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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05.
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슬라보예 지젝, 에릭 L. 샌트너, 케네스 레이너드, 『이웃』, 정혁현 옮김, 2010.
슬라보예 지젝, 『헤겔레스토랑』,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이정우 옮김, 한길사, 1999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자본주의와 분열증2』,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미셀 푸코, 『성의 역사-자기에의 배려』, 이영목 옮김, 2004
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이정우 옮김, 민음사, 2000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옮김, 2003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 김연숙 옮김, 인간사랑, 2010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글방,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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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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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할만한 하이데거의 책 N 서평 |
강*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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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세미나에서 친구들과 읽었던 책인데 재밌어서 서평을 쓴 게 있어요. 그냥 재미로 읽어주세요. 참고로 아래 제 글에 등장하는 알랭바디우에 대한 강의는 아트앤스터디 서용순 선생님 강의가 들을만 하고요. 저도 많이 은혜받았어요~ ^^
하이데거의 언어, 그 시적 언어를 탐하다
- 언어로의 도상에서 (하이데거, 신상희 역, 나남출판, 2012)를 읽고
시가 안 읽히고 어렵다고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긴 하다. 그래도 요즘에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하루에 한 두편이라도 읽으려고 애를 쓴다. 뭔가 일이 안 풀릴 때, 종종 시는 그런 내게 다가와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것, 한번도 말해주지 않은 것을 비밀처럼 속삭이고 간다. 나만 힘든 건 아니구나, 이 순간에도 시를 짓는 그 누군가도 한잎 바람에 부끄러워하기도, 절망하기도 하면서 밤을 새우고 있구나, 하면서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는데 그 느낌이 싫지 않다. 오히려 위안이 된다. 이렇게 나의 존재의 답답한 유한성을 넘어서 타자와 어울려 숨 쉬고 있다는 것 또한 이 세계가 내게 준 선물 아닐까. 내가 항상 감사해야 할.
시가, 소설이, 밥먹여 주느냐고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혹은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난 밥만 먹고 살 수 없노라고 되려 큰소리 치면서 책을 읽고 또 뭔가를 끄적이면서 시간을 보내던 때가 있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거나 친구들과 카페에서 실컷 수다를 떨고 나서도 뭔가 허기진, 내가 정작 말하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몰려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시는 가장 난처한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까지, 얼굴이 화끈거리도록 말해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다나 잡담보다 이런 시가 주는 독특한 경험들이 나를 오히려 깨어있게 하고 충만하게 하는 것이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프랑스 사상가 알랭 바디우가 얼마전에 한국을 찾았다. 공개 강연이 있다길래 부랴부랴 가서 귀동냥을 하고 왔다. 그의 강연은 마침 ‘시’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시’라는 게 일상 언어 밖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시는 우리의 일상적 언어, 공간, 시간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부재하는 것, 시적인 것,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을 아예 일치시켜 버린다. 이 말은 좀 어려운데 그가 쉽게 설명해 주었다. 바디우가 예를 든 ‘푸른 기타’라는 시어를 보면, 우리는 일상에서 기타를 기타로 경험하지 ‘푸른 기타’ 로 경험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들은 다르다. 그들은 예민하게 사물을 바라보고 사물과 친밀하며 사물의 언어, 사물이 말하는 바를 들으려 한다. 사물이 말을 한다니?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사물이 먼저 존재하고 언어는 그것을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라고 한다. 사물은 언어와 동시에 있거나 아니면 언어가 발견되어야 비로소 사물이 존재(『언어로의 도상에서』, 신상희 역, 나남, 2012, p. 217 ; 이후에는 페이지만 표기) 한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사물은 언어와 함께, 언어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사물과, 존재와 함께 세계에 거주하며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말한다. 그런데 이 사실을 포착할 수 있는 힘은 시인에게 있다. 세인으로서 우리는 정보적인 언어, 이성과 논리로 계산 가능한, 합리적인 언어만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세계의, 대지의 존재의 울림, 사물의 말을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푸른 기타’라는 시어에서는 실제 기타와 이 시적으로 말해진, 예술적 기타 사이에 더 이상 구분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 둘은 완벽히 하나인 것이다. 이런 일치, 를 우리는 꿈꾸지만 시는 이 일치를 실현시킨다. 일상에서 나는 나 이외의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과 구분하고 이로써 (외부와)단절, 소외를 경험 한다. 그래서 우리 현대인은 늘 우울 하고 타자와 소통이 안 된다고 불평하기도, 다투기도 한다. 우리는 나를 둘러싼 세계와(존재들, 사물들, 타자들과)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 진정한 소통은 정말 예술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외부 사물이나 타자와의 ‘일치’는 냉정하게 말해 현실에서는 정신병의 논리 구조이기도 하다. 내 마음은 호수요 처럼 시적, 예술적 맥락이 아니고서 가령 ‘내가 호수요’ 하면 나는 당장 정신병원에 갇힐 것이다. 하지만 시에서는 이 모든 일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시는 현실 질서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는 꿈꾼다. 현실 세계에서 꿈꾸고 상상하는 일은 위험하며(지금과 다른 체제를 상상한다든지 하는 것은) 밥벌이가 안 되는 무용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짓고 사유하는 일을 멈추어야만 할 것인가.
하이데거는 서구의 합리적인 이성이, 비밀스럽고 수수께끼적인 사유나 시적 언어를 추방하고 세계를 계산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일상 언어로 바꾸어 균질화해 지배가능한 세계로 환원해 버렸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합리적 이성의 사유방식, 말하기 방식은 결국 전쟁을 가져왔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세계를 주도하고 사물을 지배한다는 관념이 팽배한 서구 사회에 하이데거는 선언한다. 서구는 교만하게도 인간이 말한다고 믿었지만 그는 반대로, 인간이 아니라 ‘언어가 말한다’고.
인간이 아니라 언어가 말을 한다니. 우리는 이 난처한 발언에 다가가기 위해 그의 언어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인간은 말한다, 깨어있을 때도 꿈속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말한다. 침묵할 때도. 인간에게 말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언어로의 도상』, p. 15). 말하는 자로서 인간은 존재한다. 우리는 도처에서 언어와 마주친다(p. 17). 그래서 언어는 ‘관계’이며 그 자체로 ‘세계’이다. 우리는 언어 안에 체류(p. 19)하고 표현(p. 21)한다. 그렇게 우리 인간 존재는 언어적으로 이 세계와, 사물과 관계하고 대화한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의 일상어는 대개 잡담이고 수다로 오염되어 있다. 잡담으로 본래적 자기(죽을 존재로서, 아픔과 불안의 존재로서의)를 은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지 않다. 시인은 가장 순수한 언어(p. 24)로 말한다. 시인은 일상적 언어로는 인간 존재의 본질,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지 못한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래서 그는 한번도 말해지지 않은 것, 아직 사유해보지 않은 것,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을 말한다. 시인은 사물을 호명하면서 자신은 물론 현존하는 사물(이름 없이 현존하지만 부재하는 상태로 있던)이 도래하게 하고 돌연 생기하게 하며 하늘과 땅, 죽을 자들과 신적인 것들을 모두 자기에게로 모아들인다(p. 32). 시인은 이렇게 세계 자체를 호명한다. 그리고 그 세계와 ‘친밀’해진다. 이렇게 사물들은 (가장 순수한)언어에서, 즉 시에서, 세계를 낳고 세계와 사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관통(p. 36)한다. 이렇게 인간의 언어, 말함은 자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p. 49). 인간의 언어는 세계와 함께, 곧 말하는 게 아니라 세계를 통과해 ‘말해지는 것’이다. 순수한 언어는 그렇게 세계의 본질, 존재의, 사물의 본질에 가까운 곳에 있다.
그렇다면 세계의 본질, 사물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서구 유렵의 형이상학은 사물과 존재의 본질을 ‘확정’하려 했다. 아마 서구 형이상학은 그런 것을 찾으려고 헛되이 애쓰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자신의 본질에 있어서 아직 확정 되지 않은 것(p. 67)이 인간의 존재 방식이며 사물의 존재 방식이다. 인간과, 사물, 세계는 그저 길 위에, 도상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길 위에 모든 (신적, 존재적)비밀이 있다. 그곳에는 죽은 자도 있고, 죽을 자도 있으며, 결별한 이도 있고, 아픔을 가진 자도 있다. 죽은 자는 단지 지나가버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존하는 것의 모음(p. 81)이다. 길 위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응축되어 있고(하이데거는 일직선적인 시간관을 거부하면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근원적으로 단일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한 존재의 ‘존재해옴’의 방식은 그의 미래에 속한다. 과거는 현재를 경유하여 미래의 타자인 자기에게 열려 있고 이런 시간은 어떤 한 시점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죽은 자, 죽을 자들, 도래할 자들이 공존하는데, 순수한 언어는 그들을 모두 불러 세운다. 하지만 서구의 합리적 이성은 이런 일을 불가능하며 수수께끼적이며 비밀스러운, 한갓 꿈 같은 얘기일 뿐이라며 배제해왔다.
합리적 이성은 옳고 그름, 낮과 밤, 슬픔과 기쁨이라는 식으로 대립하는 것들만 알지 그 둘이 어떻게 어우러져 있는지는 애써 눈감아왔다.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미워하기도 하며 가장 힘들게 무엇인가를 하면서 몸은 고통스럽지만 그 가운데서 만족, 쾌락을 얻기도 한다. 이런 지점은 이성으로 이해하기 불가해한데 하이데거는 마치 이러한 대립의 불가능성이 점령한 곳에 언어의 본질, 존재의 본질이 머문다고 본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언어와 더불어 경험한다는 것은, 언어의 말 걸어 옴에 관여해 들어가고 그것에 스스로 순응함으로써 고유하게 관계한다(p. 210)는 것이다. 경험한다는 것은 내가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자립적으로 한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세계에 던져진다는 것이며 알 수 없는 어떤 심연의 그 (신비의)세계를 체험하고 깊이 관여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체념이나 불안, 아픔을 그저 대상화하지 않고 아예 체념이 ‘되고’, 아픔이 ‘되어’ 버린다. 체념은 단순히 부정적인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일종의 긍정(p. 321)이다. 존재는 자신의 유한성, 세계의 유한성을 외면하면서 그것들을 도착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유한성, 죽음, 아픔, 고통 등을 철저히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존재의 본질에 다가간다. 이렇게 성숙한 단계로 들어가면 그곳에는 존재의 부정이 아니라 존재에의 긍정(자기를 거부하지 않음; p. 321)이, 그러한 세계와 어울림, 죽음과도 친밀해질 수 있음을 배울 수 있다. 죽음을 고려해야 하는 존재는 바로 그 이류로 인해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 안에서만 비로소 (비본래적 자기로부터)본래적 자기에로 몰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시인의 이러한 체험이, 즉 본래적 자기를 되찾음으로써 세계의 비밀에 다가가는 체험을 통해 세계와 어울리고 감응함으로써 자신의 유한성에서 벗어나 본래적 자기의 비밀을 품고 있는 세계와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시인은 ‘언어를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언어로부터 달아나는 대신, 언어에 이르는 길은 언어를 언어로 경험’(p. 346)하도록 한다. 그는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고 지나간 것을 소환하며, 도래해야 할 것을 부른다. 시인들의 언어는 단순한 수다나 잡담과는 다른 것이다. 잡담은 존재의 본질을 망각한 언어일 뿐이다. 존재 즉, 무한한 잠재성을 지니고 무한한 차이와 생성, 가능성들을 지닌 존재는 시적 언어, 즉 가장 순수한 언어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존재는 존재자와 달리 ‘무엇’이라고 규정된 존재도 아니고 결정된 존재도 아니다. 하지만 세인으로서의 우리에게는 이런 존재를 호명할 언어가 없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존재를 선생님, 친구, 동료, 애인, 아버지로 호명할 수는 있지만 그 존재가 본래적으로 어떤 존재인지는 망각하고 있다. 내 앞에 보이는 존재, 회사 동료가 있다고 하자. 그는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나는 그를 보이는 대로, 그저 나의 회사 동료로 본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의 아빠이거나 남편이며 삼촌이거나 아들이기도 하다. 이렇게 한 존재란 다양한 차이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란 가장 불명료한 개념이다. 그는 분명 ‘컵이 존재한다. 강아지가 존재한다’와는 다르게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존재를 그저 내 눈앞에 보이는대로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나의 사물처럼 ‘무엇’(당신은 무엇으로 규정되는가, 의사? 판검사? 등등으로 우리는 구분되고 폭력적으로 위계지어진다)으로 그렇게 존재한다고 믿는다. 왜 그럴까. 하이데거는 이런 질문을 제기한 어쩌면 최초의 인물이다.
하이데거는 서구의 사상적 전통이 이러한 존재에 대해 망각하고 눈에 보이는 존재자에만 관심을 기울였다고 주장한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사물을, 심지어 사람까지 재단하고 구분하고 계산하고 지배하려 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인간에 대한 인간 지배는 날로 극악해지고 인간의 자연 지배 또한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이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을 에너지 저장고처럼 여기고 마구 파헤치고 인간의 장기와 성까지도 상품처럼 사고 팔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이 급격하게 개발하면서 내뿜는 먼지들은 우리에게도 매일매일 찾아온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일은 우리가 존재를 망각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보았다(참고,『존재와 시간』, 이기상 저, 살림, 2008).
서구의 이성적, 합리적 언어와 달리 순수 시적 언어는 보이는 대로의 사물에만 관심을 갖는 게 아니다. 시적 언어는 사물의 현존 이면에, ‘이미’ 그 사물에 다가가며 호명함으로써 앞으로 ‘도래하게’ 하며, 현존재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는 언어인 것이다. 그 언어는 정보적 언어(정보화된 언어는 기술적으로 계산하는 본질 속으로 균일하게 정돈되어 나가다가 서서히 ‘자연언어’를 포기 하는 상태에 이르게 한다. p. 373)와 다르며 존재를 결정하고 규정짓는 언어와도 다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적 언어는 기본적으로 결여이고 결핍일 수 있지만 이 결여는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결여, 공, 비어 있음은 ‘열린 곳’(데즈카 도미오, p. 395)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곳, 열린 곳은 비밀의 장소, 말하자면 실재의 영역이라고도 부를 만한데 이 영역은 대립을 넘어선 제 3항으로서의 ‘문턱’의 공간, ‘경계’의 공간 쯤 되지 않을까 싶다. 이 공간은 합리적 이성이 만들어 놓은 ‘대립’을 무너뜨린다. 남성/여성, 안/밖의 대립들 말이다. 가령, 그동안의 여성주의가 여성의 본질을 규정해 놓고 남성 때문에 여성적 본질이 발현되지 못했다고 말할 때 범하는 우는 여성의 본질이라는 것을 실체화해서 고정 불변의 무엇으로 여김으로써 여성의 무한한 잠재성을 가두어 놓는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본질주의적 함정에 스스로 빠져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저항과 위반의 논리가 ‘거짓된 위반의 모델’(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역, 401~403쪽)이라면 어떨까. 그래서일까. 지젝은 이런 식의 이항 대립 구도(여성 대 남성)를 버리고 하나의 내속적 자기 곤궁으로서의 다른 하나, 라는 구도를 고집했다.
쉬운 말로 ‘여성’이라는 기표는 그 자체로 아무런 균열이나 그 자체 안에 간극을 가지고 있지 않은 순수한 기표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이데거식으로 존재의 본질적 차원에서 여성이라는 기표 이면에는 여성 그 자신의 무한한 내속적 차이, 간극을 통해 생성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여성과 남성의 대립 구도로 사태를 볼 것이 아니라 이렇게 존재의 본질적인 차원에서 사태를 파악한다면 저항의 논리를 넘어설 수 있다. 권력 없이는 어떠한 저항도 없고 금지가 욕망(위반에 대한 욕망)을 생산(<까다로운 주체>, 404~406쪽)한다면 자기 자신의 내속적 곤궁을 통해서, 즉 자신의 내재적 부정성과 결핍을 통해서 외부(타자, 자신의 대립항)와 만날 때 세계는 다르게 지각될 수 있다.
더 이상 낡은 방식으로 남성이 없는 세계라는 유토피아에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여성 자신의 근본적 구성적 상실, 혹은 결여를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결여의 장소는 하이데거식으로 언어의 장소이고 존재의 본질(규정되지 않은, 길 위의 존재)의 장소일 것이다. 이곳은 분명 불안의 장소이고, 카오스의 장소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실제 삶에서, ‘시에서 못지않게 아마 정치에서도, 하나의 사건이 존재할 때마다 우리는 원리의 와해를 목격하며 이런 원리의 붕괴가 동시에 원리와 역사 사이의 연결을 재구축하게 만드는 것을 목격’(『공산주의의 현실성』, 브루노 보스틸스, 갈무리, 2014, p.240)한다. 우리는 늘 ‘실재’(라캉이 말한 것처럼 상징화될 수 없는 영역, 문턱, 경계의 영역) 속에서, ‘사건’ 속에서 산다. 메타적 차원에서 우리는 존재할 수 없고 사태를 직시할 수 없다. 이 ‘실재의 장소’에서, 즉 ‘문턱’의 자리에서 무한한 차이와 생성의 과잉이 지금과 다른 세계를 불러올 수 있는 길목을 열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곳에서 존재의, 언어의 본질을 찾아다닌 것은 아닐까. 존재의 본질, 진리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곳이 진리와 비진리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장소가 아닐까. 하이데거라면 진리와 비진리를 대립시키기 보다 이 둘이 서로가 서로를 품을 수 있는 세계야 말로 말 그대로 본래적 세계라 할 것 같다. 전통적으로 본질은 고정불변의 속성으로 이해되었지만 하이데거에게 본질이나 진리는 ‘동사’이다. 근원적인 언어가, 시적 언어가 사물들을 그것의 본질에 이르도록 한다면 그것은 사물이 길 위에서 우리를 습격하도록 한다는 것이며, 언어가 우리를 사물과 함께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 근원적 언어는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세계에 처해 있도록 하며 세계가 존재들의 존재 방식에 따라 정렬되어 있고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참고, 하이데거, 마크 래톨, 웅진 지식하우스, 2010, p. 174).
문제는, 우리가 하이데거의 언어나 존재에 관한 사유를 단지 포스트모던식으로 무조건적 비결정성, 끝없는 열림, 차이를 향한 무한한 긍정만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읽어야 할까.
아니면 오히려 세계의 비결정성 자체의 ‘비어 있음’을 대신함으로써 시인처럼 그것 자체를 ‘체험’함으로써 세계에 ‘개입’할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 당연히 후자이다. 현실 세계의 언어가 가진 폭력적 균질성, 서구 합리적 이성의 불합리성을 넘어, 세계를 실재적 혼란과 과잉으로 인식함으로써 언어의 본질에,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 그것들과 오히려 적극적으로 친밀한 관계 맺기. 이성 중심 세계가 지금껏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던 것을 시적 언어로, 존재의 언어로 말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존재가 말과 사물 사이(한가운데, 경계, 문턱의 영역)에, 사물과 세계가 공존하는 친밀성의 영역에(p. 37) 존재하면서 사물 세계와 함께 변화해가고, 또 존재가 자립적(자율적)이고 유한한 합리적 이성적 주체가 아니라 사물과, 세계와 함께 화합하는 주체로 거듭나면서 본래적 자기와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세계의 길 위에서 가능하다. 그 길은 내가 아니라 ‘세계’가, 언어가 말하는 길, 아직 끝나지 않은 길, 언어의 도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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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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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왜 나치에 동조했을까 |
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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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자'를 부각시키면서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시하는 서구 형이상학을 비판했다. 서구의 근대적 이성, 합리성, 과학성이 신비한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부재하는 것을 망각했지만 이는 하이데거에겐 폭력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존재자가 다가 아니다. 얼마전에 오랫동안 함께 공부했던 선배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항상 쾌활한 사람이었고 우리 모두 그럴리가, 믿지 못했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 보이지 않는 것, 그런 것들이 이런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기본적인 사상이 뭐가 문제라는 것일까. 그는 왜 나치에 동조할 수 밖에 없었을까. 지젝은 이 문제를 그의 사상의 내적 논리에서 찾는다. 지젝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기술문명, 과학성을 비판하면서 기술 자체의 조작과 착취의 성질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 결과 그 (기술의)사용을 주도하는 자본의 동학을 보지 못했거나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치와 하이데거의 공통된 오류는 결국, '정치 경제를 기술, 과학의 문제로 환원했고 이로써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 그 내적 동학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이러한 사유의 틀의 바탕에는, 하이데거가 개인적 현존재의 본래적 결단으로부터 공동(체)의 결단으로 이행이 있었다. 그는 초기에 현존재의 본래적 결단을 중시했다. 그러던 그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운명에 개인을 복속시킨 데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분명 전체주의 논리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논리 구조였다. 그는 왜 이런 논리적 전환을 감행했던 것일까.
그는 '영웅'에 대한 낭만주의적 향수가 있었던 듯한데, 그가 근대적 개인의 결단을 중시했지만 그의 무의식에는 전근대적 영웅 모델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일까. 그에 따르면 영웅은 개인적 결단과 공동체의 운명의 결단을 일치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 유형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히틀러에게 투영된 것일까.
아무튼 지젝은 하이데거 사유의 내적 논리를 추적하면서 그가 나치와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그의 이론적 결함 내지는 곤궁이 무엇이었는지를 탐색해서 앞으로 우리는 이런 오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고 과거의 사상들을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4강으로 짧게 지젝이 문제 삼고 있는 사상가들을 짚어 보았다. 재미있었고 유익한 시간들이었다. 지젝은 워낙 어려워서 공부하는 사람들도 그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텍스트 중에 하나인데 선생님이 내공 있는 분이시고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셔서 지젝을 혼자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앞으로도 지젝 강의가 더 많이 열려서 공부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알려져서 사유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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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젝, 드디어 한 걸음 다가서다! |
이*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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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어렵다고 악명(?) 높은 지젝이라 시작하기 전부터 부담이 컸습니다. 그래도 다른 철학자들과의 논쟁 구도를 중심으로 핵심 쟁점을 짚어주니 훨씬 이해하기 수월했습니다. 특히 들뢰즈와의 차이점을 명확히 짚어준 1강이 인상적이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요즘 회사에서 팀원들 간의 이견 조율 문제로 골치가 아팠는데, 이 강의에서 논쟁을 '사유나 이론틀을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으로 설명한 부분이 저에게 큰 위안이 되고 실질적인 태도 변화에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철학이 이렇게 삶과 직결될 수 있다는 게 놀랍네요. 이 강좌를 계기로 지젝의 저서를 직접 읽어볼 용기가 생겼습니다. 마상룡 강사님 내공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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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와 나치즘 문제를 지젝의 시각으로 보니... |
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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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하이데거 vs 지젝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하이데거의 나치즘 동조 문제를 단순히 도덕적 비난을 넘어, 그의 사상 내부의 '이론적 결함' 에서 찾는 지젝의 비판이 매우 날카로웠어요. 기술문명의 비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자본의 동학을 간과했다는 지적이 핵심이었습니다. 짧은 강의였지만 핵심을 꿰뚫는 설명 덕분에 지젝의 비판적 사유방식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를 다시금 되새기게 해준 강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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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레비나스까지 한 번에 정리! |
박*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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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좌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현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지젝과의 논쟁이라는 렌즈를 통해 압축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푸코의 '실존의 미학'과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 같은 어려운 개념들을 지젝의 관점에서 대조적으로 설명해주어 혼자 공부할 때 헷갈렸던 부분이 명쾌하게 정리되었습니다. 푸코의 훈육적 권력 이론의 역설에 대한 지젝의 논의는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용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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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님 설명은 좋은데, 짧아서 아쉬워요 |
김*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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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님의 해설은 정말 훌륭합니다. 지젝의 복잡한 논리를 비교적 쉽게 풀어주셔서 좋았고요. 하지만 4강으로 현대 철학의 거장 4명과 지젝의 논쟁을 다루기엔 역시 분량이 너무 짧습니다. 각 철학자들의 사상과 지젝의 비판을 더 깊이 있게 듣고 싶었는데, 맛보기처럼 끝난 느낌이라 아쉽습니다. 다음에는 심화 코스로 더 길게 만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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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입문으로는 최고입니다. |
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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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다단한 현대 철학의 흐름을 지젝이라는 구심점을 통해 잡아주는 기획이 아주 신선하고 효과적이었습니다. 특히 '헤겔-라캉-마르크스'라는 지젝의 사상적 기반을 바탕으로 다른 사상가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방식이 지젝의 철학적 위치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이론을 외우는 게 아니라 **'직접 사유하는 힘'**을 기르게 해준다는 강좌 소개 문구가 허언이 아님을 느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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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적 사고를 연습하는 좋은 기회 |
권*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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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과 학문의 경계를 넘어서서 철학적 쟁점을 다각도로 조명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1강의 '신체 없는 기관 대 기관 없는 신체' 같은 개념 논쟁을 들으면서, 제가 가진 사고방식이 얼마나 이분법적이고 경직되어 있었는지 반성하게 되었어요. '창조적인 융합과 통섭'을 위한 유연한 사고 연습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강의를 들을 때마다 제 사고의 지평이 넓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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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지젝 위주로만 진행된 느낌 |
이*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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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제목이 '지젝과 그 적들'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다른 철학자들의 사유를 이해하는 비중보다 지젝의 비판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들뢰즈나 푸코의 사상을 좀 더 균형 있게 다루어 주고 난 뒤에 지젝의 비판으로 넘어갔다면, 논쟁의 맥락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지젝 팬이라면 좋겠지만, 다른 철학자들에게도 관심이 많다면 불만족스러울 수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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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 강좌 |
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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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레비나스 vs 지젝 논의 중 '타자로부터의 분리'와 관련된 지점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최근 몇 달간 개인적인 슬럼프가 심했는데, 모든 것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찾으려 했던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자신의 내재적 부정성과 결핍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 부분에서, 비로소 자기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재구성해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습니다. 철학을 통해 위로를 받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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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근대 철학의 핵심만 쏙쏙! |
오*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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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구조주의 현대 철학의 핵심적인 문제의식들을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인간의 실존론적 존재구조'**부터 시작해서 '죽음충동'과 '유한성 철학의 한계'를 지젝의 시각으로 비판하는 과정이 일목요연했어요. 지젝의 철학을 '현대 사회의 핵심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기 위한 사유의 장치'로 활용하는 능력을 기르라는 강사님의 말씀이 계속 귓가에 맴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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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쉬운 비유가 필요해요 |
정*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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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님의 깊은 내공은 느껴지지만, 강의 내용 자체가 워낙 난해한 개념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철학 입문자에게는 조금 버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도 평소에 인문학 강의를 자주 듣는 편인데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기관 없는 신체', '존재의 미학 대 존재의 충동' 등 주요 내용을 좀 더 일상적이거나 대중적인 비유로 설명해 주셨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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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문제 제기가 시원하네요 |
유*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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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평소 지젝의 독창적인 시각을 좋아했는데, 이 강좌에서 그가 현대 철학의 거장들의 '사유의 한계' 를 어떻게 돌파하려 했는지 집중적으로 배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특히 레비나스의 윤리에 대한 스피노자적 관점에서의 비판이나 '무젤만' 사례를 통해 절대적 타자성의 근원을 해체하려는 논의가 가장 시원했습니다. 철학적 논쟁의 재미를 제대로 느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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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이야기 - 철학 공부하며 잃은 것 |
고*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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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듣는 내내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 이 분야에 빠져서 밤낮없이 책을 읽었거든요. 그때는 제 주변 사람들이 제가 하는 말을 '잡담'으로 취급하고, 저는 그들에게 '비본래적 자기' 속에 사는 사람처럼 군림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강의에서 하이데거의 '잡담' 개념이 나왔을 때, 그 오만했던 제 자신이 떠올라 부끄러웠습니다. 강의 내용은 훌륭하고, 저에게는 개인적인 반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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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깊이가 있는 강의! |
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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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구성이라 금방 끝날까 걱정했는데, 강사님이 핵심만 짚어서 전달해 주시는 덕분에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현대 철학의 주요 쟁점들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강의를 듣고 나서 슬라보예 지젝의 책들을 다시 보니, 예전에 놓쳤던 논리적 맥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지젝 입문서로 강력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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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없이 강의록만으로는 부족해요 |
백*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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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록이 제공되긴 하지만, 강사님께서 참고문헌으로 언급하신 원서들의 내용이 워낙 방대하여 강의록만으로는 충분한 이해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각 철학자들의 핵심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지젝의 비판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강의 외적인 독해가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물론 강사님의 설명은 좋았습니다. 다음부터는 주요 참고문헌 중 핵심 내용을 요약한 보충 자료를 더 제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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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비판적 논의를 정리하고 싶다면 |
신*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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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이 펼쳤던 비판적 논의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싶다면 이 강좌가 답입니다. 특히 들뢰즈와 가타리의 외디푸스 삼각형 비판이나 푸코의 권력이론에 대한 지젝의 해석은 매우 독창적이며, 저의 사유를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다양한 이슈들을 지젝의 시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사유의 장치'를 얻은 기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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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지젝 사유의 얼개 |
김*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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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다단한 지젝의 논의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 강의와 같이 다른 사상가들과의 비교대조를 통해 설명해주시는 것은 매우 효율적인 접근법 같았습니다. 지젝에 대한 깊은 논의보다는 다른 사상가들과의 유사점 또는 차이점을 짚기에 적절한 강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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