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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 음악 |
김보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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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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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이야기 |
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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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사의 음악철학을 기대했지만 강의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다른 책이나 강의에서 접할 수 없는 음악의 이면사의 대한 강사님의 의견은 정말 흥미로웠다. 앞으로 어떤 이면사가 숨겨져 있으며, 또 어떤 시각으로 해석이 가능해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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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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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음악이라는 언어 |
m**ch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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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가장 개념화하기 어려운 대상이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아포리아의 상황을 전제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음악은 육체성과는 가장 동떨어진, 가장 가벼운 상태 ('탈물질화')의 상태를 지향하는 예술이다 리오타르는 음악의 '극단성'(intensity)를 이야기 하는데, 이는 '저장과 축적'의 특성을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와는 반대로 이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비우려는 탈자본주의적 성격을 말한다. 즉 결핍이 있기때문에 채우려고 하는 감수성이 아니라 비움의 특성... 즉 부정적 성격을 가지지 않은 긍정만이 있는 감동이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가 슈베르트를 들으면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왜 흐르는지는 모른다". - 아도르노
-비트겐 슈타인의 '또 다른 언어'라는 개념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이론을 음악이라고 하는 범주와 연결시키면 지금껏 음악을 다루어온 언어가 철학적 언어라면 과연 철학적 언어라는 것이 음악을 다룰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라고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고 만일 이 철학적 언어가 음악을 다루는데 있어서 유일한 개념언어라고 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대로라면 이 언어는 여러가지 언어 중 단지 하나의 언어일 뿐인 것이다. 철학적 (논리의 형식의) 언어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 그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는 언어 중 하나가, '음악이라고 하는 (논리적 형식의) 언어'일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말할 수 없는 것을 '말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언어인 음악, 그 '음악이라는 언어'
-'신화속의 음악' 분기점으로서의 호메로스의 서사시 철학은 어둠속에 있던 자연의 상징들을 소위 인간의 합리성, 빛으로 끌여들여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의 분기점으로서 서사시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신화속에 있는 그 어떤한 것들을 철학의 영역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신화속의 어떠한 것들을 불러내야 한다. 즉 "동시에 이야기 하지 않으면 안된다." 서사시는 신화속에 들어있는 음악적인 것이 어떻게 해체되는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해체되기 이전에 그것이 무엇이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성의 범주에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을 넘어서는 , 내안에 있지만 나도 모르는 무엇을 건들이는 것이 음악의 힘이지 않을까? 그래서 음악의 이면사의 본질이랄 수 있는 힘은 하모니가 아니라 해체시키고 용해시키는 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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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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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의 독보적 존재 |
이*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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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철학, 음악과 철학! 그 오묘한 조화는 기대하게 만드는 김진영선생님만의 매력이다. 소설의 미로 강의를 보면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를 느끼게 하였는데, 음악철학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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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언어로 담을 수 없는 음악의 가능성 |
김*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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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의는 단순히 음악사를 훑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언어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음악이라는 '또 다른 언어'로 사유하는 경이로운 경험이었습니다. 특히 호메로스의 사이렌 에피소드를 통해 음악의 이면사를 해체와 용해의 힘으로 풀어낸 1강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성의 범주를 넘어 내 안에 있지만 알지 못하는 무엇을 건드리는 음악의 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김진영 선생님의 경이로운 강의력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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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음악을 절대 형식으로 보다 |
박*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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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의 헤겔, 칸트, 쇼펜하우어 비교는 음악 미학의 핵심을 꿰뚫었습니다. 특히 쇼펜하우어가 음악을 '표상이 아닌 의지 자체로서의 모사물', 즉 모든 예술 중 최고 단계에 둔 이유를 '절대 형식성'으로 해석하는 부분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음악 감상이 감정의 해소가 아니라, 의지 자체를 직접 체험하는 순수하고 텅 빈 형식 경험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감상문을 강요하던 음악 수업이 오히려 음악의 본질을 가로막았던 것은 아닌지 씁쓸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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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아도르노 음악 미학의 정수를 만나다 |
이*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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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부정성의 미학과 현대 예술의 운명적 미완성에 대한 3강의 깊이 있는 해설은 단연 압권이었습니다. 오디세우스 신화를 이용해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을 비판하는 아도르노의 논리를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불협화음과 파열이 음악의 자기 성찰과 억압된 자유의 표현이라는 해석은 현대 음악을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특히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음악'에 대한 해석은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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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비극적 명랑성에 대한 통찰력 |
최*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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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바그너의 관계를 다룬 4강은 흥미진진한 드라마 같았습니다. 니체가 바그너에게서 발견하고자 했던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즉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유희를 통해 혼돈의 삶을 극복하고 생을 구축하는 예술적 태도로서의 '비극적 명랑성'을 배웠습니다. 진리를 깨닫고도 좌절하지 않는 그리스인의 태도가 인상 깊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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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너무 방대해서 흐름을 놓쳤어요 |
강*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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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0강에 걸쳐 고대 철학부터 쇼펜하우어, 니체, 아도르노, 바르트, 리오타르까지 너무 많은 사상가와 개념을 다루다 보니, 깊이 있는 논의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아도르노 부분은 3강이나 할애했지만, 난해한 개념들이 빠르게 제시되어 초심자로서 따라가기 버거웠습니다. 난이도를 고려하여 다루는 개념의 수를 조금 줄이거나 분량을 조절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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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 서정성의 새로운 발견 |
윤*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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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슈베르트를 들으면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왜 흐르는지는 모른다"는 아도르노의 말처럼, 슈베르트의 서정성이 주체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주체로서 유동성을 받아들이는 '미메시스적인 서정성'이라는 해석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이 서정성은 권력화되지 않는 자유로운 정서의 흐름이라는 통찰이 제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강의를 들으며 음악으로 감정을 흘려보내는 치유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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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철학, 경계를 허무는 매력 |
노*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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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철학, 음악과 철학을 넘나드는 김진영 선생님만의 독보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강의입니다. 단순히 음악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는 경험이었습니다. 아도르노를 '접촉공포자'로 해석한 부분이나, 피타고라스의 음악을 육체의 발견과 우주의 발견으로 연결하는 통찰 등, 신선하고 흥미로운 해석이 가득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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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아도르노 파트가 너무 길고 반복적 |
오*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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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강의 분량(3강)이 너무 길어 내용이 반복되거나 장황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아도르노 철학의 난해함 때문일 수 있지만, 분량 대비 효율성이 아쉬웠습니다. 특히 아도르노의 엘리트주의적 시각으로 재즈를 '퇴행적 음악'이라고 비판하는 부분은 현대 음악 팬으로서 다소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다음에는 아도르노를 좀 더 압축적이고 균형 있게 다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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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포스트모던 시대의 음악 이해의 열쇠 |
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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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강과 10강에서 다룬 롤랑 바르트와 리오타르의 음악 철학은 현대 음악을 이해하는 데 큰 통찰을 주었습니다. 바르트의 기호학(기표/기의)적 관점으로 음악을 해석하는 방식과 리오타르의 '극단성'이 탈자본주의적 성격을 지닌다는 해석이 새로웠습니다. 존 케이지와 글렌 굴드 등 포스트모던 시대 음악가들을 철학적으로 조망하는 시야가 좋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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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철학자들의 음악론을 한눈에 정리 |
정*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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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의 '우주의 음악'부터 플라톤의 음악의 윤리적 측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까지 고대 철학자들의 음악 통찰을 단시간에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특히 피타고라스가 수학적 비율로 음악의 법칙을 발견한 일화는 여전히 놀랍습니다. 음악을 수학적 질서이자 영혼의 질서로 본 고대 철학의 관점이 흥미로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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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들리지 않는 천상의 하모니 |
문*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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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가 말한 '들리지 않는 음악', '천상의 하모니'에 대한 해석을 육체의 체험이 탈물질화되어 우주의 발견에 이르는 과정으로 연결시킨 교수님의 통찰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단순한 소리가 아닌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음악을 경험하게 해준 강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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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음악 지식 없이도 충분히 빠져들 수 있는 강의 |
이*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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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론이나 지식이 없어도 철학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쉽게 풀어주셔서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강의의 재미와 몰입도를 놓치지 않는 김진영 선생님의 경이로운 강의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인문학적 소양을 넓히고 싶은 사람에게 강력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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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오디세우스와 아도르노의 연결고리 |
박*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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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를 '접촉공포자'로 해석하고, 이를 오디세우스가 사이렌의 노래를 이성적으로 제어하는 방식과 연결시킨 해석이 매우 신선했습니다. 고급 음악과 대중 음악을 비판하는 아도르노의 엘리트주의적 코드를 맥락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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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총체적인 내용 구성에 만족 |
서*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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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철학에 국한되지 않고 철학 전반의 기본적인 내용과 역사적 배경까지 아우르는 총체적인 강의였습니다. 독일의 문화 정치, 벤야민의 '정치의 미학화' 등 풍부한 배경 지식 덕분에 현대 예술과 사회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습니다. 강사님의 열정적인 강의 톤 덕분에 몰입하여 완강할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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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바그너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아쉬움 |
송*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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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바그너의 관계를 설명할 때, 바그너의 예술성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니체의 비판적 시각에 더 무게가 실린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바그너의 음악사적 영향력을 고려할 때, '퇴행성의 벼랑 끝'이라는 평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균형 잡힌 비평이 조금 더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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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음악에서 철학이 시작되는 순간 |
진*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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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철학은 완전히 다른 분야인 줄 알았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감성과 이성이 합일되어 인간이 느끼는 시간의 흐름조차 변화시키는 음악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1강 호메로스의 사이렌 에피소드 를 통해 음악의 이면사를 해체와 용해의 힘으로 풀어낸 것이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철학적 언어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언어가 음악이라는 통찰은 제 사유의 지평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경이로운 강의력에 감동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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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쇼펜하우어와 음악의 절대 형식성 |
조*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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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헤겔, 칸트, 쇼펜하우어 비교 강의가 정말 명쾌했습니다. 특히 쇼펜하우어가 음악을 '표상이 아닌 의지 자체로서의 음악', 즉 모든 예술 중 최고 단계에 두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쇼펜하우어에게 음악은 내용이 없는 순수한 형식, 절대 언어 라는 해석이 기존의 감상법을 뒤엎었습니다. 강의를 듣고 나서 제가 예전에 들었던 음악 감상 강요가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표상의 세계로 받아들이게 만든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씁쓸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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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아도르노에 대한 최고의 강의입니다 |
이*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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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에 대한 스콜라적인 주입식 강의가 아닙니다. 오디세우스의 신화에 대한 이해하기 쉬운 전달과, 왜 불협화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역구성적 수업 진행이 매우 좋았습니다. 아도르노의 미학에서 부정성의 미학과 현대 예술의 운명적 미완성을 다루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음악'이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망각 당함이 유일한 목적이라는 해석은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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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방대해서 따라가기 힘들었어요 |
김*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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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0강에 고대 철학부터 쇼펜하우어, 니체, 아도르노, 롤랑 바르트, 리오타르, 존 케이지까지 너무 많은 사상가와 개념을 다루다 보니, 깊이 있는 논의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아도르노 부분은 3강에 걸쳐 다뤘지만, 분량이 긴 만큼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뒤로 갈수록 핵심만 빠르게 요약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워낙 난이도 있는 철학자들을 다루다 보니, 초심자가 따라가기에는 버거운 강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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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니체의 비극적 명랑성에 대한 통찰 |
박*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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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바그너의 관계를 연인의 연애사와 흡사한 과정으로 비유한 설명이 재미있었습니다. 니체가 바그너에게서 찾으려 했던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즉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유희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습니다. 니체가 말한 '비극적 명랑성'은 진리를 깨닫고도 좌절하지 않고 생을 구축하는 예술적 태도라는 점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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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슈베르트 서정성'에 눈물 흘리다 |
김*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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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슈베르트를 들으면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왜 흐르는지는 모른다."는 아도르노의 말이 슈베르트의 서정성을 가장 잘 설명해줍니다. 슈베르트의 음악이 수동적인 주체로서 받아들이는 유동성이기에, 권력화되지 않는 서정성을 갖는다는 교수님의 해석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최근 개인적인 슬픔으로 힘들었는데, 강의를 들으며 제 감정을 슈베르트의 음악을 통해 흘려보내는 경험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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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의 이면사를 엿보다 |
이*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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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사(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조화와 윤리)뿐만 아니라, 음악 철학의 이면사에 대한 강사님의 의견이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사이렌의 강력한 아름다움이나 디오니소스의 계보처럼, 이성의 범주에서 벗어나 내 안에 있지만 나도 모르는 무엇을 건드리는 음악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이면사가 숨겨져 있을지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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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철학자들의 음악론을 한눈에 |
이*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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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의 '우주의 음악'과 플라톤의 음악의 '윤리적 측면',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까지, 고대 철학자들의 다양한 음악 통찰을 짧은 시간에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음악을 수학적 질서로 본 피타고라스의 사유가 흥미로웠지만, 플라톤이 지나친 찬미주의적 음악을 조심스러워 했다는 점은 현재 대중음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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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의 독보적 존재감 |
이*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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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철학, 음악과 철학을 넘나드는 오묘한 조화는 김진영 선생님만의 독보적인 매력입니다. 소설의 미로 강의를 들으며 이미 놀라움을 느꼈는데, 음악 철학에서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전문적인 용어와 내용을 유지하면서 쉽게 설명하시는 경이로운 강의력은 항상 놀랍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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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아도르노의 '접촉공포자' 해석이 와닿았습니다 |
박*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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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가 합리주의자이자 엘리트주의자, 심지어 접촉공포자라고 볼 수 있다는 해석이 매우 신선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사이렌의 노래를 이성적으로 제어하는 방식 을 통해 고급음악과 대중음악을 비판하는 아도르노의 코드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재즈를 퇴행적 음악이라고 비판했던 이유까지 맥락적으로 설명해주셔서 좋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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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포스트모더니즘과 음악의 만남 |
안*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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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강과 10강의 롤랑 바르트와 리오타르의 음악 철학이 현대 음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바르트의 기표와 기의, 기호학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음악 과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 담론이 슈만, 존 케이지, 글렌 굴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리오타르가 이야기한 음악의 '극단성'이 탈자본주의적 성격을 지닌다는 해석이 새로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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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아도르노 파트에 분노하다 |
김*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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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강의 내용이 너무 길고 반복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물론 아도르노의 철학 자체가 워낙 난해해서 반복이 필요했을 수 있지만, 3강이나 할애할 만큼의 효율성이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아도르노의 엘리트주의적 시각에 분노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다음에는 아도르노를 조금 더 압축적으로 다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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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슈베르트와 바르트의 관계가 궁금해졌어요 |
이*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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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강 바르트와 슈베르트 강의가 예상치 못한 조합이라 흥미로웠습니다. 기호와 육체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슈베르트의 서정성을 다루는 방식이 재미있었습니다. 강의를 듣고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다시 찾아 읽어보며, 슬픔과 노래에 대한 바르트의 사유를 음악과 연결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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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육체의 발견이 우주의 발견이 된 음악 |
박*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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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의 음악 철학을 육체의 발견, 영혼의 발견, 우주의 발견으로 연결시킨 교수님의 해석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들리지 않는 소리, 천상의 하모니 를 듣는 것이 육체의 체험이 탈물질화되어 우주의 발견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설명은 정말 철학적이었습니다. 수학적 비율이 음악의 법칙이 되었다는 사실도 다시 한번 놀라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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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경의로운 강의력 |
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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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적인 용어와 내용을 유지하면서 쉽게 설명하시는.. 정말 대단하시네요. 보통 어려운 개념을 쉽게 설명하려하다보면 직관적인 이해는 가능케 하더라도 엄밀한 내용면에서는 오류가 발생 할 법도 한데 김진영 선생님 강의는 항상 놀랍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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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흥미로운 세 철학자 이야기 |
이*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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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1강은 음악철학에 있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표면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면사도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어진 수업에서는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음악의 영향에 대해 알아보았다. 피타고라스의 경우 보이지 않는 소리가 있다고 존재했으면 바로 보이지 않는 소리야 말로 진정한 음악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귀 기울이면 별의 움직임까지 들을 수 있다고 한 것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천상의 흐름과 계시를 들을 수 있다는 시론을 바탕으로 할 경우 이해될 수가 있다. 이어 플라톤의 경우는 음악의 역할을 중요시 하면서도 지나칠 경우 그 음악이 인간의 영혼을 침해할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파장을 가진 것을 깨닫고 지나친 찬미주의적 음악을 조심스러워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음악의 본질에 윤리적인 측면을 드러내며 교양 있는 귀족을 위한 음악을 존중했으며 악기를 연주하거나 지나치게 음악에 빠져 전문가를 벗어난 상태는 좋지 않은것으로 여겼다.
세 철학자의 음악철학에 관한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관심이 생겼던 부분은 디오니소스와 그의 제자 오르페이스에 관한 음악이론 이었다. 아폴로의 아들인 오르페우스의 경우 사람 뿐 아니라 동물 그리고 말을 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물과 존재를 음악으로 조율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신의 영역에 이르는 음악적 능력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과 만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부분은 이전에 의심하지 않았던 부분이라 새로웠다. 디오니소스의 경우도 제우스의 아들이지만 헤라의 질투로 인해 비이상적인 삶을 살지만 그의 주변에는 늘 그를 부정하면서도 그를 쫓는 혹은 아예 그를 맹목적으로 따라다니는 존재가 있었다는 부분을 빗대어 현대인이 뱀파이어에게 갖는 두려움 및 이해되지 않는 동경에 대한 해석이 재미있었다.
표면사의 음악철학을 기대했지만 강의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다른 책이나 강의에서 접할 수 없는 음악의 이면사의 대한 강사님의 의견은 정말 흥미로웠다. 앞으로 어떤 이면사가 숨겨져 있으며, 또 어떤 시각으로 해석이 가능해질지 기대된다.
『향연-사랑에 관하여』(플라톤, 문학과지성사 발매 2003.05.30)
『사랑의 단상』(롤랑 바르트, 동문선 발매 200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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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1강 후기입니다. |
김*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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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오늘 수업도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역시 김진영 선생님은 음악철학을 철학사에서 흔히 다루는 식으로는 결코 설명하지 않으시는군요.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풀어주셔서 너무 좋았습니다.
이면사로서의 음악 - 그것이 지닌 망각과 해체 그리고 용해의 힘
하모니와 법칙, 조화의 세계로 가지 않으려는 꿈틀거리는 그 힘에 대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아마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을 거예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다음 주도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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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음악에서 철학이 시작된다 |
이*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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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소개글을 보니 음악에서 철학이 시작된다고 하네요. 음악과 철학은 완전히 다른 분야인 것 같은데 신기하네요. 강의를 들으면서 점점 생각이 바뀌기도 하고 아는 것도 생기는 것 같아서 뿌듯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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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대상으로서의 음악 |
서*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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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소설은 일정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는 반면 음악은 음의 변주나 반복으로 재생될 뿐 이야기를 갖는 것은 아니다. (예외의 사례도 있겠지만) 그래서 비평의 대상으로서 "이 이야기는 좀 낡았어. 별로야." 라고 영화나 소설은 쉽게 비평할 수 있겠지만, 음악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음악에 대해서는 나는 쉽게 가치판단을 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었다. 좋고 나쁨을 판단할 기준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음악을 잘 알지 못하고 단순히 듣기만 하는 입장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삼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김진영 선생님의 강의는 음악을 사유했던 철학가들의 이론을 들려주면서, 비록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음악에 대한 가치판단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니체의 강의가 흥미로웠고, 아도르노는 분량이 너무 길지 않나 싶어 아쉬웠지만 그만큼 아도르노의 개념을 더 단단하게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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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상 님:)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읽으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네요. ㅎㅎ 역시 배움의 세계는 넓고도 깊구나. 싶어요. admin (14.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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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음악철학 이야기 |
김*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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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철학이라는 제목 자체에 끌렸어요. 문학은 문학, 철학은 철학, 음악은 음악 이런 식으로 나누어서 생각했는데 음악과 철학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입니다.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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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음악철학 이야기 |
안*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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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철학이라는 제목 자체에 끌렸어요. 문학은 문학, 철학은 철학, 음악은 음악 이런 식으로 나누어서 생각했는데 음악과 철학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입니다.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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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최고 강의입니다. |
l**w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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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철학에 대한 스콜라적인 주입식 강의가 아니라, 오딧세우스의 신화에 대한 이해하기 쉽게 전달해주십니다. 왜 불협화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역구성적 수업진행이 좋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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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ron과 Siren 그리고 오디세우스 이야기 |
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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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철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단순히 철학이라고 하면 종교적이라던가 심리학적인 개념 혹은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관념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에 반해 앞에 특정 분야가 주어지면 오히려 공부하기가 쉽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은 듣는다는 직접적인 해석보다는 타의적인 해석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었는데 막상 수업이 시작되고 강사님께서 본인 스스로가 실험적인 강의가 될 것 같다라는 고백에 당황스럽다기 보다는 오히려 기대감이 생기는 것은 아마도 이전에 철학자가 의구심을 가졌던 그 정도의 수준을 옅볼수 있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러운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첫 강의의 주제는 음악철학이라고 불리우는 일반적인 표면사와 그 이면에 이야기로 앞으로 이어질 강의에 대한 배경이 되는 철학가와 호메로스의'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오디세이아』(호메로스, 돋을새김 발매 2011.01.11)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를 하였다. 또 다른 언어는 없는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작품을 기점으로 음악철학의 표면사와 이면사가 나뉘어 진다고 볼수있다. 표면사에서 음악의 역할이 조화와 인간의 윤리의식을 말한다면 이면사의 조화가 아닌 음악해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솔직히 강의시간에는 정말 집중하며 재미있게 들었던것 같은데 이제 겨우 며칠 지났는데 누군가 내게 음악의 표면사와 이면사를 나누어 설명하라고 하면 쉽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이야기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Chiron의 이야기는 기억에 남는다. 브루델 전에서 인상깊에 보았고 도슨트의 설명도 기억에 남을 정도라 수업시간에 Chiron의 철자를 보는 순간 반가울 정도였다. 당시에는 그의 불운한 죽음과 그에 따른 고통만 뇌리에 남았는데 그가 예술, 특히 그 당시에 음악으로 대표되는 지식에 해박했으면 음악이라는 것이 긍정적인 의미를 가졌기에 그의 성품을 음악을 통해 다시금 각인 시킬 수 있었다. 더불어 다양한 영화에 소재로 등장하는 Siren과 관련된 음악철학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Siren은 Demodokos와 달리 인간에게 트라우마를 일깨워 고통을 안겨주는 반면 자신도 모르는 그 이상을 깨닫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음악이 가질 수 있는 커다란 힘에 대해 알게해주었다. 호메로스 이후 시대에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철학으로서의 음악을 해석하는 방향이 다소 달랐는데 피타고라스의 경우는 하모니 즉, 조화를 가져다주는 것이상으로 인간에게 음악이 미치는 영향을 상당히 큰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숫자화 하는데 공을 세웠다. 반면 플라톤의 경우는 음악을 도덕적인 측면으로 해석할 때 감정적인것이라 판단하고 경계하기도 하였다.
다음 주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서의 음악에 대한 내용으로 강의가 진행 될 예정이며, 다음의 소개하는 책은 수업시간에 강사님께서 추천해주신 도서들이다.
『모래 사나이』(E. T. A. 호프만, 지만지고전천줄 발매 2009.12.2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셀 프루스트, 국일미디어 발매 1998.02.28)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롤랑 바르트, 강 발매 199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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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hematics-the music of reason |
정*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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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지 않는 음악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책을 찾아내었습니다.
"mathematics-the music of reason" 읽어보세요....jean Dieudonne 의 책입니다.
플라톤이 말한 들을 수 없는 musike 는 아마 수학을 의미한 것 같습니다. 플라논의 학당 앞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말라.'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지요...
근대적(?)의미의 music 으로 개념이 분화되기 전의 musike 였으니 가능할거라고 상상을 해봅니다.
^^
다음주에 즐겁게 또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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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체험이 탈물질화되어 우주의 발견에 이르다. |
m**ch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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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는 더이상 물질성을 가지고 우주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법칙"을 우주의 본질로서 이해하려했다. 이는 물질을 떠난 관념의 세계, 즉 meta-physics적인 우주의 본질을 말한다. 이는 '투사'를 통해 만들어지는 일종의 concet이 아닐까.. 또 음악과 우주(cosmos)를 연결시켜주는 매개항이라 볼 수 있는것이 피타고라스에게는 '숫자'라는 것이었다. 즉 영혼(소우주)의 세계와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대우주 사이의 연계성, 공유되고 있는 그 무엇이 '숫자'인 것이고.. 조화로서의 우주의 원칙은 질서인데 이 질서의 특성은 움직이는 것, 흐르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은 움직이고 있고 영혼의 (내적)질서와 세계의 (외적)질서 이 두가지가 동일한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법칙이 음악이다. 즉 음악과 영혼, 우주의 본질이 '수' 인것이다. 피타고라스가 밤하늘의 아름다운 천체를 바라보며 경험한 시각적 체험이 조화로운 상태로서 자기에게 재투사되었을때, 그 시각적 체험이 아마도 청각으로 옮겨온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렇게 시각에서 옮겨온 청각적 체험이 영혼의 세계와 만나면서 경험했던 그 울림이 피타고라스가 말한 천상의 하모니는 아니었을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곧 육체의 발견이 곧 영혼의 발견이고, 우주의 발견이며 음악의 발견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오르페우스는 하데스에서 음악을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그는 금기를 깨버렸기 때문이다. 오르페우스의 음악의 힘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 그 경계를 용해시켜버리는 것이었기에, 그는 당연스럽게 삶과 경계를 잇는 것으로서의 금기를 위반했기에 벌을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어딘가에 떠돌아다니고 있는 오르페우스의 머리가 울고있는 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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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거리 |
정*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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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music even in the beauty, and the silent note which Cupid strikes, far sweeter than the sound of an instrument; for there is music wherever there is harmony, other, or proportion; and thus far we may maintain the music of the spheres. -Sir Thomas Browne (1605-1683)
Might is geometry; joined with art, resistless. -Euripides(480?-406 B. C.)
...mathematicians are really seeking to behold the things themselves, which can be seen only with the eye of the mind. -Plato (427? -347?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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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를 말하다 -음악 |
정*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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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피타고라스를 말하다 96쪽 음악이라는 장의 내용 입니다.
피타고라스는 단순한 여흥의 형태로서 음악에 접근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그보다는 조화를 표현하는 것이 음악이라고 했다. 조화란 혼돈과 불일치에 질서를 가져다주는 신적인 원리다. 따라서 음악은 두가지의 가치를 지닌다. 음악은 수학과 마찬가지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의 구조를 볼 수 있게 해준다. ... 음악은 영혼의 각 부분에 이러한 구조들을 바탕으로 한 조화를 가져다주고, 마음과 육체를 진정시키고 정화시키며, 따라서 완벽한 건강을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준다. ... 그는 특정한 춤이나 몸동착을 병든 육체와 영혼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으로 처방했다. 이때 오보에와 비슷한 악기인 아울로스보다는 8현의 리라가 함께 연주되었다. 피타고라스는 아울로스의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동요시키기 때문에 이러한 목적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피타고라스 공동체의 사람들은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전 피로를 풀기위헤 고안된 멜로디를 들었다. 이것은 음정과 조바꿈을 잘조화시켜 발성하는 것이나, 가끔 말이 들어가기도 했다. ... 피타고라스는 시간과 계절마다 여기에 어울리는 노래와 음계들이 있다고 말했다. 봄에는 리라를 중심으로 음악적 의식을 즐김. 또한 음악을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일화...생략) 피타고라스가 이처럼 음악의 효과에 정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hearing'에 있어서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이것을 통해 우주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천체들의 조화와 일치를 식별할 수 있었다. 우주의음악, 즉 '하르모니아'는 피타고라스 학파 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우주를 음악적 형식으로 묘사했다. 서로 다른 멜로디와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음색, 리듬, 박자, 음정 등이 복잡하지만 부드러운 소리를 만들어내며 얽혀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여기에 자신의 사상과 품성이 녹아들도록 해서 우주의 음악을 모방한 소리의 음악을 만든 다음, 이를 노래나 악기의 연주를 통해 제자들에게 들려주었다. ... 비록 피타고라스가 우주적 조화의 힘을 이해하고, 이것을 다시 구현해내는 작업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그는 지식의 다른 모든 영역에서 그렇듯 음악적 원리들 역시 '상징적 표상의 체계'가 결여된 학생들의 마음에는 굳건하게 뿌리내릴 수 없다고 믿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음악의 요소들을 규격화하고 이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에 착수했다. 어느날 이 문제에 관해 골똘히 생각하며 걷고 있던 피타고라스는 우연히 대장간 옆을 지나게 되었다. 모루 위에 있는 쇳덩이를 망치로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망치들이 내는 소리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든 소리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망치들이 내는 조화로운 화음은 여덟 번째 옥타브와 네버째와 다섯번째 음정이었으며, 단 한번의 불협화음에서는 네번째와 다섯 번째 음정 사이에 놓인 모든 단계의 소리를 냈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이 그토록 발견하기를 열망하던 음악의 법칙이 신의 도움으로 갑자기 눈앞에 '그 자체의 형태로'나타났음을 깨달았다. 그는 대장간을 들어가서 주의 깊게 작업을 관찰했다. .... 그는 이 세가지의 듣기 좋은 음정의 비율이 모두 숫자 1, 2, 3, 4에서 나온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이 네 개의 숫자들은 함께 모여 코스모스의 표상인 테트라크티스를 형성한다. 피타고라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숫자들 사이의 관계성을 통한다면 아마도 천상의 조화를 물리적 현상의 세계의 언어로써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우선 현악기에 초점을 맞춰 실험을 하였다. ... ... 현악기들이 계속해서 어울리는 음정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음악적 체계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는 망치들의 무게를 통해 발견한 숫자와 법칙들을 바탕으로 수학적 비율을 이루는 일련의 여덟음정을 규정했다. 이것이 현재의 도-레-미-파-솔-라-티-도 의 원시적 형태이다. 이것은 '피타고라스의 8현 리라'라는 말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중에는 ... ... 피타고라스 자신도 음악과 수학등의 방법을 통해 영혼의 감정과 육체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을 완벽하게 다듬었다. 그는 음악을 이해함으로써 예술과 기술과 인간 행동안에 담겨진 신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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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과 쇼펜하우어의 '음악' |
m**ch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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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철저한 정신화 과정으로서의 음악'
헤겔에게 있어 예술의 지극한 행복은 절대정신을 감각적으로 현현시키는 임무를 다하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다 (The End of Art) 그래서 예술이 자기를 실현해 가는 3단계, 즉 상징적 단계로서의 건축, 고전적 단계로서의 조각, 마지막으로 낭만적 단계인 회화, 음악, 시로 나아가게 된다. 이는 물질적 외연성의 단계로 부터 시작해서 물질적 개체성을 정신화한 주체성의 단계로 나아가는 단계이다. 따라서 낭만적 단계가 예술의 종말에 가장 가까운 단계이며 여기에서 음악은 시로 건너가는 이전 단계로서 자리하게 된다. 헤겔에게 있어 음악의 변증법은 소리-> 음 -> 멜로디 -> 주체성의 4 단계로 이루어져있는데 각각이 지향의 방식을 통해 하나씩 전 단계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다. 소리는 음이 되기 전까지 자기의식을 갖지 않은 즉자적 존재, 즉 질료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한 물질의 영역, 공간의 영역인 소리의 공간성에 시간성을 불어 넣음으로서 음의 울림이 일어난다. 이 떨림, 운동자체는 아무런 내용도 갖기 못한 텅 빈 공간일 뿐인데 하나의 음이 음 관계성 (톤 관계성)을 지니게 되는 것, 즉 주체가 자기의 주체성을 텅 빈 음의 공간에 집어넣어 멜로디가 되면서 내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선율을 듣는 음악 경험은 결코 향유가 아니라, 이 선율의 운동이 내면의 운동으로 변해서 주체성이 절대정신을 지향해 나가려는 운동이 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즉 음악의 경험은, 멜로디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움직이는 주체의 운동성을 듣는 것이다. 이 주체의 운동성이 지속적인 내면의 변증법을 통해 점점 완전한 내면성, 완전한 절대정신의 단계로 가까이 다가가는 경험인 것이다. 즉 "음악은 아무런 대상도 갖지 않는 자체로 완벽하고 순수한 내면성의 경험이다." "음악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울리는,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만족해하는 정신이고 영혼이다." 어쩌면 헤겔에게 음악(예술)이라는 것은 곧 'swan song'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
쇼펜하우어: '음악의 절대 형식성'
예술은 이념들의 모사물 인데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음악은 다른 예술들과는 다른 우월한 예술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음악의 체험은 육체 체험의 절대적 모사(유사)관계 즉, absolute analogon의 관계 같은 것이다. 즉 음악의 체험은 표상이전의 직접적 체험이고, 내가 육체를 가지고 있음에 대한 신체 경험이며, 온 몸 안에 포만한 느낌, 정서, 열정 등에 대한 직접적 체험인 것이다. 육체 자체가 정서 자체가 되어 버리는 것, 의지의 세계 자체를 육체를 통해 체험하는 것, 이러한 것의 전형적인 예가 Marcel Proust의 무의지적 기억의 체험이 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게 음악은 내용이 담긴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순수한 형식이다. 음악은 내용이 아무것도 없는 오로지 텅 빈 그릇 자체, 절대 형식이다. 즉, 형식 외에는 없다. 우리의 이 텅 빈 형식 경험 안에서 우리의 모든 감정들, 육체적 경험의 요소들이 생성되는 것이다. 생성되고 있는 의지의 체험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운동하며 서로 용해되는 육체 경험의 덩어리들, 마그마 같은 것(Roland Barthes)이다. 이 텅 빈 형식 속에서 다만 육체가 발생시키고 있는 모든 감정, 정서, 덩어리, 마그마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의지 자체를 체험하는 것은 그런 체험인 것이다. 즉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순수형식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다 담길 수 있는 것이며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규정할 수 없고, 기호화 할 수 없는 것을 전부 포함하고 있는 것이 음악이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음악과 언어의 관계는 음악이 절대 언어이기 때문에 그 어떤 철학적 담론의 언어보다 우월한 것이다. 후에 20세기에 아도르노는 그의 미학이론에서 현대예술의 순수 형식을 미이라로 표현했다. 미이라는 속이 텅텅 비어있지만 그 어떤 인간의 육체보다도 생명력을 가진, 죽음마저도 극복할 수 있는 신체성을 표현해내고 있다. 이는 쇼펜하우어 음악 미학의 흐름으로 볼 수 있고, 쇤베르크의 음악과 John Cage의 음악에서 이러한 형식을 생각 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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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결국 자기 스스로를 울린다 |
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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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철학: 음악의 순간과 언어의 떨림 3강
칸트의 세 가지 비판 중에 속하는 것이 음악이었다.
음악은 정지의 개념이 없이 지나치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 시대의 여성이 향수를 손수건에 뿌리고 다니는 것을 비유로 하여 손수건에 지나친 향기는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처럼 음악도 멈춤 없이 절제되지 않고 흘러 하나의 문화영역이 아닌 그저 향유의 영역으로 보았다.
칸트야 말로 음악이 가지는 음악을 형식의 문제로 보려고 했다. 동시에 원하지 않는 속성이 들어가 있는 것이 음악으로 자기의 형식성을 탈 형식화 하려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인식작용을 도와주는 면은 긍정적이지만 또 다른 속성, 자신을 규제하는 형식성을 돌파하고 넘어가려고 하는 향유에 지나지 않는다. 긍정적인 영역을 보고 있지만 음악의 파렴치성, 탈 형식적인 것을 또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음악의 표면사로 보자면 표에 시학 밑에 있어 음악을 언어화 대상에 놓으려는 학자로 볼 수 있다.
헤겔의 경우는 음악의 경험, 영향영역을 사유의 대상이 아닌 음악작품 본질에 대해서 보려 했다. 복잡한 시스템 철학.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자연대상은 물질성 관념철학물질성은 육체성을 가진 것들은 시간적 유한성을 가지고 있어 언젠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정신성은 물질성이라는 장애를 만나는데 이것을 한 단계씩 지양하는 방법을 찾는다. aufheben 정반합 집어낸다. 간직한다. 끊임없이 정반합을 통해 장애를 제거, 부정해나가며 변증법의 마지막 단계가 절대정신. 모든 반들을 변증법적으로 제거해서 더 이상 반을 갖지 않는 완벽한 정신의 상태. 칸트에게는 관념주체로 해당된다. 절대정신이 감각적으로 현현한다. 정신적인 것은 보이지도 만질 수도 들리지도 않는다. 이런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예술. 감각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소리를 들으면서 멜로디를 듣는 게 아니라 내 내면에서 나오는 주체운동성을 듣게 된다. 그 단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음악을 들으면서 점점 음악 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은 내가 내면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서 절대 정신으로 가고 있는 장애를 극복하면서 완전한 내면성, 완전한 절대정신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경험.
음악이란 결국 자기 스스로를 울린다.
쇼펜하우어는 철학보다 예술의 영역에서 더 많이 영향을 주었다.
쇼펜하우어도 엄연한 의미에서 칸트와 플라톤의 영향권 아래 사유한다. 의지와 사유를 나누는 것은 물과 현상을 나누는 등의 이분법적 사고를 부정하지 않았다. 중요한건 의지의 세계라는 것을 염두해둘 때 우리의 삶이라는 하는 것을 쇼펜하우어는 크게 3개의 영역으로 나눴다.
의지 자체의 세계, 이념의 세계, 표상의 세계
표상의 세계에 머물 때는 의지 자체의 세계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인식되는 세상에서 사는 것. 이념의 세계는 구체적으로 의지라는 세계가 혼돈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객관화 할 때 생기는 세계. 내가 표상의 세계가 아니라 의지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데 이 의지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될 때 살 수 있는 것이 이념의 세계. 표상의 세계를 올라간 것으로 객관화 되고 법칙성을 알고는 있으나 이념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더 이상 의지라는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의지라는 것에 대해 휘둘리지 않으며 관조적이 되며 평안을 갖게 된다.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볼 때 불교로 봤을 때 깨달은 자로 볼 수 있다. 집착, 애착을 벗어난 상태. 수도를 통한 깨달음. 표상의 세계 속에 휘둘리지 않고 본질의 세계인 의지의 법칙을 알게 된다. 거리를 두고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상태.
이념의 세계가 의지 자체는 아니다.
깨달은 세계일 뿐 의지자체의 세계는 아니라고 주장. 예술들(건축, 회화, 조각 그리고 시까지 포함)이념의 세계에 속한다. 예술이 표상의 세계 속에 있는 것과 달리 예술가들은 이념의 세계를 모사한다. 인식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이것이 쇼펜하우어의 미학. 한 단계 높은 인식이고 철학에 가까운 인식영역이다. 의식적이지 않고 직관적으로 도달한다. 철학도 이념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으나 개념이나 담론, 사유를 통해 도달하나 직관적으로 이념의 세계를 모사해 내는 사람들이다. 다른 예술들이 이념의 세계에 대한 모사물이라면 음악은 다른 예술과 달리 이념의 세계에 대한 모사물이 아니라 의지 자체에 대한 모사다. 즉 이념도 뛰어넘은 의지자체를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 음악이다. 표상 한 단계 이상이 예술, 그 예술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아주 최고 단계의 영역이라고 정의를 내림.
"예술들은 이념의 모사물이지만 음악은 이념의 모사물이 아니라 의지 자체의 모사물이다.;라고 정의.
견딜 수 없는 고통 혹은 성적충동, 원초적인 욕구가 왔을 때 나의 육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객관화 되면서 내 자체가 육체가 되어버리는 것. 사유에 의해 대상화 되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 것 자체가 되는 것을 직접적 체험이라고 한다. 가령 수술 후 통증이 심해질 때 사유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자체를 느끼는 육체가 내가 되는 것을 내가 알게 되는 것이 음악이다.
음악은 절대형식(언어)이다. 감동을 언어화 이미지화 혹은 그 어떤 것으로 형상화 하는 것은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음악을 표상의 세계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음악을 듣고 감상을 적으라고 강요했던 것은 오히려 음악을 제대로 감상하게 만드는 방법이 아니었다는 사실... 씁쓸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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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
몰락한 삶의 회복, 예술 |
m**ch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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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이 태어났다"
빙켈만의 그리스 세계가 우아한 통일성의 세계 (즉, 화음의 세계)라 한다면 니체가 보고 있는 그리스 세계는 찢어지고 분열된 세계 (즉, 불협화음의 세계)이다. 바그너의 총체예술에 대한 현대성의 의미는 니체의 이러한 예술론을 통해 이야기 될 수 있다. 니체의 음악론은 그리스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서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니체는 생이라는 문제를 예술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생의 몰락이 예술의 몰락이라는, 즉 당대 예술의 내용 없는 형식주의 문제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예술이 몰락한 삶을 다시 회복하고 구원해 낼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니체의 '생(삶)과 예술'
니체는 그리스인들의 삶의 태도에서 비극적 명랑성을 보았는데, 그리스인의 삶은 명랑한 것으로, 그리스의 예술은 비극으로 보았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받아들여 삶을 의지의 세계로 보고 혼돈의 세계인 삶의 본질을 아는 것을 진리라고 보았다. 니체에게 철학을 한다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바탕으로 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의 명랑성은 진리를 깨닫고 난 후, 진리에 매몰되거나 종속되지 않고 과감히 되돌아선 것이다. 이 양가성을 껴안고 있는 생의 테크닉을 예술의 근원으로 보았고, 이러한 것이 구체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그리스 비극이며 또한 이것이 음악의 정신이다.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그리스 비극은 음악적 차원(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언어적 차원(아폴론적인 것), 이 두 축이 어떤 유희를 드러내고 있는 무대이다. 니체에게 있어 음악의 기원과 음악의 정신은 다른것인데, 니체에게 디오니소스의 세계는 혼돈의 세계이며 생을 불가능하게 하는 참혹한 자연의 세계이다. 이는 종잡을 수 없고 끊임없는 흐름의 세계인 음악과 만나는 부분이다. 이 혼돈의 세계는 더 이상 자기를 유지할 수 없는 도취의 세계로 빠져들어가는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자 음악의 기원이 되는 세계이다. 즉 음악의 기원은 자연의 세계다. 하지만 이것에서 끝나지 않고 이를 재현한 음악과 춤(그리스 비극의 합창단)은 이 세계로 부터 심미적 거리를 두고 있는 음악의 정신이다.
반면 아폴론적 세계는 혼돈의 세계를 그대로 이야기하면서 그 안으로 끌려들어가지 않고 그로부터 돌아선, 혼돈의 세계를 정리시킨 세계, 드라마로 구성시켜 극복된 세계이다. 즉 어떤 형식의 영역, 구성의 영역, 소포클레스 같은 영역이다. 이를 통해서 그리스 비극은 혼돈의 삶에서의 어떤 해방감(카타르시스)을 맛보는데 이것이 아름다운 가상, 아폴론적 가상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그리스 인들의 명랑성이라 말 할 수 있다.
'음악하는 소크라테스' 로서의 바그너
니체에게 주지주의자인 소크라테스는 음악의 타락이고 퇴행인 것이지만 자연적인 인간에서 주지적 인간으로 이행해가는 것은 필연적인 인간문명의 과정이었기에 그리스적 비극 모델(아폴론적 비극 시인)이 현대성 안에서 실현되는 모델(아폴론적인 현대 음악가)이 니체에게는 바그너였다. "바그너는 신이 없는 시대에 여전히 살아있는 비극시인이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기 바그너의 음악은 디오니소스를 잃어버린 아폴론이었고 니체에게 이것은 '무정부적 형식'으로 다가왔다. 즉 니체가 초기 바그너에게서 크게 평가했던, 개개의 요소들에게 전부 언어들을 수여해 만들어지는 어떤 전체성이 후기 바그너에게서는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바그너의 위대함은 끝까지 간다는 것이었는데 퇴행성의 벼랑 끝까지 감으로써 퇴행의 끝(유미주의의 극단성)을 보게 해 준다는 것이다. 니체는 그 벼랑 끝에서 비제가 태어났다고 보고 있다. 마치 그리스 인들이 자연의 세계, 혼돈의 세계에서 생명성을 보고 뒤돌아서서 명랑성을 보았듯이 비제는 바그너의 참혹한 음악적 끝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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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바그너-비제 |
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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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니체, 바그너 그리고 비제 세 사람을 중심으로 한 음악철학에 대해 공부했다.
니체와 바그너의 관계는 강사님의 말씀처럼 연인의 연애사와 흡사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선 니체는 그리스인들이 비극적 명랑성, 즉 품위 있는 명랑성을 가졌다고 했다. 유명한 말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은 태어났다.'와 연결해보면 그리스인들의 경우 진리를 만났을 때 이것을 극복하는 '명랑성'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진리를 만나게 되면 괴롭거나 우울에 빠지게 된다. 이때 음악과 같은 예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극복해내는 것을 말한다. 즉 황금뱀은 인간에게 있어 만나서는 안되는 '독'을 가진 존재이다. 하지만 이 독을 가진 존재의 배에는 황금빛이 감돌고 그것을 보게 됨으로써 경외심이 들게 된다. 때문에 황금뱀 자체는 우리에게 거부되는 존재지만 배를 보게 됨으로써 희망을 갖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음악(예술)의 경향이 점차 짙어지면 예술적 탐미주의의 노예적 근성이 생겨나는데 이를 벗어나 음악을 새롭게 탄생시키려 했던 인물이 바그너였다. 이때까지는 니체와 바그너의 관계는 좋았다. 하지만 부루주아적 측면에서의 오페라, 음악이 언어를 집어삼켜버린 오페라를 부정했던 바그너가 점차 테크니컬 적인 면모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그것이 극진성에 다다르자 니체는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를 현대 대중음악으로 옮겨오면 힙합가수들이 랩을 통해 '디스(diss)'하는 경우와 닮았다고 보았다. 서로의 의견이 합일점을 찾았을 때는 함께 긍정적인 경쟁관계를 유지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심하다 싶을 만큼의 디스 과정을 밟기 때문이다. 물론 니체가 다소 외골수적인 부분을 넘어서서 현재에 이르기 까지 바그너의 음악사적 영향력을 판단 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다면 바그너와의 관계가 그렇게 나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강사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서로 비난하고 상대가 초심을 잃은듯한 모습을 보였을 때 그를 포용하기보다 일깨워주며 극진성을 분발시킬 수 있었던 것은 역으로 니체의 끊임없는 비난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관련 용어 ; 데카당스, tone, 심오한 인간적 명랑성, 니체, 바그너, 비제, 극진성, 음악적 언어, 베토벤 9악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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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음악에 대한 사유의 기본적 구조 |
m**ch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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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음악에 대한 사유의 기본적 구조, 계몽의 변증법 제2장: 'siren episode'
이 에피소드는 오디세우스라는 이성적 주체가 siren이라는 자연적 존재와 맞서는 기점이자 음악 탄생의 기점이기도 하다. 음악의 탄생 이후, 아도르노에게는 자연의 지배라는 문명화 과정 자체가 오히려 음악의 퇴행과정이었다고 본다.
즉 음악의 발전 과정은 siren의 노래를 끊임없이 억압하는 과정으로서, 직접적 자기 체험, 육체 체험, 내적 자연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대리만족 기능을 걸어온 것이다('가상적 체험'). 그런 의미에서 현대음악(new music)은 siren의 노래를 음악으로 바꾸어내는 실험의 장소로서 원래의 자기 내적 체험(자연체험)을 되찾는 기점이라고 볼 수 있다.
아도르노가 비판하는 음악은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는데 고급음악과 대중음악이다. 고급음악의 영역은 오디세우스(아도르노: '최초의 이성적 주체')를 통해 설명될 수 있는 역역으로, siren의 음악을 듣기는 했으나 몸이 묶여 있었기에 음악을 듣는 귀는 있어도, 음악을 직접적으로 삶으로 향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주체이다. (듣기만 하는 자들, 음악적 소비주체) 바르트에게 있어서의 아마추어들(삶에서 음악을 직접 향유하는 자들)이 없는 영역인 것이다. 한편 대중음악의 영역은 귀를 틀어막고 노을 저은 자들, 즉 듣는 귀는 없으나 몸만 움직일 줄 아는 주체들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것이 아도르노가 비판하는 현대음악이 나오기 전까지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아도르노는 오디세우스 이후의 문명사가 끊임없이 합리성에 의해 자연이 지배되는 길을 걸어왔듯이 음악에서도 끊이없이 합리성의 영역이 mimesis의 영역을 통제해왔다는 것이다.
즉, mimesis (신체적, 내용, 표현) < ratio (합리성, form, construct) 내용과 형식이 잘 어우러지면 심미적 경험(자기표현경험, 카타르시스 경험)이 나오지만 전통 음악의 과정은 이성에 의한 형식의 아름다움(자기완벽성)이 이루어내고 있는 인위적인 카타르시스의 경험인 것이다. 즉 자유의 경험이 아니라 억압의 경험이다. 그러나 말러로부터 불협화음, 파열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음악의 내파'), 이는 음악의 자기성찰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아도르노는 보고 있다. 즉 형식에 대해 프로테스트가 일어나는, 근본적 자유가 표현되기 시작하는 것이고 현대음악의 시작인 것이다.
현대 예술의 상황, 심미적 명목주의의 시대 (nominalism) (↔ realism, 모방론) 예술은 근본적으로 (생산적) 테크닉인데 지금까지의 예술은 형식을 통해 어떠한 특정한 것을 모방하는 테크닉이 우세하였다. 하지만 이제 어떤것을 모방하는 임무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예술의 기술은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 ('심미적 생산력의 해방': 아방가르드 운동) 하지만 아도르노는 이것이 어떤 지향성을 잃어버린 채 '새로움을 위한 새로운 것'이라는 작위적인 새 것들의 아나키상태가 되어버렸다고 비판한다.
아도르노에게는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잃어버린 신체성과 이성을 조화관계로 만드는 목적성을 실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즉 잘못된 문명화 과정을 수정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예술인 것이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이 잃어버린 신체성을 표현하고 억압된 자유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음악은 mimesis(표현)와 ratio(형식)를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다.
1. 자기동일성의 원칙 : 과거의 음악들은 ratio(합리성, 형식)에 맞추어 mimesis(표현력)를 형식화하려 했다.
2. 타자동일성의 원칙: 현대예술은 ratio(형식)이 mimesis(표현력)을 자기에 맞게끔 형식화하는 것이 아니라 mimesis(표현력)에 ratio(형식)이 따라는 것이다.
하지만 mimesis로 따라가기만 하면 예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 자체'가 되고 마는 것, 즉 자연 속으로 매몰되는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이것은 나치의 문화정치가 만들려는 구도와도 같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신체성 자체 역시 너무도 오랫동안 합리성에 의해 억압받았기 때문에 기형화되어 있거나 화가나 있는 순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씩 합리화시키는 과정을 수행해야 한다. ratio는 근본적으로 mimesis (신체성)을 억압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ratio가 mimesis(신체성)을 끊임없이 따라가는 과정은 신체성이 ratio의 일부임을 깨닫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ratio가 신체성을 끊임없이 따라가면서도 동시에 mimesis가 끊임없이 ratio의 영향을 받도록 해야한다. 이러한 과정, 즉 mimesis가 ratio와 맺는 과정을 깨닫는 과정.. 이 운동이 타자동일성의 원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 아도르노는 표현이 mimesis와 ratio의 조화와 화해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금욕주의적이어야 한다고 본다. 즉 진정한 표현을 위해서 예술가는 끊임없이 양쪽이 독자적으로 분리돼있으면서 끊임없이 화해하는 과정을 이루어야한다는 것이다. 즉 '모순의 생산력'이 아도르노가 지향하는 것이고 아도르노에게 있어 현대예술은 mimesis와 ratio가 끊임없이 화해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완결된 카타르시스가 없고 열린 상태로 주어지기 때문에 운명적으로 미완성이다. 즉 열린 형식으로서 독자, 관객, 청중이 직접 개입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예술은 대리기능을 행하지 않는 것, 어떤 것을 말하지 않는 것, 관객에게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고 있다고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예술은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 되는 것', siren의 노래도 들으면서 몸도 묶지 않는 것,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예술이 가야할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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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공포자, 아도르노 |
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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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철학 제 5강 Th.아도르노
아도르노는 합리주의자이며 엘리트주의자이며 심지어 접촉공포자라고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 까닭은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대중음악은 예술로 보기에도 저급한 것이라고 판단했기에 재즈의 경우는 퇴행적 음악이라고 까지 표현했다. 성악의 경우도 음악이 아닌 인간의 목소리가 주가 되었기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최초의 이성적 주체는 오디세우스다. 사이렌의 음악은 유혹적이며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는데 오디세우스는 이를 귀를 막는다는 행위, 즉 이성적 판단에 의해 사이렌을 이겨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귀를 열어두었으나 몸은 밧줄로 묶어두었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는 열렸지만 결국 접촉할 수 없는 상태, 접촉을 하게 되면 이성을 상실하게 된다. 앞서 아도르노를 접촉공포자라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도르노는 음악이 궁극적 목적이나 표현의 대상은 자유라고 말했다. 카타르시스 즉, 감동을 갖게 되는 계기는 형식화할 수 없는 것들을 형식, 구성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현할 때 느끼는 감정으로써 이 모든 것이 자유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자연스러운 표현이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현대에 이르러 불협화음의 음악이 각광을 받고 있는 까닭은 단순히 음악의 변조를 통해 화려함을 더하거나 구성의 변화를 통한 다양한 음악 구성적 표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에의 갈망을 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음악철학 수업은 음악철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철학을 공부하는 혹은 철학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내용을 전체적으로 아우를 법한 총체적인 내용이 주가 되었다. 예를 들어 독일의 문화정치를 보았을 때 영화부분의 경우는 나치시절 시민을 통제하기 위해 간접적으로 포스터 디자인을 비롯해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예술을 이용했다. 벤야민을 이를 두고 정치의 美학화라고 했다. 예술은 현대에 이르러 점점 더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는데 더 이상 이용당하면 안 된다는 측면이 바로 아도르노가 지적하는 예술의 역할이다. 예술은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현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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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 부정성의 미학 |
m**ch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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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장르의 자율성은 아도르노 미학의 결정적인 부분이다.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주체다운 주체는 문명사에서 한 번도 있어 본적이 없다. 현대적 주체는 합리성이라는 광기에 의해 병들어 있고 함몰된 주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병든 주체로 하여금 변증법적으로 계몽하여 주체의 기억을 불러내어 스스로 구성하는 '주체의 복원'을 주장하는 모더니스트다. 그리고 미메시스를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예술만이 감각적으로 경험됨으로써 이런 주체의 기억을 불러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아도르노 미학의 테마는 주체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아도르노는 현대예술은 운명적으로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는 열린 형식을 이야기한다. 이는 가장 미메시스적인 것과 가장 합리적(ratio)인 것이 팽팽하게 긴장하고 하고 있는 형식의 모습으로 양극적 운동이 소실점에 도달하면서 양극을 포괄하는 형식인 것이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예술이 해야 하는 것은 아직 우리가 도달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도달해야 되는 유토피아의 세계나 주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도르노에게 현대 예술은 유토피아 혹은 진실한 주체를 음화로 기억시켜주는 부정성의 미학이다.
아도르노는 바그너와 스트라빈스키를 세련된 퇴행성 (그래서 유혹성이 강한)이라고 비판하는데 이는 이들 예술의 절충주의와 미성숙성 때문이며 이는 기본적으로 문제의식이 없는, 즉 계몽이 덜 된 예술로 보고 있다.
슈베르트의 서정성
서정성에는 주체가 자신을 표현해서 생산해내는 서정성이 있는가 하면 주체가 자신을 텅 빈 그릇으로 만들어 그 어떤 무언가를 모두 받아들이는 서정성이 있다. 슈베르트의 서정성은 미메시스적인 서정성이다. 자신을 표현해내려고 하지 않고 끝없이 미메시스적인 것을 따라가기 때문에 우리를 눈물 흐르게 하지만 왜 눈물이 흐르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슈베르트의 서정성은 수동적인 주체로서 받아들이는 유동성인데 (변화를 일으키면서 흐르는 정서적 유동성) 이 서정성은 결코 권력화 되지 않는 서정성이다.
즉 오디세우스가 들었던 사이렌 노래의 서정성은 있는 그대로 듣게 되면 위험한 것이기에 합리적 주체는 이 서정성을 형식 속에 가두어버리고 말았지만(권력화) 슈베르트의 서정성은 자신을 권력주체로 만들지 않고 수동적 주체로서 그저 이 서정성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슈베르트의 놀라운 테크닉(합리성)은 서정성을 끊임없이 따라가면서 (합리성이 없는 영역) 합리성의 영역과는 다른 제3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끈다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아도르노는 "진정한 예술은 아마도 동물의 눈과 같을 것이다"라고 표현했는데, 즉 "선한 동물"은 ratio 와 mimesis 가 모두 충족되는 존재로 생각할 수 있다.
베토벤의 "late style"
열린 형식이라는 것은 형식주의적 관점에서는 형식이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자유로운 표현의 요소들을 형식에 가두지 않고 해방시켜주기 때문에 (또 다른 차원의)형식의 완성이라 볼 수 있다. 바로 베토벤의 후기 스타일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열린 형식은 마치 잘 익은 과일이 갈라지고 쪼개지듯 표현의 요소들이 해방되고 있는 열린 형식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현대예술이 운명적으로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는 아도르노의 논지가 나타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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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을 남기는 음악가 아도르노 |
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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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철학 제 6강 Th.아도르노
4주차에 이어 아도르노의 음악철학 수업이 3주째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아도르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강사님 말씀이 현실처럼 와 닿았다. 강의하는 사람도 듣는 수강생들도 아도르노의 이야기에 점점 더 빠져들 뿐 지루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3주라는 어쩌면 짧지 않은 시간동안 그의 저서를 읽을 여유가 없다는 것이(물론 핑계이겠지만)이것저것 해야할 일이 많은 연말이 미워질만한 까닭이 될 줄은 몰랐다.
아도르노. 그의 철학은 헤겔의 형상학을 본받았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지만 합리성만이 예술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던 헤겔과 반드시 뜻을 같이한다고는 볼 수 없다. 아도르노의 경우는 예술이 합리성 뿐 아니라 재구성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아도르노가 좋게 평가한 음악가와 그렇지 못한 음악가가 나뉘게 된다.
직접적으로 음악가에 대한 비평을 말하기 전에 예술을 위한 재구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재구성이라는 것은 주체, 혹은 실체가 있는 그 무엇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자율성을 가진 존재이다. 테크니컬하면서도 대다수의 음악인, 아니 현대 음악가들이 모두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음에도 아도르노가 비판했던 바그너는 바로 주체, 자율성을 기술성의 발전아래 상실했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예를 들면 바그너의 경우는 최초의 이성을 가진 존재이자 자율성을 가졌던 오디세우스와 비교할 수 있다. 아도르노는 여기에 더 나아가 오디세우스가 몸은 밧줄에 묶였지만 두 귀로 사이렌의 노래를 들으며 괴로워하는 것처럼 현대인 혹은 지식인들의 예술은 자학과 같은 고통을 견뎌내며 예술을 즐기고 있다고 까지 말했다.
하지만 바그너를 비판하면서까지 그를 버리지 못했던 까닭은 당대의 예술의 문제점을 인식한 최초의 음악가이며 실제 바그너 역시 오페라를 부정하며 뮤직드라마라는 장르를 시도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그너와 마찬가지로 아도르노의 비판을 받은 사람은 스트라빈스키다. 스트라빈스키는 말러와 종종 비교되며 아도르노의 비난을 샀는데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와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트라빈스키의 경우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분해를 하고 다시 이것을 처음 그대로 조립하려고 시도하는데 오히려 원상태보다 못한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고 이와 반대로 말러의 경우 똑같은 장난감을 가지고 똑같이 분해를 시도하지만 원형보다 더 낫거나 혹은 전혀 새로운 상태의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내 느낌으로는 글쎄...라고 밖에 말하지 못하겠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말러의 음악을 좋아하지만 나의 경우 말러보다는 바그너를 더 좋다. 그가 퇴행을 했을지라도.
2교시에는 슈만과 슈베르트의 관한 아도르노의 칭찬과 비판에 대해 강의가 진행되었는데 이에 관한 강의 역시 마치 신화를 듣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특히 슈베르트를 통해 음악이 가지는 서정적인것, 즉 서정성에 관한 두 가지 측면, 생산주체가 직접 서정성을 표현하는 것과 이와는 반대로 표현하려는 주체는 텅 빈 상태인 수동적 주체로서의 서정성인데 슈베르트의 음악을 통해 우리가 서정적인 상태가 되는 까닭은 단연 후자이기에 그러한 것이고 그 때문에 아도르노의 호평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비슷하게 영화나 책을 읽을 때도 직접적으로 눈물나게 만드려는 시도보다 수동적으로 자연스럽게 흡수되어 내가 전혀 기억하거나 느끼지 못했던 감성을 일깨우는 작품이 더 여운이 오래가는 까닭이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이 되었다. 아쉽게도 아도르노의 강의는 이번시간이 마지막이었지만 다음 기회에 꼭 아도르노 한사람에 대한 철학 강의를 진행하신다던 강사님의 말씀에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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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의 행복은 불행을 인식하는 행복이다. |
m**ch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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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음악미학은 오랜 응시의 시선(미메시스적 태도)으로 현상을 통해 관념을 읽어내는(allegory) "음악적 관상학"이다. 시선에는 두가지 태도가 있다. 첫번째는 어린아이의 시선(미메시스적 시선)으로 자기를 대상에 투여하기 때문에 어떤 대상이던 유희적 대상 (장난감)으로 만드는 시선이고 행복한 시선이자 멈(거리)을 소거시키는 몽상능력으로 동경, 꿈, 몽상의 시선이다. 두 번째는 어른/노인의 시선인데 어린아이의 시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직시하는 멜랑꼴리하지만 냉정한 시선이다.
*말러의 음악미학 "말러의 시선은 환멸적 낭만성의 시선이다" (Antagonism적 시선) 즉 form(ratio)과 표현(mimesis)의 끊임없는 긴장 관계로서 이 두 가지가 양극적으로 극에 이르게 되면서 형식이 파열된다. 이런 파열의 순간에 예기치 않은 음들이 악곡의 전면에 나타나다가 사라지는 것이 말러 음악의 특성이며 아도르노는 이를 "파현"이라 불렀다. 이는 철저하게 날것 (polyphony)이면서도 철저히 합리화된 소리이다. 이것이 말러의 오랜 시선이 궁극적으로 얻어내려하는 소리인 것이다. 이는 오랜 시간동안 형식에 의해 억압되었던 날것의 소리가 말러에 이르러 형식에 의해 해방되어 나타난 것이고 이는 철저히 합리성속에 짜여진 세계 속에서 파현된 톤을 통하여 우리의 날것의 육체성, 신체성이 해방되는 세상(유토피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negative) 지시하고 있다. ("기억하게 만든다") 이것이 현대 예술의 (미완성적) 열린 형식이라는 아도르노의 부정성의 미학이다.
*쇤베르크의 음악미학 지금까지의 음악은 작곡가들의 (주체적)'이념'에 따라 tonality (음들의 관계)를 따라서 만든 멜로디를 통해 감동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이는 나의 감동이 아니라 한 작곡가의 '이념'이 구현해 낸 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감동이다. 또한 tonality라는 형식적으로 짜여진 것 속에는 주체의 이념이라는 것이 사실상 만들어 질 수 가 없는데, tonality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므로 주체의 고유한 표현의 특수성은 주어진 형식체계 속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거짓된 가상인 것이며 청자가 느끼는 감동 역시 거짓된 가상인 것. 오직 전통적 형식만이 승리하는 것이다.
쇤베르크의 12음계법은 톤들을 해방시킴으로서 재료로서가 아니라 톤들이 가진 욕망을 표현해내는 것이다. 톤들은 자체적으로 (울리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고 다른 톤들과 관계 맺고 싶은 욕망이 있다. 톤과 나와의 사이에는 (그 어떤 형식성, 시스템 없이) 관계를 맺으면서 (나의) 투사와 감흥이 일어난다. 즉 음들의 해방이란 본래적인, 원재료적인, 미메시스적인 ("직접성의 회복", "표현의 회복")을 지향하면서 소리의 대상과 소리를 듣는 귀 사이의 본질적인 어떤 관계에서의 해방인 것이다.
하지만 이후 쇤베르크의 12음계법은 또 다른 시스템이 되어버린다고 하는 아도르노의 비판과 더불어 후기 쇤베르크는 앙포르멜 뮤직이라는 비형식적 음악의 범주로 넘어가게 된다.
"현대음악에게 행복이 있다면 그건 불행을 인식하는 행복이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음악은 비탈길로 추락하는 공처럼 텅 빈 시간 속으로 굴러 떨어진다. 이 마지막 경험이,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망각 당함이, 현대 음악이 스스로 택한 유일한 목적이다...그래서 현대음악은 진정한 병 속의 편지다" -『새로운 음악의 철학』-
오늘 강의로 마무리가 된 아도르노의 음악미학도 참 감동이었지만 무엇보다 지금까지 강의 중의 백미는 마지막에 언급하신 김진영 선생님의 미학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리뷰를 적고 있는 지금도 가슴이 뛴다. 선생님 미학의 내용은 옮겨 적지 않겠다. 그저 가슴이 뛰었던 그 감동을 고스란히 마음 한편에 담아두고서 공부를 하다 때때로 떠올리며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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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역사... |
박*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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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킬링필드...인간이 인간을 다시 보게 되는 사건. 기다려지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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