다. 유토피아는 어쩌면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음 시간에는 에드가 모랭이다. 무식해서 이분도 잘은 모르겠지만, 선생님만 믿고ㅎ. 모랭은 질서와 무질서, 창조와 파괴, 삶과 죽음의 공존에 대해 사유한 진지한 사상가라 하니 기대된다.
어느덧 다음 시간이 종강이다.
항상 수업 준비를 못해가서 선생님께도, 내 자신에게도 미안한데 그래도 꿋꿋이 수업을 듣고 있다는, 이 뻔뻔함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ㅎ 선생님의 마약 같은 '강의력'이 원인이 아닐까 싶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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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tentia를 증대시키는 만남.. |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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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범인들의 '인간탐구'가 시작되자마자 고착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추상적/포괄적 질문으로부터 인간탐구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인식의 갑옷을 내려놓는다면, 다시 첫걸음을 딛어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니체, 푸코.. 이 분들의 질문방식이 그 멋진 예를 보여준다.
양운덕 선생님께서 강의 중 ''potentia를 증대시키는 만남''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이 강의가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에 대한 매우 적절한 요약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양운덕 선생님 강의를 듣고 싶어서, 내가 무얼 하고 있든 나는 내 안에 없을 지경이었다, 강의를 듣는 순간 외에는. ㅎㅎ. (강의를 들을 때에만, 나는 내가 될 수 있는 ^^;; 선생님께서하신 소외 관련 강의를 본 이들끼리는 이해할 수 있는 농담;;)
선생님과 만나는 모든 시간이 다 좋았지만, 특히, 프로이트/라캉/지젝, 들뢰즈, 푸코 강의는, 감동적이었다. 큰 그림을 읽으시는 놀라운 혜안의 소유자이신 선생님께로부터 사사받으며 공부를 지속할 수 있는 기회는,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큰 축복일 것이다.
(양운덕 선생님의 거의 모든 강의 장면에서, 전체를 읽으시는 구조주의자셨다. 퍼스날러티보다 ''''''''위치(지위, 자리)''''''''에 더 관심을 두는 구조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구조주의자의 입장에서 꿰뚫어 설명하시는 선생님 강의를 들으면서, 구조를 읽는 이 엄청난 혜안을 소유하신 선생님은, 그래도 퍼스날러티로 설명하는 것이 더 설득적이겠다 라는 생각도 했다;; )
(! 특히, 양운덕 선생님의 푸코 강의는, 겨우 2시간 맛보았을 뿐인데도 앞으로 너끈히 일년은 푸코님을 짝사랑할 수 있게 만드시는 놀라운 힘을 뿜으신다.)
짧아서 아쉽기 그지 없는 니체/스피노자에 대한 잠깐의 말씀들..
아트앤스터디 관계자분들께 부탁드리고 싶다, 양운덕 선생님의 귀한 강의들, 다양한 분야(문학 포함)에 대한 강의/구체적 깊이 있는 철학 강의(철학자별 심도 있는 강의)를, 아트앤스터디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앞으로도 많이 열어주시기를.
양운덕 선생님,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자주(매일!) 아트앤스터디에서 뵐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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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레비나스부터 바틀비까지 |
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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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이다. 레비나스 이전의 윤리학은 '자기'의 윤리학이었다. '타자'는 무엇일까. 사실 타자는 공포의 대상이다. 우리는 타자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거기에서 오는 '불안'. 물론 우리는 '죽음'의 불안에 한평생 시달리는 존재이기도 하다. 죽음을 인식하지만 대체 그 죽음이 언제인지는 모르는 까닭이다. 자신의 유한성. 고독. 이런 고독이나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을까.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자손'을 통해 무한히 연장하려고 한다. 그리고 '타자'(사랑의 대상)를 통해 무한성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것은 자기를 '초월'한다는 것이며, 우리가 아이를 기를 때나 누군가를 사랑할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약한 자, 헐벗은 자, 고아, 과부이다. 타자를 환대할 때 주체는 '자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넘어설 수 있다. 존재의 고독이나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체는 '자기'라는 유한성(총체성, 전체성, 닫힌)을 넘어 '차이'의 세계 즉 '타자'의 세계로 나가야한다. 이것이 레비나스의 윤리학이다. 서구의 전체주의와 '합리적 이성'이라는 보편적 폭력에 맞서 레비나스는 '유일성', '차이'('자기'를 넘어선 타자의 세계일텐데)를 중시했다. 전체성의 한계, 이성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 바로 타자의 '얼굴'이다. 타자의 얼굴은 똑같지 않다. 유일하다. 그들은 똑같이 웃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상은 또 얼마나 재미없을까.
각 개인이 '유일한' 존재로 인식된다면 수용소의 거대한 학살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열명의 유대인을 학살할 수는 있지만, 그들 중 내 친구 아무개를 죽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고유의 이름이 없는, 타자성, 유일성이 없는 '유대인'이라는 보편, 추상 명사는 그 안에 '잔혹함'을 품고 있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이러한 사유 방식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의 철학은 서구의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이다. '이성'의 합목적성과 하이데거 식의 도구적 목적론에 맞서, 레비나스는 '향유'를 강조한다. 사과를 꼭 어떤 목적을 위해 먹어야 하는 걸까. 사과를 먹고 즐길 수는 없을까. 사과는 맛있는 먹거리이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이러한 '향유'로부터 주체는 진정한 의미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어떤 목적으로부터도 해방된.
목적이 없을 때 세상은 지금과 달라질 것이다. 목적이란 내가 없는 것-결핍된 것을 추구하는 것이거나 '더 나은 것'을 추구할 때나 필요한 것이다(화이트헤드는 인간이, 살기 위해, 잘살기 위해, 보다 더 잘 살기 위해, 라는 세 가지 충동에 의해 산다고 했다. 내 기억에 그의 어조에는 그런 인간을 향한 빈정거림이 묻어 있었다). 스피노자의 말마따나 '결핍'이란 내가 가져야한다고 상상한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내게 속한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추상적 사고방식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상상된 불완전성은 완전한 상태와의 위계를 낳고(이런 폐단이 없다, 인간 이성이란), 나를 더욱 '결핍되게' 만들 뿐이다.
어찌하여 스피노자까지 왔는지.. 이왕 이렇게 된거, 바틀비(<필경사 바틀비>1853, 허먼 멜빌의 단편, 읽어보거나, 바쁘다면 아쉬운 대로 진중권의 <아이콘>2011, 에서 내용을 다루고 있어 참고할 수 있다. 바틀비는 어느 변호사의 필경사로 고용되었지만 어느 날부턴가 '일하지 않는 것'을 긍정하는 인물이다.)까지 가보자. 바틀비처럼 사는 건 어떤가. 레비나스의 기획과 통하는 면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아무 목적 없이, 선호하는 것 없이. 누군가는 '세기말'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I would prefer not 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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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인문학 |
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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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감벤이다. 푸코가 자연적 신체를 전제하고 권력이 어떻게 신체를 규율하는지에 주목했다면 아감벤은 이미 신체는 정치화되어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이미 의미화, 정치화되어 있고 그 후에 슈미트식으로 적과 동지, 좌/우가 구분된다. 순수한 주체는 불가능하다는 말인 듯하다. 언어 이전에 아기는 아직 주체가 아니지 않은가. 아기는 말을 배우면서 정치화된다.
푸코의 주체가 관리되고 규율되는 주체라면 아감벤의 주체는 포함되면서 배제되는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잘 이해했다면. 이런 식의 논의가 쉽지는 않다. 이런 식으로 사유하는 법을 우리는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선과 악을 배웠지 선이면서 악인 것은 배운 적이 없다.
아감벤에 의하면 근대 정치는 생명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배제한다. 공동체의 규범을 따르지 않는 자는 추방당한다. 추방당하는 자는 공동체의 추방령을 따르기 위해서는 '포함되어야' 한다. 이렇게 배제된 자, 희생된 자는 규범 안에서 '관계' 맺는다. 이 예외자는 단순히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포획'되는 것이다.
바로 이 예외의 정치가 근대의 핵심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법은 그 자체로 위법적(예외)이다. 세워질 때의 폭력성은(기원) 은폐되고 이후에 '법은 법'이라는 동어반복만이 남아, 법은 그 스스로 자기를 정당화 시킨다.
슈미트식으로 말하면 법은 법의 안에 있으면서도 법 밖에 있다. 이제 더 이상 법과 위반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문화와 야만은 대립적인가. 아니면 문화가 스스로를 야만과 대립시키면서 자신을 정당화 시킬 때 야만과 '같아지는' 가.
근대, 예외 상태에 기초한 듯한(?) 수용소는 (근대)정치 공간의 '숨겨진' 패러다임이다. 수용소는 예외적, 비인간적 공간이 아니라 '법률적 정치적 공간'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는 불가능하다는 아도르노의 말이 생각난다.
수용소에서 예외 상태는 규칙이 된다. 수용소로 추방된다는 것은 그 사회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규칙과 예외가 구별되지 않는 새로운 법적, 정치적 패러다임이 생긴다.
예외적 비상사태, 계엄령의 일상화. 예외 상태의 규범화. 그 상태에서 생명은 포함된 듯 보이지만, 또 언제든 잠재적으로 추방될 수 있다. 이것을 전제로 생명은 정치의 대상이 된다.
아감벤은 생명에 대한 모든 가치평가와 생명의 정치화는 희생당하는 인간을 생산한다고 말한다. 한 사회에서 우월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을 구분 짓는 순간, 열등한 인종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이 된다. 이대로 가다간 이 사회는 공멸할 것이다. 성적 좀 안 나왔다고 수능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야만 한다면, 이 사회는 문명인가. 야만인가.
다음 시간은 닥치고 레비나스다. at 아트앤스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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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왜 사람들은 해방이 아니라 억압을 원하는가 |
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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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업은 바로 이 질문으로 시작했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나와 상관없이 미리 정해진 교과목을 공부하고 미리 정해진 규칙, 규범에 따라 살아왔다. 어쩌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억압받아왔다. 그래서 '억압'은 견디기 힘든것이라기 보다 자연스럽게 내면화되어 불편함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다. 오히려 우리는 '억압'이 없을 때 당황하고 난처해 한다. 백지 앞에서의 공포와 비슷할까.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억압적 권력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일구었다. 그러나, 다시 주체는 대표에게 자신의 주체성을 양도하여 소외를 경험하며, '다수' 앞에서 '소수'는 억,압,된,다. 계몽의 변증법이라 해두자. 들뢰즈는 언제나 억압적 힘에 대항해 '자유'를 '유목'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정신분석에 따르면 중심, 의 부재는 '정신병'을 발병시킨다. 다양한 것이 좋고 두려울 것은 없으며 '나는 나'인 시대에 왜'묻지마 살인'은 성행하고, 조금만 밤이 늦으면 여자들은 동네 컴컴한 길목을 걸을 때, 멀쩡한 사람들까지 사이코패스로 의심하면서 집에가야 하는 오늘, 또 이 수많은 자살은 어떻고.
포스트모던 시대에 더이상 억압적 '아버지'는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상징적 3항으로서)가 없을 때 주체는 상상계(2자 관계, 어머니와 아이)로 떨어진다. 이 세계는 '타자'가 없는 세계이다. 실제 세계와 무관한 초월적인 세계.
우리는 누구도 현실적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다. 신호등의 빨간불이 '억압'적이라고 따르지 않을 것인가. 교통이 마비될 것이다. 테리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 있다. 모든 기존의 가치 체계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초월적인 세계에서나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들뢰즈가 고민했던 것들을 우리는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십년 공부하면 들뢰즈 이해된다고 한다. 나는 이제 2~3년이나 읽었을까. 아직 멀었다. 절망적이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다.
지젝(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다)은 들뢰즈를 받아들이면서도 비판적인 입장이다. 그는 들뢰즈의 유목적 사유 방식이 어쩌면 지나치게 현실 세계를 떠나 초월적인 것은 아니냐고 묻는다.
오늘 양운덕 선생님께 배운 것처럼. 지젝이냐 들뢰즈냐가 아니라. 지젝도 들뢰즈도. 함께 사유해 보는 것은 어떨까. 언제나 그렇듯이 선현들에게서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을 취하면 되지 않을까. 그들은 신이 아니기에 앞으로 계속 후학들에게 비판도 받을 것이다. 들뢰즈 선생님은 돌아가셨지만 지젝 선생님은 아직 살아계시니 계속 자신의 이론을 수정보완도 할 테고.
역시 오늘 수업도 명강의 였다. 한두시간 안에 들뢰즈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선생님의 강의로 그림이 그려졌다. 큰 수확이다. 항상 많은 것을 얻어가기만 해서 죄송하기도 하다. 수업 빠지지 않는 것으로 보답해야 할 것 같다. 거의 모두가 그렇겠지만 일 때문에 수업 안 빠지고 듣기도 수월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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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근대권력, 어디에나 존재하는 감시자 |
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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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계몽의 변증법?> '계몽의 변증법'하면 아도르노가 떠오른다. 그러나 오늘 양운덕 선생님의 강의는 푸코다. 훌륭한 선생님들의 강의를 쫓아다니며 들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나무를 보느라 미처 숲을 보지 못할 때 숲을 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오늘은 '권력'에 대하여.
권력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가능할까. 권력을 이렇게 실체처럼 다루어도 좋은 것인가. 아니면 권력은 일련의 작동 방식 안에서 드러나는 것인가.
'권력'을 설명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권력을 상품(사물)처럼 소유하거나 양도 하고 탈취할 수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프로이트, 라캉으로 이어지는 설명 즉, '금지/허용'(부정, 제한, 억압)의 메커니즘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진정, 억압적 법이나 규제(사회적) 등에 의해 우리의 자유는 제한되어 있을까. 아니면 역설적으로 '금지'가 우리를 자유롭게 '욕망'할 수 있는 주체로 열어 놓는 것일까. 법(금지)이 강압적이기만 하다면 인간 주체는 과연 그것을 순순히 따르기만 할 수 있을까. 푸코의 문제 의식은 이런 데서 출발한다.
주체가 자발적으로 권력(주체의 신체까지 규율하는)을 따르고 재생산 한다면?
권력은 중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제 권력은 어디에나 있다. 어디서나 작동한다. 학교, 교회, 군대, 회사 등등. 그래서 우리는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 길들여진다. 훈,육,된,다.
고대의 절대 권력에 저항한 오늘날의 자칭 합리적 인간이라 불리는 우리는 더 자유로워졌는가. 아니면 더 예속되어 있는가. 가시적으로 잔인하고 야만적이던 고대 권력과 달리 근대 권력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관리하고 감시한다. CCTV는 우리 대문 앞에서 언제나 나를 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나를 감시하는 자는 누구인가. 거기엔 아무도 없다. 장치만 있을 뿐이다.
합리적 이성이 발전하면 우리는 해방될 것인가. 아니면 더 감시당하는 주체로 전락할 것인가. 이성(지식)과 권력은 반대항인가. 아니면 그들은 공모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신체 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집중 케어 받고 있는 중이다. 찝찝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내 방 테레비 상품 광고는 내게 있지도 않았던 욕망을 생산하고 부추긴다. 나는 날마다 소비 주체로 거듭나야만 한다. 교묘하게도 강요하지 않는 방식으로 강요한다. 이 아파트에만 살면 당신은 우아해지며 이 차를 타면 당신은 능력있는 자이다. 등등. 이제 모든 것은 전도된다. 내가 자발적으로 고급 아파트와 고급 승용차를 욕망하는 것이다. 이 주체를 자율적이라고 부를 것인가.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비판적 성찰이다. 고급 승용차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밥먹다가 뉴스를 보았다. 내년부터 서울시립대 반값 등록금! 좋다. 가자, 전면 무상교육, 무상의료!! 99프로여 단결하라. 누군가 날 감시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가보자. 자본주의가 이대로 끝까지 가겠다면, 우리도 어떤 식으로든, 어디로든 가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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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큰 행운이다 |
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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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계,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
생각하고 의식하는 주체에 대해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주체를 주장했다. 무의식은 '이성'이나 '합리성', '목적 의식' 등과는 무관하다. 무의식의 주체는 '타자'이며 온통 '타자의 담론'으로 채워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말)실수나 꿈, 증상(반복 강박, 히스테리, 공포증)을 통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억압된 것의 회귀인데, 인간은 언어 세계(상징적 법과 규범, 제도)로 들어오면서 본능이 억압된다. 의식의 세계에서 억압된 본능이 실수나 꿈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무의식의 주체는 욕망의 주체인데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그래서 이 욕망은 만족할 줄 모른다. 애초에 주체는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지 못한다. 동시에 타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주체는 상징계(아버지의 세계)에 진입하면서 원초적 어머니(잃어버린 대상)를 상실하고 계속 다른 것으로 어머니(욕망의 대상)를 대체하려고 한다. 보상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을 뿐 어머니 자체는 절대로 회복할 수 없다. 쉽게, 아버지 때문이다.
그 결과 욕망은 항상 만족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그래서일까. 라캉은 욕망이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이가 그토록 욕망하는 어머니 즉, 아이의 대타자 또한 결핍된 존재이고 욕망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라캉에 이르면 대타자도 주체처럼 빗금그어져 있다. 바로 이 빗금, 간극에 대한 이름이 실재계이다.
라캉은 세계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설명한다. 상상계는 아이와 어머니의 이자 관계(상상적 동일시)이다. 아버지의 개입은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는 상징계(는 법이 법이고, 아버지가 아버지이며, 왕이 왕이라는 식의 동어반복일 뿐 완전체는 아니다. 왕이 왕인 것은 신하가 그렇게 믿기 때문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의 불완전성 그 자체이다.
인간은 상징계에서 언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무엇인가를 요구하지만 언어는 모든 것을 표현하지 못한다. 주체는 항상 상징계에서 소외되고 상처 받는다. 거,세,된다.
주체 그 자신이 존재론적으로 완벽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상처 받은 채, 소외된 채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주체의 '불가능성'은 부정되거나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존재론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는 적대(부정성)를 배제하려고 하지만 사실 사회는 적대를 완전히 해소시킬 수 없으며 어쩌면 적대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오늘도 아트앤스터디, 양운덕 선생님의 명강의가 이어졌다. 45분 수업이지만 항상 1시간이 넘는 것 같다. 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이런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큰 행운이다. 선생님께는 물론 아트앤스터디 그리고 나를 있게 해준 부모님께도 감사해야 할 판이다. 강의를 간략히 소개하고 내 이야기와 오늘 내용을 접목시켜 보려 했는데 실패했다. 선생님 강의가 알차서 아직 다 정리도 못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투 비 컨티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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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자의 담론으로부터 도저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
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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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주체로서 인간은 태어나면서 세계에 던져진다. 인간은 그 사회의 문법을 배워야 하고 관습과 규율을 학습한다.
나는 완전히 의식하는 주체일까. 아니면 나를 둘러싼 타자의 담론(무의식)에 지배를 받는 주체일까. 오늘 아트앤스터디 양운덕 선생님 강의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됐다. 바하의 협주곡 1041번과 함께. 어릴 때 피아노 학원에 보내달라고 떼를 썼던 기억이 난다. 부르주아인지 아닌지, ‘피아노 칠 줄 아니?’라는 질문 하나면 된다. 왜 아직도 우리는 예술을 향유하지 못할까. 예술의 전당. 문턱이 너무 높다.
정부는 예술하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있다. 예산을 핑계대지만 괜한 4대강 사업 중단하면 되지 않을까. 실업 문제? 병원, 학교만 무상으로 해도 해결된다. 영국은 1944년인가 43년인가부터 의료 무상이다. 돈이 들지 않으니 사람들이 병원에 많이 오고 그러면 병원을 더 많이 지어야 한다. 건설 경기가 좋아지고 병원은 인력이 많이 필요해서 고용이 증가한다. 흥분해서 얘기가 너무 멀리 왔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99프로의 근로 대중이 움직여야 할 때는 지금이다. 그러면 세상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나는 타자의 담론으로부터 도저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되려고 노력한다. 노숙자가 되겠다는 꿈을 발표하는 학생은 없다. 언제나 의사이고 판사다. 내가 어릴 땐 그랬다. 이제 이런 시대는 지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개별 주체(빠롤) 이전에 보편적 문법(랑그)이 먼저 있다. 구조주의적 혁명이라고 부를까. 이제 더 이상 인간을 의식적 주체로, 데카르트식 ‘생각하는 주체’로 여길 수 없다. 구조주의는 인간의 오만함을 경고하는 듯도 하다.
※ 참고도서: 『비트겐슈타인은 왜 말놀이판에 나섰을까』(양운덕, 창작과비평사, 2001.12.05)
이는 데카르트 제자들이 보기에 기분 나쁜 ‘주의’일 것 같다. 주체가 이렇게 의심받는다면, 실존주의(데카르트적 주체에 반대해서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했던 키에르케고르 이래)와도 사이가 좋을 것 같지 않다. 또 언제나 그렇듯이, 탈구조주의도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틈을 봐서 정리해 두어야겠지만.
개인과 사회, 전체와 부분은 언제나 풀기 힘든 숙제 같다. 둘이 완벽하게 일치(해체, ‘경계 없음’의 상태)된다면 가장 좋겠지만. 개인을 강조해도, 사회나 구조만 강조해도 사회는 불구가 된다. 이 둘(양극)은 조화나 합일되는 것이 아니라(합은 언제나 양극을 보존해왔다) 오히려 양극이 해체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다음 주에는 라캉과 지젝 이야기다. 지젝은 사회가 중심점 없이 해체된 현대 사회에 다시 헤겔식 사유를 불러들인다. 과연 우리는 헤겔의 억압적 ‘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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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평생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존재 |
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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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근대 주체
아침엔 네발로 걷고 오후엔 두발, 저녁엔 세발로 걷는 것이 무엇일까. 그렇다. 인간이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인간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인간은 평생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을 뿐).
그러면서도 인간은 인간을 정의하고 세상을 정의하려고 애써왔다. 서구의 근대는 오만하게도 인간을 생각하는 인간으로 정의하면서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배제했다. 인간 이성은 이렇게 언제나 폭력적이다. 비이성적인 것을 폭력적으로 배제하는 야만이었던 것이다. 이성이 비이성적인 것과 대면해서 스스로를 보편자로 정립할 때 그 자신은 결국 비이성이 된다. 쉬운 말로 겉으로 대립해 보이는 것들이 실은 하나였다는 것이다(이성과 비이성의 동일성, 이것을 대립의 동일성이라고 한다).
인간 이성은 자연을 착취해왔고 인간 세상에 계급을 두었다. 4대강 사업은 고용을 증가시킨다고 광고 했지만 공사 대부분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하는 것이다. ※ 추천도서:『4대강 살리기 사업의 역설과 남강댐의 딜레마』(김창수, 한국학술정보, 2010.06.30)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 이성을 전면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성과 비이성(자연이나 본능과 같은, 그러나 인간의 본능은 이미 이성적인 본능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기괴하기도 하고 도착적이기도 하지 않던가)이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할 수 있는 관계로 복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세상은 다시 불구로 될 것이다.
언제나 이분법은 위계를 낳는다. 하지만 헤겔 변증법에서 이분법은 파괴되어 버린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 변증법을 살펴 보자. 주인은 노예에게만 인정받는 어쩌면 가련한 존재이다.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결국 무능해진다. 엄마 없을 때 밥솥 뚜껑 못여는 우리 아빠. 반면 노예는 노동을 통해 '창조'의 능력을 발견하게 되고 주어진 조건을 초월하여 노예 상태를 벗어나게 된다. 부정의 계기가 긍정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씨앗이 자기를 부정하고 탐실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 추천도서:『헤겔』(우도 티이츠 | 노선정 옮김, 생각의나무, 2009.06.23)
헤겔에게는 그래서 영원한 주인도 없고 영원한 노예도 없다. 이런 생각이 맑스에 와서 '계급 없는 사회'로 발전한 것이 아닐까. 그들이 다르다면 헤겔은 관념을 규정적으로 보았고 맑스는 물질을 그렇게 보았다는 것이다. ※ 추천도서:『마르크스』(리우스 | 윤길순 옮김, 김영사 2008.01.25)
그들이 살아있다면 지금, 신자유주의, 신계급 사회의 우리 모습을 보고 경악했을 것이다. 승자독식 사회, 성공 만능 사회 그리고 전도된 세계-인간이 만든 산물(화폐, 상품, 신..)이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는 -를 그들은 꿈꾸지 않았다.
얼마전 뉴스에세 맥도널드 아르바이트 시급으로 빅맥 셋트 하나를 사먹지 못하는 나라로 당당히 우리가 1등을 차지했다. 우리나라인지 남의 나라인지. 외국인 노동자 문제도 그렇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이번에 아트앤스터디에서 양운덕 선생님의 <근대주체의 안과 밖> 강의를 듣게 되었다. 강의 내용도 알 차고 현실 비판적 감각이 살아있는 수업이었다. 선생님께서 열정적이셔서 수업 시간을 훌쩍 지났지만 우리 모두 경청하느라 그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유머감각도 탁월하셨다. 앞으로 강의가 더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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