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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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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립니다. |
Y**nAhJoun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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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마음으로 조급해하지않고 잘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사랑의 단상이라고하면 말씀하셨다싶이 달콤함만 바라보게되는데. 바르트의 날카로운 시선과 선생님의 설명이 아..그렇다면을 계속 생각하게해주는 혹은 하지만 이렇게는.. 이라는 생각의 고리를 계속 그리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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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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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moksa의 경지에 이르는 기분입니다. |
배*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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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의 기원은 언어다. 언어는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실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기가 욕망하는 그것을 미워한다. 미워하니까 강제로 소유하려고 한다. 언어는 히스테리다. 질투도 이 히스테리로부터 온다. 부르주아 문화는 이 언어를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부르주아 문화 속에는 깊은 질투의 의식, 원한의 의식이 작동한다. 사랑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부르주아 문화가 가르치는 사랑은,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로 귀결되어야 하듯, 사랑하는 그 사람을 규정하고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질투의 주체는 언어로부터, 부르주아 문화로부터 태어난다. 질투의 주체는 사랑의 주체가 아니라 그것이 언어이든 문화이든 자기를 조종하는 초자아의 법률을 따르는 주체일 뿐이다.
어머니는 놀이터에서 뜨개질만 한다. 아이에게 내 옆에만 있어라 하지 않는다. 아이는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보지만, 엄마를 떠나가지는 못한다.
이것은 질투하지 않음이 아니라 질투를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사실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질투를 모르는 주체는 '엄마'와 같다는 사실에서 웃음이 나왔어요. "남자는 평생 엄마의 마음을 가지고 길러야한다."고 엄마가 늘 이야기하셨던것이 떠올랐거든요 ;^) 강의를 들을수록 왠지 moksa의 경지에 이르는 기분입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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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대단한 교육자였던 것 같네요. 그런데 그런 어머니들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 건가, 요즈음은 남자의 본질적 미성숙성을 잘 아는 여자들이 점점 더 사라져가는 것 같아서... 김진영 (11.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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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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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숙고한 기록이 또 어디 있을 |
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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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프랑스가 자랑하는 20세기의 지성. 『사랑의 단상』은 그의 치열한 사유가 향하는 목적지가 '사랑'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시대를 풍미한 지성인이 '사랑'을 숙고한 기록이 또 어디 있을까. 김진영 선생님, 감사합니다. 또 선생님께 한 줌 지식을 배워가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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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최*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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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와, 김진영선생님괸 함께하는 겨울입니다. 선생님이 이미 육체를 벗으신 걸 얼마전 알고 또한번 놀랐습니다. 바르트를 읽는 길잡이가 되었습니디ㅡ. 카메라루시다를 듣고 이 강의를 들었는데, 이후 애도일기와 프루스트까지 다 듣고 싶네요. 읽고 싶은 책, 듣고 싶은 강의가 생겨서 정말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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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합니다. |
김*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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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의 강의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매일을 애도하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또는 그래야 하는지 모릅니다. 무십코 시나간 시간을 애도하는 법을 배우기. 바르트의 책을 거쳐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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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초콜렛이다 |
김*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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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초콜렛이다.
아름다운 시인 사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오 사랑, 달콤하지만 쓰구나!' 달콤하면서도 쓴 것은 초콜렛 아닌가? 그러고 보니 중독을 일으킬 만큼 매혹적인 향과 맛을 지니고 있고 고독을 닮은 깊고 어두운 빛깔을 지녔다는 점 등 사랑은 초콜렛과 무척 닮아있다. 신들의 음식이라고 불리우는 초콜렛처럼 사랑은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천연의 인간들이 저마다 심연에 지닌 고유한 신성이 아닐까?
독사에 물린 것처럼..
마지막 강의인 이번 강의에선 사랑의 표현과 사랑과 고독에 관한 문제에 대해 다루었다. 플로베르는 쓸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땐 의자에 몸을 내던졌다고 한다. 아무 저항없이 내적인 폭풍우에 몸을 맡기고 이미지로 채워지는 자신을 내버려둔 것이다. 마치《향연 Symposion》에서 알키비아데스가 ' 독사에 물린 것과 같은 고통' 이라고 했던 것처럼 사랑으로 인한 치명적인 고통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그 쓰디쓴 맛을 끝까지 느끼고자 했던 것이다. 왜 독사에 물린 사람은 그 고통을 말하지 않는 것일까? 독사에 물린 사람의 고통은 독사에 똑같이 물려본 사람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랑의 주체는 텅빈 들판에 홀로 선 듯 고독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사랑에 빠진 고독한 주체는 저항하거나 싸우려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이 정처없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둔다. 그리고 그냥 혼자 운다. 이렇듯 감정에 순응하므로 사랑에 빠진 고독의 주체는 뗏목의 주체라고도 하고 긍정의 주체라고도 한다.
비극적 내용에도 불구하고 코러스의 합창으로 인하여 환희가 느끼지는 그리스 비극을 보고 그리스인들이 생을 긍정했듯이...아침에 일어나서도 사랑 때문에 고립무원을 느끼고 혼자 눈물을 흘려본 사람은 그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다는 걸 알 것이다.
어떤 무덤에 귀를 기울이면 합창 소리가 들린다는 말처럼 마음이 헤매이는 날에는 칩거중인 나에게도 이런 노랫소리가 자꾸 맴돈다.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오오~~오 기이퍼어라~~~. '
뗏목을 위하여.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텍스트로 한 김진영 샘의 강의가 비로소 끝났다. 사랑을 다룬 이 강의를 듣고 나는 사랑법에 능숙하고 통달해져서 지혜롭게 사랑을 해나가는 현명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런데 도리어 종종 미궁에 빠진 기분.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는 기분에 빠졌다.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방치해두었던 나의 내면을 자꾸만 돌이켜보았기 때문이다.
상처입기 싫어서 모든 순간 너무나 쿨하게 대응했고 그렇기 때문에 정작 진짜 사랑을 놓쳐버렸고 그랬기 때문에 내면 깊은 곳은 외로움과 회한으로 떨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는 일은 힘겹고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강의를 듣고 리뷰를 쓰는 중간 중간 앞으로는 갑순이처럼 안그런 척하지 말고 사랑을 쟁취해야지 했다가도 삶도 사랑도 내게 너무 어려우니 사랑하며 사는 대신 그냥 미쳐버려야 할까? 아니면 베르테르처럼 사랑에 빠져 자살해버려야 할까? 아니면 사랑 따위 절대로 침입할 수 없도록 마음의 문을 단호하게 잠그고 석고처럼 안전하고 딱딱하게 굳어가야 할까? 이런 저런 방황이 없지 않았다.
이미 현대성에 물들어 이성적이며 영리해진 내가 정처없이 흘러갈 사랑이라는 위험한 뗏목을 덥썩 타는 일이 생기게 될지 어떨지 나도 나의 미래가 무척 궁금하다.
어쨌든 이 강의를 통해 오렌지 시들기 전에 까먹어야한다는 걸 깨달았으니 변화는 있겠지. 게다가 지나간 사랑의 순간들을 기억해내는 소득이 있었으니 매우 감사한 일이다. 마음 속에서 사랑을 끝장내 버리지 않고 아직도 사랑에 대해 공부하고 있으니 그것도 희망적이고 감사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뗏목에 올라 정처없이 흘러갈 사랑스런 인물에 대한 영감이 떠올랐으므로 그것이 나로선 가장 감사하고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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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사랑의 묘법 그리고 오렌지 |
양*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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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의 정체!
난 널 사랑한다구. 넌 왜 내 맘을 몰라! 이번 강의에선 이러한 감정 속에 숨어있는 은밀한 속내에 대해서 분석했다. 이 말 속에 감춰져 있는 속내는 나는 너의 마음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걸 용서 못하며 너를 통제하고 싶다라는 것이다. .
사랑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질투! 사랑을 공부함에 있어서 우리는 질투라는 감정의 정체를 공부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질투란 무엇일까? 질투는 본질적인 것인가? 진정 사랑한다면 질투라는 감정은 어쩔 수 없이 동반되는 것인가?
나의 경우는 어땠는가 생각해본다. 나와 잘해보려는 남자가 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다른 여자가 꼬여든다.그 남자는 나의 관심을 끌고 싶거나, 혹은 다른 이유에서 좀 곤란해하면서도 다른 여자를 끊어내지 못하고 어울린다. 두가지 경우에 나는 다르게 대처한다.
내 관심을 끌고 싶어 일부러 다른 여자를 끌어들이는 경우... 가차없이 버린다. 자기 감정때문에 남을 이용하는 사람은 미련둘 가치가 없는 뭔가 문제가 있는 인품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 있어서 나는 다행히도 명쾌한 성격이다.
그외 다른 이유일 경우가 문제다. 다른 여자와 어울릴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나도 안다. 그런데도 같이 있는 걸 보면 그 구질스런 상황이 싫다. 그때의 내 감정은 1.어떻게 하는지 보겠어!-> 2.왜 이 짜증나는 상황을 정리해주지 않는 거지?->3.상황을 정리해주지 않는다면 쿨하게 때려치울거야!-> 4.원망하지마! 결국 나는 그의 진심을 어느정도 알고 있으면서도 인연을 관둬버린다. 그렇게 인연은 엇갈려버린다. 딴여자한테 콱물려놓고는 뒤늦게서야 진짜 사랑하는 건 너라고 울며 전화해봐야 소용이 없다. 하지만 그럴 경우 마음이 아주 끝나버린 건 아니라서 나의 괴로움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이번 강의를 통해 히스테리란 원하는 걸 얻기 힘든 자기 딜레마를 스스로 덮어서 과대망상 증상을 보이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건 일종의 자기방어이며 원하는 것에 대한 원한이고 이러한 히스테리를 정당화시키는 것이 질투라는 것이다. 질투란 상대의 욕망이 나에게만 고착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실 질투가 없는 편이라고 스스로 믿어왔는데 사실은 변형된 방식으로 질투를 해오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건 절대 질투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다.왜냐하면 인연을 팽개쳐버리고 괴로워했다는 게 그 증거니까.
사랑의 묘법.
질투란 나쁜 것이고 용서란 좋은 걸까? 강사샘은 부르조아 문화가 질투는 유치하고, 추하고,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가르쳐 왔으며 이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들은 질투하는 대신 사랑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이렇듯 질투를 나쁜 것으로, 용서를 좋은 것으로, 교육받고 있으나 이건 진짜 웃기는 개념이니 더이상 선악의 논리에 속지 말아야한다고 하셨다. 허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겠는가. 저마다 입장이 다르면 옳고 그른 것도 제각각 다른 것일 텐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질투는 사랑의 결과가 아닌 두려움의 결과일뿐이다. 나는 여태 질투는 나쁜 것이라 믿었고 그래서 좀 복잡한 상황이 오면 멋지게 툭 털어버리거나 쿨하게 팽개쳐버리고 홀로 외투깃을 올리며 나의 길을 걸었다. 결국 그런 식으로 늘 진짜 사랑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자, 이제라도 오류를 발견했으니 자꾸만 쿨한 척 팽개쳐버리지 말고 사랑의 전략을 다시 세워야겠다.
아이를 주변에서 놀게 하며 느긋하게 뜨개질 하는 엄마처럼, 방향만 알려주고 따라나서지는 않는 원주민처럼, 집착하지 않으면서 상대가 자유의지로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묘법이란다.
내가 건넨 오렌지
사랑이 깍아놓은 과일, 포크로 콕 찍어 내 접시에만 챙겨놓는 일처럼 간편하면 참 좋을텐데.. 사랑은 은근히 강한 내공과 섬세한 전략전술이 필요한 일이었다.
어쨌든 내가 건넨 오렌지.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랑 나눠먹는 거 나도 베르테르처럼 싫을 거 같다. 누구 나눠주지 말고 그 사람 혼자서만 다 먹었으면 좋겠다. 물론 나랑 나눠먹으면 더 좋고! ㅎㅎㅎ. 그런 건 질투가 아니겠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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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들을수록 왠지 moksa의 경지에 이르는 기분입니다. |
주*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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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의 기원은 언어다. 언어는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실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기가 욕망하는 그것을 미워한다. 미워하니까 강제로 소유하려고 한다. 언어는 히스테리다. 질투도 이 히스테리로부터 온다. 부르주아 문화는 이 언어를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부르주아 문화 속에는 깊은 질투의 의식, 원한의 의식이 작동한다. 사랑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부르주아 문화가 가르치는 사랑은,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로 귀결되어야 하듯, 사랑하는 그 사람을 규정하고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질투의 주체는 언어로부터, 부르주아 문화로부터 태어난다. 질투의 주체는 사랑의 주체가 아니라 그것이 언어이든 문화이든 자기를 조종하는 초자아의 법률을 따르는 주체일 뿐이다.
어머니는 놀이터에서 뜨개질만 한다. 아이에게 내 옆에만 있어라 하지 않는다. 아이는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보지만, 엄마를 떠나가지는 못한다.
이것은 질투하지 않음이 아니라 질투를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사실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질투를 모르는 주체는 '엄마'와 같다는 사실에서 웃음이 나왔어요. '남자는 평생 엄마의 마음을 가지고 길러야한다.'고 엄마가 늘 이야기하셨던것이 떠올랐거든요 ;^) 강의를 들을수록 왠지 moksa의 경지에 이르는 기분입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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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니 마음을 구원하라고 가르쳐주는거야" |
최*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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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글로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 글을 쓰면 이야기는 많이 할 수 있지만 사랑하고 있는 주체로서의 나는 사라진다고, 바르트는 그렇게 말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참 웃긴 작업이지요. 저는 인문학을 배우는 학생입니다. 인문대학의 간판 굶는 과(?), 국문과에 재학 중입니다. 고등학교 때 저는 참 모범생이었습니다. 필기 대마왕이었죠. 쓰는 재미에 학교를 다녔는지도 모릅니다. 심화자율학습을 밤 11시 반까지 하는 학교에 다녔는데, 조용한 심자실에서 빡빡하게 필기를 하다가 문득 정신이 들면 그 상황이 어쩜 그리도 허탈하던지. 공부를 하려고 적는데 공부하는 내가 아니라 득달같이 공책에 달려드는 나만 덩그러니 있는 기분. 연애도 그렇게 모범적으로 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기 짝이 없지만, 새벽에 전지 크기의 편지지를 꺼내놓고 얼마나 거창한 말들을 써내려 갔는지. 그땐 그래도 '나 글 좀 쓴다.'하는 오만에 빠져서 밤을 꼬박 새워가며 연애편지를 완성했습니다. 무슨 퀘스트도 아니고. 지금은 누가 돈 주고 쓰라고 해도 못 쓸 거에요, 아마. 대학에 가면 내 인생이 반짝반짝 빛나게 될 거라고, 저 뿐만 아니고 모든 고3 수험생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 근데 별로 달라진 게 없었어요. 고등학교 때 처럼, 대학 전공수업도 열심히 받아적는 내가 있을 뿐. 반짝반짝 빛나는 나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롤랑 바르트 이 자식도 대체 내 인생에 뭐 대단한 놈이라고! 오늘 중간고사가 끝나서 필기장을 다시 들추어보니 그 중에 바르트 1강 필기도 빽빽하게 있었더랬죠. 언젠가 누구에게 들었는지 이제는 출처도 불분명해진 말을 다시 곱씹게 되는 새벽입니다. '공부 왜 하니? 솔직히 이게 뭐가 중요해? 다 니 마음을 구원하라고 가르쳐주는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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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사랑은 속살이다 |
이*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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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자살.
이번 강의에선 얼어붙은 세상, 사랑의 글쓰기 등에 대한 단상들을 다루었다.
젊은 베르테르는 원래 슬픔에 찬 청년이 아니었다. 그러나 롯테를 만나 사랑에 빠진 후 세상이 어찌해볼 수 없이 얼어붙어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사랑을 알기 전엔 아름답고 찬란해 보이기만 하던 세상.그러나 다른 남자의 약혼녀를 사랑하게 된 베르테르는 보이지 않는 규율과 관습으로 얼어붙어있는 세상에 좌절하여 그만 자살하고야 만다.
사랑이 어긋나버린 소설 속 주인공 베르테르가 자살했으니 우리도 잔뜩 절망하여 자살해 버려야할까?
작은 생선토막도 못자르는 내가 50킬로그램도 넘는 나의 육체를 살해할 수 있을까. 게다가 내가 죽으면 남겨진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은 어떻게 될까... 그들이 받을 충격과 상처를 생각해본다면 덜컥 자살해버릴 수 없는 노릇이다. 어찌보면 자살은 내 감정만을 중시하는 너무 이기적인 행동이니까.
소설 속 가상인물들은 걸릴 게 없으니 자살을 택할 수 있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한다. 그래서 우리는 대책없이 마음이 치우칠 경우 그 여리고 위험한 마음들만 그저 차례차례 자살시켜버린다. 마음들을 자살시킨 우리는 얼어붙은 세상을 살아갈 몇가지 방법을 선택해야만 한다.
첫번째, 싸우지 않고 그냥 견디면서 살기. 두번째, 스펙을 쌓는 등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보기. 세번째, 미쳐서 정신병원에 가기. 네번째, 지나간 사랑을 추억하며 사랑에 대한 글쓰기. 다섯번째, 그래도 다시 사랑하기.
사랑은 속살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의 마음은 살갗이 벗겨진 피부상태와 비슷하며 사랑을 하는 동안엔 마음이 무장해제된 순수한 속살 같은 상태라서 더더욱 상처입기 쉬워진다고 한다. 또한 마음이 포장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나므로 사랑의 마음은 음란하다고 한다.
나의 작은 말 한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유난히 잘 삐졌던 한 사람. 간혹 듣기 민망한 음란한 이야기조차 스스로는 괴로운 듯 말하곤 했던 그 사람은 나를 사랑했던 걸까? 아니면 기질이 그냥 별나고 포장되어 있지 않아 음란했던 걸까?
사랑합니다.
비가 오고 나면 봄꽃이 다 져버린다는데 꽃구경도 못가고 끙끙 앓아누워 있었다.
그런데 핸드폰 벨이 울린다. 친구인가 싶어 반가운 맘에 받으려는데 지나가버린 인연...돌이킬 이유도 기운도 없어서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고 다시 잠들었다. 그래도 자꾸만 자꾸만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
멈추지 않을 기세라서 무슨 일이냐고 문자를 보냈더니 봄꽃을 보니 생각이 나서라고.... 제발 한번 볼 수 있겠느냐고... 애인없으면 다시 만나고 싶다고... 꼬치꼬치 주저리주저리...
고맙지만 짬이 없다고 짧은 답문자로 사양했더니 '사랑합니다.'라고 문자가 온다. 느닷없다.
얼마나 안다고... 아직 어려서 그런가? 사랑이 참 쉽기도 하네...
마냥 누워있을 수는 없어서 기운을 차리려 일어나 뒷동산 국사봉으로 쉬엄쉬엄 향했다. 마지막 봄꽃이 활짝 피어있다.
문자의 느낌으로는 여전히 철이 없는 듯 보인다.게다가 지금 선택하면 내겐 마지막 사랑이 될테니 정말 신중히 결정해야한다. 무수히 마음들을 자살시키고 기껏 지나간 사랑에 대한 글을 쓰며 얼어붙은 세상을 살아내고 있는 내가 그래도 다시 사랑하는 길을 택하게 될까? 내 마음 스스로 잘 지켜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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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기 혹은 사랑하기 |
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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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6강 - 미치기 혹은 사랑하기
첫강의에서 말랑말랑한 사랑이야기로 생각하지 말라던 위협은 불과 다섯 강의를 지나고 나서 롤랑바르트의 ㄹ 이 많이 들어감 혀가 꼬이는 부드럽고 감칠맛 나는 이름을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사랑의 주체’가 되는 순간이 올까? 한 장의 꽃잎이 꽃받침을 버리고 낙하할 때 전의 화려한 색깔과 탄성을 잃는 것처럼 세상은 현실과 유리된다. 그럼에도 그 순간 꽃잎은 편안하고 유유하다. 세상의 절정에서 문득 한 점으로 흩어질 때의 비현실적인 감각, 나는 과연 존재하기나 했었는가?
세상은 빈틈없는 시스템이다. 이런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살아간다. 잘살아 가기 위한 그들의 방식은그냥 견디기(미련하지만 자신을 포기하면 제일 쉬운 방법이다.), 노력하기(스펙을 쌓는다던가, 성형을 한다던가.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성격을 고친다던가. 돈과 얼마간의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무기들이다.), 적극적으로 유희하기(개그맨이라던가 바보짓의 메타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몽상하기(꿈꾸기, 교회가기, 등단하기, 문학이나 종교로의 이동은 시스템에서 다른 외부로 건너가지만 그 외부인 영역은 제도안의 영역보다 더 충실하게 사회의 구조를 충실하게 수행한다.), 정신병원가기, 정신병원이 싫다면 사랑하기(글쓰기. 소설이 아니라 소설적인 것, 드라마적인 것. 음악적인 것, 사랑의 유치함속으로 추락하기),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생각보다 화끈하다. 그냥 견디기를 선택한 당신이라면 맨 마지막의 두 개를 권해 드리고 싶다. 정신병원가기 혹은 사랑하기.
바르트 식으로 사랑하기를 선택한다면 ‘사랑의 주체’가 되는 순간 현실과 유리된다. 그러나 미친것이 아니므로 아직 ‘언어의 끈으로 세상과 있어져 있으므로 세상 안에서 유리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비현실적 상태- 광기 담론을 할 때, 광기 무의식담론은 현실을 무시하고 하강환타지이다. -초현실적 상태- 종교담론, 선 담론, 자동기술 등 상승환타지이다.
그러나 사랑의 순간은 탈현실적 상태이다. 도시가 풍경으로 보일 때 내가 외부가 될 때 친숙함과 낯섦의 감각의 변증법이 생긴다. 사랑에 빠지면 어떤 상태를 보여주려 한다. 편지를 쓰거나 편지를 쓰는 상태, 광기의 포즈. 그러나 본질적 고독의 상태에서는 포즈가 없다. 가장 광기에 근접해 있다. 문장은 이 순간에 탄생한다. 휘겨에서 프레그먼트가 발상으로 반짝하는 것이 아니라 광기로부터 건져 올려 낸 슈만의 마지막 소나타처럼.
사랑의 주체는 예민하다. 살갗이 벗겨진 사람이다. 시니피에로 포장되지 않은 날것의 시니피앙, 욕망의 속살, 그 자체인 시니피앙. 살갗 없는 시니피앙의 주체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농담’이다. 시니피에를 시니피앙으로 연결시킨 모든 것은 농담이다. 농담을 모르는 주체는 ‘진지함의 주체’다. 진지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물적 진지함과 진지스러움(정신, 도덕, 교양, 포즈로서의 진지함).
텍스트에도 두 가지가 있다. moderner Text:지적인, 추상적인, 의미적인, 육체적인 것이 정신화된 텍스트들: 이 농담의 텍스트들. - anachronischer Text. 진부한 텍스트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 (이것은 포장하지 않은 직설이다. 그러므로 음란하다. 음란한 것은 독서를 강요한다. 포장이 익숙해서 감춰진 것을 읽으려 하지만 헐벗은 텍스트는 노력하며 읽어야 한다.) 신체적인 것이 정신화 되지 않은, 상상적인 것이 추상화되지 않은, 피부 없는 속살이 시니피앙이 의미의 시니피에로 환원되지 않은 순박한, 유치한, 진지한 텍스트. 과거의 낭만적 가슴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랑에 대하여 말하려한다. 현대적 텍스트는 자기를 분석하며 현대적 러브스토리를 갖지만 낭만적 주체들은 외과적 텍스트이다.
표현(Ex +pression) 속살을 밖으로 짜내다란 뜻의 즉물적인 이 말은 현재 가장 코드화 되어 있다. 내 사랑을 어떻게 글쓰기 할 것인가. 사랑의 글쓰기는 나를 둘로 나누는 일이다. 사랑하는 나와 글 쓰는 나, 사랑의 안에 있는 나와 사랑의 밖에 있는 나. 그래서 사랑의 글쓰기는 사랑을 탐색하기와 동일한 딜레마에 빠진다. 그 사람의 육체를 탐색할수록 매혹이 사라지는 딜레마. 마찬가지로 사랑에 대해 글을 쓸수록 사랑하는 나는 사라지는 딜레마. 사랑하는 나는 없어지고 사랑에 대해서 글을 쓰는 나만이 남게 되는 글쓰기의 혐오감. 뒤를 돌아보자 코드시스템을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면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다가가는 글쓰기는 어떤 것일까?
사랑이 글이 된다면 그 글은 상상적인 것의 언어, 아담의 언어, 육체적인 언어, 자연의 언어, 모든 정신적인 것들도 남김없이 말해지는 언어, 유토피아의 언어일 것이다.
이 언어에 도착하기 위해선 언어의 신화로부터 깨어나기 그러나 언어의 신화를 포기하지 않기 그렇게 깨어나면서 언어의 진창(mottel)과 맞서기 글쓰기가 아무것도 가져다 줄 수 없음을 긍정하기 시작만이 있는 글쓰기, 광기의 글쓰기일 것이다.
인간은 homo-signifiant이다. 기호를 만듦으로서 모든 것이 기호로써 생산된다. 이건은 아담의 언어이며 육체적 언어이며 상상적인 것의 언어이며 자연의 언어이다. 자연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인데 감각 그 자체의 언어 속에는 감각의 모든 것들이 다 발현된다. 당신은 어떤 언어로 사랑을 쓰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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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그 사람이 사랑을 이야기하던 새벽 4시입니다 |
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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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접촉. 그 사람이 더이상 내게 몸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을 때, 대답이 붙임성이 없고 사무적으로 변했을 때. 그때 그사람의 육체는 나에게 먼 육체가 됩니다. 가까운 육체가 나에게 닿으면 나는 집중합니다. 닿은 부분에 집중합니다. 내 관심이 그 물질적 육체에만 집중될 때, 그 사람은 육체로서 나에게 존재합니다. 이것은 그사람이 육체로서 나에게 대상화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이는 상처받은 육체입니다. 상처와 상처가 만나면 교과서 속 이야기처럼, 그렇게 치유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은 히스테리밖에 없죠. 집중. 이것이 한발자국 잘 나아가면 육체와 육체의 직접적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충족되지 않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족되지 않았을 때, 나는 그 사람의 육체를 탐색합니다. 탐색, 앎은 권력이 됩니다. 앎은 소유, 변형, 조작하려고 합니다. 딜레마. '매혹의 근거는 무엇인가?'를 알고자 탐색한 것인데, 그 사람의 육체가 자명해지면 자명해질수록 그 육체의 매혹이 사라져갑니다. 물화(物化)된 것, 고정된 것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혹은 살아있는 것인데 이것을 해부한 것은 대상화 한 것, 물(物)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목소리의 육체.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결코 탐색할 수 없고, 탐색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육체가 있습니다. 그 육체는 '그 사람 전체로서의 육체'이다. 이 육체는 내가 탐색할 수 없는 육체이기 때문에 사실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가장 매혹적일 때, 비로소 나는 그 매혹의 시작점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타자로서의 극점에 있을 때 입니다. 주기(to give)와 헌정하기(to dedicate) 그러니까,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나를 주어야 합니다. 헌정하게 되면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바르트의 텍스트입니다.
강의를 하나씩 수강하면 할수록, 어쩐지 필기를 안 하면서 듣게 됩니다. 자꾸만 내 텍스트를 쓰고 싶어지거든요. 그 사람과 내 손끝이 처음 맞닿았던 순간, 숨결이 느껴지던 순간, 입술이 맞물리던 순간. 대체 이 사람의 매혹의 끝은 어디인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매혹적인 것인가라는 고민은 잠든 그 사람의 얼굴을 탐색하게 만들었었죠. 파리하게 떨리던 긴 속눈썹, 나와 다르게 오똑한 코, 위아래 두께 차이가 별로 없던 입술, 까슬까슬한 턱.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왜 이 사람이 매혹적인지는 알 수 없게 되었죠.
그렇습니다. 그는 탐색할 수 없었고, 탐색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소유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를 '낭비'해야 했습니다. 나는 낭비하지 못했습니다. 철저히 '소비'했습니다. 투자했습니다. 그래서 보상을 바랐습니다. 나는 '낭비'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조차 '사랑'을 말할 수 없었던 거겠지요. 나에게 낭비만 하던 그 사람이 사랑을 이야기하던 새벽 4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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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너, 페르세스를 사랑했니, 안 했니?" |
유*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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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페르세스와 멜리상드 그리고 골로의 이야기>
어느날 왕자인 골로가 숲속을 헤매다가, 울고있는 아름다운 소녀 멜리상드를 보고 한눈에 반합니다. 그녀를 성으로 데려와 결혼을 하지만, 골로에게는 페르세스라고하는 이복동생이 있었습니다. 성으로 데려온 그녀를 보는순간, 페르세스는 그녀에게 매혹됩니다. 둘의 사이를 알게 된 골로는 질투를 일으킵니다. 멜리상드는 사랑의 아픔때문에 죽어갑니다.
골로가 멜리상드에게 물어봅니다.
'너, 멜리상드. 제발 대답해. 너, 페르세스를 사랑했니, 안 했니?'
골로는 대답을 꼭 듣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멜리상드는 이 질문을 모릅니다. 순수의 상태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것입니다. 왜 모르는 것일까요? 그녀가 아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하나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없습니다. 골로의 질문 속에는 사랑의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도덕과 사랑이 엉킨 것입니다. 멜리상드는 이분법적인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쩜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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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그런 절박한 사랑 |
최*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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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나는 욕망하면서 동시에 필요로 한다. 필요는 인간이라는 것을 지키는 마지노선이기 때문에 이것을 건드리면 안된다. 향유가 아닌 '필요'를 가지고 장난치는것은 옳지 않다. 필요를 가지고 장난치지마라.
나는 욕망하며 동시에 필요로 하지만 그러나 사랑의 주체에게서는 욕망이 언제나 필요 앞에서 스스로 무너진다.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부재를 '나를 위해서' 현존으로 만들어서 향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랑의 흐름은 욕망과 필요 사이에 있다. 이것이 사랑의 영역이다. 탈코드적 영역이다. 사랑의 담론이라는 것은 여기서 흘러나오는 수다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 영역속에 머리를 쳐박고, 숨이 막히고 공기가 희박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그는 스스로를 긍정한다. '그래,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주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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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가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그에게 재촉한다. 한 번 만나보자고. 어느 날 우리는 X의 여자를 만난다. 그리고 놀란다. 전혀 X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 어쩐지 X와는 다른 영역에 사는 것 같은 여자. 나중에 우리는 X만 다시 만난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충고한다. 아니라고, 그 여자는 너의 상대가 아니라고, 라고.
그런데 X는 사랑에 빠진 다음부터 좀 이상해진다. 읽지 않던 소설을 읽는다. 지드의 ‘좁은 문’을 읽는다. 기형도의 시를 읽는다. 게다가 부르지 않던 노래도 부른다. 노래방에만 가면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만 자꾸만 부른다.
게다가 X는 우울증에 빠진 것 같다. 술도 안 마셨는데 ‘죽고 싶다, 사라지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것도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또 아주 단호한 얼굴로...
그러더니 급기야 우려하던 일이 일어난다. X가 사라진다. 아무에게도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 휴대폰도 끊어진다. 우리는 실종 신고까지 고려한다. 그러다가 수소문을 해서 X의 여자에게 연락을 한다. 그녀를 만난다 (우리들의 X에게 너무도 안 어울리는 이 여자!). 그러나 소용이 없다. 그 여자도 X가 간 곳을 알지 못한다. 그저 그 사이 있었던 이상한 얘기만을 전해 듣는다.
어느 날 X는, 그것도 비행기 표까지 사들고 와서, 말했다는 것이다. 자기를 당분간 떠나줄 수 있느냐고, 잠시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 올 수 있겠느냐고... 그런데 정말 이상했어요, 여자는 킥킥거리고 웃는다, 날 만자자고 매일 그렇게 보채던 사람이 글쎄..., 여자는 또 낄낄 웃는다, 약간 좀 이상해졌나 생각 했어요, 그러던 사람이 자길 떠나 있어 달라나, 안 보이는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라고 하더니... 그래서 난 말했죠, 차라리 헤어지자고...
우리의 착한 X, 우리의 가엾은 X, 넌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는 거니...
그러다가 드디어 X로부터 연락이 온다. 우리는 달려 나간다. 그 사이 X는 완전히 폐인이 된 모습이다. 납치되었다가 도망 나온 사람처럼 삐쩍 마르고, 수염은 엉망이고, 옷은 더럽고... 어디 가 있었어? 어디서 뭘 했어? 다그쳐 물어도 X는 말이 없다. 겨우 알아먹지 모를 소리만 혼자 중얼거린다: “사랑이 나를 세상의 쓰레기로 만들었다고, 사랑이 나를 쓰레기 같은 세상으로부터 지켜 주었다고...”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판단한다. 모든 게 그 여자 때문이라고, 경박하고 비속하고 주책맞은 그 이상한 여자 때문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X에게 온 힘을 다해서 충고한다, 그 여자와 헤어지라고, 다시는 만나지 말라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라고... X는 웃는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 날 여자는 X의 전화를 받는다. X는 만나고 싶다고 말한다. 여자는 약속 장소로 나간다. X는 먼저 와서 앉아 있다. 그런데 이상해라, X는 주사위를 굴리고 있다, 던졌다가 집어들고, 또 던졌다가 집어 들고... 여자는 마주 앉는다. X가 다시 한 번 주사위를 던진다. 그리고 말없이 여자를 바라보다가 말한다: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요?
ㅡ 김진영 <롤랑바르트 사랑의 단상> 3강 강의록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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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하실래요? 사랑의 주체가 되시겠습니까?
온통 사랑이 넘치는 것만 같은 세상이지만, 주체, 사랑의 주체 그런 사랑은 그런 절박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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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유치하다. |
유*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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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손가락이 닿았을 때
이번 강의에서는 <그 사람의 육체> 등의 장을 다루어서 그런지 듣는 동안 웬지 떠오르는 기억이 많았다. 어쩌다 손가락이 닿았을 때, 탁자 밑에서 어쩌다 슬쩍 발끝이 스쳤을 때, 함께 모여 사진찍느라 어쩌다 어깨가 닿았을 때, 오토바이 안장 위에서 서로의 허벅지가 어쩔 수 없이 겹쳐졌을 때...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데 일어난 그러한 일들... 그런 일들이 가져다준 자잘한 번민들...
사랑하는 이에게 나를 바치는 두가지 방법.
상대에게 줄 수 있는 육체성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한가지는 몸(Body)이고 다른 한가지는 목소리(Voice)라고 한다. 몸은 소비되는 것이고 목소리는 낭비되는 것이다. 몸은 투자하는 것이므로 보상을 바라게 되고 보상을 원하기에 결국 실망과 분노가 생긴다. 그러나 목소리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이므로 단지 그냥 바치는 것이다. 목소리를 바친다 함은 이야기하는 일일 것이다. 즉슨 하염없이 고백하고 대화하는 것도 강력한 사랑의 행위라는 의미이다. 그냥 바치고도 마냥 즐거운 일... 어쩌면 대화는 가장 안전하고 멋진 사랑의 행위가 아닐까 싶다. 덕분에 풀지 못했던 삶과 인연의 의문 하나를 풀었다. 아무리 멋진 최고의 이상형을 만났더라도 대화의 쾌감이 없는 인연은 한계가 있다는 것.
사랑은 유치해.
내가 초록보다 푸르렀던 시절, 이런 군사우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 왜냐면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나 흔하니까 그런 말은 너에게만은 쓰고 싶지도 않아. 사롱해..사롱해...사롱해..'
면회는 커녕 단한번의 답장조차 쓰지 않았는데도 군대에서 제대한 그애는 내게 연락을 해서 한번만 만나자고 했다. 나를 기다리고 서 있는 그애의 품에는 들국화가 한아름 안겨 있었고 그애의 표정은 설레고 수줍고 들떠보였다. 꽃을 든 그애의 모습은 무척 이뻤고 게다가 잔잔한 들국화는 내가 참 좋아하는 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딴 건 뭐하러 샀느냐고 일부러 차고 독하게 말했다. 그애의 실망하는 표정을 즐기면서...
그날까지도 차게 굴었던 건 군대가기 전날 다른 여자아이와 차 마신 걸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지 않는 연하의 철부지를 위해 내 꿈을 접고 인생을 걸 용기도 이유도 없었다.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이쁘다고 칭찬해주었고 못내 떠날 때조차도 너처럼 멋진 여잔 자기 인생에서 다시 못만날 거라고 말해줬던 그애에게... 나는 정말 못되고 지독했고 유치했다.
나에게 주었던 많은 칭찬, 격려, 긍정의 언어들... 고마웠어. 잘살고 있겠지? 원만하고 성실하고 좋은 성품이니까 잘살고 있으리라 믿어.
근데...그때말이야...하필 '사롱해'가 뭐야? 유치하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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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달팽이다 |
함*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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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달팽이다.
롤랑바르트는 사랑이 정신화된 어떤 것이 아니라 그냥 어떤 기관과 같다고 했고 강사선생님은 그것을 달팽이나 페니스에 비유하셨다. 자기만의 집에 죽은듯이 콕 쳐박혀있다가 어느새 기어나와 더듬이까지 세우고 슬금슬금 기어다니는 달팽이. 사랑은 그런 것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감정이 넘쳐나는 이유는 그 사람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내 욕망이 특별히 넘쳐흐르기 때문이므로 사랑의 존재는 애초부터 상처를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한 상처 때문에 욕망이 생기고 욕망은 빈곳(허파, 틈새)에 머물게 되는데 그곳에서 바로 사랑의 상상적인 것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또한 사랑은 교환원칙이 작용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사랑에 대한 욕망은 소유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이다. 롤랑바르트는 이렇듯 문화이데올로기인 신화를 해체하려 하였고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도 이 텍스트를 통해 해체해보려 하였다.
내가 바람둥이였을 때.
롤랑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의 <아토포스>에서 '자신의 타입을 찾아 일생을 헤매는 조금은 힘든 바람둥이'라고 바람둥이에 대해 언급하였다
고백을 한가지 하자면 나도 돈주앙처럼 바람둥이였던 때가 있었다. 이십대 끝자락이었다.
어쩌다보니 어느 하루에 세 명의 남자와 데이트를 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여자로서 유리한 나이일 때 결혼상대를 잘골라보려던 나는 소개받은 모든 남자들을 고루 살피고 만나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엔 치의대 입학했다가 적성이 아닌 듯하여 절에 들어갔다가 다시 공부하게 된 만학도도 있었고, 유학가서 박사따느라 결혼이 늦어진 전임교수도 있었고, 세속에 상당히 물든 여의도 근무자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여의도 근무자였다. 전임교수는 아주 점잖은 분이었지만 매우 꼬장꼬장했고 나에게 독일서 공부한 이론을 가르치려 하였다. 그와의 데이트는 강의실에 앉아 지루한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그중에서 말이 통했던 사람은 치의대 만학도였다. 그러나 그는 종손이었고 가난한 모양인지 레지던트 시절에도 과외까지 뛰어야했다. 그가 늘 바쁜 건 당연했다.
전임교수와 아침산행을 약속한 참이라 북한산에 갔던 날이었다. 아무래도 대화가 겉돌아 점심도 먹지않고 총총 바쁜척 집에 왔다. 그때 여의도 근무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맛있는 거 사줄테니 63빌딩에서 보자고... 나는 얼른 샤워를 하고 세속적인 그의 취향에 맞추어 화장을 하고 빨간 꽃무늬 원피스를 차려입고 나갔다. 그러나 그가 능글거리는 걸 참기 힘들어 일찍 귀가했다. 그 저녁 치의대 만학도에게 맥주나 한잔하자고 전화가 왔다. 나는 다시 차려입기도 귀찮아서 맨얼굴에 청바지 티셔츠 차림으로 털레털레 나갔다. 만학도는 나처럼 안 꾸미고 나오는 여자는 처음 봤다고 신기한 듯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랑 잘해볼 생각이 없거든요. 나 열쇠 세개나 갖다주고 의사랑 결혼할 생각 눈꼽만큼도 없어요.'
'치대 졸업하면 융자가 나와요. 열쇠 세개 안 가져와도 되는데...'
'그래도 당신은 종손이잖아요. 우리집은 딴건 안 따지는데 종손만은 사윗감으로 싫어해요. 아빠가 종손이라서..'
그와 나는 장충공원 벤치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동이 터오는지도 모를 만큼 즐거웠던 모양이다. 그는 바쁜 사람인데 나땜에 잠을 못잤으니 어쩌나 싶어 얼른 헤어져 집에 왔더니 새벽신문이 담장 안으로 툭 던져졌다.
나는 그날 아침 여명 속에서 거울을 보았다.
하루 세 명과 데이트를 했는데도 거울속의 나는 하염없이 정처없고 외로워보였다. 그중 누구도 내가 마음을 기대어 머물만한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어찌나 피곤하던지....허긴 새벽에 일어나 등산다녀왔지, 꽃단장하고 여의도 진출해주셨지, 밤에 맥주마시고 노래방까지 진출했다가 공원서 날이 새도록 수다를 떨었으니 얼마나 심신이 피곤했겠는가..
책한줄 못읽고 글한줄 못쓰고 허무하게 바빴던 걸 깨닫고 나는 그순간 거울 앞에 서서 결심했다. 이 노릇도 고달파서 못할 짓이군. 결혼이고 뭐고 나는 그냥 나의 길을 가야겠다! 그렇게 결혼계획을 내려놓았더니 나는 날아갈듯이 자유로워졌다.
소속에 대한 열망 때문에 하룻날 여러 데이트를 해야했던 나도 그렇게 고달팠는데 일생동안 사랑찾아 헤매며 살았던 돈주앙의 인생은 얼마나얼마나 피곤하고 고달팠겠는가. 만나고 헤어지는 그 모든 과정들이 그 얼마나 머리털 빠지고 주름살 생기는 중노동이었겠는가. 생각해보면 바람둥이도 참 가엾은 중노동자다.
사랑의 쓸쓸한 본질.
어제 읽은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이라는 소설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사랑이란 여자에게 있어선 능력있는 남자에게 빌붙어서 평생 공짜로 얻어먹고 싶은 마음이고, 남자의 입장에선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를 건강하게 낳아 양육해줄 젊고 싱싱한 자궁에 대한 열망일뿐. 우울한 얘기지만 그것이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모든 사랑 이야기는 대중을 기만하는 사기일 뿐이다.'
롤랑바트르가 이 글귀를 읽었다면 아마 가려운데 긁어줘서 고맙다고 인사했을 것이다.
사랑은 그냥 달팽이같이 움직이는 마음의 한 기관일 뿐이고 교환가치를 명백히 따지는 것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순수한 척 계산없는 척하고 싶지만 우리는 사랑의 이면에 있는 이러한 쓸쓸한 본질에서 도피할 수가 없다.
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의 상처로 말미암아 생긴 틈새에서 우리가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자란 상상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독창적이고 특별하다고 인식하고 폭빠질 수도 있다는 것...그렇게 열병을 앓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달팽이가 뭐 어떤가.
슬금슬금 어느새 원하는 곳에 가있는 걸 보면 달팽이도 참 놀랍고 대견하고 귀엽지 아니한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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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너무 근사하고 눈부신 그 사람! |
강*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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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무엇인가?
이번 강의를 내맘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 쪽에는 치켜진 욕망의 팔이 있다. 다른 쪽에는 필요의 내민 팔이 있다. 그 사이에는 탈코드적 영역이 있다. 사랑의 담론은 이 탈코드적 영역에서 흘러나오는 수다이며, 욕망과 필요 사이에서의 방황이 곧 사랑이다.
인간이 사랑에 빠지면 여러 주체들이 생긴다. 우는 주체, 웃는 주체, 주변부 주체, 나그네 주체, 발기하는 주체, 변태적인 주체, 윤리 주체, 긍정하는 주체, 자신의 진실을 배반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주체들말이다.
사랑은 기적이다.
http://cafe.naver.com/artnstudy/4210 위의 사진은 내가 몇년 전 외도에 여행갔을 때 발견하여 찍어온 사진이다. 큰 나무에게 악착스럽게 매달리고 감겨드는 휜나무의 모습이 놀랍고도 징그러웠다.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수다는 폴리티컬 디스커스라고 했던 강사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저 작은 나무가 큰나무를 끌어안고 매달린 이유가 사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매달려서라도 살아야했던 끈질긴 생존욕 때문이었을까? 휜 나무도 사람처럼 욕망과 필요 사이에서 방황했을까? 큰나무는 악착스럽게 매달리는 저 나무를 사랑했을까?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다던 유행가 가사가 있지만 나는 사랑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안에서 들려오는 어쩔 수 없는 목소리에 이끌려 나 아닌 타자가 나보다 중요해지는 본능적이고도 놀라운 경험... 이기적인 인간에게도 그러한 본능이 있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그래서 사랑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내게 너무 근사하고 눈부신 그 사람!
사랑의 작용 중 하나는 사랑하는 동안 사랑하는 상대를 빛덩어리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토록 근사하고 멋진 사람이 있을까 생각되고 상대가 빛덩어리로 보인다면 그건 사랑이란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똑같이 교복입은 무리들 속에서 그애만 군계일학으로 보였던 때가...
그리고 또한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왜 빛이 안 나세요? 이 친구가 그랬거든요.님은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다고.. 성모 마리아처럼 빛이 난다고..'.ㅋㅋ.
그토록 근사하고 눈부신 사람이 내 마음에 또다시 생기게 될까? 그토록 나를 근사하고 눈부시다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또다시 생기게 될까? 눈에 콩깍지가 끼어 서로 반짝반짝 빛난다고 믿는 순수한 착각 속으로 빠져들고도 싶은 계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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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안 그런척 안 하기 |
서*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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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부터의 부자유.
나는 봄을 맞아 말랑달콤한 기분으로 사랑에 대해 공부 좀 해보려 했다. 사랑을 제대로 공부하여 더이상 문제없이 멋지고 근사하고 능숙하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일까? 괜실히 책주변을 며칠동안 헤맸고 어느 바쁜날 시간에 쫓기며 문득 펼쳐들고는 사로잡혀 연필로 밑줄 그어가며 잘 이해한 듯 읽었다가 다시 뭔지 모르겠어서 나중에 밑줄 그어놓은 곳을 보면서도 갸웃하곤 했다. 마치 손아귀에 쥐어도 어느새 빠져나가버리는 바람처럼 자꾸만 빈손이 된 것 같은 기분...짐작할 수 없는 어려운 함정에 빠진 기분...그렇지만 매력적이니 던져버릴 수도 없는 기분...
우리가 즐겨보는 드라마나 영화나 서적에서 사랑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그 누구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할만큼 사랑이 범우주적이고 본능적이고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를 유지하며 널리 읽히는 것이리라.
사랑은 변하고,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아니, 사랑은 변하는 거야.'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묻는 상우에게 은수는 대답한다. 사랑은 회귀할 수는 있어도 반복될 순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랑의 연속성과 사랑의 가변성을 표현한 말이라고 김진영샘은 설명하신다. 예를 들자면 이런 뜻인가보다. 활짝 피어 향기로웠던 꽃이 덧없이 져버리지만 새롭게 열매로 변하게 되는 것처럼, 따뜻한 밥 한그릇이 피와 살과 에너지가 되는 것처럼 사랑이 다른 형태로 연속된다는 뜻... 밥처럼 꽃처럼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바로 그것은 사랑이라는 뜻.
안그런척 안하기.
강의 들은바에 의하면 사랑을 하는 사람은 싸이코와 노이로제의 중간쯤의 상태로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중얼중얼 수다를 떠는 사람이다. 나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아무 대화 없이 혼자 지내는 날에도 누군가에 대한 망상을 짓고 허물고 그 사람은 절대 안된다고 결심했다가 다시 흔들리느라 머릿속이 하루종일 중얼대던 날... 마음은 달려가는데 이성이 절대! 결코! 안된다고 하도 잔소리를 해서 잠도 못자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새벽까지 뜬눈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던 나날들...
김진영샘은 사랑을 신화화시키면 우리의 순진성을 희생시켜야한다고 하신다. 생이란 철저하게 경제논리를 따르는 것이라 속이면 속인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옳으신 말씀이다. 갑돌이와 갑순이도 안 그런척하다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인연이 엇갈려 버리는 큰 고통을 겪었다.
자존심 때문에 안 그런 척하는 점에 있어서 여우주연상감인 나는 이 강의를 듣고 와르르 반성을 하게 됐다. 이웃나라 일본의 대지진과 참사를 보면 언제 휩쓸려갈지 끝장날지 알수 없는 소중한 인생. 앞으로는 안그런 척하지 말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마음가는대로 인연흐르는대로 사랑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려운 함정에 빠진 기분이긴 하지만 이 강의는 참 유용한 강의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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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대체 사랑의 주체가 뭘까요. 머리를 싸매게 되는 주말입니다. |
강*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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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이 책이 많이 팔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사랑'이야기여서일겁니다. 그리고 또, 독자를 탄생시키는 글이어서가
아닐까요? '이 책을 공부하겠다!'라는 마음은 바보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이 아니라, 독자의 입장에서 그냥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면서 내 이야기를 하고자합니다. (사실, 그래서 필기도 제대로 하지 않고 들었더니 많이 어려워요. 동네아저씨 이야기 듣듯이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던걸요~)
바르트는 계속 사랑의 주체(subject of love)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주체'라는 것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와 같은 것이죠. 바르트에게 사랑의 주체라는 것은 우선, 망각된 주체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기억과 망각을 이분법적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짧더라도, 연애를 한번 끝내본 사람- 이별을 해 본 사람은 공감하실겁니다. 잊는다, 잊는다 외쳐도 그게 다 잊는게 아니잖아요. '이 사람을 다 잊었다.'는 생각도 결국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잖아요. 망각이야말로 철저한 기억, 완벽한 기억입니다. 저는 사실 '망각된주체'라는 바르트의 표현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저는 '잊는게 잊는것이 아니다'라는 인생의 진리(?)를 몇 번의 고통끝에서야 깨달았는데, 이 남자, 바르트는 대체 사랑을 얼마나 지독하게 해 본 것일까요.
종영된 후에도 인기를 끌고 있는 한 드라마의 대사를 빌리자면, 이 '어메이징한' 남자 바르트는 사랑을 또한 '고독한 주체'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사랑의 주체는 자기의 운명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사랑하는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이죠. 사랑의 주체는 고리타분한 주체이면서 낭만적 주체입니다. 이 낭만적 주체는 열정 주체이기도 합니다. 열정 주체는 소유를 전제하는 질투 주체와 달리, 어딘가에 도착할 수 없는, 오로지 흐를 수만 있으나 정지할 수는 없는 주체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넘칠 수 밖에 없고, 다 담을 수 없는 사랑의 열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르트는 사실 이러한 사랑을 아는 것은 세상에서 단 하나, 어머니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주체는 달리 말해서, 몽상하는 주체이거나 말하는 주체이기도 합니다. 유일무이한 주체이기도 합니다. (주체가 뭐가 이렇게 많나 싶네요 ;-( )
그러면, 이렇게 많은 주체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바르트는 윤리의 주체라고 답합니다. 여기서 도덕과 윤리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덕은 외부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법률이지만, 윤리는 내부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법률로 자생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내부에서 자기에게 요청되는 법률을 어기려고 하지 않는것이 됩니다.
계속 주체,주체,주체 타령을 하고 있으니까 주체가 맞는 말인지부터 헷갈리게 됩니다. 바르트가 했던 말 중에, '나에게 사랑의 주체라는 것은 싸이코와 노이로제의 가운데에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싸이코, 비정상적인 상태와 노이로제, 정상적인 범주에 드는 신경증의 가운데에는 광기(혹은 변태)라는 상태가 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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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잖아요, 그냥. 사랑이라는 말 |
서*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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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랑하고 있는가?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을 이끌었고, 기호학, 신화학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며 20세기의 사상계를 이끌어간 롤랑 바르트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르트 저 자신이 괴테를 비롯한 사랑의 텍스트를 고찰하며 치열하게 사유한 결과물인 『사랑의 단상』.
철학서도, 소설도, 수필도 아닌 이 기묘한 텍스트를 통해 바르트가 시도한 것은 무엇일까?
사랑. 솔로 생활을 못 벗어나서 허덕이는 네가 무슨 사랑을 논하냐고 웃을 수도 있겠지만, 좋잖아요, 그냥. 사랑이라는 말. 사랑이 꼭 남녀간의 애정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이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어렵습니다. 그래서 강의 스크립트 수준의 리뷰에서 머물지도 모릅니다. 기호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운 제가, 기호학자가 말하는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굉장히 궁금하고 설렙니다.
학자인 R.바르트를 분석하는 또 하나의 학자, 이 강좌의 김진영 선생님께서는 사랑의 단상은 사실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하는 말의 파편들이라고 합니다. 사랑에 빠지면 사람들은 바보같아 집니다. 말더듬이가 됩니다. 언어장애가 생기는 것입니다. 언어장애는 크게 두 가지인데, 단어를 고르지 못하거나 조합을 못하는 것입니다. 각 담론에 맞게끔 맞는 카테고리에서 단어를 뽑아내고, 제대로 이어붙여야 하는데 일상생활에서는 정상인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기만 하면’ 이런 언어장애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말을 잘하기 시작하면 사랑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어렵게 표현해놔서 이렇지, 떠올려보세요. 지금, 혹은 예전의 연애 경험을. 내가 말하고자 했던 건 이게 아닌데,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면 버벅거리다가 집에 돌아와서 이불 속에서 하이킥. 여기서 뜨거운 감자의 <고백>이라는 노래가 떠올랐어요. '이게 아닌데 내 마음은 이게 아닌데 널 위해 준비한 오백가지 멋진 말이 남았는데.'
그러면, 일상생활에서는 지극히 정상인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기는 왜 늘 실패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바르트가 스탕달에 관해 쓴 에세이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즉, 그는 사랑과 언어의 관계, 언어와 신체성, 언어 형식의 문제에 대해 고민했던 것입니다. 바르트가 그의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밝혔듯이, 그는 메타언어와 표현언어 사이에서 늘 힘들어했습니다. 메타언어는 비평언어 행위, 공적이면서 객관적인 언어입니다. 표현언어는 개인의 신체성을 표현하는 언어입니다. 바르트는 메타언어에서 표현언어로 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사랑의 단상>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사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문학 장르 (혹은 글쓰기 형식)으로서 자서전적 글쓰기에 해당합니다. 이 부분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소설은 ‘나’를 통해 세상을 보편적으로 담론화하기 어렵습니다. 세계상실이라고도 하죠. 쉽게 말해서, 이야기는 해야겠고 세상에 관해서는 이야기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기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에 들어서 소설이 공적 담론에서 사적담론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서전도 현대소설의 내면화 문제와 결부되어있죠. 바르트는 “소설적인 것을 쓰겠다.”라고 말합니다.
쓴다는 것, 글쓰기의 문제는 문자-육체-정신의 관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문자, 즉 기호는 사실 육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문자는 기본적으로 ‘쓰는 것’이지만 먼 옛날, 문자는 각인하는 것(새기는 것)이었습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지만, 그 어떤 문자도 육체성과 연결지어서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생경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듣고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소문난 팔랑귀인 탓일까요. 어찌되었건, 이렇게 문자가 육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담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부터 존재했던 문자의 물질성(육체성)이 문자의 정신성으로 바뀌게 되는 계기가 있습니다. 이 계기의 중심부에 Paulus(바울)이 있습니다. 그는 구약과 신약을 분리한 사람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죠.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잉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쓰는 것이며, 돌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랑’의 말씀이고, 이것이 잉크에서 정신으로, 돌에서 가슴으로 변화합니다. 사랑이 정신화되면서 육체에 대한 추방성도 끼어듭니다. 그런데 고백이라는 것은 내밀성을 언어로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딜레마가 생깁니다. 내밀성은 육체성을 지니는데, 언어는 이제 정신화된 문자이기 때문에 육체성이 배제되어있죠. 그래서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언어의 정신성만 드러나게 되니, 이게 고백일까요? 이 문제가 특히 ‘사랑’에서 두드러지게 되는거고요. 바르트는 그래서 ‘소설적인 것’을 쓰겠다고 한 것입니다.
바르트가 보기에 소설은 장르 자체가 문자 정신화 과정의 한 형식입니다. 그래서 자서전적 이야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형식 자체를 파괴하고 초현실주의적인 글쓰기(신화적 글쓰기)를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르트는 이런 형태는 옳지 않다고 봅니다. 형식을 파괴하면 글쓰기 자체가 불가능하고, 비명만이 남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소설의 형식을 따라가면서도 그것을 ‘파편화’시키는 방식을 취합니다. 바르트가 가진 구조주의자로서의 성실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체제 파괴적인 요소는 구조 ‘안’에서지, '외부'에서 가져올 수가 없다는겁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울이 글을 쓰는 형식은 편지였습니다. 오래전, 연애편지를 쓸 때가 생각이 나네요. 편지는 가장 자서전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또, 사랑의 내밀성을 이야기하려 할수록 내밀성은 추방되는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본디 정신과 육체는 갈라놓을 수가 없는 것인데, 이 둘을 갈라놓으려고 하니 정신이 글을 쓸 바닥은 육체 밖에 없는 딜레마가 생기는 것이죠. 코드를 없앤다고 탈코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코드를 어떻게 운용하느냐의 문제 속에서 탈코드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죠. 이 부분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말장난같기도 하고, 비문 같기도 하고 오묘했어요.
<사랑의 단상>은 어떻게 보면 단말마적인, 말의 파편들로 장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바르트는 문자육체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문자육체성은 choreography(안무)입니다. 이것은 기호이면서 탈기호입니다. 하나의 문자지만 동시에 제스쳐입니다. 이 안무에 대해 쓴 글이 fragment인데, 독자는 자기나름의 fragment로서의 텍스트를 만들어내어야 합니다. 문자육체성이 생성해낼 수 있는 무한한 것들 가운데 <사랑의 단상>은 바르트가 쓴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책의 구성방식은 알파벳 순입니다. 시스템화 하지 않고, 그저 병렬해두고 파편화시키겠다는 다짐의 표출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문장에 꽂힌다에 그치지 않고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fragment는 독자와의 관계에서 대화공간(dialogism)을 만듭니다. 이 대화공간을 통해 또 하나의 텍스트가 태어납니다.
사실, (어쩌면 제게만) 굉장히 어려운 강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재미있었어요. 세상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의 사랑이 존재하고, 또 제 스스로의 연애관도 이해하지 못하는 마당에 '사랑은 어떠하다.'고 정의를 내린다는게 애초에 어불성설이겠지요. 그래서 옆 집 사는 바르트라는 아저씨의 사랑관은 이렇다, 정도로 즐거운 마음으로 강의를 들으려고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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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머거리와 말더듬이 |
박*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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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바르트 사랑의 단상 1강 귀머거리와 말더듬이
어쩌다 tv는 관객과 시청자와 게스트와 자기 자신을 다 웃겨야만 하는 절실한 시대적 소명에 빠져 들었을까. 키가 멀쑥한 사회자의 웃음기가 섞인 질문에 진지한 답을 하는 여가수, “아직도 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도 그럴 거예요.” 그녀가 통치자의 마지막 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국가와 국민은 기꺼이 그녀의 사생활을 낱낱이 간섭해 주었다. 그런 그녀는 준열하게 사랑을 이야기하고 사랑의 상복 같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사랑노래를 불렀다. 사랑의 후일담이 된 노래들, 사랑을 사랑하게 된 노래들, 이쯤엔 웃음을 거두고 좀 슬퍼진다. 후일담이 아닌 사랑의 현재 모습은 어떤 것일까.
롤랑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을 통하여 사랑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현재 상태를 기호학적으로 풀어낸다. 담론제공자가 아닌 소설로 건너가려는 공적담론에서 사적 담론으로 건너가는 범주에 있는 책, 사랑에 대해 말하기는 왜 늘 실패하는가에 따른 책. 사랑과 언어의 관계, 언어와 신체성의 문제, 언어형식의 문제를 다루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상을 좀 더 정확하게 해석하자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의 파편들이므로 이러한 파편이라고 한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자의 물질성(육체성) ->문자의 정신성으로 옮아간다. 여기에는 사도 바울(paulus. 신학을 정리하며 구약과 신약을 분리. 기독교의 성서는 자연의 문명성과 일치한다.)은 고린도 후서 3장 3절에 “복음은 잉크로 쓰는게 아니라 정신으로 쓰는 것이며 돌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가습에 새기는 것이다”라는 말로 문자가 물질에서 떨어져 나와 정신의 영역으로 분리시킨다. 바울의 복음은 편지형식이며 이것은 러브레터이다. 사라진것 같지만 없어질 수 없는 것은 육체성이며 몸을 바꾸어서 어딘가에 존재한다. 문자속에 러브레터적인 것이 있을 수 있다. 정신의 귀족성은 육체를 보면 두려움을 느낀다. 육체를 숭상한다.
사랑의 단상은 피겨와 아규먼트, 프레그먼트로 구성되어 있다.
1. 피겨 “나는 빠져들어간다. 나는 쓰러진다”
피겨는 하나의 문자이며 제스처이다. 필드가 형성되고 나름의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 무엇 으로도 가두어 놓을 수 없는 상태. 아주 많은 방식으로 자신을 생성시킨다. 독자의 다중해 석이 가능하다. 파편적 문장이며 멜로디속에서 어떤 톤하나가 귀에 들리는 것처럼 텍스트 속에서 돌출된 한 문장, 어떤 한 문장에 꽂히는 것 푼크툼현상을 말한다.
문자육체성으로 하나의 특별한 현상이다. 문자와 육체가 함께 있는 것. choreography (안 무) 시나 음악에 맞춰 몸이 조응하는 테크닉. 기호이며 탈기호이다.
2. 아규멘트 - 피겨를 담론화한다.
3. 프레그먼트(소설적 인 것) - 피겨로 다른 프레그먼트를 만들어 내야 한다. 휘겨는 시니피에를 갖고 있지 않은 시니피앙, 수없이 많은 시니피에를 가진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담론이 아니며 소설도 아니다. 하나의 피겨에 독자 스스로의 담론(프레그먼트)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이 이 책을 입체적으로 읽는 방법이다. 사랑에 관한 한 귀머거리였다고, 말더듬이였다고 슬퍼하기엔 아직 이르다. 당신에게 있는 사유, 사유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을 봉합하는 파워풀한 능력이다. 그러나 자의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렴하고 통찰하고 아파하면서 때에 따라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적극적 사유, 지적 교양 외에 환타지, 승리나 패배의 경험, 생의 작은 고독들로 이뤄진 경험들과 적극적으로 만날 때 실험적 사유가 된다. 그러니 다음 시간을 위하여 “나는 빠져들어간다, 나는 쓰러진다...”, 부재하는 이, “근사해!”, 다루기 힘든 것, 코에 난 작은 점, 고뇌, 사랑을 사랑하는 것, 고행자, 아토포스, 기다림, 검은안경, “모든 안착한 사람들”, 파국이라는 피겨로 프레그먼트를 만들어 보라, 이 책에 대한 적극적 개입과 동시에 긍정적 독자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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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겁고 매혹적인 사랑 |
이*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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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사랑의 주체 또는 고독의 시니피앙 - R.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1강 『사랑의 단상』을 펼치며 :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적인 것으로의 내파
우리는 피켓 들고 나가 시위하는 게 정치적이란 것, 시스템 바깥에서 사고하는 것, 시스템 바깥에서 사고되지 않는 것을 불러오는 것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쨌거나 정치적이라는 것은 여기서 긍정의 개념이 전제된 것으로 보인다. 정치는 관계에서 자연스레 도출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복잡한 사회의 관계망 속에서 내 위치를 사유하고 또 어떻게 자리할 것인가를 고찰하는 게 이를테면 정치를 작동시키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서 출발하는 것 나의 내재적인 욕망을 가리켜 시스템의 경계에서 충돌을 감행하는 것, 나의 상처를 돌아보지 않는 지점에서 다시 출발하기 바르트를 가지고 어디까지 사유할 수 있을까? 김진영의 언어를 가지고 바르트를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걸까? 오히려 나는 바르트에 부딪치는 방법으로 그의 사유 밖이 아니라 그의 사유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다시 다른 레퍼런스가 필요할지를 나의 사유의 한계를 시험하는 가운데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정치는 내가 만든 구조, 나에게 부여된 구조,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잊어버린 것의 회복, 기억을 통해 현재를 조망하기, 아니 현재에서 벗어나는 차원에서 기억을 사유하기 등 여러 차원에서 다가오며 약간은 혼란스럽다.
난 선생님에게 강의 말미에 질문을 던지며 벅차오르는 가슴과 함께 열패감마저 들었다. 바르트가 한 번에 밀어닥치는 것, 그렇지만 아직도 난 바르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고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인가에 대한 것.
바르트는 풀리지 않는 얼굴, 떠나지 않는 얼굴, 보고 싶다고 되뇌며 섬광처럼 오는 얼굴 하나를 다시 불러 들였다. 나를 떠난 사람, 아니 내가 떠나보낸 사람, 아니 붙잡지 못 했던 사람, 이러한 내재적인 아픔에의 침잠은 멜랑콜리 상태로 나를 빠뜨렸고, 한편 난 이 상태가 좋았다. 반면 정치적이라는 말에 지금에 내가 그것과 과연 어떤 관련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스스로 들었던 것이다.
아폴론의 빛의 무대에서 디오니소스 어둠의 배우가 돼서 가상의 말로써 실재의 힘들을 작용시키는 니체, 반면 바르트의 목소리는 무엇인가? 선생님은 단편들 fragment로 이뤄진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단편집으로 구성해 나간다고 했다. 그 사이 사이의 봉합선은 사유로써 기워진다. 선생님은 자신만의 바르트를 가지고 소설을 쓰는 것이다. 떨어진 시공간의 늪에서 섬광처럼 오던 또는 사라져버리던 텍스트는 비로소 제 몸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이는 완성이 아니다.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창조적 이차 텍스트가 될 것이다. 곧 소설은 진리들의 나열이 아니다. 특정한 개념어의 사조로 편입되는 것 역시 아니다. 이는 삶이 자리하는 철학인 동시에 삶을 깨닫게 하는 사유의 조각들이 묻어나는 곳이다. 바르트의 분절적 텍스트는 엄밀히 말해 조합되는 대신 구성될 것 같다. 바르트가 말한 저자로서의 주체적 독자를 성립시키면서. 바르트는 바르트에서 말을 하는 것 같다. 바르트의 기약 없는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것도 같다. 누군가를 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 누군가는 오히려 부재하는 누군가인 것 같다. 아무래도 니체가 나타난 마당에 니체와 바르트의 섬세한 차이 그리고 그 상관관계를 좇아 가보는 것 역시 필요할 것 같다.
삶을 조각하는 것은 사유의 몫인 것 같다. 삶은 분절되고 편재하며 드문드문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는 그저 흘러가고 사라지고 우울해진다.
이것들을 다시 붙잡고 돌이키고 반성하는 과정이 곧 삶을 조각하는 사유가 아닐까? 선생님은 사유는 능력이고 파워라고 했다. 또한 다른 것과 다른 것을 잇되 -사실 사유는 주체의 행위이고 이는 인위성이 개입된다-최대한 자연스럽게 전거를 찾고(또 사유하고 사유하며) 성립시키는 행위라고도 했다. 모 대통령의 얼마 전 무릎 꿇은 행위와 장 모 배우의 죽음을 연결 짓는 건 사유다. 차이를 발견하고 주목하다는 게 중요하다고 한 선생님의 말과 이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전자가 시스템을 통찰하고 권력의 영향을 고찰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사유의 지속적인 과정과 개별 특수성을 죽이며 종합하는 지적 권력에 저항하는 것일 것 같다.
『카메라 루시다』 강연을 통해서 전달 받은 것들이 많고, 이것 역시 봉합과 차이의 발견이 중요하다. 봉합은 차이들의 인지와 그것의 종합적 사고인 듯하다. 아직 강의 안에서 발견하지 못 한 것들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어느덧 『사랑의 단상』의 시기로 넘어가고 있다. 이번에는 두 번의 연장이 주어지지 않을까? 처음이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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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치적인 것의 정치적인 것으로의 내파 |
이*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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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사랑의 주체 또는 고독의 시니피앙 - R.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1강 『사랑의 단상』을 펼치며 :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적인 것으로의 내파
우리는 피켓 들고 나가 시위하는 게 정치적이란 것, 시스템 바깥에서 사고하는 것, 시스템 바깥에서 사고되지 않는 것을 불러오는 것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쨌거나 정치적이라는 것은 여기서 긍정의 개념이 전제된 것으로 보인다. 정치는 관계에서 자연스레 도출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복잡한 사회의 관계망 속에서 내 위치를 사유하고 또 어떻게 자리할 것인가를 고찰하는 게 이를테면 정치를 작동시키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서 출발하는 것 나의 내재적인 욕망을 가리켜 시스템의 경계에서 충돌을 감행하는 것, 나의 상처를 돌아보지 않는 지점에서 다시 출발하기 바르트를 가지고 어디까지 사유할 수 있을까? 김진영의 언어를 가지고 바르트를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걸까? 오히려 나는 바르트에 부딪치는 방법으로 그의 사유 밖이 아니라 그의 사유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다시 다른 레퍼런스가 필요할지를 나의 사유의 한계를 시험하는 가운데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정치는 내가 만든 구조, 나에게 부여된 구조,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잊어버린 것의 회복, 기억을 통해 현재를 조망하기, 아니 현재에서 벗어나는 차원에서 기억을 사유하기 등 여러 차원에서 다가오며 약간은 혼란스럽다.
난 선생님에게 강의 말미에 질문을 던지며 벅차오르는 가슴과 함께 열패감마저 들었다. 바르트가 한 번에 밀어닥치는 것, 그렇지만 아직도 난 바르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고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인가에 대한 것.
바르트는 풀리지 않는 얼굴, 떠나지 않는 얼굴, 보고 싶다고 되뇌며 섬광처럼 오는 얼굴 하나를 다시 불러 들였다. 나를 떠난 사람, 아니 내가 떠나보낸 사람, 아니 붙잡지 못 했던 사람, 이러한 내재적인 아픔에의 침잠은 멜랑콜리 상태로 나를 빠뜨렸고, 한편 난 이 상태가 좋았다. 반면 정치적이라는 말에 지금에 내가 그것과 과연 어떤 관련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스스로 들었던 것이다.
아폴론의 빛의 무대에서 디오니소스 어둠의 배우가 돼서 가상의 말로써 실재의 힘들을 작용시키는 니체, 반면 바르트의 목소리는 무엇인가? 선생님은 단편들 fragment로 이뤄진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단편집으로 구성해 나간다고 했다. 그 사이 사이의 봉합선은 사유로써 기워진다. 선생님은 자신만의 바르트를 가지고 소설을 쓰는 것이다. 떨어진 시공간의 늪에서 섬광처럼 오던 또는 사라져버리던 텍스트는 비로소 제 몸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이는 완성이 아니다.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창조적 이차 텍스트가 될 것이다. 곧 소설은 진리들의 나열이 아니다. 특정한 개념어의 사조로 편입되는 것 역시 아니다. 이는 삶이 자리하는 철학인 동시에 삶을 깨닫게 하는 사유의 조각들이 묻어나는 곳이다. 바르트의 분절적 텍스트는 엄밀히 말해 조합되는 대신 구성될 것 같다. 바르트가 말한 저자로서의 주체적 독자를 성립시키면서. 바르트는 바르트에서 말을 하는 것 같다. 바르트의 기약 없는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것도 같다. 누군가를 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 누군가는 오히려 부재하는 누군가인 것 같다. 아무래도 니체가 나타난 마당에 니체와 바르트의 섬세한 차이 그리고 그 상관관계를 좇아 가보는 것 역시 필요할 것 같다.
삶을 조각하는 것은 사유의 몫인 것 같다. 삶은 분절되고 편재하며 드문드문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는 그저 흘러가고 사라지고 우울해진다.
이것들을 다시 붙잡고 돌이키고 반성하는 과정이 곧 삶을 조각하는 사유가 아닐까? 선생님은 사유는 능력이고 파워라고 했다. 또한 다른 것과 다른 것을 잇되 -사실 사유는 주체의 행위이고 이는 인위성이 개입된다-최대한 자연스럽게 전거를 찾고(또 사유하고 사유하며) 성립시키는 행위라고도 했다. 모 대통령의 얼마 전 무릎 꿇은 행위와 장 모 배우의 죽음을 연결 짓는 건 사유다. 차이를 발견하고 주목하다는 게 중요하다고 한 선생님의 말과 이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전자가 시스템을 통찰하고 권력의 영향을 고찰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사유의 지속적인 과정과 개별 특수성을 죽이며 종합하는 지적 권력에 저항하는 것일 것 같다.
『카메라 루시다』 강연을 통해서 전달 받은 것들이 많고, 이것 역시 봉합과 차이의 발견이 중요하다. 봉합은 차이들의 인지와 그것의 종합적 사고인 듯하다. 아직 강의 안에서 발견하지 못 한 것들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어느덧 『사랑의 단상』의 시기로 넘어가고 있다. 이번에는 두 번의 연장이 주어지지 않을까? 처음이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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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합니다. |
윤*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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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 강의는 체계적이고 심도있는 강의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문학강의, 철학강의, 교양강의로써도 모든 면에서 훌롱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어떤 강의도 후회 없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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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숙현 님:) 네 맞습니다. 선생님의 모든 강의는 옳습니다. 좋아요.. 선생님의 깊이있는 사유와 즐거움, 그리고 멜랑콜리와 우울까지 배우고 싶은 아트걸이었습니다.ㅎㅎ 아트걸 (15.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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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의 후기 사상 |
오*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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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의 후기 사상, 로만 프로젝트 중에 한 작품, 사랑의 단상에 대해서 책 제목을 단상이 아닌 다른 제목이 더 적절하다고 김진영 교수님은 강의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호학적인 근간으로 문자의 물질성이 정신성으로 가는 단계를 설명하시면서 강좌를 이어나가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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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영 님:) 강의를 열심히 듣고 계시군요. 비가 와 더위가 한풀 꺾였지만, 배움의 기쁨을 위하여! 아자아자! admin (14.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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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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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너무 좋은 강의를 듣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의 강의도 끝나가네요.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8강에서 '질투'부분을 얘기하실 때, 사랑의 시니피앙이 아닌 사회적 코드, 욕망(시니피앙)이 아닌 시니피에(의미화) 에 의한 사랑을 지양하시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사실 그 시니피앙(욕망)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의미화된 시니피에 ( 외모, 돈, 몸매, 다른 무엇) 와 어떻게 구별이 되는지 확실히 집어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원시인들이 사랑에 빠졌을 때 그것은 의미화된 시니피에인지, 아니면 자신의 원초적 욕망 (시니피앙)인지 , 어떻게 구별할 수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 사랑을 알 때부터 시니피에의 지배 속에서 자신의 욕망(시니피앙)이 발현되는 것이 아닐까요? 지식이 짧아 여쭙습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문의를 위해 교수님의 메일주소도 알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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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운명 |
권*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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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무가 꽃을 사랑하듯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무어든 돈으로 교환되는, 그게 아니면 모든것이 무용한 자본주의에서 사랑을 사랑으로 바꿀수 있으려면 사랑 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생이란 것과 함께 사랑의 불가피함에 대해 생각하는 강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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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단상 |
황*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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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최소한 사랑의 중얼거림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들은 그 최소한 인간이 가져야 할 경우나 예의에 대해서는 되돌아 보며 생각을 하는거 같아요. 그러니까 사랑에 대해서 되돌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나마 세상을 살만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러면요. 배신을 일삼는 사람들, 그들이 중얼거리는 책은 없을까요? 배신을 일삼고, 배신을 두둔하는 그런 사람들의 욕망을 우리가 미리 견제할 만한 책은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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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질문이네요. 문제는 ''배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라는 고민이겠죠. 배신에는 두 가지가 있을 거예요. 하나는 의도적 배신 - 예컨데 공공성을 사유화해서 사적인 잉여가치를 얻어내고자 하는 담론들은 우리 사회 안에서 범람하고 있지요 (늘 ''국민''을 외치는 이들, ''자유경쟁''을 외치는 이들, 온갖 ''순수의 우상들'' (신, 예술, 행복, 정의 등등)을 외치는 이들...) 또 하나는 무의도적 배신 - 아픔과 선의에서 출발하지만 아직은 통렬하지 못한 그래서 미숙할 수 밖에 없는 비판의식 때문에 자기도모르게 기존체제를 옹호하고 마는 역설적 배신도 있지 않을까요. 선의가 곧 정의로 이어지는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겠지만, 과연 그럴까요? 글쎄요, 제가 아는 범주 안에서는 아도르노, 특히 <미니마 모랄리아>를 권하고 싶군요. 적극적으로 도전한다면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일 것 같군요. 저 또한 그랬으니까... 또 하나 추천한다면 <순진함의 유혹> (파스칼 브뤼크네르, 동문선)도 있겠네요. 아도르노보다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고요. 하긴 번역이 또 좀 그러니 아주 편하게는 못 읽겠지만... 김진영 (11.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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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꽃잎이 꽃받침을 버리고 낙하할 때 |
박*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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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강의에서 말랑말랑한 사랑이야기로 생각하지 말라던 위협은 불과 다섯 강의를 지나고 나서 롤랑바르트의 ㄹ 이 많이 들어감 혀가 꼬이는 부드럽고 감칠맛 나는 이름을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사랑의 주체’가 되는 순간이 올까? 한 장의 꽃잎이 꽃받침을 버리고 낙하할 때 전의 화려한 색깔과 탄성을 잃는 것처럼 세상은 현실과 유리된다. 그럼에도 그 순간 꽃잎은 편안하고 유유하다. 세상의 절정에서 문득 한 점으로 흩어질 때의 비현실적인 감각, 나는 과연 존재하기나 했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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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먹고놀고 책읽고 싶은 분들! |
조*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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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에서 언급되는 사랑의 텍스트들을 읽고 싶어서 세미나를 열였습니다. 책에서 인용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향연>은 물론이고, 선생님이 언급하신 책들(가와바타 야스나리 작품, 롤리타)까지 읽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참에 사랑의 고전격인 텍스트들인 <오르페우스에 에우리디케>,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미오와 줄리엣>와 마르케스의 최신작인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까지 읽으려구요.
말이 좋아 세미나지 사실은 책읽고 뒤풀이하는 모임입니다ㅋ 현재 멤버는 저까지 포함해서 5명입니다. 카페에서 부담없이 책읽고 사람들과 놀고 싶은 분들 맥주라도 한 잔 걸치면서 사랑의 텍스트들을 읽고 싶은 분들 언제든 연락주세요!
자세한 내용은 아래를 클릭~ http://cafe.naver.com/eroslreader
문의: 조지훈(010-6308-7223) 시간: 매주 토요일 오후 5시30분 장소: 까페 시클라우드(http://cafe.naver.com/ccloudc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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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의 수업마다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
심*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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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의 수업마다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벤야민 수업때 처음 뵌 이후로 항상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단상』 첫 수업 느낌도 좋습니다. 일 때문에 가끔 수업 빠졌는데, 이번 수업은 꼭! 한 번도 빠지지 말고 다 들어야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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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사랑을 이야기하던 새벽 4시입니다 |
배*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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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하나씩 수강하면 할수록, 어쩐지 필기를 안 하면서 듣게 됩니다. 자꾸만 내 텍스트를 쓰고 싶어지거든요. 그 사람과 내 손끝이 처음 맞닿았던 순간, 숨결이 느껴지던 순간, 입술이 맞물리던 순간. 대체 이 사람의 매혹의 끝은 어디인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매혹적인 것인가라는 고민은 잠든 그 사람의 얼굴을 탐색하게 만들었었죠. 파리하게 떨리던 긴 속눈썹, 나와 다르게 오똑한 코, 위아래 두께 차이가 별로 없던 입술, 까슬까슬한 턱.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왜 이 사람이 매혹적인지는 알 수 없게 되었죠.
그렇습니다. 그는 탐색할 수 없었고, 탐색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소유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를 '낭비'해야 했습니다. 나는 낭비하지 못했습니다. 철저히 '소비'했습니다. 투자했습니다. 그래서 보상을 바랐습니다. 나는 '낭비'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조차 '사랑'을 말할 수 없었던 거겠지요. 나에게 낭비만 하던 그 사람이 사랑을 이야기하던 새벽 4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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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낭비, 그 낭비... 김진영 (11.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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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유치해 |
김*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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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손가락이 닿았을 때. 이번 강의에서는 <그 사람의 육체> 등의 장을 다루어서 그런지 듣는 동안 웬지 떠오르는 기억이 많았다. 어쩌다 손가락이 닿았을 때, 탁자 밑에서 어쩌다 슬쩍 발끝이 스쳤을 때, 함께 모여 사진찍느라 어쩌다 어깨가 닿았을 때, 오토바이 안장 위에서 서로의 허벅지가 어쩔 수 없이 겹쳐졌을 때...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데 일어난 그러한 일들... 그런 일들이 가져다준 자잘한 번민들...
사랑하는 이에게 나를 바치는 두 가지 방법. 상대에게 줄 수 있는 육체성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한가지는 몸(Body)이고 다른 한가지는 목소리(Voice)라고 한다. 몸은 소비되는 것이고 목소리는 낭비되는 것이다. 몸은 투자하는 것이므로 보상을 바라게 되고 보상을 원하기에 결국 실망과 분노가 생긴다. 그러나 목소리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이므로 단지 그냥 바치는 것이다. 목소리를 바친다 함은 이야기하는 일일 것이다. 즉슨 하염없이 고백하고 대화하는 것도 강력한 사랑의 행위라는 의미이다. 그냥 바치고도 마냥 즐거운 일... 어쩌면 대화는 가장 안전하고 멋진 사랑의 행위가 아닐까 싶다. 덕분에 풀지 못했던 삶과 인연의 의문 하나를 풀었다. 아무리 멋진 최고의 이상형을 만났더라도 대화의 쾌감이 없는 인연은 한계가 있다는 것.
사랑은 유치해. 내가 초록보다 푸르렀던 시절, 이런 군사우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 왜냐면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나 흔하니까 그런 말은 너에게만은 쓰고 싶지도 않아. 사롱해..사롱해...사롱해.." 면회는 커녕 단한번의 답장조차 쓰지 않았는데도 군대에서 제대한 그애는 내게 연락을 해서 한번만 만나자고 했다. 나를 기다리고 서 있는 그애의 품에는 들국화가 한아름 안겨 있었고 그애의 표정은 설레고 수줍고 들떠보였다. 꽃을 든 그애의 모습은 무척 이뻤고 게다가 잔잔한 들국화는 내가 참 좋아하는 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딴 건 뭐하러 샀느냐고 일부러 차고 독하게 말했다. 그애의 실망하는 표정을 즐기면서...
그날까지도 차게 굴었던 건 군대가기 전날 다른 여자아이와 차 마신 걸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지 않는 연하의 철부지를 위해 내 꿈을 접고 인생을 걸 용기도 이유도 없었다.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이쁘다고 칭찬해주었고 못내 떠날 때조차도 너처럼 멋진 여잔 자기 인생에서 다시 못만날 거라고 말해줬던 그애에게... 나는 정말 못되고 지독했고 유치했다.
나에게 주었던 많은 칭찬, 격려, 긍정의 언어들... 고마웠어. 잘살고 있겠지? 원만하고 성실하고 좋은 성품이니까 잘살고 있으리라 믿어. 근데... 그때말이야... 하필 "사롱해"가 뭐야? 유치하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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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을 왜 떠나 보냈어요? 그렇게 유치한 사람을... 정말 유치했군요.
김진영 (11.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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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지 않는 얼굴, 떠나지 않는 얼굴, 보고 싶다고 되뇌며 섬광처럼 오는 |
김*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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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를 가지고 어디까지 사유할 수 있을까? 김진영의 언어를 가지고 바르트를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걸까? 오히려 나는 바르트에 부딪치는 방법으로 그의 사유 밖이 아니라 그의 사유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다시 다른 레퍼런스가 필요할지를 나의 사유의 한계를 시험하는 가운데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정치는 내가 만든 구조, 나에게 부여된 구조,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잊어버린 것의 회복, 기억을 통해 현재를 조망하기, 아니 현재에서 벗어나는 차원에서 기억을 사유하기 등 여러 차원에서 다가오며 약간은 혼란스럽다.
난 선생님에게 강의 말미에 질문을 던지며 벅차오르는 가슴과 함께 열패감마저 들었다. 바르트가 한 번에 밀어닥치는 것, 그렇지만 아직도 난 바르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고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인가에 대한 것.
바르트는 풀리지 않는 얼굴, 떠나지 않는 얼굴, 보고 싶다고 되뇌며 섬광처럼 오는 얼굴 하나를 다시 불러 들였다. 나를 떠난 사람, 아니 내가 떠나보낸 사람, 아니 붙잡지 못 했던 사람, 이러한 내재적인 아픔에의 침잠은 멜랑콜리 상태로 나를 빠뜨렸고, 한편 난 이 상태가 좋았다. 반면 정치적이라는 말에 지금에 내가 그것과 과연 어떤 관련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스스로 들었던 것이다. 아폴론의 빛의 무대에서 디오니소스 어둠의 배우가 돼서 가상의 말로써 실재의 힘들을 작용시키는 니체, 반면 바르트의 목소리는 무엇인가?
선생님은 단편들 fragment로 이뤄진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단편집으로 구성해 나간다고 했다. 그 사이 사이의 봉합선은 사유로써 기워진다. 선생님은 자신만의 바르트를 가지고 소설을 쓰는 것이다. 떨어진 시공간의 늪에서 섬광처럼 오던 또는 사라져버리던 텍스트는 비로소 제 몸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이는 완성이 아니다.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창조적 이차 텍스트가 될 것이다.
『카메라 루시다』 강연을 통해서 전달 받은 것들이 많고, 이것 역시 봉합과 차이의 발견이 중요하다. 봉합은 차이들의 인지와 그것의 종합적 사고인 듯하다. 아직 강의 안에서 발견하지 못 한 것들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어느덧 『사랑의 단상』의 시기로 넘어가고 있다. 이번에는 두 번의 연장이 주어지지 않을까? 처음이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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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초콜렛이다 |
웃** 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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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초콜렛이다.
아름다운 시인 사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오 사랑, 달콤하지만 쓰구나!" 달콤하면서도 쓴 것은 초콜렛 아닌가? 그러고 보니 중독을 일으킬 만큼 매혹적인 향과 맛을 지니고 있고 고독을 닮은 깊고 어두운 빛깔을 지녔다는 점 등 사랑은 초콜렛과 무척 닮아있다. 신들의 음식이라고 불리우는 초콜렛처럼 사랑은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천연의 인간들이 저마다 심연에 지닌 고유한 신성이 아닐까?
독사에 물린 것처럼..
마지막 강의인 이번 강의에선 사랑의 표현과 사랑과 고독에 관한 문제에 대해 다루었다. 플로베르는 쓸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땐 의자에 몸을 내던졌다고 한다. 아무 저항없이 내적인 폭풍우에 몸을 맡기고 이미지로 채워지는 자신을 내버려둔 것이다. 마치《향연 Symposion》에서 알키비아데스가 " 독사에 물린 것과 같은 고통" 이라고 했던 것처럼 사랑으로 인한 치명적인 고통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그 쓰디쓴 맛을 끝까지 느끼고자 했던 것이다. 왜 독사에 물린 사람은 그 고통을 말하지 않는 것일까? 독사에 물린 사람의 고통은 독사에 똑같이 물려본 사람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랑의 주체는 텅빈 들판에 홀로 선 듯 고독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사랑에 빠진 고독한 주체는 저항하거나 싸우려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이 정처없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둔다. 그리고 그냥 혼자 운다. 이렇듯 감정에 순응하므로 사랑에 빠진 고독의 주체는 뗏목의 주체라고도 하고 긍정의 주체라고도 한다.
비극적 내용에도 불구하고 코러스의 합창으로 인하여 환희가 느끼지는 그리스 비극을 보고 그리스인들이 생을 긍정했듯이...아침에 일어나서도 사랑 때문에 고립무원을 느끼고 혼자 눈물을 흘려본 사람은 그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다는 걸 알 것이다.
어떤 무덤에 귀를 기울이면 합창 소리가 들린다는 말처럼 마음이 헤매이는 날에는 칩거중인 나에게도 이런 노랫소리가 자꾸 맴돈다.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오오~~오 기이퍼어라~~~. "
뗏목을 위하여.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텍스트로 한 김진영 샘의 강의가 비로소 끝났다. 사랑을 다룬 이 강의를 듣고 나는 사랑법에 능숙하고 통달해져서 지혜롭게 사랑을 해나가는 현명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런데 도리어 종종 미궁에 빠진 기분.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는 기분에 빠졌다.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방치해두었던 나의 내면을 자꾸만 돌이켜보았기 때문이다.
상처입기 싫어서 모든 순간 너무나 쿨하게 대응했고 그렇기 때문에 정작 진짜 사랑을 놓쳐버렸고 그랬기 때문에 내면 깊은 곳은 외로움과 회한으로 떨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는 일은 힘겹고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강의를 듣고 리뷰를 쓰는 중간 중간 앞으로는 갑순이처럼 안그런 척하지 말고 사랑을 쟁취해야지 했다가도 삶도 사랑도 내게 너무 어려우니 사랑하며 사는 대신 그냥 미쳐버려야 할까? 아니면 베르테르처럼 사랑에 빠져 자살해버려야 할까? 아니면 사랑 따위 절대로 침입할 수 없도록 마음의 문을 단호하게 잠그고 석고처럼 안전하고 딱딱하게 굳어가야 할까? 이런 저런 방황이 없지 않았다.
이미 현대성에 물들어 이성적이며 영리해진 내가 정처없이 흘러갈 사랑이라는 위험한 뗏목을 덥썩 타는 일이 생기게 될지 어떨지 나도 나의 미래가 무척 궁금하다.
어쨌든 이 강의를 통해 오렌지 시들기 전에 까먹어야한다는 걸 깨달았으니 변화는 있겠지. 게다가 지나간 사랑의 순간들을 기억해내는 소득이 있었으니 매우 감사한 일이다. 마음 속에서 사랑을 끝장내 버리지 않고 아직도 사랑에 대해 공부하고 있으니 그것도 희망적이고 감사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뗏목에 올라 정처없이 흘러갈 사랑스런 인물에 대한 영감이 떠올랐으므로 그것이 나로선 가장 감사하고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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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사랑의 묘법 그리고 오렌지 |
웃** 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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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의 정체!
난 널 사랑한다구. 넌 왜 내 맘을 몰라! 이번 강의에선 이러한 감정 속에 숨어있는 은밀한 속내에 대해서 분석했다. 이 말 속에 감춰져 있는 속내는 나는 너의 마음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걸 용서 못하며 너를 통제하고 싶다라는 것이다. .
사랑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질투! 사랑을 공부함에 있어서 우리는 질투라는 감정의 정체를 공부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질투란 무엇일까? 질투는 본질적인 것인가? 진정 사랑한다면 질투라는 감정은 어쩔 수 없이 동반되는 것인가?
나의 경우는 어땠는가 생각해본다. 나와 잘해보려는 남자가 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다른 여자가 꼬여든다.그 남자는 나의 관심을 끌고 싶거나, 혹은 다른 이유에서 좀 곤란해하면서도 다른 여자를 끊어내지 못하고 어울린다. 두가지 경우에 나는 다르게 대처한다.
내 관심을 끌고 싶어 일부러 다른 여자를 끌어들이는 경우... 가차없이 버린다. 자기 감정때문에 남을 이용하는 사람은 미련둘 가치가 없는 뭔가 문제가 있는 인품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 있어서 나는 다행히도 명쾌한 성격이다.
그외 다른 이유일 경우가 문제다. 다른 여자와 어울릴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나도 안다. 그런데도 같이 있는 걸 보면 그 구질스런 상황이 싫다. 그때의 내 감정은 1.어떻게 하는지 보겠어!-> 2.왜 이 짜증나는 상황을 정리해주지 않는 거지?->3.상황을 정리해주지 않는다면 쿨하게 때려치울거야!-> 4.원망하지마! 결국 나는 그의 진심을 어느정도 알고 있으면서도 인연을 관둬버린다. 그렇게 인연은 엇갈려버린다. 딴여자한테 콱물려놓고는 뒤늦게서야 진짜 사랑하는 건 너라고 울며 전화해봐야 소용이 없다. 하지만 그럴 경우 마음이 아주 끝나버린 건 아니라서 나의 괴로움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이번 강의를 통해 히스테리란 원하는 걸 얻기 힘든 자기 딜레마를 스스로 덮어서 과대망상 증상을 보이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건 일종의 자기방어이며 원하는 것에 대한 원한이고 이러한 히스테리를 정당화시키는 것이 질투라는 것이다. 질투란 상대의 욕망이 나에게만 고착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실 질투가 없는 편이라고 스스로 믿어왔는데 사실은 변형된 방식으로 질투를 해오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건 절대 질투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다.왜냐하면 인연을 팽개쳐버리고 괴로워했다는 게 그 증거니까.
사랑의 묘법.
질투란 나쁜 것이고 용서란 좋은 걸까? 강사샘은 부르조아 문화가 질투는 유치하고, 추하고,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가르쳐 왔으며 이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들은 질투하는 대신 사랑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이렇듯 질투를 나쁜 것으로, 용서를 좋은 것으로, 교육받고 있으나 이건 진짜 웃기는 개념이니 더이상 선악의 논리에 속지 말아야한다고 하셨다. 허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겠는가. 저마다 입장이 다르면 옳고 그른 것도 제각각 다른 것일 텐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질투는 사랑의 결과가 아닌 두려움의 결과일뿐이다. 나는 여태 질투는 나쁜 것이라 믿었고 그래서 좀 복잡한 상황이 오면 멋지게 툭 털어버리거나 쿨하게 팽개쳐버리고 홀로 외투깃을 올리며 나의 길을 걸었다. 결국 그런 식으로 늘 진짜 사랑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자, 이제라도 오류를 발견했으니 자꾸만 쿨한 척 팽개쳐버리지 말고 사랑의 전략을 다시 세워야겠다.
아이를 주변에서 놀게 하며 느긋하게 뜨개질 하는 엄마처럼, 방향만 알려주고 따라나서지는 않는 원주민처럼, 집착하지 않으면서 상대가 자유의지로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묘법이란다.
내가 건넨 오렌지
사랑이 깍아놓은 과일, 포크로 콕 찍어 내 접시에만 챙겨놓는 일처럼 간편하면 참 좋을텐데.. 사랑은 은근히 강한 내공과 섬세한 전략전술이 필요한 일이었다.
어쨌든 내가 건넨 오렌지.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랑 나눠먹는 거 나도 베르테르처럼 싫을 거 같다. 누구 나눠주지 말고 그 사람 혼자서만 다 먹었으면 좋겠다. 물론 나랑 나눠먹으면 더 좋고! ㅎㅎㅎ. 그런 건 질투가 아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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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다 니 마음을 구원하라고 가르쳐주는거야" |
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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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글로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 글을 쓰면 이야기는 많이 할 수 있지만 사랑하고 있는 주체로서의 나는 사라진다고, 바르트는 그렇게 말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참 웃긴 작업이지요. 저는 인문학을 배우는 학생입니다. 인문대학의 간판 굶는 과(?), 국문과에 재학 중입니다. 고등학교 때 저는 참 모범생이었습니다. 필기 대마왕이었죠. 쓰는 재미에 학교를 다녔는지도 모릅니다. 심화자율학습을 밤 11시 반까지 하는 학교에 다녔는데, 조용한 심자실에서 빡빡하게 필기를 하다가 문득 정신이 들면 그 상황이 어쩜 그리도 허탈하던지. 공부를 하려고 적는데 공부하는 내가 아니라 득달같이 공책에 달려드는 나만 덩그러니 있는 기분. 연애도 그렇게 모범적으로 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기 짝이 없지만, 새벽에 전지 크기의 편지지를 꺼내놓고 얼마나 거창한 말들을 써내려 갔는지. 그땐 그래도 '나 글 좀 쓴다.'하는 오만에 빠져서 밤을 꼬박 새워가며 연애편지를 완성했습니다. 무슨 퀘스트도 아니고. 지금은 누가 돈 주고 쓰라고 해도 못 쓸 거에요, 아마. 대학에 가면 내 인생이 반짝반짝 빛나게 될 거라고, 저 뿐만 아니고 모든 고3 수험생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 근데 별로 달라진 게 없었어요. 고등학교 때 처럼, 대학 전공수업도 열심히 받아적는 내가 있을 뿐. 반짝반짝 빛나는 나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롤랑 바르트 이 자식도 대체 내 인생에 뭐 대단한 놈이라고! 오늘 중간고사가 끝나서 필기장을 다시 들추어보니 그 중에 바르트 1강 필기도 빽빽하게 있었더랬죠. 언젠가 누구에게 들었는지 이제는 출처도 불분명해진 말을 다시 곱씹게 되는 새벽입니다. "공부 왜 하니? 솔직히 이게 뭐가 중요해? 다 니 마음을 구원하라고 가르쳐주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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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들을수록 왠지 moksa의 경지에 이르는 기분입니다 |
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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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의 기원은 언어다. 언어는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실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기가 욕망하는 그것을 미워한다. 미워하니까 강제로 소유하려고 한다. 언어는 히스테리다. 질투도 이 히스테리로부터 온다. 부르주아 문화는 이 언어를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부르주아 문화 속에는 깊은 질투의 의식, 원한의 의식이 작동한다. 사랑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부르주아 문화가 가르치는 사랑은,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로 귀결되어야 하듯, 사랑하는 그 사람을 규정하고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질투의 주체는 언어로부터, 부르주아 문화로부터 태어난다. 질투의 주체는 사랑의 주체가 아니라 그것이 언어이든 문화이든 자기를 조종하는 초자아의 법률을 따르는 주체일 뿐이다.
어머니는 놀이터에서 뜨개질만 한다. 아이에게 내 옆에만 있어라 하지 않는다. 아이는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보지만, 엄마를 떠나가지는 못한다.
이것은 질투하지 않음이 아니라 질투를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사실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질투를 모르는 주체는 '엄마'와 같다는 사실에서 웃음이 나왔어요. "남자는 평생 엄마의 마음을 가지고 길러야한다."고 엄마가 늘 이야기하셨던것이 떠올랐거든요 ;^) 강의를 들을수록 왠지 moksa의 경지에 이르는 기분입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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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속살이다 |
웃** 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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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자살.
이번 강의에선 얼어붙은 세상, 사랑의 글쓰기 등에 대한 단상들을 다루었다.
젊은 베르테르는 원래 슬픔에 찬 청년이 아니었다. 그러나 롯테를 만나 사랑에 빠진 후 세상이 어찌해볼 수 없이 얼어붙어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사랑을 알기 전엔 아름답고 찬란해 보이기만 하던 세상.그러나 다른 남자의 약혼녀를 사랑하게 된 베르테르는 보이지 않는 규율과 관습으로 얼어붙어있는 세상에 좌절하여 그만 자살하고야 만다.
사랑이 어긋나버린 소설 속 주인공 베르테르가 자살했으니 우리도 잔뜩 절망하여 자살해 버려야할까?
작은 생선토막도 못자르는 내가 50킬로그램도 넘는 나의 육체를 살해할 수 있을까. 게다가 내가 죽으면 남겨진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은 어떻게 될까... 그들이 받을 충격과 상처를 생각해본다면 덜컥 자살해버릴 수 없는 노릇이다. 어찌보면 자살은 내 감정만을 중시하는 너무 이기적인 행동이니까.
소설 속 가상인물들은 걸릴 게 없으니 자살을 택할 수 있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한다. 그래서 우리는 대책없이 마음이 치우칠 경우 그 여리고 위험한 마음들만 그저 차례차례 자살시켜버린다. 마음들을 자살시킨 우리는 얼어붙은 세상을 살아갈 몇가지 방법을 선택해야만 한다.
첫번째, 싸우지 않고 그냥 견디면서 살기. 두번째, 스펙을 쌓는 등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보기. 세번째, 미쳐서 정신병원에 가기. 네번째, 지나간 사랑을 추억하며 사랑에 대한 글쓰기. 다섯번째, 그래도 다시 사랑하기.
사랑은 속살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의 마음은 살갗이 벗겨진 피부상태와 비슷하며 사랑을 하는 동안엔 마음이 무장해제된 순수한 속살 같은 상태라서 더더욱 상처입기 쉬워진다고 한다. 또한 마음이 포장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나므로 사랑의 마음은 음란하다고 한다.
나의 작은 말 한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유난히 잘 삐졌던 한 사람. 간혹 듣기 민망한 음란한 이야기조차 스스로는 괴로운 듯 말하곤 했던 그 사람은 나를 사랑했던 걸까? 아니면 기질이 그냥 별나고 포장되어 있지 않아 음란했던 걸까?
사랑합니다.
비가 오고 나면 봄꽃이 다 져버린다는데 꽃구경도 못가고 끙끙 앓아누워 있었다.
그런데 핸드폰 벨이 울린다. 친구인가 싶어 반가운 맘에 받으려는데 지나가버린 인연...돌이킬 이유도 기운도 없어서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고 다시 잠들었다. 그래도 자꾸만 자꾸만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
멈추지 않을 기세라서 무슨 일이냐고 문자를 보냈더니 봄꽃을 보니 생각이 나서라고.... 제발 한번 볼 수 있겠느냐고... 애인없으면 다시 만나고 싶다고... 꼬치꼬치 주저리주저리...
고맙지만 짬이 없다고 짧은 답문자로 사양했더니 "사랑합니다."라고 문자가 온다. 느닷없다.
얼마나 안다고... 아직 어려서 그런가? 사랑이 참 쉽기도 하네...
마냥 누워있을 수는 없어서 기운을 차리려 일어나 뒷동산 국사봉으로 쉬엄쉬엄 향했다. 마지막 봄꽃이 활짝 피어있다.
문자의 느낌으로는 여전히 철이 없는 듯 보인다.게다가 지금 선택하면 내겐 마지막 사랑이 될테니 정말 신중히 결정해야한다. 무수히 마음들을 자살시키고 기껏 지나간 사랑에 대한 글을 쓰며 얼어붙은 세상을 살아내고 있는 내가 그래도 다시 사랑하는 길을 택하게 될까? 내 마음 스스로 잘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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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유치하다. |
웃** 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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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손가락이 닿았을 때
이번 강의에서는 <그 사람의 육체> 등의 장을 다루어서 그런지 듣는 동안 웬지 떠오르는 기억이 많았다. 어쩌다 손가락이 닿았을 때, 탁자 밑에서 어쩌다 슬쩍 발끝이 스쳤을 때, 함께 모여 사진찍느라 어쩌다 어깨가 닿았을 때, 오토바이 안장 위에서 서로의 허벅지가 어쩔 수 없이 겹쳐졌을 때...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데 일어난 그러한 일들... 그런 일들이 가져다준 자잘한 번민들...
사랑하는 이에게 나를 바치는 두가지 방법.
상대에게 줄 수 있는 육체성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한가지는 몸(Body)이고 다른 한가지는 목소리(Voice)라고 한다. 몸은 소비되는 것이고 목소리는 낭비되는 것이다. 몸은 투자하는 것이므로 보상을 바라게 되고 보상을 원하기에 결국 실망과 분노가 생긴다. 그러나 목소리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이므로 단지 그냥 바치는 것이다. 목소리를 바친다 함은 이야기하는 일일 것이다. 즉슨 하염없이 고백하고 대화하는 것도 강력한 사랑의 행위라는 의미이다. 그냥 바치고도 마냥 즐거운 일... 어쩌면 대화는 가장 안전하고 멋진 사랑의 행위가 아닐까 싶다. 덕분에 풀지 못했던 삶과 인연의 의문 하나를 풀었다. 아무리 멋진 최고의 이상형을 만났더라도 대화의 쾌감이 없는 인연은 한계가 있다는 것.
사랑은 유치해.
내가 초록보다 푸르렀던 시절, 이런 군사우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 왜냐면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나 흔하니까 그런 말은 너에게만은 쓰고 싶지도 않아. 사롱해..사롱해...사롱해.."
면회는 커녕 단한번의 답장조차 쓰지 않았는데도 군대에서 제대한 그애는 내게 연락을 해서 한번만 만나자고 했다. 나를 기다리고 서 있는 그애의 품에는 들국화가 한아름 안겨 있었고 그애의 표정은 설레고 수줍고 들떠보였다. 꽃을 든 그애의 모습은 무척 이뻤고 게다가 잔잔한 들국화는 내가 참 좋아하는 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딴 건 뭐하러 샀느냐고 일부러 차고 독하게 말했다. 그애의 실망하는 표정을 즐기면서...
그날까지도 차게 굴었던 건 군대가기 전날 다른 여자아이와 차 마신 걸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지 않는 연하의 철부지를 위해 내 꿈을 접고 인생을 걸 용기도 이유도 없었다.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이쁘다고 칭찬해주었고 못내 떠날 때조차도 너처럼 멋진 여잔 자기 인생에서 다시 못만날 거라고 말해줬던 그애에게... 나는 정말 못되고 지독했고 유치했다.
나에게 주었던 많은 칭찬, 격려, 긍정의 언어들... 고마웠어. 잘살고 있겠지? 원만하고 성실하고 좋은 성품이니까 잘살고 있으리라 믿어.
근데...그때말이야...하필 "사롱해"가 뭐야? 유치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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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달팽이다 |
웃** 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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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달팽이다.
롤랑바르트는 사랑이 정신화된 어떤 것이 아니라 그냥 어떤 기관과 같다고 했고 강사선생님은 그것을 달팽이나 페니스에 비유하셨다. 자기만의 집에 죽은듯이 콕 쳐박혀있다가 어느새 기어나와 더듬이까지 세우고 슬금슬금 기어다니는 달팽이. 사랑은 그런 것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감정이 넘쳐나는 이유는 그 사람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내 욕망이 특별히 넘쳐흐르기 때문이므로 사랑의 존재는 애초부터 상처를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한 상처 때문에 욕망이 생기고 욕망은 빈곳(허파, 틈새)에 머물게 되는데 그곳에서 바로 사랑의 상상적인 것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또한 사랑은 교환원칙이 작용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사랑에 대한 욕망은 소유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이다. 롤랑바르트는 이렇듯 문화이데올로기인 신화를 해체하려 하였고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도 이 텍스트를 통해 해체해보려 하였다.
내가 바람둥이였을 때.
롤랑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의 <아토포스>에서 "자신의 타입을 찾아 일생을 헤매는 조금은 힘든 바람둥이"라고 바람둥이에 대해 언급하였다
고백을 한가지 하자면 나도 돈주앙처럼 바람둥이였던 때가 있었다. 이십대 끝자락이었다.
어쩌다보니 어느 하루에 세 명의 남자와 데이트를 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여자로서 유리한 나이일 때 결혼상대를 잘골라보려던 나는 소개받은 모든 남자들을 고루 살피고 만나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엔 치의대 입학했다가 적성이 아닌 듯하여 절에 들어갔다가 다시 공부하게 된 만학도도 있었고, 유학가서 박사따느라 결혼이 늦어진 전임교수도 있었고, 세속에 상당히 물든 여의도 근무자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여의도 근무자였다. 전임교수는 아주 점잖은 분이었지만 매우 꼬장꼬장했고 나에게 독일서 공부한 이론을 가르치려 하였다. 그와의 데이트는 강의실에 앉아 지루한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그중에서 말이 통했던 사람은 치의대 만학도였다. 그러나 그는 종손이었고 가난한 모양인지 레지던트 시절에도 과외까지 뛰어야했다. 그가 늘 바쁜 건 당연했다.
전임교수와 아침산행을 약속한 참이라 북한산에 갔던 날이었다. 아무래도 대화가 겉돌아 점심도 먹지않고 총총 바쁜척 집에 왔다. 그때 여의도 근무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맛있는 거 사줄테니 63빌딩에서 보자고... 나는 얼른 샤워를 하고 세속적인 그의 취향에 맞추어 화장을 하고 빨간 꽃무늬 원피스를 차려입고 나갔다. 그러나 그가 능글거리는 걸 참기 힘들어 일찍 귀가했다. 그 저녁 치의대 만학도에게 맥주나 한잔하자고 전화가 왔다. 나는 다시 차려입기도 귀찮아서 맨얼굴에 청바지 티셔츠 차림으로 털레털레 나갔다. 만학도는 나처럼 안 꾸미고 나오는 여자는 처음 봤다고 신기한 듯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랑 잘해볼 생각이 없거든요. 나 열쇠 세개나 갖다주고 의사랑 결혼할 생각 눈꼽만큼도 없어요."
"치대 졸업하면 융자가 나와요. 열쇠 세개 안 가져와도 되는데..."
"그래도 당신은 종손이잖아요. 우리집은 딴건 안 따지는데 종손만은 사윗감으로 싫어해요. 아빠가 종손이라서.."
그와 나는 장충공원 벤치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동이 터오는지도 모를 만큼 즐거웠던 모양이다. 그는 바쁜 사람인데 나땜에 잠을 못잤으니 어쩌나 싶어 얼른 헤어져 집에 왔더니 새벽신문이 담장 안으로 툭 던져졌다.
나는 그날 아침 여명 속에서 거울을 보았다.
하루 세 명과 데이트를 했는데도 거울속의 나는 하염없이 정처없고 외로워보였다. 그중 누구도 내가 마음을 기대어 머물만한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어찌나 피곤하던지....허긴 새벽에 일어나 등산다녀왔지, 꽃단장하고 여의도 진출해주셨지, 밤에 맥주마시고 노래방까지 진출했다가 공원서 날이 새도록 수다를 떨었으니 얼마나 심신이 피곤했겠는가..
책한줄 못읽고 글한줄 못쓰고 허무하게 바빴던 걸 깨닫고 나는 그순간 거울 앞에 서서 결심했다. 이 노릇도 고달파서 못할 짓이군. 결혼이고 뭐고 나는 그냥 나의 길을 가야겠다! 그렇게 결혼계획을 내려놓았더니 나는 날아갈듯이 자유로워졌다.
소속에 대한 열망 때문에 하룻날 여러 데이트를 해야했던 나도 그렇게 고달팠는데 일생동안 사랑찾아 헤매며 살았던 돈주앙의 인생은 얼마나얼마나 피곤하고 고달팠겠는가. 만나고 헤어지는 그 모든 과정들이 그 얼마나 머리털 빠지고 주름살 생기는 중노동이었겠는가. 생각해보면 바람둥이도 참 가엾은 중노동자다.
사랑의 쓸쓸한 본질.
어제 읽은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이라는 소설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사랑이란 여자에게 있어선 능력있는 남자에게 빌붙어서 평생 공짜로 얻어먹고 싶은 마음이고, 남자의 입장에선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를 건강하게 낳아 양육해줄 젊고 싱싱한 자궁에 대한 열망일뿐. 우울한 얘기지만 그것이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모든 사랑 이야기는 대중을 기만하는 사기일 뿐이다."
롤랑바트르가 이 글귀를 읽었다면 아마 가려운데 긁어줘서 고맙다고 인사했을 것이다.
사랑은 그냥 달팽이같이 움직이는 마음의 한 기관일 뿐이고 교환가치를 명백히 따지는 것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순수한 척 계산없는 척하고 싶지만 우리는 사랑의 이면에 있는 이러한 쓸쓸한 본질에서 도피할 수가 없다.
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의 상처로 말미암아 생긴 틈새에서 우리가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자란 상상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독창적이고 특별하다고 인식하고 폭빠질 수도 있다는 것...그렇게 열병을 앓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달팽이가 뭐 어떤가.
슬금슬금 어느새 원하는 곳에 가있는 걸 보면 달팽이도 참 놀랍고 대견하고 귀엽지 아니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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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너무 근사하고 눈부신 그 사람! |
웃** 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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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무엇인가?
이번 강의를 내맘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 쪽에는 치켜진 욕망의 팔이 있다. 다른 쪽에는 필요의 내민 팔이 있다. 그 사이에는 탈코드적 영역이 있다. 사랑의 담론은 이 탈코드적 영역에서 흘러나오는 수다이며, 욕망과 필요 사이에서의 방황이 곧 사랑이다.
인간이 사랑에 빠지면 여러 주체들이 생긴다. 우는 주체, 웃는 주체, 주변부 주체, 나그네 주체, 발기하는 주체, 변태적인 주체, 윤리 주체, 긍정하는 주체, 자신의 진실을 배반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주체들말이다.
사랑은 기적이다.
http://cafe.naver.com/artnstudy/4210 위의 사진은 내가 몇년 전 외도에 여행갔을 때 발견하여 찍어온 사진이다. 큰 나무에게 악착스럽게 매달리고 감겨드는 휜나무의 모습이 놀랍고도 징그러웠다.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수다는 폴리티컬 디스커스라고 했던 강사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저 작은 나무가 큰나무를 끌어안고 매달린 이유가 사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매달려서라도 살아야했던 끈질긴 생존욕 때문이었을까? 휜 나무도 사람처럼 욕망과 필요 사이에서 방황했을까? 큰나무는 악착스럽게 매달리는 저 나무를 사랑했을까?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다던 유행가 가사가 있지만 나는 사랑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안에서 들려오는 어쩔 수 없는 목소리에 이끌려 나 아닌 타자가 나보다 중요해지는 본능적이고도 놀라운 경험... 이기적인 인간에게도 그러한 본능이 있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그래서 사랑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내게 너무 근사하고 눈부신 그 사람!
사랑의 작용 중 하나는 사랑하는 동안 사랑하는 상대를 빛덩어리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토록 근사하고 멋진 사람이 있을까 생각되고 상대가 빛덩어리로 보인다면 그건 사랑이란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똑같이 교복입은 무리들 속에서 그애만 군계일학으로 보였던 때가...
그리고 또한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왜 빛이 안 나세요? 이 친구가 그랬거든요.님은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다고.. 성모 마리아처럼 빛이 난다고..".ㅋㅋ.
그토록 근사하고 눈부신 사람이 내 마음에 또다시 생기게 될까? 그토록 나를 근사하고 눈부시다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또다시 생기게 될까? 눈에 콩깍지가 끼어 서로 반짝반짝 빛난다고 믿는 순수한 착각 속으로 빠져들고도 싶은 계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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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대체 사랑의 주체가 뭘까요. 머리를 싸매게 되는 주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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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이 책이 많이 팔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사랑'이야기여서일겁니다. 그리고 또, 독자를 탄생시키는 글이어서가
아닐까요? '이 책을 공부하겠다!'라는 마음은 바보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이 아니라, 독자의 입장에서 그냥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면서 내 이야기를 하고자합니다. (사실, 그래서 필기도 제대로 하지 않고 들었더니 많이 어려워요. 동네아저씨 이야기 듣듯이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던걸요~)
바르트는 계속 사랑의 주체(subject of love)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주체'라는 것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와 같은 것이죠. 바르트에게 사랑의 주체라는 것은 우선, 망각된 주체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기억과 망각을 이분법적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짧더라도, 연애를 한번 끝내본 사람- 이별을 해 본 사람은 공감하실겁니다. 잊는다, 잊는다 외쳐도 그게 다 잊는게 아니잖아요. '이 사람을 다 잊었다.'는 생각도 결국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잖아요. 망각이야말로 철저한 기억, 완벽한 기억입니다. 저는 사실 '망각된주체'라는 바르트의 표현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저는 '잊는게 잊는것이 아니다'라는 인생의 진리(?)를 몇 번의 고통끝에서야 깨달았는데, 이 남자, 바르트는 대체 사랑을 얼마나 지독하게 해 본 것일까요.
종영된 후에도 인기를 끌고 있는 한 드라마의 대사를 빌리자면, 이 '어메이징한' 남자 바르트는 사랑을 또한 '고독한 주체'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사랑의 주체는 자기의 운명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사랑하는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이죠. 사랑의 주체는 고리타분한 주체이면서 낭만적 주체입니다. 이 낭만적 주체는 열정 주체이기도 합니다. 열정 주체는 소유를 전제하는 질투 주체와 달리, 어딘가에 도착할 수 없는, 오로지 흐를 수만 있으나 정지할 수는 없는 주체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넘칠 수 밖에 없고, 다 담을 수 없는 사랑의 열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르트는 사실 이러한 사랑을 아는 것은 세상에서 단 하나, 어머니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주체는 달리 말해서, 몽상하는 주체이거나 말하는 주체이기도 합니다. 유일무이한 주체이기도 합니다. (주체가 뭐가 이렇게 많나 싶네요 ;-( )
그러면, 이렇게 많은 주체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바르트는 윤리의 주체라고 답합니다. 여기서 도덕과 윤리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덕은 외부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법률이지만, 윤리는 내부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법률로 자생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내부에서 자기에게 요청되는 법률을 어기려고 하지 않는것이 됩니다.
계속 주체,주체,주체 타령을 하고 있으니까 주체가 맞는 말인지부터 헷갈리게 됩니다. 바르트가 했던 말 중에, "나에게 사랑의 주체라는 것은 싸이코와 노이로제의 가운데에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싸이코, 비정상적인 상태와 노이로제, 정상적인 범주에 드는 신경증의 가운데에는 광기(혹은 변태)라는 상태가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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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런척 안 하기 |
웃** 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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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부터의 부자유.
나는 봄을 맞아 말랑달콤한 기분으로 사랑에 대해 공부 좀 해보려 했다. 사랑을 제대로 공부하여 더이상 문제없이 멋지고 근사하고 능숙하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일까? 괜실히 책주변을 며칠동안 헤맸고 어느 바쁜날 시간에 쫓기며 문득 펼쳐들고는 사로잡혀 연필로 밑줄 그어가며 잘 이해한 듯 읽었다가 다시 뭔지 모르겠어서 나중에 밑줄 그어놓은 곳을 보면서도 갸웃하곤 했다. 마치 손아귀에 쥐어도 어느새 빠져나가버리는 바람처럼 자꾸만 빈손이 된 것 같은 기분...짐작할 수 없는 어려운 함정에 빠진 기분...그렇지만 매력적이니 던져버릴 수도 없는 기분...
우리가 즐겨보는 드라마나 영화나 서적에서 사랑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그 누구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할만큼 사랑이 범우주적이고 본능적이고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를 유지하며 널리 읽히는 것이리라.
사랑은 변하고,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아니, 사랑은 변하는 거야."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묻는 상우에게 은수는 대답한다. 사랑은 회귀할 수는 있어도 반복될 순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랑의 연속성과 사랑의 가변성을 표현한 말이라고 김진영샘은 설명하신다. 예를 들자면 이런 뜻인가보다. 활짝 피어 향기로웠던 꽃이 덧없이 져버리지만 새롭게 열매로 변하게 되는 것처럼, 따뜻한 밥 한그릇이 피와 살과 에너지가 되는 것처럼 사랑이 다른 형태로 연속된다는 뜻... 밥처럼 꽃처럼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바로 그것은 사랑이라는 뜻.
안그런척 안하기.
강의 들은바에 의하면 사랑을 하는 사람은 싸이코와 노이로제의 중간쯤의 상태로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중얼중얼 수다를 떠는 사람이다. 나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아무 대화 없이 혼자 지내는 날에도 누군가에 대한 망상을 짓고 허물고 그 사람은 절대 안된다고 결심했다가 다시 흔들리느라 머릿속이 하루종일 중얼대던 날... 마음은 달려가는데 이성이 절대! 결코! 안된다고 하도 잔소리를 해서 잠도 못자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새벽까지 뜬눈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던 나날들...
김진영샘은 사랑을 신화화시키면 우리의 순진성을 희생시켜야한다고 하신다. 생이란 철저하게 경제논리를 따르는 것이라 속이면 속인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옳으신 말씀이다. 갑돌이와 갑순이도 안 그런척하다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인연이 엇갈려 버리는 큰 고통을 겪었다.
자존심 때문에 안 그런 척하는 점에 있어서 여우주연상감인 나는 이 강의를 듣고 와르르 반성을 하게 됐다. 이웃나라 일본의 대지진과 참사를 보면 언제 휩쓸려갈지 끝장날지 알수 없는 소중한 인생. 앞으로는 안그런 척하지 말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마음가는대로 인연흐르는대로 사랑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려운 함정에 빠진 기분이긴 하지만 이 강의는 참 유용한 강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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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잖아요, 그냥. 사랑이라는 말 |
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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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랑하고 있는가?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을 이끌었고, 기호학, 신화학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며 20세기의 사상계를 이끌어간 롤랑 바르트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르트 저 자신이 괴테를 비롯한 사랑의 텍스트를 고찰하며 치열하게 사유한 결과물인 『사랑의 단상』.
철학서도, 소설도, 수필도 아닌 이 기묘한 텍스트를 통해 바르트가 시도한 것은 무엇일까?
사랑. 솔로 생활을 못 벗어나서 허덕이는 네가 무슨 사랑을 논하냐고 웃을 수도 있겠지만, 좋잖아요, 그냥. 사랑이라는 말. 사랑이 꼭 남녀간의 애정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이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어렵습니다. 그래서 강의 스크립트 수준의 리뷰에서 머물지도 모릅니다. 기호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운 제가, 기호학자가 말하는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굉장히 궁금하고 설렙니다.
학자인 R.바르트를 분석하는 또 하나의 학자, 이 강좌의 김진영 선생님께서는 사랑의 단상은 사실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하는 말의 파편들이라고 합니다. 사랑에 빠지면 사람들은 바보같아 집니다. 말더듬이가 됩니다. 언어장애가 생기는 것입니다. 언어장애는 크게 두 가지인데, 단어를 고르지 못하거나 조합을 못하는 것입니다. 각 담론에 맞게끔 맞는 카테고리에서 단어를 뽑아내고, 제대로 이어붙여야 하는데 일상생활에서는 정상인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기만 하면’ 이런 언어장애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말을 잘하기 시작하면 사랑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어렵게 표현해놔서 이렇지, 떠올려보세요. 지금, 혹은 예전의 연애 경험을. 내가 말하고자 했던 건 이게 아닌데,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면 버벅거리다가 집에 돌아와서 이불 속에서 하이킥. 여기서 뜨거운 감자의 <고백>이라는 노래가 떠올랐어요. '이게 아닌데 내 마음은 이게 아닌데 널 위해 준비한 오백가지 멋진 말이 남았는데.'
그러면, 일상생활에서는 지극히 정상인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기는 왜 늘 실패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바르트가 스탕달에 관해 쓴 에세이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즉, 그는 사랑과 언어의 관계, 언어와 신체성, 언어 형식의 문제에 대해 고민했던 것입니다. 바르트가 그의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밝혔듯이, 그는 메타언어와 표현언어 사이에서 늘 힘들어했습니다. 메타언어는 비평언어 행위, 공적이면서 객관적인 언어입니다. 표현언어는 개인의 신체성을 표현하는 언어입니다. 바르트는 메타언어에서 표현언어로 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사랑의 단상>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사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문학 장르 (혹은 글쓰기 형식)으로서 자서전적 글쓰기에 해당합니다. 이 부분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소설은 ‘나’를 통해 세상을 보편적으로 담론화하기 어렵습니다. 세계상실이라고도 하죠. 쉽게 말해서, 이야기는 해야겠고 세상에 관해서는 이야기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기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에 들어서 소설이 공적 담론에서 사적담론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서전도 현대소설의 내면화 문제와 결부되어있죠. 바르트는 “소설적인 것을 쓰겠다.”라고 말합니다.
쓴다는 것, 글쓰기의 문제는 문자-육체-정신의 관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문자, 즉 기호는 사실 육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문자는 기본적으로 ‘쓰는 것’이지만 먼 옛날, 문자는 각인하는 것(새기는 것)이었습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지만, 그 어떤 문자도 육체성과 연결지어서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생경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듣고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소문난 팔랑귀인 탓일까요. 어찌되었건, 이렇게 문자가 육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담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부터 존재했던 문자의 물질성(육체성)이 문자의 정신성으로 바뀌게 되는 계기가 있습니다. 이 계기의 중심부에 Paulus(바울)이 있습니다. 그는 구약과 신약을 분리한 사람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죠.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잉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쓰는 것이며, 돌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랑’의 말씀이고, 이것이 잉크에서 정신으로, 돌에서 가슴으로 변화합니다. 사랑이 정신화되면서 육체에 대한 추방성도 끼어듭니다. 그런데 고백이라는 것은 내밀성을 언어로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딜레마가 생깁니다. 내밀성은 육체성을 지니는데, 언어는 이제 정신화된 문자이기 때문에 육체성이 배제되어있죠. 그래서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언어의 정신성만 드러나게 되니, 이게 고백일까요? 이 문제가 특히 ‘사랑’에서 두드러지게 되는거고요. 바르트는 그래서 ‘소설적인 것’을 쓰겠다고 한 것입니다.
바르트가 보기에 소설은 장르 자체가 문자 정신화 과정의 한 형식입니다. 그래서 자서전적 이야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형식 자체를 파괴하고 초현실주의적인 글쓰기(신화적 글쓰기)를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르트는 이런 형태는 옳지 않다고 봅니다. 형식을 파괴하면 글쓰기 자체가 불가능하고, 비명만이 남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소설의 형식을 따라가면서도 그것을 ‘파편화’시키는 방식을 취합니다. 바르트가 가진 구조주의자로서의 성실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체제 파괴적인 요소는 구조 ‘안’에서지, '외부'에서 가져올 수가 없다는겁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울이 글을 쓰는 형식은 편지였습니다. 오래전, 연애편지를 쓸 때가 생각이 나네요. 편지는 가장 자서전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또, 사랑의 내밀성을 이야기하려 할수록 내밀성은 추방되는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본디 정신과 육체는 갈라놓을 수가 없는 것인데, 이 둘을 갈라놓으려고 하니 정신이 글을 쓸 바닥은 육체 밖에 없는 딜레마가 생기는 것이죠. 코드를 없앤다고 탈코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코드를 어떻게 운용하느냐의 문제 속에서 탈코드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죠. 이 부분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말장난같기도 하고, 비문 같기도 하고 오묘했어요.
<사랑의 단상>은 어떻게 보면 단말마적인, 말의 파편들로 장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바르트는 문자육체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문자육체성은 choreography(안무)입니다. 이것은 기호이면서 탈기호입니다. 하나의 문자지만 동시에 제스쳐입니다. 이 안무에 대해 쓴 글이 fragment인데, 독자는 자기나름의 fragment로서의 텍스트를 만들어내어야 합니다. 문자육체성이 생성해낼 수 있는 무한한 것들 가운데 <사랑의 단상>은 바르트가 쓴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책의 구성방식은 알파벳 순입니다. 시스템화 하지 않고, 그저 병렬해두고 파편화시키겠다는 다짐의 표출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문장에 꽂힌다에 그치지 않고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fragment는 독자와의 관계에서 대화공간(dialogism)을 만듭니다. 이 대화공간을 통해 또 하나의 텍스트가 태어납니다.
사실, (어쩌면 제게만) 굉장히 어려운 강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재미있었어요. 세상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의 사랑이 존재하고, 또 제 스스로의 연애관도 이해하지 못하는 마당에 '사랑은 어떠하다.'고 정의를 내린다는게 애초에 어불성설이겠지요. 그래서 옆 집 사는 바르트라는 아저씨의 사랑관은 이렇다, 정도로 즐거운 마음으로 강의를 들으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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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겁고 매혹적인 사랑 |
웃** 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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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봄 선물.
지독히나 추웠던 겨울이 간혹 샘을 부리긴 하지만 어쩔수 없다는 듯 차차 저만치 물러가고 있다. 움트는 새싹 속에, 창가에 깃드는 햇살 속에 봄이 꽃처럼 피어나고 싶어 간질거리고 있는 걸 자연의 일부인 나또한 마음 간지럽게 느끼고 있는 중이다. 다가오는 봄을 축하함과 동시에 지난 겨울을 무사히 견뎌낸 나 자신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려고 인문숲 아트앤스터디에서 8주간 진행될 김진영 선생님의 <롤랑바르트, 사랑의 단상>강의를 신청했다. 골 아픈 정치 경제도 아니고 사랑에 대한 공부이니 얼마나 말랑말랑하고 설레는 시간일까 자못 기대가 된다.
롤랑바르트는 누구인가?
롤랑바르트(1915-1980년)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이다. 소르본 대학에서 고전 문학을 공부하였고 고등학교 선생, 대학강사, 연구원 등을 거치다가 1976년 문화 기호학 교수가 되었다. 미셀푸코와 동성애적 연인관계였으며 1980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사랑의 단상]은 무언가?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가장 활력적인 사유체계의 개척자로 꼽히는 저자가 괴테, 프로이트 등의 사랑의 담론들을 새롭게 해석해 낸 산문을 모은 책이다.
무척 당황스럽고 바보같은 증상.
인간이 사랑에 빠지면 단어를 선택하고 조합하는 능력 등에 장애가 생긴다고 김진영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순간 중학교 소풍갔을 때가 생각났다. 오락부장이라는 이유로 갑자기 전교생 앞에 불려나가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게 된 나에게 함께 사회보게 된 남학생이 불쑥 다가왔다. 진행할 순서를 의논하려고 다가왔을텐데 그애가 다가올 때마다 나는 자꾸만 뒷걸음치다 그만 뒤로 자빠졌다. 벌러덩하고 자빠진 곳은 코스모스 꽃밭 속이었다. 선생님들과 전교생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곤경에 처한 나를 위해 그 남학생은 성큼 다가와 내 손을 잡아 벌떡 일으켜주었다. 그러면서 뭐라고 살짝 귓속말을 했다. 얼굴이 빨개진 나는 그애의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그리고 다시한번 더 고꾸라졌다. 어딘가에 있던 돌부리에 걸려 다시한번 몸의 균형을 잃었던 것이다. 더 크게 깔깔거리던 전교생의 웃음소리...이번엔 웃다가 아예 뒤로 넘어가신 과학 선생님,체육 선생님... 늘 장난끼가 많고 까불락대던 왈가닥 소녀가 멍청바보가 된 최초의 순간이었다. 그 남학생이 그때 나에게 도대체 뭐라고 말했을까? 나에게도 그럴 때가 있었구나. 열다섯 살 때의 이야기이다. 눈물이 핑돈다.하하..
어렵고 버겁고 까다롭고 매혹적인 사랑
메타언어(비평언어), 표현언어(정서언어), 시니피에(기의), 시니피앙(기표), 피규어, 아규먼트, 프래그먼트, 정신의 귀족성, 육체의 미성숙성...사랑하는 사람은 고독한 주체다. 왜냐하면 말을 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므로...롤랑바르트는 굉장히 폴리티컬하다...문자의 육체성->"바울이 말하기를, 복음은 잉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쓰는 것입니다. 복음은 돌에 쓰는 게 아니라 가슴에 쓰는 것입니다."
이상은 강의를 들으며 간헐적으로 메모한 단어와 문장들이다.
이 중에서 "정신의 귀족성, 육체의 미성숙성"이라는 표현에 마음이 꽂힌다.사랑의 어쩔 수 없는 딜레마를 잘 표현해낸 글귀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새 봄을 맞아 말랑하고 달콤하게 사랑에 대해 공부좀 해보려고 했는데 뜻밖에 이국적인 전문용어가 나오고 번역투의 어휘가 나오니 좀 버겁고 어려운 기분이 든다. 하지만 남은 강의마다 달린 "단말마의 고통,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그 사람의 육체, 푸른 연미복과 조끼, 사랑해요, 난 끔찍해, 자살의 상념"이라는 소제목은 또 어찌나 매혹적인지... 나는 다음 강의들을 기다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새봄.
빛깔 고운 봄옷 하나 새로 장만해 입은 샬랄라한 기분으로 나는 사랑을 공부하기로 한다. 사랑, 그것이 어렵고 버겁고 까다로울지라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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