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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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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타버린 자유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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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버린 자유
-김진영 선생님의 멜랑콜리와 철학 6강 강의 정리+리뷰
비평의 순간
문화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창조물’이다. 자연에는 문화가 없다. 인간의 ‘문화’는 자연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자연을 인간의 관점대로 해석하고 편집한 것으로, 결국에는 반자연적 성향을 내재한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고 생존의 문제 대신 자유를 선취하고자 했다. 문화는 그러한 시도를 영웅의, 소시민의 역사로 만들었다. 하지만 자유를 지향하던 문화는 점차 사회 시스템에 의해 재편되면서 모순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부자유라는 결말로. 사회는 철저한 제도화를 기반으로 한 합리적 시스템으로 변모했다. 문화는 이러한 부자유를 부각하는 대신 사회의 폭력을 가리는 ‘현혹’으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의 나사나 태엽이 되어 돌아간다. 사회라는 모습 전체를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그들은 계속 설국 열차에 갇혀서 어디론가로 향해야만 한다. 열차에 타고 있는 한, 그들은 자신이 달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달리는 건 그들의 의도가 아니다. 열차가 달리는 것 뿐이다. 그들은 자신이 이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어떤 중요한 부품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편집해 나가려고 한다. 어쨌거나 ‘퇴직’은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사가 다 돌아가면 또다른 나사가 대기하고 있다. 다 쓰인 나사는 또다른 곳에 쓰이거나 버려진다. 현대 사회의 경우 후자에 처할 확률이 높다.
문화비평의 등장은, 사실상 그 장르가 모호하다는 점에서 의문을 품게 한다. 기존의 대중 매체를 분석할 것인지 아니면 영화나 문학과 같은 고유한 예술 장르를 통틀어 바라볼 것인지. 문화는 사회와 유리된 어떤 창조물의 대상, 사회와는 연계되어 있지 않은 어떤 중립지점으로 언급되어온 만큼 그 비평 또한 현실도피에 속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문화 비평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으려고 하는 사회의 전체상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설령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게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일부분에 불과할지라도, 낙관적으로 판단하는 대신 냉철하게 분석하고 판단하려 한다.
그러나 과연 현대 사회에서 문화비평은 그 의의를 다하고 있는가? 문화비평을 쓰는 주 계층이 현실의 미미한 ‘미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풍부한 지식을 지닌 부르주아 계층이라는 점은-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문화 비평의 한계를 지적한다. 문화 비평은 모순에 대한 무기가 아니라 하나의 방패가 되어버리고, 난해함은 그들의 우월감과 오만에 대한 정당화로 귀결된다.
붕대 클럽
트라우마란-그리스어에 의하면-어떤 무기에 의해 입은 깊은 상처를 의미하는데, 이 때의 상처는 상처를 입힌 자가 죽일 의도가 있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출생의 트라우마는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왔다는 충격에 의한 상처일 수도 있는 한편, 강제로 떨어지고 평온 대신 차가운 손에 의해 엉덩이를 맞아야 한다는 폭력에서 의거할 수도 있다. 아기는 이제 이성적인 보살핌을 받고 이성적인 발달을 거쳐 이성적인 정상인이 되어야만 한다. 아기는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처럼 보인다. 어른들은 아기들을 끊임없이 건드리고 때리면서 가르친다. 아기들에게 상냥하게 가르친다는 말은, 너무나도 쉽게 남용되고 있다. 아기들은 당신들의 말을 모른다. 끊임없는 보살핌이 필요하고,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다. 한 덩이의 햄을 만들기 위해서는 돼지를 죽이는 과정뿐 아니라 양념을 하고 노끈으로 단단히 묶는 행동이 필요하다. 햄은 기존의 ‘돼지’와 분리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인식의 분리는 보신탕이나 다른 애완 동물들을 먹지 말자는 사람들의 논리와 상충되는 바, 그들의 논지는 이렇다. 사람들이 정을 붙인 동물들을 어떻게 먹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들이 제시하는 먹을 수 있는 짐승은 그들이 정을 붙이지 않았으며 살아 있었던 과거를 모르는 동물들로 한정된다. 아이들은 애완동물이 될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애완동물들의 경우, 우리는 애완동물에게 어떤 발전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아주 최소한의 것을 기대하고 말 뿐이다. 하지만 아기는 언젠가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 그들 또한 오딧세우스처럼 유혹을 끊어버리고 이성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고, 구강기의 욕망은 잊어버려야 한다고 강요될 때가 올 것이다. 다만 가끔씩 탯줄을 끊어낸 상처를 보면서 그들은 묘한 상실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기억의 흔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자살의 자유로운 허용
모더니즘 사회에서 댄디즘은 멜랑콜리의 합법화이자 멜랑콜리를 통한 자기 도취, 나르시시즘의 지향이었다. 그들은 산업 사회와 인간의 사물화에 대해 반항하고자 했으며, 그 자신이 이러한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격차를 느끼고 슬퍼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다면 그들은 그 변화를 따라가야 하나, 그랬다가는 그들이 으깨지고 말 것이었다. 카렌 블락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에 정착하고자 하는 사람들, 저자를 비롯한 버클리, 데니스는 너나할 것 없이 사회로부터 도망쳐 나왔다고 자조하지만 사실상 그들을 아프리카로 추방한 건 그들 자신이 아니라 사회였다. 사회는 그들의 시간을 더 이상 받아들여 줄 수 없었다. 뛰어가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흰 토끼를 따라 토끼굴로 들어간 앨리스는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환상 속에서 대처하고, 실수하고, 목이 잘릴 뻔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울에의 집착은 멜랑콜리적인 것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모순에 빠진다. 어떤 기질로 보고 ‘어쩔 수 없는’ 불치병으로 판단한다는 것, 이는 사회의 멜랑콜리적인 것을 회피하는 태도와 같다. 자기 자신의 우울은 조그만 돌멩이처럼 주머니에 넣고서 만지작거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의 우울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공중에 뜬 구름처럼 두려워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채, 땅만 보고 걸어다니는 것이다.
‘자살의 자유로운 허용’이라는 말은 어찌 보면 모순이다. 자살은 본래 자신의 선택이며, 마지막 ‘자유’를 표방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 아메리가 비꼬듯이 말했던 ‘자유 죽음’이 바로 그 일환이다. 하지만 ‘허용’은 부자유를 의미한다. 댄디즘의 모순은 그 자신으로 남아 있으려고 했던 시도가 결국에는 자신의 왜곡을 초래한다는 점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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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를 통한 삶 보기 |
김*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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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와 철학: 우울의 철학 혹은 철학의 우울 / 김진영
√ 트라우마: 치유될 수 없는 상태 √ 사람은 상처를 받으면 안된다. 회복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유약한 존재, 연약하고 유약한 존재로서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잊혀 질 수는 있 다. √ 우리에겐 열린 상처가 있다. √ 우리는 밀려서 (The Drive) 산다. √ 비오는 날 달팽이는 바다를 건너간다. 문명사는 복수의 정신으로 만들어진 것(니체) √ 기억의 흔적: 프로이트, 기억으로 불러낼 수 없는 흔적이 있다. √ 애도 될 수 없을 때 비극은 형성 될 수 없다. 따라서 역사적 생산력은 고갈될 수밖에 없다 는 것.(소비되거나 처리되어 왔다) √ 인문학: 지적 교양이 아니라 하나의 자세를 배우는 것. √ 프리모 레비: 인간 무슬림은 누구인가. 이것이 인간인가 아닌가, 이것을 증언하려 했지만 결국은 스스로 무슬림이 되고 말았던가. 피조물성을 증언하려 했지만 스스로 그 피조물성 으로 되돌아갔다. √ 인간의 능력 중 탁월한 것 중의 하나가 자기를 주는 것. Faith(충성, 성실, 인내) √ 모든 위대한 사람들이라 불리는 사람에게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 중 하나가 인내다. 공유되는 덕성이 성실성이다. 중단 없이 걷기, 성실성, 자기가 가고 있는 길에서 자기에게 성실한 것, 그것이 인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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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에 대한 자세한 설명 |
홍*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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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강의는 늘 열정이 넘쳐 가르쳐주고 주고싶은 욕구가 넘침을 느낄수 있습니다. 덕분에 어려울 수도 있는 서양의 다양한 이론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강의해 주신 내용을 바탕으로 그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될 강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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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김진영 선생님의 멜랑콜리와 철학 6강 강의록 및 후기 |
양*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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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시간 프랑스혁명 최고의 발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고 한 적이 있다. 근대의 최고의 발명은 개인. 신에 종속된 중세적 인간이 아닌 자유로운 개인의 탄생. 하지만 '나는 자유인이다' 선언이 곧바로 인간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다. 자유와 부자유는 변증법적 관계 속에 있어 진정한 자유는 변증법의 그물, 사슬을 뚫고 나왔을 때 가능한 무엇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유명한 프로이트의 친부 살해 모티브를 생각해볼 수 있다. 금기를 선언했던 아버지가 죽고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금지되는 역설. 자유는 억압-부자유와의 긴장 속에서 부자유를 지양하면서 얻어지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절대적 자유는 존재하는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지에 대해선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정확한 예시는 아니겠으나 이런 예시를 들어보고 싶다. 우리는 일상의 굴레를 불편해, 답답해하면서도 한편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김수환 교수의 <책에 따라 살기> 북콘서트에서 들은 말이 있다. 정혜윤 PD는 '저녁이 있는 삶'이 실시되고 실제로 어떤 저녁들이 있는지 관찰하기 위해 인터뷰를 실시했는데 노동자들에게서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무엇을 해야할 지 몰라 TV만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업무시간이 줄어들어 그에 따른 수입감소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개인에게 무한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비하지 않고 살 수 없게 만드는 소비사회의 자유의 역설처럼 우리에겐 상대적 자유만 가능한 지도 모르겠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절대적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려나? 그것도 죽음이란 안티테제를 지양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는 자유라면 절대적이라 보기 힘들 지도 모르겠다.
문화는 자연의 인간화이다. 인간이 더 잘 살기 위해 만든 문화는 동시에 인간을 억압한다. 김진영 선생님은 여성과 결혼을 보면 전근대 사회인지, 근대 사회인지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 결혼은 하나의 사회제도일 뿐인데, 성인남성/여성은 결혼을 해 가정을 이뤄야 한다는 인식이 넓고 깊게 퍼지고, 일종의 정상적 원형으로 제시되면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뭔가 결함이 있는 것으로,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폭력적 인식을 형성한다.
자연을 극복하고, 인간화하는 인물의 전형으로 오디세우스를 꼽았다. 이는 엄기호의 <단속사회> 에필로그에서도 다른 관점으로 흥미롭게 다뤄진 바 있다. '꾀돌이' 오디세우스. 이전의 항해자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이를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고 '건너갔다'(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느낌). 오디세우스는 지혜로운, 이성적인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를 어떻게 통과했던가? 그의 묘안은 기둥에 몸을 묶는 것이었다. 대신 부하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았으나 자신만은 세이렌의 천상의 노래를 향유했다. 노래를 듣되 노래를 듣고 바다에 빠져 죽지 않도록 육체만 속박하면 된다는 발상이었다. 이를 이성/자연(육체)의 분리라고 보았다. '나'와 '내 몸'의 분리. 선생님은 성형수술을 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육체와 정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육체에 칼을 대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졌다. 묶어둔 몸은 어디 있는가. 그곳에 남겨져 있다. 정신은 건너왔지만 몸은 건너오지 못하고 남겨져 있다. 이 두고 온 것, 배제된 것은 멜랑콜리적인 것이 되고, 반드시 회귀한다. 몸은 땅속에 묻혔으나 혼은 구천을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원혼의 유령들.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영적인 종교인이거나 예술가이다. 작년에 어느 소설가는 우리에게 광주의 혼들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소년이 온다>. 한강 소설가는 어느 팟캐스트에 출연해 자신이 쓴 소설 중에 가장 밝았던 <희랍어 시간>을 탈고한 후 '빛나는' 밝은 소설은 소설을 쓰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에게 광주는 하나의 원체험으로 남아 광주를 온전히 애도하고 해결하지 못하면 인간에 대한 근원적 불신을 해소할 수 없으리란 결론에 도달해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게 됐다고 했다. 혼들을 제 몸으로 불러들이는 작업, 혼들에게 제 몸을 빌려주는 초월로 넘어가지 않고, 혼들과 대화하면서 '살아남은 자'로서 고백하는 작업, 두고 온 아이의 노래를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작업, <소년이 온다>를 2014년의 책으로 선정하게 된 데에는 광주의 혼들뿐만 아니라 아직 진도 바다에 가라앉아 있는 세월호의 원령들에 대한 미완의 애도, 아니 어쩌면 시작조차 되지 않은 애도의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성경은 진리를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적었는데 적어도 근대사회에서 진리와 동일시되었던 이성은 과연 인류를 자유롭게 했는가? 아도르노라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변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황지우 시인이 적었듯 '끔찍한 모더니티'는 변형을 거듭해 '신자유주의'란 이름으로 호명되고 있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생존 자체, 국민의 생명 자체가 통치대상이 된 '생명관리정치'의 시대를 살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멜랑콜리를 우리는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지난 시간에 잠깐잠깐 언급됐던 수전 손택이 좀 더 전면에 등장했다. '캠프'로 대변되는 문화운동의 탈정치성, 도피주의적 성격을 비판했는데 손택이 근대에게 무엇을 본 것일까. 모던의 태도는 심각함, 진지함, 깊이로 요약된다. 헤겔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치밀한 시스템의 철학. 루마니아 출신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어느 저서에서(독설의 팡세 혹은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헤겔로 대변되는 독일의 엄격한 시스템-독일정신을 비판한 적이 있다. 엘리트주의/정신주의/고급문화로 대변되는 유럽의 모던이 아닌 대중문화로 대변되는 미국의 포스트모던, '감수성의 혁명'을 이끈 수전 손택. 진지함, 심각함과 거리두기(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이성으로 사회를 총체적으로 기획하고자 했던 근대의 실패(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무거움에 대한 저항감, 무거움에 대한 참을 수 없음의 감각을 체득했을 지도 모르겠다.
베냐민이 다룬 '군주의 우울'에 대한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궁중에 필수적인 존재가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바보-광대(내시)이다. 군주-권력자에겐 그가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는 꼭두각시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인형. 인간-장난감. 광대는 우울하지 않은, 우울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웃음을 주는 존재이자 웃음 자체이다. 우울한 군주는 웃긴 광대를 보면서 우월성을 느낀다. '천박한 것들은 우울할 줄 몰라' 멜랑콜리는 귀족의 특권적 질병이며 노동자들은 가질 수조차 없는 계급적인 것이라는 설명을 상기했다(지금은 맥락이 달라졌지만). 공부를 하면 점점 더 우울해진다는(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 설명 또한 떠올랐다.
'쯧쯧쯧.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 줄도 모르고 희희덕거리고 있는 꼴이 말이 아니로구나. 땅에 머리를 처박고 위험을 벗어나려는 타조처럼 무식하고, 무지한 사람들. 다 같이 공부하면 될 텐데 왜 공부를 안 할까... 공부를 안 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데 언제 당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어진 거짓평화에 안주하는 꼴하곤. 그늘 없음. 깊이 없음. 표면적 광택. 천박한 치장.'
위악적으로 적었으나 멜랑콜리커는 세계를 비의를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며, 멜랑콜리의 자리에서 냉소적 우월성을 향유한다. 멜랑콜리는 어떤 '진실'이기 때문에 멜랑콜리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은 허위로 보이게 된다. 슬픔에 빠졌을 때 세상이 슬프게 보이고, 행복해보이는 사람들이 연극처럼 낯설게 보이는 것처럼. 황현산 평론가는 트위터에서 페미니스트를 혐오한다는 IS 김군을 여성과의 관계에서의 좌절/열등감이 여성혐오라는 매우 병들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멜랑콜리도 언제든지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유될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찬호 교수가 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차별에 찬성하는 이들을 이런 경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일종의 보상심리랄까? 자신의 고통, 멜랑콜리에 대한 감정적 보상을 받기 위해 자기보다 뒤처진, 낮은 이들을 경멸하고, 차별함으로써 향유하는 냉소적 우월성. 하지만 오찬호 교수가 지적했듯이 이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들의 차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있으며, 거기에 불안함,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이 야만적 차별게임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고 파괴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마지막 폴 발레리. 작시를 그만두고 그가 책도 없고 책상과 의자만 있는 공간에서 몰두했던 질문('책은 다 우둔한 것들입니다. 나의 장점은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인간의 정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고통은 육체에서 온다. 육체를 가지면 고통스럽고, 따라서 멜랑콜리에 빠질 수밖에 없다. 순수한 정신. 멜랑콜리에 오염되지 않은 정신의 유토피아에 은거한 무슈 Teste - 발레리. 치명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관절염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발레리가 <해변의 묘지>에 쓴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살려고 애써야 한다)' 구절이 다르게 다가왔다.(그런데 왜 발레리의 책들은 국내에 번역이 안 되는 것인가... 문학동네 팟캐스트에서 신형철 평론가가 황현산 평론가에게 부탁했던 것처럼 누가 번역 좀 해주시면 좋으련만. 일단은 황현산 역의 랭보를 기다려보기로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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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김진영 선생님의 멜랑콜리와 철학 4강 강의노트 |
양*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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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아도르노의 페이퍼가 제공되었지만 3강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프로이트를 보충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할애됐다.
건강한 애도와 건강하지 못한 멜랑콜리의 구분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관계성>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누구나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자아를 구축하는 데 이 관계의 형식에 리비도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근대적 자아는 주체적 자아를 강조하는 동시에 부차적 객체를 만들어내는 자기동일화를 수행하는데 반해 수동적 자아는 대상과 닮으려고 하는 모방(미메시스)으로 타자동일화를 수행한다. 앞선 강의에서 지적했던 서양의 시각의 절대적 우위성, 주체적 자아의 폭력성에 반하는 미메시스적 자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언급한 벤야민뿐만 아니라 '사물시'의 릴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주객을 분리하는 서양의 사고방식이 인도-유럽어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 오정희를 인용하면서 생생하게 설명해주셨던 언어라는 상징계로의 진입에 대한 추가적 설명이 이어졌다. 언어는 사물을 객체의 지점으로 옮겨놓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나와 언어로 호명된 사물/대상. 바르트는 자기동일화를 수행하는 권력적 언어에서 타자동일화를 수행하는 탈코드적 언어로 변화를 주장했다고 한다.
이어서 철학이 육체성의 언어이고, 따라서 에로틱하며, 소설이라는 설명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가장 인상적인 꼭지 중 하나였던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에 대한 글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철학과 문학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김진영 선생님은 아무래도 문학적 로고스를 더 사랑하지 않으실까 하는 ^^ 헤겔에 대한 삽화가 재밌었는데 어렸을 때 정시에 '댕~댕~' 울렸던 성당의 종소리가 헤겔에서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헤겔의 치밀하고 정교한 시스템의 철학은 죽음공포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정신의 요새 같은 것이라고 했다.
언어라는 상징계로의 진입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같이 일종이 통과제의인데 통과제의를 거치지 못한 사람들은 구강기에 머물며 나르시시스트가 되고, 그 대표적 인물로 프루스트를 꼽았다. 육체가 병약하기도 했지만 프루스트에게 침대는 상실한 어머니의 육체, 불가능한 애도의 공간이었을 거라고 했다. 애도되지 못한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지난 시간의 말이 떠올랐다. 한 시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시인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나갔는데 거기서 70 먹은 할머니가 어렸을 때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그 앙금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걸 보고 시인은 할머니에게 "그 기억을 믿으세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상처받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자세 중 하나는 자기연민일 것이다. 자신을 피해자로 설정하고 타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면 그 감정의 내용이 원한일지라도 리비도가 운동하긴 할테니까.
그런데 통과제의를 잘 거쳤다고 생각되는 자아의 건강성도 실은 자신의 일부를 타자화시켰을 때 갖춰지는 균형이라고 했다. 남성적 자아는 뱉는다, 여성적 자아는 삼킨다. 독일어 fressen이란 표현. 먹기와 먹히기의 역설. 여성은 남성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보다 남성을 더 잘 알고 있다(남성 시스템에 과잉적응한 여성은 남성보다 더 남성적이다), 하인은 주인보다 주인을 더 잘 알고 있다, 신하는 군주보다 군주를 더 잘 알고 있다. 크리스테바의 '비체' -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이질적인 것, '혐오스러운 맛있는 음식'. 이 혐오스러운 맛있음의 양가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이 있었는데 김기덕 영화의 여성들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다. 평소에 좋아하는 선생님이 김기덕 영화의 여성들이 남자들에게 얻어맞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그 폭력이 '혐오스러운 맛있'어서가 아닐까 하고.
먹기와 먹히기의 사례로 카프카의 변신Der Verwandlung과 단식광대를 예시로 들었다. 어느 날 갑충으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는 식욕을 잃어버린다. 여동생은 그가 평소에 좋아했던 우유와 신선한 채소를 갖다주지만 그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 배불러서가 아니다. 맹렬한 허기를 느끼지만 무엇을 먹고 싶어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40일 이상 단식을 지속하면 안 된다는 금기를 깬 단식광대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먹고 싶어. 그런데 맛있는 음식을 찾을 수 없어' 먹기에서 쾌락은 먹히기에서 온다고 한다. 나Ich의 자아 정체성을 유지하는 먹기는 단순히 영양소섭취에 머물지만 자아 정체성에 균열을 일으키며 내가 아닌 다른 것, 즉 타자성을 내 몸 안으로 들어올 때 도취는 일어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논의를 마무리하고 아도르노의 역사철학, 문명사적 논의로 이어지면서 차원을 확장했다.
선사 시대(애니미즘) - 마술적 단계 - 신화 단계 - 종교 단계 - 고대-중세-르네상스-근대-현대)
이 문명의 발전사를 인간의 주체화 과정으로 읽는 것이 아도르노의 틀이었다고 한다.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신화인데, 그것이 근대성modernity의 원천으로 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에게 신화는 '자연'이라고 하는 불가해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이야기이다. '서사의 권력'. 이 신화의 서사가 자연을 설명하고 지배하는 동시에 배제와 추방이 이뤄진다. 특히 근대는 사회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하려는 기획이었고, 이 근대성의 폭력에 반발해 다양성을 들고 나오는 포스트모던의 비판이 뒤따랐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이 근대라는 시스템이, 아우슈비츠의 참극이라는 처참한 실패로 사형선고를 받은 근대(화)가 이성에 의한 필연적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근대화는 폭력에서 비폭력으로 진행되는 과정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는데 실상은 폭력이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주먹도끼나 돌도끼가 아닌 원자폭탄 같은 첨단과학기술이나 관료제 같은 복잡한 법-시스템의 폭력으로 대체된 것뿐이라는 진단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철학자들이 로그스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크리스테바의 비체 개념에 대한 숙지(혐오스러운 맛있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와 법폭력 이전의 근원적 폭력으로서, 폭력의 원형식으로서 언어/이성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남겼다.
p.s 어떤 분이 질문해주셔서 김진영 선생님의 말씀을 좀 더 들어볼 수 있었다. 요약하면 공부의 존재론/윤리학이랄까. 공부하기 힘든 시대이고, 공부를 하면 끝에는 그리스 시대처럼 빛나는 진리가 아니라 쓰레기가 있는데 공부를 안 하면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는 시대이다. 소극적 방어를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위,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에 가슴이 뜨거워지진 않았지만(멜랑콜리커라서 그런걸까?) 역시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구나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세를 다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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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김진영 선생님의 멜랑콜리와 철학 3강 프로이트 : 애도와 우울증 |
양*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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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와 멜랑콜리 Trauer und melancholie
이번 시간에 프로이트의 저명한 애도와 우울증 논의를 바탕으로 강의가 이뤄졌습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힐링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뗐습니다. 힐링을 '하는' 주체는 무의지적, 무의도적으로 우월, 예외 의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사랑의 마음으로 상처받은 영혼에 다가서려 해도 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 아이러니가 힐링의 딜레마라고 했습니다. 상처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사랑을 뜸뿍 받으며 자란 아이가 풍부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도도 높고, 받은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높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 고통에 무감각해질 수는 있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결정적'으로 받게 된 세월호 유가족들.
선생님은 자식의 죽음에 대해 가슴에 '묻는다'는 표현에 주목했습니다. 너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 또 너를 만져보고 싶다. 한겨레 신문에 유가족들의 편지가 실리는데 저도 거기서 너를 한 번이라도 만져볼 수 있으면 좋겠어, 라는 표현을 본 기억이 났습니다. 삶도 죽음도 아닌 비식별역에서 묻혀 있는 9명의 실종자들, 이제는 만져볼 수 없는 아이들에 대한 접촉욕구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감각성과 접촉성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자문했습니다. 접촉이 단절된 채 오직 시각으로만 향유하는 온라인의 세계에 빠져 살고 있고,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포르노그래피의 문제도 양성화되지 않았을 뿐 음지에서 많은 문제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실제로 중, 고등학생들 중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의 야동중독에 빠진 아이들이 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납니다). 서구의 역사는 시각의 역사라 해도 될 만큼 명료하게 사물/자연을 파악해 자연을 인간화, 도구화해 통제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는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오히려 눈을 찌르는(부정하는) 결말을 통해 눈의 이성이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았음을 승인하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는 관점을 보여줬습니다.
본격적으로 프로이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는데요. 프로이트의 말하기-글쓰기에서 두드러지는 아이러니를 활용하는 방식에 유념할 것을 지적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임상실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결론을 도출해내긴 했지만 자신이 진찰한 집단 내에서 도출된 결론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이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고 스스로를 부정해나가는 방식의 외교적 글쓰기에 능하다고 했습니다. 다른 환자 한 명만으로도 자신의 결론이 무너질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프로이트의 글 애도와 멜랑콜리에서 둘을 연결하는 접속사 'und'(영어의 and)에 주목했습니다. 이 등위접속사는 양가성을 띠는데 1 애도와 멜랑콜리를 대치적으로(versus의 관계) 보고자 함을 드러내고, 2 둘의 동일한 영역이 존재함을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온 부분이 재밌었는데요. 환자는 거짓말을 하고, 의사는 탐정 같이 환자의 거짓말 속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작업을 한다는 것입니다. 환자는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돌려말하거나 거짓말을 하는데, 거짓에 거짓을 계속 쌓아가다 보면 말실수가 발생하게 되고 의사는 말실수를 통해 우회적으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애도와 멜랑콜리에 대해선 저번 글에서 이현우 선생님이 쓴 <애도와 우울증>을 인용하면서 개념 정리를 하고 넘어갔는데요. 이번 시간의 설명이 간명하게 직관적인 느낌을 전달해줘서 부연합니다. 애도는 세상이 텅 비어 있는 것이지만 멜랑콜리는 내가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애도는 주체가 있지만 멜랑콜리는 주체가 없다. 멜랑콜리가 건강하지 못한 이유는 리비도나 내면의 에너지가 외부를 향해 있어야 하는데 내부에 갇혀 있게 되면서 주체가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의 유명한 이론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는데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미분리 상태에서 분리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분리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최초의 상처, '열린 상처'라고 했습니다.
애도에는 주체 '나Ich'도 있고, 대상도 확실하기 때문에 애도 작업(Trauer Arbeit)이 이뤄질 수 있지만, 멜랑콜리는 대상이 불명확하기 때문에 사랑의 에너지가 슬픔 자체로 가게 된다. '나는 내 슬픔을 사랑한다' 내가 누구를 사랑했는지, 내가 사랑했다고 믿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는지, 애착 관계의 견고성, 확실성이 제대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작업Arbeit' - 난제를 이성적으로 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애도는 상실한 대상1에서 새로운 대상2로 넘어가면서 삶의 다음 단계로 진보progress하지만('새로운 사랑') 멜랑콜리는 퇴행Regression한다. 이 퇴행이 향하는 곳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멜랑콜리커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자기에게로 도피한다. 대상이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서 길/방향을 잃은 사랑은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스스로에 침잠하게 되는 것이다. 원초적 나르시시즘, 오이디푸스 단계 이전의 구강기(구순기)라고 할 수 있다.
'남자는 뱉어낸다, 여자는 삼킨다'
여기서 먹기와 먹히기의 역설이 존재하는데 내가 죽은 자를 먹었으나 결국 죽은 자에게 먹히는 격이 된다.
이 먹기와 먹히기의 역설은 원초적 나르시시즘 -구강 단계-카니발리즘에 대한 설명으로 보충될 수 있다. 구강단계에서는 타자를 자기화하려 한다. '상상적 자아를 먹고, 상상적 자아에게 먹힘' 자/타의 미분리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애니미즘 역시 자기 자신의 영혼을 나와 만나는 모든 사물/자연에 투사하는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일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연을 먹고, 자연에 먹힌 사람'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은 앞서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분리 상태로의 이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진입/통과한 것을 반대로 보면 그 원초적 세계(어머니의 자궁/탯줄)에서의 추방으로 볼 수 있다. 상징계, 기호 세계로의 진입은 분리의 고통을 수반한다. 오정희는 자신의 작품에서 바깥 세상으로 나오기 직전의 아기의 입을 빌어 이런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세계로 나가지 않으려 했으나 엄마가 밀어냈다. 그물에 걸려 들었다. 더불어 카프카의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도 호출되었다. 이 분리고통은 의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육체에 직접적으로 새겨진다. 인간은 누구나 통과제의를 고통 없이 완벽하게 통과해낼 수 없기 때문에 '열린 상처'를 갖게 된다. 이번 강의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 <태어나기의 망설임> 우리는 태어나기를 망설인다. 우리를 옭아맬 그물에 걸려들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버텨보지만 태어난 이상, 세상에 '던져진' 이상 그 세계의 코드-시스템-언어를 습득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이런 운명을 진정 사랑할 수 있을까?)
1,2강에서 멜랑콜리의 대기권에 있다는 표현이 3강에서는 오늘날 우리는 모두는 나르시시트가 되었다로 변주되었다. 공동체가 붕괴되고 타자와의 만남이 어려워진 시대에 길 잃은 사랑이 가엾는 나 자신의 '빈 집'에 스스로 갇히게 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빈 집에서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 혹은 이 집으로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읽어보면 어떨까. 내 사랑이 갇혀 있는데 그 집은 여전히 비어 있다는 것. 이런 빈 집의 사랑을 내가 텅 비어 있다는 멜랑콜리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길 잃은 가엾은 사랑이 빈 집을 만들어냈고, 그 빈 집에 사랑이 갇혀 영영 갇혀버린 꼴이라 쓸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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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멜랑콜리와 철학 2강 정리 및 리뷰 |
양*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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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다뤄져 왔는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담론화가 진행되었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고대 - 중세 - 르네상스 - 바로크 - 계뮹주의 - 근대
고대엔 과학적, 물질적으로 멜랑콜리를 해명하고자 한 히포크라테스와 정신적으로 해명하고자 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습니다.
멜랑콜리는 '은혜로운 광기'로 설명되었습니다. 위대한 학자/예술가는 멜랑콜리에 걸릴 수밖에 없고, 그 멜랑콜리에 의해 천재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설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멜랑콜리는 상류층의 특권적 질병이었고, 노예-여자는 감히 멜랑콜리에 걸릴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멜랑콜리는 굉장히 정치적이면서 계급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세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주지주의적 성향이 더 짙어졌습니다. 별의 움직임을 통해 우주의 운행을 읽어내고자 했던 점성술과 주로 남성 수도자들이 걸리는 영혼의 문제로 설명하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점성술은 별의 움직임을 통해 우주의 운행을 읽어내고자 했고, 멜랑콜리는 토성Saturn과 연결지어 설명했습니다. 수전 손택은 토성의 네 가지 특성 (제일 멀다, 느리가, 차갑다, 무겁다)을 바탕으로 발터 베냐민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제일 멀다 : 메시아니즘/ 느리다 : 산책자/ 차갑다 : 놀라운 사유력/ 무겁다 : 하강 판타지(서 있는 것을 쓰러진 폐허로 봄).
남성 수도사들이 멜랑콜리에 걸리면 죄악시했는데, 신앙이 부족해서 사탄에 홀렸다는 식으로 멜랑콜리에 걸린 원인을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신에게 향해 있어야 할 정신이 다른 지상적인 것에 한눈 팔고 있으니 허영이 많아지고, 나태해지고, 무기력해진다는 식의 설명으로 고대에서 신화화된 멜랑콜리는 중세에 와 저주화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르네상스엔 다시 멜랑콜리에 대한 찬양론으로 상황이 급변합니다. 모든 천재는 멜랑콜리의 아들들이란 식으로 말이죠(여전히 딸들은 멜랑콜리에 걸릴 수 없다고 본 것 같습니다).
바로크 시대는 어떨까요? 바로크는 시기적으로 15~16세기에 해당하는데 이때 전쟁이 많이 발발하기도 했고,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궁정에서 상연된 비애극-애도극Trauerspiels은 비극tragedy란 장르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비극은 대단원에 이르러 승화가 이뤄지지만, 비애극은 승화가 일어나지 않고 난장판으로 마무리됩니다. 바로크는 멜랑콜리의 컬트화가 이뤄진 시기였다고 합니다. 발터 베냐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란 박사논문을 바탕으로 집필한 저서에서 문학적으로 저평가받았던 비애극에 주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니 좀 더 이해가 됐습니다. 또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인물들을 모두 멜랑콜리커로 설명하는 부분이 재밌어 햄릿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작년 말에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진행한 세월호 포럼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이동연 교수님도 햄릿을 읽자는 얘기를 해주셔서 이날 셰익스피어의 이름이 좀 더 깊게 울렸던 것 같습니다)
파스칼의 팡세에 대한 설명도 흥미진진했습니다. '저 우주의 진공이 나를 전율케 한다' 아무 것도 없는, 가공할 정도의 절망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희망/신을 찾고자 함. 끊임없이 신을 갈구하지만 대답 없는 신.
바로크 시대에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멜랑콜리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의사 리처드 버튼은 Anatomy of melancholy란 저서를 출간하며 히포크라테스 이후 끊긴 멜랑콜리에 대한 유물론적, 병리학적 탐구의 부활시킵니다.
계몽주의 시대부터 멜랑콜리에 대한 병리화 작업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애도와 우울증 모두 대상의 상실에서 촉발되는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애도는 사랑을 대상을 찾기 위한 건강한 앓음이라면 우울은 자기 자신 속에 매몰돼 있는 부정적 질병으로 대조적으로 설명됩니다. 여기에 대해 이현우 교수의 저서 <애도와 우울증>에 내용을 덧붙입니다.
애도와 우울중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애도의 경우에는 일단, 현실성 검사를 통해서 드러난 사실, 즉 사랑하는 대상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상에 부과되었던 모든 리비도를 철회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점차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상실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난다. 하지만 우울증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이 자아상실로 전환된다. 그리고 대상과 자아 사이의 갈등은 동일시에 의해 변형된 자아와 자아-이상으로서의 초자아 사이의 갈등으로 변모되고, 이것은 대상화된 자아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낳으면서 급격한 자기애의 상실, 곧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이러한 애도와 우울증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애도는 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무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된다. 둘째, 애도는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나르시시즘, 즉 자아 형성과 관련된다. 섯째, 애도와 달리 우울증에서는 애증의 양가감정이 자아 내부로 투사되면서 사랑의 대상을 자아로 바꾸고, 자신의 자아는 초자아의 역할을 하면서 사디즘을 발현시킨다.
(p28~29)
루터와 칼뱅주의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루터는 청교도적 자세로 신과의 소통을 중시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도덕-윤리가 판치는 사회에서 신에 대한 은총을 추구하기 위해 경건주의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에 따라 현실에 대한 도외시가 이뤄졌고,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의 신에 대한 믿음 속에서'만' 찾으려고 하니 먹고 사는 문제마저도 제쳐두고 신앙생활에 몰두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칼뱅주의는 예정론이란 프레임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신이 인간을 구원할지 안 할지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 또한 직업-노동도 신앙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에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계몽주의 시대에 멜랑콜리에 대한 병리화 작업은 왜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계몽주의가 이성의 추구를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사유할 수 있다는 믿음. 하지만 사유의 끝/종착지는 불가능(성)이기 때문에 이성이 주도한 멜랑콜리의 담론화 작업에서 배제되고 억압되고 담론화되지 못하고 추방된 어둠의 자식들, 입이 없는 것들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것의 회귀the return of the repressed를 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최근에 읽은 이성복 시인의 대담집 <끝나지 않는 대화>에서 이성복 시인의 필생의 문제로 '불가능'을 상정해 천착하는 걸 읽고 멜랑콜리와 불가능의 관계를 좀 더 파고들어가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설명해주신 부르주아 부분은 개인적으로 정말 무릎을 치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로 이론을 통한 현실문제에 대한 분석이 탁월하게 느껴졌습니다. 초창기에는 부르주아 시민들이 건강했다고 합니다. 경제적, 정치적 의미로 건강했던 부르주아들은 건강한 노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사유재산-부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이 있었다고 합니다(사회로 환원하는 식의). 하지만 자본주의가 진행됨에 따라 개인의 도덕은 지속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쁘띠 부르주아는 오직 부를 축적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고, 정치에 대해 무관심해지면서 탈정치화됩니다. 부의 축적을 통해 행복이란 이념-이상향에 도달하려 하지만 나보다 더 잘 사는 사람이 있으면 만족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소시민들은 권태에 빠지고 불행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재벌은 왜 골목상권까지 침투-침략하는가에 대해 그것이 시장 자본주의의 메커니즘, 생리 자체라는 설명, 그렇게 끊임없이 더 많이 추구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 소위 말하는 '무한경쟁'이라는 걸 깨닫고 성장의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호출하고 있는 현 정부에 대해, 아니 자본주의의 대기권 안에 있는 우리 세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 바깥-사회, 정치적 영역에서 단절된 채 내면에 스스로 만들어낸 행복 이념을 골몰하는 사람들. 이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이 곪아 끝내 악성종기로 터져버리는 양태 중 하나라 히스테리라고 했습니다(조현아 부사장은 왜 이렇게 히스테리컬한가 라는 저번 시간의 말씀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네요). 프루스트의 소설 살롱 여인들과 프로이트가 진찰한 여성 환자들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하는데요. 사회진출이 금지된 여성들에게 좀 더 첨예하게 나타난 겁니다. 이렇게 내면으로의 도피 말고 자연으로의 회귀도 있었는데 이 역시도 현실에 대한 외면이라는 점에서 결함이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청년 세대에 짙게 깔린 무기력도 이런 맥락에서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취업(생존)을 위해 학력과 스펙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한 극단에는 잉여들이 양산되고, 한 극단에는 경쟁을 통한 차별은 정당하다고 말하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 나오는 경쟁시스템에 과잉으로 적응한 괴물들도 만들어지는 극단적 양상. 강의 마지막에 세월호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개인적으로 속칭 일베, 일간베스트에 대한 이야기도 멜랑콜리의 차원에서 다뤄주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발명한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가 세워졌는데 이 자유의 불가능성과 존재의 무의미성이 엘리트 계급에 국한돼 있던 멜랑콜리의 일반화를 야기했다고 합니다. 쁘띠 부르주아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냉소적 우월성'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냉소적 우월성은 보통 일반인보다 더 많이 자유를 추구하는 지식인, 교양인, 예술가들에게 나타나는데, 그들은 멜랑콜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난 멜랑콜리해' 자기승인을 하고, 발버둥치고 저항하는 이들을 밑에서 내려다봄으로써 심리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점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환멸하고, 의미 운운하고 진보 운운하는 이들을 냉소합니다. '어차피' 바뀌지 않을 거야, 생은 무의미하고 자유는 불가능해.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져 고고하게 자신을 지키는 냉소적 우월주의자로 김영하 소설가를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함돈균 평론가의 평론집 <예외들>에서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 투영된 작가의 정치의식, 냉소적 포즈를 비판하는 대목이 기억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청년 운동, 문화 운동을 일으킨 대표적 사례로 수전 손택을 거론했는데 그녀 역시 현실도피적 행위라는 비판을 피하진 못했습니다.
애도불가능의 사회. 선생님은 세월호에서 침몰한 아이들이 마지막에 본 것은 무엇일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구해줄 거라 굳게 믿었고, 탈출하기 위해 창문을 절박하게 두드리고 있는 아이들을 버려두고 빈손으로 돌아간 해경을 보면서 그들이 무엇을 알게 되었을지에 대해.
http://na-dle.hani.co.kr/arti/issue/710.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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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9강 정리+리뷰] 인류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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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9강 정리+리뷰-
홀로 남는 왕
크레온은 안티고네에게 피조물로서의 사형을 내리면서 역설적으로 안티고네의 승리를 인정하게 된다. 그는 법과 도덕에 대해 안티고네에게 끊임없이 설교하며 그녀가 저지른 죄의 무게를 체감하게 하고 그가 느끼는 당혹감에 대해 ‘공감’을 요구하지만, 안티고네는 그에게 끊임없이 반박하고 그녀 자신의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든다. 크레온은 그의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 안티고네를 끝내 제거하게 된다. 그는 가족의 법도를 지키기 위해 안티고네를 제거하지만 결국 그 자신의 아들과 아내를 잃으면서 ‘가족’을 무너뜨리게 된다. 안티고네는 스스로의 도덕과 윤리를 보존하기 위해 ‘무덤-신혼방’으로 가버리고, 크레온은 폐허가 된 현실 앞에서 절망한다. 권력으로서 작동하는 혈통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 규범과 도덕을 지킬 것을 강조하며, 그로써 그들의 권력이 계승되고 보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위 재벌집 드라마에서 ‘감히 네가’ 운운하는 것은 그들의 보존과 안전한 계승을 위한 ‘짝짓기’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주디스 버틀러는 권력의 계승과 혈통의 보존으로 지속되는 한 ‘가족’의 찬란한 영광보다 가족에 속한 한 주체의 존재를 중시한다. 이는 한 재벌집-왕가 뿐 아니라 사회 전체, 남녀의 체계를 통해 ‘인류’의 보존과 번식을 주장하는 ‘인류’라는 권력에 대한 저항에 대입해 읽을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생산’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부과받고, 때문에 인간의 최종형은 기계가 되어버린다. 왕은 혼자 남아도 왕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곁을 떠나도 그 자신은 떠나지 못하고 옥좌에 남아 있어야 한다.
나는 당신과 자지 않았어요
최근 한 방송인의 막말로 인해 페미니즘 논쟁이 다시금 끓어오른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기다. 과거에 이미 사과한 일인데도 굳이 화두로 끌어 올릴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고 그의 사고가 남녀 평등 정신에 위배될 뿐 아니라 휴머니즘의 측면에서도 윤리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사실상 한국에서 가장 붙이기 쉬운 싸움은 남녀의 싸움이며, 이들은 서로에 대한 공격을 통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자 한다.
이에 대항하는 페미니즘의 초기 양상은 ‘여성’이 아닌 다른 물적인 것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아브젝시옹, 혐오적인 것으로 외면되고 방어대상이 되어버린 것의 ‘패배 정당성’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 것을 늘 배제해 왔으나, 그 배제 기준이 과연 ‘생존’을 위한 것이었는지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생존’이었는가, 아니면 ‘죽음’이었는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고심해 왔으나, 결국 제자리 걸음이었다는 결론 앞에서 인간에게 남은 건 자결 뿐인가?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편견으로, 페미니스트는 연애에 실패해 패배 의식에 차 있는 못 생긴 여자로 규정되곤 한다. 혹은 다른 ‘정상적인 여자’들과 다른 모습, 레즈비언으로 취급된다. 이에 페미니스트들의 대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레즈비언’의 배척으로 이어지고, 여성적 가치를 보존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남성과 싸우기 위해 소위 남성적인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즐기는 척하거나 그들과의 구분이 없고, 혹은 그들의 도덕을 계승하고 있다는 듯이 ‘레즈비언’의 배척을 주장하나 이는 그들 자신을 공격하는 것을 역순으로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는 그들의 나약함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십여년 넘게 그들은 어떤 ‘규범’을 되풀이 해 배워왔고, 무의식에 뿌리박은 이 편견은 쉽게 사라질 수 없다. 끊임없는 사유와 토론, 성찰만이 ‘페미니즘’과 ‘휴머니즘’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게 해줄 수 있다. 스테파니 스털의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는 책을 읽고 공부하며 토론하는 페미니스트들, 한 인간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한 인간을 보여준다. 그녀는 ‘노란 벽지’의 여주인공처럼 미쳐 버리기 전에, 그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기 위해 ‘공부한다.’ 그녀가 자신의 딸을 사랑하고 남편과 함께 사는 삶을 택했다 해서 그녀를 ‘좌절한 페미니스트’-순응자로서 읽는 건 지나친 오독이다. 그녀는 자신을 어떤 존재로 규정짓는 사람들에 대해 ‘자신’을 알지 못한다고 자신있게 지적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녀의 독서 편력 뿐 아니라 성찰, 그리고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콜비츠와 인류
그렇다면 그녀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끊임없는 자기 존재에 대한 낙관이나 아이에 대한 사랑 때문일까? 그녀의 책에는 딸에 대한 사랑보다는 딸의 칭얼거림, 갑작스런 병에 대한 불평과 한탄이 더 많다. 그녀는 딸에 대해 무작정 찬양하는 대신 ‘핑크’를 주장하는 딸에 대해 의문시하고 짜증을 느끼기까지 한다. 딸은 그녀의 분신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작고 거대한 타자다. 그녀의 존재에 의문을 던지고 그녀가 ‘자신으로서 분명히 살고 있는 것인지’를 묻게 한 계기이기도 하다.
최근 번역된 로베르 앙텔므의 ‘인류’의 표지에는 케테 콜비츠의 그림이 실려 있는데, 이 그림은 사람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거나 껴안으면서 하나의 원을 유지하고 있는 ‘단단한 그림’이다. 원 속에서 고개를 내미는 아이들은 밖의 상황을 궁금해 하는 ‘천진난만’한 표정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원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결심에 찬 비장함 뿐 아니라 두려워하고, 끊임없이 밖을 살핀다. 그래도 그들은 그 결속을 풀고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그림은 단단하면서도 불안하다.
타자성은 어떤 기호로 환원될 수 없는 불확실한 것으로 존재의 견고함에 위협을 가하는 ‘치명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타자성은 동시에 상실될 수 있는 ‘연약한 것’이기도 하다. 스테파니 스털은 딸이 그녀의 인생을 망치고 방해하는 ‘치명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동시에 딸이라는 존재가 순간 상실되어 버릴 수 있을 만큼 ‘연약한 것’이며, 그녀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고 있는 근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녀는 ‘딸’과 함께 살아나갈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슬픔의 공동체’인 동시에 ‘기쁨의 공동체’일 수 있으며, 불가능한 삶과 애도를 지속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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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8강 정리+리뷰]버티는 성실함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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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성실함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8강 정리+리뷰-
무서운 자화상
발터 벤야민은 어렸을 적 아버지와 동반해 간 파리에 매혹되는 한편, 나치의 탄압을 피해 도망쳐 온 파리를 경멸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 자연사는 시간에 의해 그를 매혹했던 모든 것-보들레르의 파사주는 퇴색하고 아름다웠던 과거-들이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점점 갈수록 나아질 수 있다고 점진적 진보를 주장하는 보수주의와 온건한 부르주아 마르크시스트들의 논지와 점점 갈수록 폐허로 치달을 뿐이라는 벤야민의 예언은 이 점에서 일치한다. 보통 예언은 앞으로의 운명을 순응하고 받아들이라는 징조인가, 아니면 그 운명을 거부하라는 충고인가? 사람들은 예언의 실현으로 인해 얻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치를 다하거나, 혹은 그 예언을 실현시키지 않기 위해 애쓴다. 오이디푸스는 예언을 실현시키지 않기 위해 양부모 곁을 떠나고 스핑크스를 물리쳤으나,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한 노인의 살해로 인해 예언을 현실로 만들고 만다. 어떤 ‘저항’ 또한 예언의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결국 예언은 절대적인 것이 되며 우리의 저항은 사실상 무력한 것이 되고 만다. 사실상 어떤 안전책도 결국 ‘안전하지 않다.’ 배가 가라앉은 것은 그 배의 안전성이나 경영진의 부도덕이 직접적인 원인일 수 있지만, 간접적인 원인 또한 그 운명을 재촉하는 꼴이 되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고, 사람들은 그 파멸의 전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신뢰’의 파멸이 실제로 드러나자 사람들은 일제히 불신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향한, 불신을 위한 불신이 바이러스처럼 매복해 있다가 따뜻해지면 피어오르는 꽃처럼 일제히 터져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벤야민은 혁명을 위해서는 기존의 자연사적 시간관보다는 새로운 시간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시간은 바로 순차적 시간을 방지하는, 파우스트가 외쳤던 ‘이대로 시간이 멈춰라’라는 외침과 같겠지만-그러나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으로 인해 ‘시간’에 의해 패배하며, 그에게 남은 건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의 신 밖에 없다.-동시에 과거와 현재, 미래의 가치 판단을 없애는 ‘판단의 중지’와도 같다. 그림과 사진이 위력을 지니는 이유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바로 ‘초상화’다. 초상화는 이미 몇백년 전에 죽은 이를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우리는 그 시선 앞에서 허둥거리다가, 그들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자연사적인’ 안심을 촉구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한없이 냉정하다. 이는 모든 그림과 사진이 사유 이미지로서 작동할 계기를 부여한다. 파리의 거리를 찍은 사진이나 클레의 천사 그림은 우리가 망각하고 지나쳤던 것, 우리가 잊어버리고 해몽책이나 뒤적이며 ‘미래’를 알려고 하는 꿈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메시아를 기다리지만, 그 수동적 기다림은 ‘고도를 기다리며’와 달리 끊임없이 준비하는 데에서 능동적인 움직임으로 변모될 수 있다. 벤야민은 계속 파리에서 ‘기다렸으나’ 그 기다림은 좌절에 의한 멈춤이 아니라 적극적인 ‘기다림’이었다.
광해
‘광해’의 왕은 자신과 꼭 닮은 광대와 독대하며 흥미로워하는 한편 그를 철저하게 증오한다. ‘광해’는 늘 혼자 있으며, 모두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한다. 그는 아무 것도 믿지 못하며, 그 자신이 입은 용포의 위력조차도 의심한다. 모든 미친 왕들은 다 혼자 있고 싶어했다. 그들은 어떤 누구에게도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국 그의 질문을 대답으로 되풀이할 것이며, 그의 결정을 촉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신은 그들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폭군 앞에서의 신하들은 폭군에게 쉬이 말하지 못하지만, 그 침묵은 폭군을 의기양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미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성군’들은 가신과 함께 다니며, 그 가신은 그에게 조언을 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폭군과 성군의 연출 차이가 드러나는 지점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사극에서의 ‘간신’들은 재물에 눈이 먼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 재물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존재적 ‘비극성’이 드러나게 된다. 그들이 무릎이 닳도록 빌고 굽실거린 왕은 그들을 구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들은 ‘재물’을 모은다. 소위 ‘개미’가 늘어나고 소비가 줄어드는 현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끊임없이 스스로의 이념을 배신하고 살아남기를 택한다. 동전 한 닢은 그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고, 더 오래 돌아다닌다. 자본주의의 최종점은 형체가 없는 ‘사이버 머니’라고 하지만, 결국 이는 자본주의의 이념의 최종에 다다른 것에 불과할 뿐, 자본주의의 폐지를 뜻하는 게 아니다. 완전한 이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신’으로서 자본은 격상되었고, 이제 인간은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배반할 일만 남았을 뿐이다.
우울할 때는 벤야민
모순적이게도, 벤야민의 멜랑콜리와 함께 대두되는 것은 알레고리다. 멜랑콜리는 그 자리에 멈춰선 정지라면, 알레고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생성되는 어떤 것을 표현한다. 로마와 그리스, 어떤 시대가 ‘어떤 시대’로 명명되었고 그 시대가 후일에 모범의 사례가 되듯 이 파국의 전조도 어떤 반면교사의 사례로 언급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제목은 이제 소망이 되어버린다. 도시의 꿈은 이제 꿈의 끝에서 깨어나기 위해 파국을 맞이해야 한다. 호접지몽은 꿈의 혼란을 뜻하기도 하나 동시에 꿈에서 비롯되는 존재의 자유로움, 한 고유명사 안에 갇힐 가능성과 한계를 뛰어넘는 데에서 온다.
벤야민의 멜랑콜리는 분명히 철저하게 파리의 통속적인 모습과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면들을 해부해내나, 이는 단순한 ‘관찰’만이 아니다. 미국으로 간 아도르노의 청에 불복했던 것은 그의 단순한 낙관주의나 깊은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는 스탈린과 부르주아들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타협하지 않는 미래’에 스스로를 주어버린 것이다. 만약 그가 그 국경을 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절망’해야 했다. 그의 극단적 선택은 그의 병리적인 면에서 비롯된 게 아닐지도 모른다. 혹은 어떤 담론으로 이상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병리적인 면’으로 치우쳐 그의 결말을 해석하는 것 또한 과도한 시각에 해당할 수 있다. 니체가 우울증과 진지한 사람들을 위한 철학으로 쉽게 오해되고, 그의 디오니소스에 대한 해석만이 대두되는 데에 비해 아폴론적인 면에 대한 시선이 축소되는 이유는-그가 전자에 치우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확한 것 하나는 그들은 자신의 담론이 예언으로 축소되거나 확대되는 것을 경시했고, 그래서 그들의 현재에서 끊임없이 그 ‘기미’를 찾아내고자 했다. 그 기미는 수많은 재료들 끝에서 태어나는 한줌의 황금처럼-혹은 그 황금의 기미를 드러내는 다른 어떤 것처럼 희미했을지도 모르며, 때문에 다른 재료들에 비해 덜 주목받을지도 모르고 별다른 성과가 아닌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어떤 것’, 기나긴 관찰과 좌절 끝에도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그들의 명랑성이 단순한 조울증 증세로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을 환기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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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7강 강의 정리+리뷰]인간에 대한 예의없음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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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예의없음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7강 강의 정리+리뷰-
여우와 포도
모더니즘은 멜랑콜리를 엘리트 계급의 특권으로 받아들였다. 지적인 분석과 심미화를 통해 멜랑콜리는 아름답고 퇴폐적인 것으로 무마되었다. 멜랑콜리는 정형화되면서 멜랑콜리적인 것으로 추방되었다. 리오타르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장선상에 속한, 시간적인 구분으로 보았으나 그러한 정의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미국의 유용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었다. 상품의 매력은 새로움과 휘발성에 있다. 멜랑콜리는 멜랑콜리적인 흔적을 남겼고, 그 흔적은 자본주의 시장의 건강한 유동성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멜랑콜리적인 것은 그로 인해 추방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건강하고 자유로운 생, 히피 문화의 대두로 이어진다. 히피 시위대는 그들을 제지하는 경찰의 총에 꽃을 꽂는다. 하지만 총알은 꽃을 짓이기도 발사된다. 꽃으로는 그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 평화와 자유는 우롱당하고 그들의 무력함이 증명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멜랑콜리적인 것, 우울증을 치료의 대상으로 보고 이를 치유하려고 했지만 그 결과 마주한 건 전기충격과 그 충격으로도 치료되지 못한 사람들을 격리하는 정신병원이었다.
멜랑콜리적인 것은 일종의 포도라고 볼 수 있다. 이솝 우화의 여우는 포도를 따먹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포도가 이미 자신의 것인양 그 맛을 상상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포도를 따먹기 위한 시도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여우는 포도의 맛이 분명 시큼털털할 것이라고 비난하며, 포도를 따먹는 건 쓸데없는 짓이라고 스스로를 비판하기까지 이른다. 포도의 맛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포도라는 열매를 맺게 한 건 다름 아닌 여우의 바로 옆에 있는 나무다. 나무는 포도를 높은 곳에,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매달아 놓았다. 여우가 만약 그 나무를 제대로 타고 오를 수만 있었다면 포도를 따먹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허공에 매달린 포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포도는 분명히 ‘나무에 달려 있다’.
파 한 줄기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증언을 시도하는 자와 증언을 거부하는 자. 프리모 레비는 그와 수용소에서 면식을 나누었던 이들이 ‘생존하는 줄’은 알지만, 그들의 현재 상황을 언급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증언을 시도하는 자들은 또다시 두 반응으로 나뉜다. 그들은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노하우에 대해 말하거나, 혹은 자신이 살아남은 데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한다. 프리모 레비는 증언을 택했으나 베텔하임과 같이 자신이 살아남은 노하우를 말하는 대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짓밟아야 했던 무언가를 말한다.
그 무언가란 말할 수 없고, 입증될 수도 없으며, 믿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귀환’에서 레비는 끊임없이 그의 곁에서 죽어간 어떤 인물들의 이름을 되새기며 그들을 잊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에 대비되어 부각되는 건 레비가 신곡을 읊조리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도움을 행했던 일들이다. 한 욕심쟁이 노파가 지옥에 떨어졌을 때, 그녀가 행한 파 한줄기의 적선이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로 내려왔던 것처럼 레비의 서술은 급박하게, 그 파 한 줄기를 향해 쓰인다.
하지만 노파가 끝내 뉘우치지 못하고 천국에 다다르지 못한 것처럼, 레비 또한 증언에 실패한다. 그를 가라앉힌 욕심은 다름 아닌 주변인들의 무관심과 그에 대한 회의였다. 사람들은 그의 증언에 대해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궁금해 했으며, ‘나치’를 언급하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금수령은 그의 상처를 치유하는 대신 오히려 곪고 터지게 만들었다. 또한 이스라엘에 대해 레비의 의견을 물어본 것처럼 그들은 무슬림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인권단체가 논하는 ‘인권’의 대상은 일정한 단계에 이르른, 그들이 이해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 어떤 대상들을 뜻한다. 이 스펙트럼에서 제외되는 이들은 태아라는 생명 초기와 무슬림이라는 생명 말기의 대상들이다. 그들이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들이 포기하게 되었고 포기당하게 되었는지를 거부한다. 인간의 주체성과 선택의 권리를 믿는 한, 인간의 ‘영웅주의’를 주창하고 인간과 동물을 위계적 질서로 편입하는 한 이런 무력한 사고는 그치지 않고 순환할 뿐이다.
헥토르의 홍조
로베르 앙텔므는 수용소 시절 그가 마주했던 홍조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아주 당황했을 때,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과 마주할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수치, 최소한의 수치를 정해 놓고 이에 대해 뿌듯함을 느끼던 인간은 아주 쉽게 미끄러지고 만다. 현대 사회에서는 ‘무엇이든’ 해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며 아름다운 결과는 추악한 과정을 아름답게 만든다. 인간의 최소한은 무너지고, 그제서야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어떤 시선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메두사다.
메두사와 눈이 마주친 사람은 돌로 변한다. 이런 법칙 하에서면 사실 메두사는 그려질 수 없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림 속의 메두사는 정면에서 우리를 본다. 우리는 타자의 시선이 느껴질 때, 그 타자를 바라보고 그 타자를 자신의 시선 하에서 재편할 때 안도감을 느낀다. 다시 주체로 되돌아 온 것이다. 하지만 메두사는 우리에게 판단의 기미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순식간에 돌로 변해버린다. 메두사는 우리를 일방적으로 ‘판단’해 버리고, 돌과 같이 딱딱한 ‘개념’ 안에 가둔다. ‘한니발’이 연쇄 살인마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대상으로 언급되는 것은, 단순히 그가 벌이는 살인이 끔찍해서가 아니다. 그는 인간을 하나의 ‘고기’로 보며, 이러한 ‘피조물성’에 의해 인간은 그가 믿던 가치를 잃고 해체된다. 한니발이 인간에게서 바라는 건 오직 ‘피조물성’일 뿐, 그가 입은 옷이나 지위에 대한 고려는 없다. 그와 나누는 대화가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운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던 어떤 것, 그들이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실재와 직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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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6강 강의 정리+리뷰]타버린 자유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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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버린 자유
-김진영 선생님의 멜랑콜리와 철학 6강 강의 정리+리뷰
비평의 순간
문화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창조물’이다. 자연에는 문화가 없다. 인간의 ‘문화’는 자연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자연을 인간의 관점대로 해석하고 편집한 것으로, 결국에는 반자연적 성향을 내재한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고 생존의 문제 대신 자유를 선취하고자 했다. 문화는 그러한 시도를 영웅의, 소시민의 역사로 만들었다. 하지만 자유를 지향하던 문화는 점차 사회 시스템에 의해 재편되면서 모순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부자유라는 결말로. 사회는 철저한 제도화를 기반으로 한 합리적 시스템으로 변모했다. 문화는 이러한 부자유를 부각하는 대신 사회의 폭력을 가리는 ‘현혹’으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의 나사나 태엽이 되어 돌아간다. 사회라는 모습 전체를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그들은 계속 설국 열차에 갇혀서 어디론가로 향해야만 한다. 열차에 타고 있는 한, 그들은 자신이 달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달리는 건 그들의 의도가 아니다. 열차가 달리는 것 뿐이다. 그들은 자신이 이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어떤 중요한 부품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편집해 나가려고 한다. 어쨌거나 ‘퇴직’은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사가 다 돌아가면 또다른 나사가 대기하고 있다. 다 쓰인 나사는 또다른 곳에 쓰이거나 버려진다. 현대 사회의 경우 후자에 처할 확률이 높다.
문화비평의 등장은, 사실상 그 장르가 모호하다는 점에서 의문을 품게 한다. 기존의 대중 매체를 분석할 것인지 아니면 영화나 문학과 같은 고유한 예술 장르를 통틀어 바라볼 것인지. 문화는 사회와 유리된 어떤 창조물의 대상, 사회와는 연계되어 있지 않은 어떤 중립지점으로 언급되어온 만큼 그 비평 또한 현실도피에 속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문화 비평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으려고 하는 사회의 전체상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설령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게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일부분에 불과할지라도, 낙관적으로 판단하는 대신 냉철하게 분석하고 판단하려 한다.
그러나 과연 현대 사회에서 문화비평은 그 의의를 다하고 있는가? 문화비평을 쓰는 주 계층이 현실의 미미한 ‘미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풍부한 지식을 지닌 부르주아 계층이라는 점은-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문화 비평의 한계를 지적한다. 문화 비평은 모순에 대한 무기가 아니라 하나의 방패가 되어버리고, 난해함은 그들의 우월감과 오만에 대한 정당화로 귀결된다.
붕대 클럽
트라우마란-그리스어에 의하면-어떤 무기에 의해 입은 깊은 상처를 의미하는데, 이 때의 상처는 상처를 입힌 자가 죽일 의도가 있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출생의 트라우마는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왔다는 충격에 의한 상처일 수도 있는 한편, 강제로 떨어지고 평온 대신 차가운 손에 의해 엉덩이를 맞아야 한다는 폭력에서 의거할 수도 있다. 아기는 이제 이성적인 보살핌을 받고 이성적인 발달을 거쳐 이성적인 정상인이 되어야만 한다. 아기는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처럼 보인다. 어른들은 아기들을 끊임없이 건드리고 때리면서 가르친다. 아기들에게 상냥하게 가르친다는 말은, 너무나도 쉽게 남용되고 있다. 아기들은 당신들의 말을 모른다. 끊임없는 보살핌이 필요하고,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다. 한 덩이의 햄을 만들기 위해서는 돼지를 죽이는 과정뿐 아니라 양념을 하고 노끈으로 단단히 묶는 행동이 필요하다. 햄은 기존의 ‘돼지’와 분리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인식의 분리는 보신탕이나 다른 애완 동물들을 먹지 말자는 사람들의 논리와 상충되는 바, 그들의 논지는 이렇다. 사람들이 정을 붙인 동물들을 어떻게 먹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들이 제시하는 먹을 수 있는 짐승은 그들이 정을 붙이지 않았으며 살아 있었던 과거를 모르는 동물들로 한정된다. 아이들은 애완동물이 될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애완동물들의 경우, 우리는 애완동물에게 어떤 발전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아주 최소한의 것을 기대하고 말 뿐이다. 하지만 아기는 언젠가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 그들 또한 오딧세우스처럼 유혹을 끊어버리고 이성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고, 구강기의 욕망은 잊어버려야 한다고 강요될 때가 올 것이다. 다만 가끔씩 탯줄을 끊어낸 상처를 보면서 그들은 묘한 상실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기억의 흔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자살의 자유로운 허용
모더니즘 사회에서 댄디즘은 멜랑콜리의 합법화이자 멜랑콜리를 통한 자기 도취, 나르시시즘의 지향이었다. 그들은 산업 사회와 인간의 사물화에 대해 반항하고자 했으며, 그 자신이 이러한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격차를 느끼고 슬퍼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다면 그들은 그 변화를 따라가야 하나, 그랬다가는 그들이 으깨지고 말 것이었다. 카렌 블락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에 정착하고자 하는 사람들, 저자를 비롯한 버클리, 데니스는 너나할 것 없이 사회로부터 도망쳐 나왔다고 자조하지만 사실상 그들을 아프리카로 추방한 건 그들 자신이 아니라 사회였다. 사회는 그들의 시간을 더 이상 받아들여 줄 수 없었다. 뛰어가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흰 토끼를 따라 토끼굴로 들어간 앨리스는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환상 속에서 대처하고, 실수하고, 목이 잘릴 뻔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울에의 집착은 멜랑콜리적인 것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모순에 빠진다. 어떤 기질로 보고 ‘어쩔 수 없는’ 불치병으로 판단한다는 것, 이는 사회의 멜랑콜리적인 것을 회피하는 태도와 같다. 자기 자신의 우울은 조그만 돌멩이처럼 주머니에 넣고서 만지작거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의 우울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공중에 뜬 구름처럼 두려워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채, 땅만 보고 걸어다니는 것이다.
‘자살의 자유로운 허용’이라는 말은 어찌 보면 모순이다. 자살은 본래 자신의 선택이며, 마지막 ‘자유’를 표방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 아메리가 비꼬듯이 말했던 ‘자유 죽음’이 바로 그 일환이다. 하지만 ‘허용’은 부자유를 의미한다. 댄디즘의 모순은 그 자신으로 남아 있으려고 했던 시도가 결국에는 자신의 왜곡을 초래한다는 점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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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김진영 선생님의 멜랑콜리와 철학 5강 정리+리뷰] 어떻게So was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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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So was
-김진영 선생님의 멜랑콜리와 철학 5강 정리+리뷰-
진보하는 폭력사
프로이트에 의하면 ‘정상적인 인간’은 존재한다. 오이디푸스 제의를 통해 혼자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건강한 주체가 되고,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 그들은 스스로의 역할을 다하며 세상에 여하고 자신의 구두에 신경쓸 줄 알며 레스토랑에서 자신이 먹은 음식 값을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들은 사회적 관습과 매너에 철저하다. 그런 사회에서 과연 전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전쟁은 일어난다. 전쟁은 그렇다면 합리적인 인간의 행동이라고 볼 수 있는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최초의 인간은 오이디푸스적 분리 제의를 통해 ‘인간’이 된다. 인간은 생각할 수 있었고,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분리는 예정된 운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분리는 자연으로부터 살아남겠다는 생존 의식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들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을 억눌러 자연 상위에 있는 인간으로서 살겠다고 다짐했고, 이는 인간에게 제 2의 자연을 창출하게 했다. 그들은 자연이 인간에게 악의없이 휘두른 폭력에 악의를 가지고 답했고, 이 악의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을 금기로 만들었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그들이 상상한 이상의 고문을 당했다. 사회는 진보했다고 소리쳤지만, 사실상 발달한 건 고문 기술이었다. 고문과 거짓 자백을 강요당했다. 그들이 읽은 모든 책은 반정부주의의 사상을 지닌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들이 지은 죄라고는 어쩌면 질문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배운 것과 사회는 너무나도 달랐고, 그들은 ‘순진했다.’
순진함이 죄라면 순진하지 않음은 죄가 아니게 될 수 있는가, 죄의 판별까지 가릴 수 있는 기준이 되는가. 제바스티안 하프너는 서글프다는 듯이 말한다. 좌파는 늘 성공하지 못한다. 그들의 정책이 현실성이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들이 부패해서인가? 다만 단 하나, 그들은 끊임없이 왜 안 되느냐고 질문한다. 우리가 여태까지 세습해 오고 있는 폭력들에 대해, 왜 그 폭력들을 개선할 수 없느냐고 되묻는 것이다. 이는 사회라는 건축물에 자랑스러워 하는 이들에게는 금기와 같다.
아도르노는 ‘부정 변증법’에서 신이 만든 유토피아란 것은 없으며, 아담은 자신의 호텔이 얼마나 최고인지 광고하는 호텔주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아이가 처음 본 아담의 폭력은 설령 그에게 가해진 것이 아닐지라도 그를 질문하게 만들었다. 그 질문은 아담에게는 하나의 영업 비밀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러한 폭력만이 아담을 주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흉터의 세습
정치 열사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정치 열사가 되는가? 나이가 들든 들지 않든 그들은 ‘세상의 이치’를 재빨리 깨닫자마자 열사이기를 포기하거나 열사를 모방한다. 그들은 그들을 짓밟았던 폭력을 거머쥐고, 그들에게 또다시 질문을 던지는 이들을 지겨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대답하지만, 그 대답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다만 끊임없이 우회하며 목적지까지 가기를 거부하는 낙타와 같은 대답일 뿐이다.
그들이 꿈꾸었던 열정을 이루기 위해서 권력을 거머쥐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그들을 정치 시스템에 가두어버린다. 수치 여사가 집 안에 유폐되어 있었을 때, 그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었다. 새로운 버마로 불리었다. 그녀가 감금에서 풀려났을 때, 사람들의 환호가 잇따랐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여전히 환호하고 있을까?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든 그 사람들은 실망했을 것이다. 그녀가 과거 그들의 환상에 갇혀 있었다면 이제 그녀는 새로운 감옥에 갇혔다. 바로 미얀마의 군사 정부다.
질문은 두려운 것이 된다. 과거 나이 든 사람을 하나의 오래된 도서관으로 알았다는 말은 말 그대로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다. 그들은 절망적인 현실에 대해 입을 꾹 다물고, 이 절망을 승인하려 하지 않는다. 그 거부는 그들의 삶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폭로하고 짓밟아 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동시에 그들이 그들 자신의 질문을 거부당했을 때 느꼈던 공포를 다시 맛보아야 한다는 것 때문이다. 늘 질문은 그들 자신에게 직접적인 공격으로 와닿는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이냐?
결국 그들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미래에 대답을 얻게 된다고 우회해 말한다. 너희들이 사는 이유는 정해져 있으며,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며, 부모와 같은 삶을 살다 보면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만약 얻은 게 있다면 왜 대답하지 않는가? 대답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맞다. 그 경험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대답할 수 없다. 막바지에 이르러 그걸 깨닫게 된다. 이미 주어진 미래, 나와 똑같은 ‘생산 기계’를 만들어야 하는 과정으로.
결국 ‘폭력을 당한 의지’는, 그게 설령 처음에는 좋은 의지라 해도 나쁜 의지가 되기 쉽다. 그 ‘쉽다’라는 것은 ‘어렵다’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좋은 의지는 결국 소멸된다. 대답할 수 없는 딜레마 앞에서 우리는 망설인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남자가 꽂혀 있는 통에서 어떤 칼도 빼지 않고 다음 사람으로 넘겨 버리는 것뿐이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은 그렇고, 우리는 또다른 방법을 생각해내기에는 시간이 없다. 현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옆구리를 찌르면서 얼른 선택하라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클로로포롬의 대기
살아남기 위한 선택은 대가를 필요로 한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잃게 되는 것이 당연하듯이, 우리는 질문의 원인이었던 고통을 잊는다. 인간은 자연을 이기는 인간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연을 억압하는 기술을 발명해 왔다. 그 기술은 나아가 인간에게 내재된 자연까지 억압했다. 그 고통을 사람들은 ‘성장통’이라고 했고, 더 큰 키와 우람한 체격으로 자랄 징조이기 때문에 ‘반가워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을 반가워한다는 건 모순이다. 고통은 아프고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잊혀진다.’ 하지만 몸은 잊지 않는다. 몸은 괴로워하고 비명을 지른다. 결국 인간은 점점 ‘이상해진다.’
이상해지는 인간을 두고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하는가? 묻지마 살인이나 수틀리는 일에 대해 폭발하는 사람을, 이제는 감상적이라거나 어떤 객기로 보는 대신 두려워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는 그들이 감행하는 폭력이 점점 과해지는 것도 있지만 사회가 어느 정도의 ‘틀’을 제시하고 그 틀을 점차 넓혀 왔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그들은 ‘억압’해 ‘처리’하려고 했고, 어ᄄᆫ 저항도 통하지 않자 살해라는 폭력에 이른다. 그러나 이는 또다른 ‘돌출 행동’으로만 여겨질 뿐, 해석되지 않는다. 해석은 금기가 된다. 신문지 한켠에서 선정적으로 노출된 이후 사라진다. 대기권에 이미 마취약이 퍼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기사가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잠깐 메스의 차가움을 느낀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가, 그 감각이 느껴지지 않고 마취가 되자 자신의 주변에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낙관하고 신문을 덮는 수준이다.
클로로포롬-마취약의 대기권을 정화하는 대신 사회는 ‘마시는 것’은 어쩔 수 없고, 그저 나갔다 오면 깨끗이 씻으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어차피 나가서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뿌연 황사-마취약은 하늘마저도 가린다. 하늘을 바라볼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 자유는 확보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제 질문마저도 지겨워한다. 어쩜 이렇게, 이렇게 될 수 있느냐고. 그저 마스크를 쓰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어다닐 뿐이다. 하염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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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김진영 선생님의 멜랑콜리와 철학 4강 정리+리뷰] 게임의 끝은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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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끝은
-김진영 선생님의 '멜랑콜리와 철학' 4강 정리+리뷰-
카라마조프 중 최고의 카라마조프
프로이트에 의하면, 애도와 멜랑콜리-우울증의 판가름은 부르주아 사회로의 귀환 여부에 있었다. 부르주아 사회는 자본에 의해 구성된 시스템이었고 사람들은 그 시스템의 나사와 못이 되어야 했다. 나사나 못이 빠지거나 헐거워지면, 열십자로 깊게 패인 홈에 드라이버를 꽂고 세차게 돌린다. 그러나 그마저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가 있다. 열십자 모양의 상처는 드라이버로는 고정시킬 수 없을 만큼 점점 깊어진다. 결국 나사와 못은 불량으로 판정되어 장도리로 뽑히고 버려진다. 왜 버려져야 했을까, 사실상 그 이유는 상처 때문이다. 그러나 나사나 못이 스스로 그 상처를 만든 게 아니다. 그들은 상처를 만들어야 했다. 드라이버에 의해 조여지기 위해서. 오이디푸스적 통과 제의에서 사람들은 상처를 받았지만 그 상처를 망각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끔 교육받는다. 상처를 떨쳐내고 부단히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 이는 제의에서 배운 두 가지의 법칙으로 분명해진다. 하나는 자신이 떨어져 나온 어머니와의 동일화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을 분리시키는 아버지의 권력을 숭배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증오라는 맹렬한 감정을 떨칠 수 없게 된다. 그들이 떨어져 나온 낙원에서는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시간에 따라 점차 맹렬해진다. 아버지는 시간이 갈수록 무력해지며, 그 무력한 존재 앞에서 되묻게 된다. 대체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복수라고는 그들이 마주했던 희생과 복수를 또 다른 사람들에게, 타자에게 행하는 것이고, 그러면서 그들을 권력자로 유지하는 것이다. 상상계의 자기애 폐하는 상징계에서 생존하기 위한 자기애 폐하로, 절박해진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아버지 카라마조프와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듯한, 지적인 둘째 이반 카라마조프는 아버지를 흥미로운 대상으로 두고 관찰한다. 그는 아버지를 ‘타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보다 훨씬 더 못한 타자로. 그리고 그에게서 가끔 놀라운 발언이 나올 때마다 ‘놀라워 한다’. 마치 실험 동물을 마주하는 것처럼. 그는 신에 대해 조소하고 아버지와 모든 가족들을 무시한다. 그는 그들을 ‘먹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전혀 믿지 않았던 ‘신’의 대척점에 있는 ‘악마’와 마주한다. 그는 결국 자신이 신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악마’의 존재를 통해 깨닫게 된다. 그는 그 자신에 의해 ‘먹힌다’는 것을 깨닫고, 그 순간 그에게 찾아오는 것은 이전에 망각했던 상처였다. 그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제거해야만 했던 모든 격렬한 감정들이었다. 사랑, 질투, 증오, 분노, 슬픔까지. 그는 그의 형 드미트리가 아닌 하인 스메르쟈꼬프가 부친 살해를 저질렀다는 증언을 하기 위해 나서지만, 그 증언을 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전까지 마주하기를 거부했던 진실, 곧 아버지를 자신이 죽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로 인해 이전까지 가만히 있었던 상처에서 고름이 터지고 피가 흘러내린다. 그는 열에 들뜨고 창백해진 얼굴로 쓰러진다. 그는 드미트리의 무죄를 증언하지 못함으로써 ‘명백히 증언한다.’
진단과 판단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한때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는 청춘의 고통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진단한 것으로, 사람들은 이에 열광했다. 하지만 점차 그 ‘진단’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 명제를 통해 청춘에게 무엇이 해결되었는가? 아픔이 정당화된다는 것인가? 저자의 신상 정보와 이력들이 파헤치고 속속들이 실망할 일들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진단을 무효한 것으로 만들고 그 명제를 거짓말로 ‘판단’했다. 그렇다면 그 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어쩌면 거짓 위로, 떠돌이 약장수가 파는 가짜 약의 출처와 무효험성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뒤에 남는 것은 형편없이 파헤쳐진 무덤, 텅 빈 구덩이 뿐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모든 것을 세분화하고, 이로써 모든 것을 통제한다. 사람들이 스스로의 개별성을 입증한다고 생각하는 취미와 패션마저도 데이터로 환산되고 다시금 재연된다. 그러나 이러한 ‘세분화’에 대해 우리는 불안해하는가? 오히려 그러한 ‘공인’에 대해 안심한다. 자신이 한여름에 뜨개질을 하는 게 이상하다고 불안해하다가도 인터넷에서 여름 뜨개질을 반기는 글을 본다면, 안심하게 된다. 그들은 적당하게 ‘개별적인 것’이다. ‘적당하게’ 라는 말만큼이나 우스운 말이 없다. 우리는 진단과 판단을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다를 수 있다.
병원에 가면 우리는 ‘진단’을 받지 ‘판단’을 얻지는 못한다. 진단은 어떤 한 사람을 특정한 병에 걸린 환자로 정의한다. 수많은 검사와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젓는 모습, 그리고 눈을 깜박이고 병원 복도에 늘어선 의자에 앉아 대기하는 순간들까지. 그 모든 것이 ‘진단’이라는 종교를 믿게 만든다. 어떤 병이라고 진단을 받는 순간 환자는 되묻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판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사가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그 종교의 환상이 깨지지 않게, 그러면서도 너무 확신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윤리다. 그들은 약을 처방하고, 앞으로 실생활에서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 알려준다. 사람들은 이를 맹신한다. 그러나 그렇게 충실히 교리를 따랐는데도 병이 악화된다면? 그들은 갑자기 의사를 불신하고, 비난하기까지 한다. 의사들은 ‘판단’해주지 않았다. 죽음 선고를 받은 사람이든 경미한 증상을 가진 사람이든 간에 ‘판단’은 자신이 하는 것이다. 가령 감독 마미 스나다가 찍은 다큐멘터리 ‘엔딩 노트’가 그렇다. 감독의 아버지는 암 선고로 ‘진단’을 받지만, 의사의 권고 대신 그 스스로 엔딩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다. 그는 자신이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여행을 다니며, 천주교 세례를 받고 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루고자 한다. 프로이트처럼 그가 이미 ‘성숙’한 자아였기 때문에 그런 ‘판단’이 가능했던 것인가? 아니, 그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왔다. 다만 다른 점이라고는 ‘죽음’에 대한 선고를 받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의 원해 왔던 ‘결말’을 준비하고, 그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새삼 깨닫게 된다. 사회는 그의 행동을 이상한 것으로 여기고 얼른 ‘병원’에 들어가라고 강요한다. 시스템에서 그는 ‘고장난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의 아버지는, 스나다 도모아키는 스나다 도모아키로서 ‘판단한’ 죽음을 맞이한다.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선사 시대가 미분리의 애니미즘 종교였다면, 신화는 언어라는 상징들을 통해 점차 세상을 해석해 나갔다. 현대는 조밀한 시스템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이성적인 제스쳐가 아닌 이상 ‘돌출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차든 무엇이든 원활하게 굴러다닐 수 있는 매끈한 표면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깎아냈고, 아도르노는 이를 문명사라 부른 뒤 조롱하듯 퇴행하는 문명사라고 덧붙였다. 인간은 사회에서 거부한, 내재된 욕망을 하나씩 제거해 가면서 ‘인간’이 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끝에서 마주한 것은 번호들의 지옥인 아우슈비츠였다. 인간이 투수라면, 그들은 자연이라는 타자를 향해 공을 던졌지만 어떤 공도 그들에게 가닿지 못했던 것이다. 공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볼’이라는 판단을 듣게 만들었으니.
반면 내재된 자연 또한 무력하게 남아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인간에게 가능성으로 남아 있었지만, 무력하게 선택해주기를 기다리는 가능성으로 남아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언어를 배우면서 내재된 자연은 그들만의 언어를 만들어냈고, 이는 소통되지 않는 ‘옹알이’이자 소통을 간곡하게 원하는 ‘옹알이’였다. 하지만 상징적인 언어 시스템의 구성으로 인해 개별적인 언어는 실패했다. 신은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수많은 언어로 퍼지게끔 만들었다지만, 그들은 그 언어로 또다시 공통의 언어를 만들고자 했다. 신화를 창작할 시대만 해도 문법의 틀을 깨는 선험적인 언어들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뮤즈를 불렀다. 하지만 점차 다신교에서 유일신으로 모든 상징들이 집약되면서 ‘순종’이 강요된다. 신에 대한 ‘불경’과 ‘이단’이 동일해진 것은 그 때부터였다. 수많은 재판들이 생겨났고 화형이 이어졌다. 하지만 내재된 자연은 이에 대해 ‘종교’를 벗어나는 ‘종교적인 현상’, 초월적인 어떤 현상을 현시하면서 사람들에게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자연 또한 무력하게 배트만 들고 서 있지 않았다. 그들은 잽싸게 배트를 휘둘렀지만, 공은 번번히 그들의 배트를 피해 포수에게 매다 꽂혔고 스트라이크가 선포되었다.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은 결국 투수와 타자 어느 쪽도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들 중 누가 성공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리고, 이는 결국 어느 한쪽만 이겨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사람들은 자연을 이기기 위해 땅을 파고 강을 메꾸며, 자연은 사람을 이기기 위해 텅빈 싱크홀과 지진,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것들을 제시한다. 어느 쪽이 더 끔찍한지에 따라 승패가 가려진다면, 이 승부는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망각하고 있는 게 있다. 그들은 ‘야구 게임’을 하고 있고, 그들이 지든 이기든 간에 게임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들의 승부 또한 게임을 위한 것이지 게임이 그들의 승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승부를 위한 게임은 사실상 노골적인 선정성을 띤 광고판이나 다름이 없다. 아도르노는 게임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어했다. 그는 그 게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어떤 희생이나 푸짐한 아침식사가 아닌, ‘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생’을 살고 있는가. 승부에 매달려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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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3강 정리+리뷰]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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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멜랑콜리와 철학 3강을 듣고-
애도하는 사람
‘슬픔과 우울증’에서 프로이트는 정상적인 사회에 회귀하는 것을 전제로 죽은 사람과 애도하는 사람을 바라본다. 그에게 죽은 사람이란 이미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중요한 건 아직 살아 있는 애도하는 사람 뿐이다. 그에게는 끝까지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의 리비도는 계속 움직이려고 한다. 이러한 리비도의 움직임을 거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동물에게는 욕구만 있다는 점이며 인간에게는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욕구는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의식주의 충동이라면 욕망은 죽음 욕망까지도 포괄한다. 욕망은 인간 스스로에게 자기 자신을 되묻게 한다. 과연 그 자신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살아남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방어 기제는 기만으로 작동한다. 우울증은 방어 기제의 정체를 통렬하게 밝힌다. 사라진 사람의 자리를 어떻게 메꿀 수 있겠는가. 생활을 위해 억지로 가두고 괜찮다고 틀어막은 수도꼭지의 뚜껑은 언젠가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기만한 슬픔은 되돌아온다. 그 슬픔은 우리에게 한 때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는 아련한 노스탤지어의 감성을 느끼게 하는 대신, 우리는 처음부터 혼자였으며 아무리 애써봤자 죽을 때마저도 혼자 남을 것이라는 선고를 내린다.
영웅의 몰락
오이디푸스는 테베 시의 스핑크스를 물리쳐 준 영웅으로 칭송받았지만, 그는 영웅이 될 수 없었다. 비단 그의 출생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그의 눈을 너무 믿었다.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죄인을 데려오라고 명령한다. 바로 ‘그의 눈 앞에’. 그에게 진짜 범인을 알려준 사람은 장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였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의 눈을 찔러 자신의 오만했던 생각을 벌한다. 그가 알지 못했던 자신의 상처는 점점 파열되면서 그 자신마저 몰락시킨다.
오늘날 영웅들은 어떤 큰 규모의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다. 현재 ‘영웅’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자본이나 지식과 같은 일정한 근거를 가지고 사건을 해결하고자 한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랑은 거부당하고 의심받는다. ‘썸’이나 ‘밀당’은 결국 그 사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행동이자 그 사람을 계속 의심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 귀착점이 과연 믿음이 될 수 있을까. 밀리고 당기는 와중에 그들이 원하는 것은 ‘승리’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져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의 확신-그 사람은 나를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져주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져주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을 확인하며 그 사람에게 사랑받는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헤어질 대 다른 사람에게 가장 상처를 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사랑이 변했어.” 라는 그 명대사는 사실은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날 사랑하는 너를 좋아했어.”
결국 우리는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으며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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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2강 정리+리뷰]죽은 렌스키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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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렌스키
-김진영 선생님의 '멜랑콜리와 철학' 2강 강의를 듣고
선왕의 유령
멜랑콜리의 역사는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 고대에서 중세, 르네상스와 바로크, 현대에 이르기까지 멜랑콜리의 정의는 실패했다. 고대에는 의학과 철학의 대상이었다면 중세에는 신앙에 의거해 병리적인 대상이자 점성술이라는 미신, 르네상스에서는 인간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무작정 찬양받았으며 바로크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세상 앞에서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두 손 벌린 채 앉아 있는 모습으로, 멜랑콜리는 형상화된다. 가톨릭의 허례허식으로 쌓아 올려진 ‘천국’이라는 환상과 면죄부를 비판한 루터는 종교 개혁을 통해 종교를 조금 더 ‘리얼한 것’, 현실과 맞닿은 어떤 것으로 바꾸려 했지만 실패한다. 신은 자비로우면서도 무자비하고, 깊고 심오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측을 벗어날 정도로 단순하다. 루터는 개인의 믿음을 강조했지만 그가 말하는 구원은 세속이 아니라 현실에 있었다.
벤야민에 의하면 멜랑콜리는 일종의 효모로, 자신의 크기보다 훨씬 더 많은 밀가루 속에 파묻혀 먹히는 듯하지만 사실상 밀가루 전체를 효모화시켜 부풀게 하는 역설을 가져온다. 사람들은 멜랑콜리를 일종의 병과 장신구, 유행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멜랑콜리의 ‘도구화’에 대한 시도는 도리어, 멜랑콜리를 소리없이 대기권으로 녹아들게 만드는 데 조력한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멜랑콜리를 정의하면서 멜랑콜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멜랑콜리적인 것은 멜랑콜리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로 인해 멜랑콜리적인 것은 추방된다. 마치 ‘햄릿’에서 선왕이 죽음을 맞이한 뒤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장소에서만 나타날 수 있을 뿐, 그를 죽이고 추방한 성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으로 멜랑콜리적인 것은 그러한 추방으로 인해 드러나는 바, 선왕의 유령은 새로운 왕이 즉위하는 잔치가 벌어지고 아들이 귀환하는 집인 성을 하나의 악몽이자 난장판으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
행복의 탄생
부르주아는 귀족 계급을 꺾고 프롤레탈리아와 함께 프랑스 혁명을 달성하며 단언한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유토피아의 도래를. 그러나 그들은 기존의 혈통에 기반한 귀족 계급 대신 돈이라는 초록색 피가 흐르는 귀족 계급을 만든다. 부르주아들은 합리적 이성관으로 철저히 교육받았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유토피아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게 하면서도 담론적 실패와 한계에 부닥치게 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자신의 명예에 대한 믿음과 실천은 헛된 것이 되어버린다. 오로지 남은 것은 계급에 의거한 정체성이고, 정체성을 확보해 생존하기 위한 투쟁만이 번복된다. 정치에 대한 회의가 탄생하는 것 또한 이 지점에서이다.
과거의 ‘행복’은 계급에 따른 일정한 분수 지키기 정도였다면, 현대의 ‘행복’은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한 ‘획득’의 여부에 달려 있다. 누구나 돈을 벌고 재산을 축적할 ‘자유’가 있으며, 돈이 있다면 행복을 ‘구매할 평등’이 있다. 과거 밥을 굶고 다니던 시절이 더 좋았다거나 현대가 더 좋아졌다고 하는 말은 결국 모두가 다 불행하며, 서로에 대한 이해에 관심을 기울일 시간조차 없다는 고백에 지나지 않는다.
외부의 조건이 모두 평등하고 자유로운데, 왜 누구도 욕망을 이루지 못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핑계는 내면으로 돌려진다. 내면의 관리를 통해 ‘욕망’이 이루어지고, ‘행복’에 다다를 수 있는 것처럼 말해진다. 내면은 낳지 못한 아기와 같이 점차 커져간다. 너무 커진 아기는 제대로 태어나지 못한다. 탄생의 장소는 죽음의 감옥이 된다.
예브네긴 오네긴
김영하의 단편 ‘흡혈귀’는 남편이 흡혈귀가 아닌지 의심하는 한 여자가 보낸 메일을 기반으로 한다. 남편은 모든 것에 해박하지만 어떤 것에도 흥미가 없다. 어떤 욕구도 강렬하게 느낀 적이 없으며 타인과의 소통이 가능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서재에 있는 관 모양의 침대에서 잠을 자며,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아내와 결혼하고 글을 쓰며 사회 생활을 유지해 나간다. 남편이라는 인물은 자유로운 듯하나 실은 세상의 시선에 대해 한없이 권태를 느끼고 무감각해진 멜랑콜리의 인간이다. 이러한 ‘냉소적 우월성’은 지식인과 예술인, 교양인에게서 나타난다. 그들은 어떠한 ‘해답’을 찾기 위해 수많은 책과 그림, 논쟁을 창조하고 감상해 왔지만 그들에게 남은 건 거대한 종이 산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 종이 산은 한순간에 타버릴 수 있다. 이러한 회의 앞에서 그들은 한없이 냉소적이 되며, 아직 희망을 가진 이들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는다. 남은 것은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뿐이며, 프랑코 모레티가 말한 대로 끊임없이 소비를 욕망할 뿐인 ‘드라큘라’의 착각에 머무르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냉소적 우월성’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없는가? 멜랑콜리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이들이야말로 ‘냉소적 우월성’에 빠져 점점 가라앉는 이들과는 다르지 않을까. 수전 손택이나 크리스테바 등 수많은 지식인들이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멜랑콜리에 다가서고자 했다. 하지만 멜랑콜리는 늘 언어로부터 배반당하고 소외당했다. 때문에 ‘딱딱하게 응집되어 열리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결말을 알고 싶어하는 성급한 관객들 때문에 멜랑콜리는, 배는 가라앉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안전한 ‘관객’의 위치를 지키려는 사람들 때문에 더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 도착’ 영화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모두들 열차가 진짜 들이닥치는 줄 알고 자리를 피했으며 강도가 나오는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애타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한 순진무구함과 달리 이제는 어느 누구도 좌석에 앉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주인공이 어떤 고난을 겪든 간에 이 영화의 평점을 매길 생각과 극장을 나가서 먹을 저녁밥 메뉴가 돌아갈 뿐이다. 왜냐하면 스크린 천을 뚫고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스크린 너머로 아무도 나오지 않고 스크린으로 뚫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스크린에서 시선을 돌리거나 도중에 영화관에서 나가지 못한다. 이는 오네긴이 그의 친구이자 시인이었던 렌스키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과 일치한다. 우리는 하잘것없이 감상적이고, 여리며, 강인한 렌스키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한다. 그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버려야 했던 한 모습이었고 우리가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오네긴은 렌스키를 죽인 뒤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 또다시 회의적 삶을 사는 듯하나, 공교롭게도 렌스키를 죽인 그 격렬한 감정에 그 또한 저주처럼 사로잡히고 만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에 돌아오는 대답은 단 한 마디 뿐이다.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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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1강 정리+리뷰-그러나 모두 죽었다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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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두 죽었다
침몰
안나 제거스의 ‘통과 비자’에서 비자를 얻는 것은 단순해 보인다. 일정한 절차와 서류들, 기나긴 영사관의 줄을 기다리면 비자를 얻는다. 그러나 일정하지 않은 영사관의 시간, 이사, 전쟁의 소식, 한 장 모자란 증명사진들이 비자 기간을 연장하고 초조함을 폭발시켜 기다림을 끊임없이 연장시킨다. 기다리지 않는 것만이 그 기다림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비자는 영영 얻을 수 없으며, 비자를 통해 도달하려는 중립국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형식은 절망을 포장해 희망으로 내놓는다. 멜랑콜리는 멜랑콜리적인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이는 하나의 담론에 불과하다. 경험은 늘 담론을 비웃으면서 지나친다. 어쩌면 관념론이 완벽하게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 그들이 배제하고자 했던 감성에 호소하게 되는 건 인간사의 비극일지도 모른다.
‘양극화 시대’라는 용어는 모든 위기를 설명하고 모든 질문의 답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고, 집 한 채 살 수 없는 신세. 평생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려는 이는 평생 남에게 해를 당하고 사는 사람이 된다. 주는 대로 받는다고 배우지만, 주는 이상으로 빼앗기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양극화 시대에서 악의 축을 떠맡고 있는 상류사회는 어떠한가. 그들은 행복할까? 세상은 거대한 무대이고, 우리는 각자의 역에 충실하라고 강요받는다. 해당된 역에 따른 정체성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대사가 틀리거나 지문과 다른 행동은 관객의 야유와 수치심을 안긴다. 맥베스는 왕이 되었지만 불행했고, 그 불행의 원인을 사람들은 던컨 왕의 살인으로 돌리면서 그 의문을 풀려 애썼다. 하지만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이 원했던 건 바로 왕의 자리가 아니었던가? 그들은 ‘노력’했지만, 그 노력의 결과는 그들이 생각한 그 ‘결과’가 아니었다. 그들의 노력을 칭송해줄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혼이 담긴 대사, 필사적인 몸짓, 억지로 올린 입가는 그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는다.
연극의 금기는 바로 관객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다. 대사는 헝클어지고, 몸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거나 마비될 것이며, 상대역까지도 곤란해질 것이다. 관객을 나무 보듯이, 숲을 가득 메운 나무들을 보듯이 하라는 지침을 따르면서 이 연극의 끝을 기다린다. 연극은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석을 쳐다볼 수도 없다. 어느 순간부터 어떤 야유도 웃음도 들리지 않는다. 그 순간은 광기가 아닌 바닥을 알 수 없이 추락하는 두려움을 마주하게 된다.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피로는 어떤 사태의 끝을 예고한다. 무거운 짐이 잔뜩 쌓여 있어도 그 짐들의 밑에 깔려 납작해진 것이 남아 있다. 하지만 소진은 다르다. 모든 게 불타고 그 재마저 바람에 날려 사라진 뒤 추하게 드러나는 바닥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리며 당근을 먹고 웃으며 자살시도를 꿈꾼다. 럭키와 포조는 끝나지 않는 산책을 한다. 사르트르의 앙투안 로캉탱은 눈 앞의 나무와 모든 배경들이 녹아 한 데 흐르는 것을 본다. 멜랑콜리는 맨바닥에 다다라 끊임없이 바닥을 훑고 두들기며 그 아래에 숨겨진 것을 찾는다. 개처럼 킁킁거리고 고양이처럼 긁어대지만, 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칸트는 그 너머에 숭고의 지평이 있다고 했고, 그리스인들은 그러한 절망을 통해 절망을 치유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사유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적 상태의 최종진단,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 라고 되뇌이는 데에 그친다.
하지만 이러한 절망마저도 사치로 여겨지곤 했다. 멜랑콜리는 모든 굴레를 직시할 수 있는 인간에게 가능한 것으로, 이는 지적인 우월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오딧세우스가 세이렌의 섬을 통과할 때, 노를 젓는 일꾼들은 오딧세우스처럼 어떤 의문도 품지 않은 채 그의 명령을 순순히 따른다. 그의 끈을 풀어주지도 않으며 밀랍 귀마개를 빼고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의문을 가지지 않는 존재다. 그저 살아갈 뿐이다. 의심 없이, 앞을 쳐다 보면서.
현재 우리에게는 그런 회의가 사치일지도 모른다. 사치라고 속삭인다. 사실들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돈을 모으고, 상류계급에 대해 선망을 품게 한다. 그들의 삶을 예술가들이 그리지 못하는 건 그들의 문화를 보지 못하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수없이 말해온 가난한 이들의 삶과 비극이 더 익숙해서인가. 아니면 ‘예외’로, 이 두렵고 무서운 게임에서 승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지탱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유토피아를 끝끝내 부정하게 되는, 이 세계가 이루어질 때까지의 시간을 한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심연을 마주하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닐까.
비(애)극
셰익스피어 극의 모든 결말은 다급하게 끝난다. 모든 인물이 죽어가는 무대에 누군가가 홀연히 등장해 미래를 약속한다. 그 미래의 약속마저도 유명무실하다. 리어 왕과 그의 세 딸들은 죽는다. 허공에 뜬 왕관 모양의 구름은 먹색이고, 모든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비극은 끝이 나야 한다. 그래야 모든 이들이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어떤 절망에든 끝이 있다고 약속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시인 추방’에 대한 웅변은, 동시에 그러한 환상이 얼마나 무해하면서도 유해한지 알려주는 것 같다. 지금 이 시대에 대해 사람들은 방관하고, 언젠가는 해결되리라고 믿는다. 어떤 영웅이 등장해서, 혹은 난장판을 수습하는 청소부가 투덜거리면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쉽게 무뎌지고, 고개를 돌리고, 잠든다. 그 다음날 아침이 되면 또다시 해가 뜰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이런 유혹 가운데 나이 든 사람들이 좋아하던 한 가지는 환상 속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우월성이라는 환상이 그나마 가장 낫다. 이 유혹에 굴복한 사람들은 초기 나치 정책이 보여주던 초심자의 도락적 성격에 연연한다. 그들은 날이면 날마다 이 모든 게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쓴다. 모든 것을 자기가 더 잘 안다는 듯이 유쾌한 포즈를 잡고 나치즘 안에 숨어 있는 극악무도함을 보지 않으려고 그 유치함에 주의를 돌린다. 그들은 사실 나치에게 완전히 무력하게 넘어갔지만 마치 우월하고 무심한 관찰자인 양 허세를 부리면서 새로운 농담이나 ‘타임’지 기사를 인용할 수 있으면 그걸로 안심하고 위안한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처음에는 확신에 차서 평온하게, 시간이 지나면 자기를 속이려 애쓰면서 나치 정권은 반드시 몰락한다고 예언한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일은 나치 정권이 자리를 잡고 성공했을 때 일어난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무장하지 못했고 허황된 통계에 따라 면밀하게 계산한 심리적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1935년부터 1938년까지 뒤늦게 나치에 복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 집단에서 나왔다. 그들은 자기가 우월하다는 입장을 필사적으로 고수하다가 힘들어지자 한꺼번에 포기해버렸다. 늘 불가능하다고 말하던 것이 성공하자 패배를 인정했다. 바로 이런 성공이 가장 끔찍한 일이라는 것까지 볼 능력은 없었다. “그는 정말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어요!” “바로 그게 문제라니까요.” “당신은 궤변만 늘어놓는군요.” (1938년에 나눈 대화)
(...)
나는 여전히 이런 입장에는 정당성이 있다고 믿으며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그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냥 모든 것을 무시하고 상아탑으로 물러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은둔하려는 내 시도가 빠르고 처참하게 실패한 것을 신께 감사한다. 나와 다르게 빨리 실패하지 않은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때로 영혼을 희생하고 대가로 지불해야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아주, 아주 비싼 값을 치러야 했다.
- ‘어느 독일인 이야기’, 제바스티안 하프너, pp.249-2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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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김진영 선생님의 멜랑콜리와 철학 첫 번째 강의노트 |
양*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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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와 철학. 이 조합에서 처음 연상되는 건 발터 벤야민/베냐민(베르그손처럼 베냐민으로 표기가 정착될까요?)이었습니다. 김진영 선생님이 이 수업을 듣게 된 동기를 물으셨을 때 저는 발터 베냐민에 관심 있다고 대답했지만 아트앤스터디 팟캐스트를 통해 조금이나마 들어본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강의를 굉장히 좋았고, '풀버전'으로 맛본 이번 강의 역시 기대를 뛰어넘어 굉장히 만족스러웠습니다. 어떤 분이 김진영 선생님과 이번 강의 주제가 딱 들어맞는다는 논평을 해주셨는데 수업을 듣고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어떤 강의였는지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학기에 진행되는 멜랑콜리와 철학, 다음 학기에 진행될 예정인 멜랑콜리와 예술에 대한 전반적인 스케치를 하셨습니다. 전자는 멜랑콜리란 주제를 철학에서 어떻게 다뤄왔는지 해석사를 살펴 보고, 후자는 뒤러의 그림, 김광석의 목소리, 이은주의 얼굴, 현대클래식 음악 등 예술작품에서 멜랑콜리가 어떻게 표현됐는지 살펴 보는 시간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강의에서 다루고자 하는 멜랑콜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먼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 멜랑콜리가 담론화되어 있기 때문에 논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멜랑콜리와 멜랑콜리적인 것의 구분을 강조하셨습니다. 멜랑콜리가 담론화되고 교양화된 (죽어 있는) 개념에 가깝다면, 멜랑콜리적인 것은 실제로 감각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느낌, 상태에 가까운 것입니다.
독일어로 우울을 뜻하는 schwermut의 풀이로 멜랑콜리를 이해하는 데 한 걸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우울schwermut는 무거운 마음이다(schwer(무거운)와 mut(마음)). 아무리 기뻐도 남아 있는 무거운 마음, 이것이 우울이다. 이 무거운 마음을 벗어날 때 우리는 주이상스(향유)나 황홀경을 경험했다고 하지만 그런 초월적 경험은 일상에서 잘 발생하지 않는다.
1. 왜 멜랑콜리인가
오늘날의 사회를 양극화 사회라고 하는데 선생님은 양극화라도 있으면 다행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좋은/나쁜, 부/빈, 이렇게 명확하게 대치하고 있는 안티테제가 있으면 전복의 가능성이 있을 텐데 오늘날은 멜랑콜리 안에서 통합된 것에 가까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있는 자들은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지셨고, 이 질문에 동의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멜랑콜리의 대기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매일매일' 멜랑콜리는 마시고 있다는 진단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는데 왜 노력할수록 나아지는 게 아니라 나빠지는가. 이 자기배반의 상황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멜랑콜리의 대기권에 갇혀 있는가. 그러면서 한국문학이나 영화가 상류사회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지적을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렇다면 상류사회의 멜랑콜리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어떤 작품을 꼽을 수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최근에 나온 영화로 보면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 마틴 스콜세지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정도? 김진영 선생님이 다른 강의에서 다룬 적 있으신 필립 로스의 텍스트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로사회, 투명사회, 단속사회 등등 ~~사회란 제목으로 사회를 진단하는 책들이 일종의 트렌드를 형성했고, 그 중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가 독일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는데 과연 피로사회가 한국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개념인가 하는 반문을 하시면서 들뢰즈가 말했던 소진사회와 피로사회를 비교하셨습니다. 피로는 힘을 많이 써버린 상태이고, 힘을 회복해 다른 상황을 희구해볼 수 있는 변화의 잠재적 가능성이 존재하는 상태이지만, 소진은 힘이 '고갈된' 상태라서 잠재적 가능성이 부재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소진된 사회의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로 사무엘 베케트를 꼽았습니다. 베케트의 대표작인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얘기를 잠깐 해주시면서 무대장치를 최소화한 무대, 잎이 다 떨어진 나무 한 그루만 있는 배경,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린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고도를 기다린다고(고도가 올 거라는 믿음이 있다고) 볼 수 없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육체뿐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피로사회/인간과 소진사회/인간의 구원 양상이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 강의를 통해 묻게 될 질문이 될 거란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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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김진영 선생님의 <멜랑콜리와 철학> 첫 수업 스케치. |
엄*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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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멜랑콜리와 철학> 스케치 by 한나
2015년 1월 14일 저녁 7시 30분, 아트앤스터디의 오프라인 배움터 인문숲에서 열린 김진영 선생님의 <멜랑콜리와 철학> 첫 수업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수업 소개 문구 중에 이런 말이 있더라구요. '슬픔이나 침묵 앞에서의 현기증같은 것을 느껴보자.'라고... 어떤 수업일지 정말 기대가 되었는데요. 큰 강의실이 가득찰 정도로 뜨거웠던 김진영 선생님의 <멜랑콜리와 철학>. 첫 수업 스케치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미소가 멋진 김진영 선생님과 함께 하는 멜랑콜리 여행. :) 진지한 수강생들의 수강 태도와 선생님의 조근조근한 목소리가 강의실의 분위기를 완전히 압도했답니다.
수업의 초반에는 '왜 멜랑콜리인가?'라는 물음이 화두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설명을 먼저 듣고 수강생들의 생각도 함께 공유해보았습니다. 다른 수강생분들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도록 선생님께서 간혹 질문을 던져주셔서 참 좋았습니다. 소통하는 수업 :) 이 날은 특히 발터 벤야민에 관심을 가지고 멜랑콜리에 대해 공부하시려는 분들이 많이 오셨더라구요.
*** 흔히 우리는 오늘날 우리 시대를 양극화 시대라고 합니다. 이때 양극단을 가르는 지표는 경제적 능력, 정치적 권력 등입니다.
그런데 김진영 선생님은 이 시대를 멜랑콜리라는 테마로 새롭게 재해석합니다.
양극단으로 나뉜 것 같은 이 시대. 이 시대의 사람들은 가진자와 갖지 못한 자, 둘 중 하나로 구분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층의 이면이랄까. 심연이랄까. 어쨌든 표층 안으로 들어가보면, 혹은 그 표층적 현상을 초과한 지점에서 다시 이 시대를 바라보면 사실 이 시대는 멜랑콜리라는 거대한 대기권 안에 통괄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잘 살든, 못 살든 모두가 멜랑콜리라는 공기로 숨을 쉬고 있는 시대.
선생님의 위와 같은 말씀에 놀란 이유는, 사실 저 역시 편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애들은 걱정없겠지.' 하는 그 흔한 편견 말입니다.
*** 수업 후반부에는, 서양에서 전개된 멜랑콜리적인 것에 대한 해석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히포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대 서양의 담론에서부터 르네상스와 바로크까지 이르는 멜랑콜리 해석의 역사를 배웠습니다. 수업 중간마다 등장하는 선생님의 톡톡 튀는 사례와 재치 덕분에 2시간이 모자라게 느껴질 정도로 재미있었답니다. :)
'멜랑콜리와 철학'이라는 수업의 제목 때문인지 무거운 수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무겁게만 치우쳐진 것도 아니고, 단순히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에서의 우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센티멘탈이라는 감정적 동요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묘한 깊이가 있으면서도 즐거운 멜랑콜리 수업이 되었답니다.
김진영 선생님의 <멜랑콜리와 철학>, 뒷 이야기가 궁금하시죠? :D 궁금하신 분들은 지금이라도 어서 수업에 함께해주세요!!!
다음 수업 스케치도 기대해주세요 ♥
수업 현장을 담은 사진이 궁금하시다면 ▶ http://blog.naver.com/artnstudy/2202410610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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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애도와 우울증 |
양*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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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와 멜랑콜리 Trauer und melancholie
이번 시간에 프로이트의 저명한 애도와 우울증 논의를 바탕으로 강의가 이뤄졌습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힐링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뗐습니다. 힐링을 '하는' 주체는 무의지적, 무의도적으로 우월, 예외 의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사랑의 마음으로 상처받은 영혼에 다가서려 해도 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 아이러니가 힐링의 딜레마라고 했습니다. 상처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사랑을 뜸뿍 받으며 자란 아이가 풍부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도도 높고, 받은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높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 고통에 무감각해질 수는 있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결정적'으로 받게 된 세월호 유가족들.
선생님은 자식의 죽음에 대해 가슴에 '묻는다'는 표현에 주목했습니다. 너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 또 너를 만져보고 싶다. 한겨레 신문에 유가족들의 편지가 실리는데 저도 거기서 너를 한 번이라도 만져볼 수 있으면 좋겠어, 라는 표현을 본 기억이 났습니다. 삶도 죽음도 아닌 비식별역에서 묻혀 있는 9명의 실종자들, 이제는 만져볼 수 없는 아이들에 대한 접촉욕구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감각성과 접촉성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자문했습니다. 접촉이 단절된 채 오직 시각으로만 향유하는 온라인의 세계에 빠져 살고 있고,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포르노그래피의 문제도 양성화되지 않았을 뿐 음지에서 많은 문제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실제로 중, 고등학생들 중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의 야동중독에 빠진 아이들이 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납니다). 서구의 역사는 시각의 역사라 해도 될 만큼 명료하게 사물/자연을 파악해 자연을 인간화, 도구화해 통제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는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오히려 눈을 찌르는(부정하는) 결말을 통해 눈의 이성이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았음을 승인하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는 관점을 보여줬습니다.
본격적으로 프로이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는데요. 프로이트의 말하기-글쓰기에서 두드러지는 아이러니를 활용하는 방식에 유념할 것을 지적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임상실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결론을 도출해내긴 했지만 자신이 진찰한 집단 내에서 도출된 결론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이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고 스스로를 부정해나가는 방식의 외교적 글쓰기에 능하다고 했습니다. 다른 환자 한 명만으로도 자신의 결론이 무너질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프로이트의 글 애도와 멜랑콜리에서 둘을 연결하는 접속사 'und'(영어의 and)에 주목했습니다. 이 등위접속사는 양가성을 띠는데 1 애도와 멜랑콜리를 대치적으로(versus의 관계) 보고자 함을 드러내고, 2 둘의 동일한 영역이 존재함을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온 부분이 재밌었는데요. 환자는 거짓말을 하고, 의사는 탐정 같이 환자의 거짓말 속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작업을 한다는 것입니다. 환자는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돌려말하거나 거짓말을 하는데, 거짓에 거짓을 계속 쌓아가다 보면 말실수가 발생하게 되고 의사는 말실수를 통해 우회적으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애도와 멜랑콜리에 대해선 저번 글에서 이현우 선생님이 쓴 <애도와 우울증>을 인용하면서 개념 정리를 하고 넘어갔는데요. 이번 시간의 설명이 간명하게 직관적인 느낌을 전달해줘서 부연합니다. 애도는 세상이 텅 비어 있는 것이지만 멜랑콜리는 내가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애도는 주체가 있지만 멜랑콜리는 주체가 없다. 멜랑콜리가 건강하지 못한 이유는 리비도나 내면의 에너지가 외부를 향해 있어야 하는데 내부에 갇혀 있게 되면서 주체가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의 유명한 이론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는데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미분리 상태에서 분리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분리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최초의 상처, '열린 상처'라고 했습니다.
애도에는 주체 '나Ich'도 있고, 대상도 확실하기 때문에 애도 작업(Trauer Arbeit)이 이뤄질 수 있지만, 멜랑콜리는 대상이 불명확하기 때문에 사랑의 에너지가 슬픔 자체로 가게 된다. '나는 내 슬픔을 사랑한다' 내가 누구를 사랑했는지, 내가 사랑했다고 믿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는지, 애착 관계의 견고성, 확실성이 제대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작업Arbeit' - 난제를 이성적으로 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애도는 상실한 대상1에서 새로운 대상2로 넘어가면서 삶의 다음 단계로 진보progress하지만('새로운 사랑') 멜랑콜리는 퇴행Regression한다. 이 퇴행이 향하는 곳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멜랑콜리커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자기에게로 도피한다. 대상이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서 길/방향을 잃은 사랑은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스스로에 침잠하게 되는 것이다. 원초적 나르시시즘, 오이디푸스 단계 이전의 구강기(구순기)라고 할 수 있다.
'남자는 뱉어낸다, 여자는 삼킨다'
여기서 먹기와 먹히기의 역설이 존재하는데 내가 죽은 자를 먹었으나 결국 죽은 자에게 먹히는 격이 된다.
이 먹기와 먹히기의 역설은 원초적 나르시시즘 -구강 단계-카니발리즘에 대한 설명으로 보충될 수 있다. 구강단계에서는 타자를 자기화하려 한다. '상상적 자아를 먹고, 상상적 자아에게 먹힘' 자/타의 미분리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애니미즘 역시 자기 자신의 영혼을 나와 만나는 모든 사물/자연에 투사하는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일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연을 먹고, 자연에 먹힌 사람'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은 앞서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분리 상태로의 이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진입/통과한 것을 반대로 보면 그 원초적 세계(어머니의 자궁/탯줄)에서의 추방으로 볼 수 있다. 상징계, 기호 세계로의 진입은 분리의 고통을 수반한다. 오정희는 자신의 작품에서 바깥 세상으로 나오기 직전의 아기의 입을 빌어 이런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세계로 나가지 않으려 했으나 엄마가 밀어냈다. 그물에 걸려 들었다. 더불어 카프카의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도 호출되었다. 이 분리고통은 의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육체에 직접적으로 새겨진다. 인간은 누구나 통과제의를 고통 없이 완벽하게 통과해낼 수 없기 때문에 '열린 상처'를 갖게 된다. 이번 강의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 <태어나기의 망설임> 우리는 태어나기를 망설인다. 우리를 옭아맬 그물에 걸려들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버텨보지만 태어난 이상, 세상에 '던져진' 이상 그 세계의 코드-시스템-언어를 습득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이런 운명을 진정 사랑할 수 있을까?)
1,2강에서 멜랑콜리의 대기권에 있다는 표현이 3강에서는 오늘날 우리는 모두는 나르시시트가 되었다로 변주되었다. 공동체가 붕괴되고 타자와의 만남이 어려워진 시대에 길 잃은 사랑이 가엾는 나 자신의 '빈 집'에 스스로 갇히게 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빈 집에서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 혹은 이 집으로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읽어보면 어떨까. 내 사랑이 갇혀 있는데 그 집은 여전히 비어 있다는 것. 이런 빈 집의 사랑을 내가 텅 비어 있다는 멜랑콜리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길 잃은 가엾은 사랑이 빈 집을 만들어냈고, 그 빈 집에 사랑이 갇혀 영영 갇혀버린 꼴이라 쓸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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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7강 인간에 대한 예의없음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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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예의없음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7강 강의 정리+리뷰-
여우와 포도
모더니즘은 멜랑콜리를 엘리트 계급의 특권으로 받아들였다. 지적인 분석과 심미화를 통해 멜랑콜리는 아름답고 퇴폐적인 것으로 무마되었다. 멜랑콜리는 정형화되면서 멜랑콜리적인 것으로 추방되었다. 리오타르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장선상에 속한, 시간적인 구분으로 보았으나 그러한 정의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미국의 유용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었다. 상품의 매력은 새로움과 휘발성에 있다. 멜랑콜리는 멜랑콜리적인 흔적을 남겼고, 그 흔적은 자본주의 시장의 건강한 유동성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멜랑콜리적인 것은 그로 인해 추방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건강하고 자유로운 생, 히피 문화의 대두로 이어진다. 히피 시위대는 그들을 제지하는 경찰의 총에 꽃을 꽂는다. 하지만 총알은 꽃을 짓이기도 발사된다. 꽃으로는 그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 평화와 자유는 우롱당하고 그들의 무력함이 증명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멜랑콜리적인 것, 우울증을 치료의 대상으로 보고 이를 치유하려고 했지만 그 결과 마주한 건 전기충격과 그 충격으로도 치료되지 못한 사람들을 격리하는 정신병원이었다.
멜랑콜리적인 것은 일종의 포도라고 볼 수 있다. 이솝 우화의 여우는 포도를 따먹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포도가 이미 자신의 것인양 그 맛을 상상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포도를 따먹기 위한 시도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여우는 포도의 맛이 분명 시큼털털할 것이라고 비난하며, 포도를 따먹는 건 쓸데없는 짓이라고 스스로를 비판하기까지 이른다. 포도의 맛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포도라는 열매를 맺게 한 건 다름 아닌 여우의 바로 옆에 있는 나무다. 나무는 포도를 높은 곳에,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매달아 놓았다. 여우가 만약 그 나무를 제대로 타고 오를 수만 있었다면 포도를 따먹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허공에 매달린 포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포도는 분명히 ‘나무에 달려 있다’.
파 한 줄기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증언을 시도하는 자와 증언을 거부하는 자. 프리모 레비는 그와 수용소에서 면식을 나누었던 이들이 ‘생존하는 줄’은 알지만, 그들의 현재 상황을 언급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증언을 시도하는 자들은 또다시 두 반응으로 나뉜다. 그들은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노하우에 대해 말하거나, 혹은 자신이 살아남은 데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한다. 프리모 레비는 증언을 택했으나 베텔하임과 같이 자신이 살아남은 노하우를 말하는 대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짓밟아야 했던 무언가를 말한다.
그 무언가란 말할 수 없고, 입증될 수도 없으며, 믿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귀환’에서 레비는 끊임없이 그의 곁에서 죽어간 어떤 인물들의 이름을 되새기며 그들을 잊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에 대비되어 부각되는 건 레비가 신곡을 읊조리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도움을 행했던 일들이다. 한 욕심쟁이 노파가 지옥에 떨어졌을 때, 그녀가 행한 파 한줄기의 적선이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로 내려왔던 것처럼 레비의 서술은 급박하게, 그 파 한 줄기를 향해 쓰인다.
하지만 노파가 끝내 뉘우치지 못하고 천국에 다다르지 못한 것처럼, 레비 또한 증언에 실패한다. 그를 가라앉힌 욕심은 다름 아닌 주변인들의 무관심과 그에 대한 회의였다. 사람들은 그의 증언에 대해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궁금해 했으며, ‘나치’를 언급하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금수령은 그의 상처를 치유하는 대신 오히려 곪고 터지게 만들었다. 또한 이스라엘에 대해 레비의 의견을 물어본 것처럼 그들은 무슬림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인권단체가 논하는 ‘인권’의 대상은 일정한 단계에 이르른, 그들이 이해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 어떤 대상들을 뜻한다. 이 스펙트럼에서 제외되는 이들은 태아라는 생명 초기와 무슬림이라는 생명 말기의 대상들이다. 그들이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들이 포기하게 되었고 포기당하게 되었는지를 거부한다. 인간의 주체성과 선택의 권리를 믿는 한, 인간의 ‘영웅주의’를 주창하고 인간과 동물을 위계적 질서로 편입하는 한 이런 무력한 사고는 그치지 않고 순환할 뿐이다.
헥토르의 홍조
로베르 앙텔므는 수용소 시절 그가 마주했던 홍조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아주 당황했을 때,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과 마주할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수치, 최소한의 수치를 정해 놓고 이에 대해 뿌듯함을 느끼던 인간은 아주 쉽게 미끄러지고 만다. 현대 사회에서는 ‘무엇이든’ 해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며 아름다운 결과는 추악한 과정을 아름답게 만든다. 인간의 최소한은 무너지고, 그제서야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어떤 시선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메두사다.
메두사와 눈이 마주친 사람은 돌로 변한다. 이런 법칙 하에서면 사실 메두사는 그려질 수 없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림 속의 메두사는 정면에서 우리를 본다. 우리는 타자의 시선이 느껴질 때, 그 타자를 바라보고 그 타자를 자신의 시선 하에서 재편할 때 안도감을 느낀다. 다시 주체로 되돌아 온 것이다. 하지만 메두사는 우리에게 판단의 기미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순식간에 돌로 변해버린다. 메두사는 우리를 일방적으로 ‘판단’해 버리고, 돌과 같이 딱딱한 ‘개념’ 안에 가둔다. ‘한니발’이 연쇄 살인마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대상으로 언급되는 것은, 단순히 그가 벌이는 살인이 끔찍해서가 아니다. 그는 인간을 하나의 ‘고기’로 보며, 이러한 ‘피조물성’에 의해 인간은 그가 믿던 가치를 잃고 해체된다. 한니발이 인간에게서 바라는 건 오직 ‘피조물성’일 뿐, 그가 입은 옷이나 지위에 대한 고려는 없다. 그와 나누는 대화가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운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던 어떤 것, 그들이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실재와 직면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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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그러나 모두 죽었다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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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모두 죽었다
침몰
안나 제거스의 ‘통과 비자’에서 비자를 얻는 것은 단순해 보인다. 일정한 절차와 서류들, 기나긴 영사관의 줄을 기다리면 비자를 얻는다. 그러나 일정하지 않은 영사관의 시간, 이사, 전쟁의 소식, 한 장 모자란 증명사진들이 비자 기간을 연장하고 초조함을 폭발시켜 기다림을 끊임없이 연장시킨다. 기다리지 않는 것만이 그 기다림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비자는 영영 얻을 수 없으며, 비자를 통해 도달하려는 중립국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형식은 절망을 포장해 희망으로 내놓는다. 멜랑콜리는 멜랑콜리적인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이는 하나의 담론에 불과하다. 경험은 늘 담론을 비웃으면서 지나친다. 어쩌면 관념론이 완벽하게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 그들이 배제하고자 했던 감성에 호소하게 되는 건 인간사의 비극일지도 모른다.
‘양극화 시대’라는 용어는 모든 위기를 설명하고 모든 질문의 답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고, 집 한 채 살 수 없는 신세. 평생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려는 이는 평생 남에게 해를 당하고 사는 사람이 된다. 주는 대로 받는다고 배우지만, 주는 이상으로 빼앗기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양극화 시대에서 악의 축을 떠맡고 있는 상류사회는 어떠한가. 그들은 행복할까? 세상은 거대한 무대이고, 우리는 각자의 역에 충실하라고 강요받는다. 해당된 역에 따른 정체성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대사가 틀리거나 지문과 다른 행동은 관객의 야유와 수치심을 안긴다. 맥베스는 왕이 되었지만 불행했고, 그 불행의 원인을 사람들은 던컨 왕의 살인으로 돌리면서 그 의문을 풀려 애썼다. 하지만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이 원했던 건 바로 왕의 자리가 아니었던가? 그들은 ‘노력’했지만, 그 노력의 결과는 그들이 생각한 그 ‘결과’가 아니었다. 그들의 노력을 칭송해줄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혼이 담긴 대사, 필사적인 몸짓, 억지로 올린 입가는 그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는다.
연극의 금기는 바로 관객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다. 대사는 헝클어지고, 몸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거나 마비될 것이며, 상대역까지도 곤란해질 것이다. 관객을 나무 보듯이, 숲을 가득 메운 나무들을 보듯이 하라는 지침을 따르면서 이 연극의 끝을 기다린다. 연극은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석을 쳐다볼 수도 없다. 어느 순간부터 어떤 야유도 웃음도 들리지 않는다. 그 순간은 광기가 아닌 바닥을 알 수 없이 추락하는 두려움을 마주하게 된다.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피로는 어떤 사태의 끝을 예고한다. 무거운 짐이 잔뜩 쌓여 있어도 그 짐들의 밑에 깔려 납작해진 것이 남아 있다. 하지만 소진은 다르다. 모든 게 불타고 그 재마저 바람에 날려 사라진 뒤 추하게 드러나는 바닥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리며 당근을 먹고 웃으며 자살시도를 꿈꾼다. 럭키와 포조는 끝나지 않는 산책을 한다. 사르트르의 앙투안 로캉탱은 눈 앞의 나무와 모든 배경들이 녹아 한 데 흐르는 것을 본다. 멜랑콜리는 맨바닥에 다다라 끊임없이 바닥을 훑고 두들기며 그 아래에 숨겨진 것을 찾는다. 개처럼 킁킁거리고 고양이처럼 긁어대지만, 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칸트는 그 너머에 숭고의 지평이 있다고 했고, 그리스인들은 그러한 절망을 통해 절망을 치유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사유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적 상태의 최종진단,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 라고 되뇌이는 데에 그친다.
하지만 이러한 절망마저도 사치로 여겨지곤 했다. 멜랑콜리는 모든 굴레를 직시할 수 있는 인간에게 가능한 것으로, 이는 지적인 우월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오딧세우스가 세이렌의 섬을 통과할 때, 노를 젓는 일꾼들은 오딧세우스처럼 어떤 의문도 품지 않은 채 그의 명령을 순순히 따른다. 그의 끈을 풀어주지도 않으며 밀랍 귀마개를 빼고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의문을 가지지 않는 존재다. 그저 살아갈 뿐이다. 의심 없이, 앞을 쳐다 보면서.
현재 우리에게는 그런 회의가 사치일지도 모른다. 사치라고 속삭인다. 사실들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돈을 모으고, 상류계급에 대해 선망을 품게 한다. 그들의 삶을 예술가들이 그리지 못하는 건 그들의 문화를 보지 못하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수없이 말해온 가난한 이들의 삶과 비극이 더 익숙해서인가. 아니면 ‘예외’로, 이 두렵고 무서운 게임에서 승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지탱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유토피아를 끝끝내 부정하게 되는, 이 세계가 이루어질 때까지의 시간을 한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심연을 마주하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닐까.
비(애)극
셰익스피어 극의 모든 결말은 다급하게 끝난다. 모든 인물이 죽어가는 무대에 누군가가 홀연히 등장해 미래를 약속한다. 그 미래의 약속마저도 유명무실하다. 리어 왕과 그의 세 딸들은 죽는다. 허공에 뜬 왕관 모양의 구름은 먹색이고, 모든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비극은 끝이 나야 한다. 그래야 모든 이들이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어떤 절망에든 끝이 있다고 약속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시인 추방’에 대한 웅변은, 동시에 그러한 환상이 얼마나 무해하면서도 유해한지 알려주는 것 같다. 지금 이 시대에 대해 사람들은 방관하고, 언젠가는 해결되리라고 믿는다. 어떤 영웅이 등장해서, 혹은 난장판을 수습하는 청소부가 투덜거리면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쉽게 무뎌지고, 고개를 돌리고, 잠든다. 그 다음날 아침이 되면 또다시 해가 뜰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이런 유혹 가운데 나이 든 사람들이 좋아하던 한 가지는 환상 속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우월성이라는 환상이 그나마 가장 낫다. 이 유혹에 굴복한 사람들은 초기 나치 정책이 보여주던 초심자의 도락적 성격에 연연한다. 그들은 날이면 날마다 이 모든 게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쓴다. 모든 것을 자기가 더 잘 안다는 듯이 유쾌한 포즈를 잡고 나치즘 안에 숨어 있는 극악무도함을 보지 않으려고 그 유치함에 주의를 돌린다. 그들은 사실 나치에게 완전히 무력하게 넘어갔지만 마치 우월하고 무심한 관찰자인 양 허세를 부리면서 새로운 농담이나 ‘타임’지 기사를 인용할 수 있으면 그걸로 안심하고 위안한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처음에는 확신에 차서 평온하게, 시간이 지나면 자기를 속이려 애쓰면서 나치 정권은 반드시 몰락한다고 예언한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일은 나치 정권이 자리를 잡고 성공했을 때 일어난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무장하지 못했고 허황된 통계에 따라 면밀하게 계산한 심리적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1935년부터 1938년까지 뒤늦게 나치에 복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 집단에서 나왔다. 그들은 자기가 우월하다는 입장을 필사적으로 고수하다가 힘들어지자 한꺼번에 포기해버렸다. 늘 불가능하다고 말하던 것이 성공하자 패배를 인정했다. 바로 이런 성공이 가장 끔찍한 일이라는 것까지 볼 능력은 없었다. “그는 정말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어요!” “바로 그게 문제라니까요.” “당신은 궤변만 늘어놓는군요.” (1938년에 나눈 대화)
(...)
나는 여전히 이런 입장에는 정당성이 있다고 믿으며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그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냥 모든 것을 무시하고 상아탑으로 물러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은둔하려는 내 시도가 빠르고 처참하게 실패한 것을 신께 감사한다. 나와 다르게 빨리 실패하지 않은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때로 영혼을 희생하고 대가로 지불해야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아주, 아주 비싼 값을 치러야 했다.
- ‘어느 독일인 이야기’, 제바스티안 하프너, pp.249-2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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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4강 건강한 애도와 건강하지 못한 멜랑콜리의 구분 |
양*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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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아도르노의 페이퍼가 제공되었지만 3강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프로이트를 보충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할애됐다.
건강한 애도와 건강하지 못한 멜랑콜리의 구분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관계성>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누구나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자아를 구축하는 데 이 관계의 형식에 리비도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근대적 자아는 주체적 자아를 강조하는 동시에 부차적 객체를 만들어내는 자기동일화를 수행하는데 반해 수동적 자아는 대상과 닮으려고 하는 모방(미메시스)으로 타자동일화를 수행한다. 앞선 강의에서 지적했던 서양의 시각의 절대적 우위성, 주체적 자아의 폭력성에 반하는 미메시스적 자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언급한 벤야민뿐만 아니라 '사물시'의 릴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주객을 분리하는 서양의 사고방식이 인도-유럽어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 오정희를 인용하면서 생생하게 설명해주셨던 언어라는 상징계로의 진입에 대한 추가적 설명이 이어졌다. 언어는 사물을 객체의 지점으로 옮겨놓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나와 언어로 호명된 사물/대상. 바르트는 자기동일화를 수행하는 권력적 언어에서 타자동일화를 수행하는 탈코드적 언어로 변화를 주장했다고 한다.
이어서 철학이 육체성의 언어이고, 따라서 에로틱하며, 소설이라는 설명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가장 인상적인 꼭지 중 하나였던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에 대한 글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철학과 문학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김진영 선생님은 아무래도 문학적 로고스를 더 사랑하지 않으실까 하는 ^^ 헤겔에 대한 삽화가 재밌었는데 어렸을 때 정시에 '댕~댕~' 울렸던 성당의 종소리가 헤겔에서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헤겔의 치밀하고 정교한 시스템의 철학은 죽음공포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정신의 요새 같은 것이라고 했다.
언어라는 상징계로의 진입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같이 일종이 통과제의인데 통과제의를 거치지 못한 사람들은 구강기에 머물며 나르시시스트가 되고, 그 대표적 인물로 프루스트를 꼽았다. 육체가 병약하기도 했지만 프루스트에게 침대는 상실한 어머니의 육체, 불가능한 애도의 공간이었을 거라고 했다. 애도되지 못한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지난 시간의 말이 떠올랐다. 한 시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시인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나갔는데 거기서 70 먹은 할머니가 어렸을 때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그 앙금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걸 보고 시인은 할머니에게 "그 기억을 믿으세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상처받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자세 중 하나는 자기연민일 것이다. 자신을 피해자로 설정하고 타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면 그 감정의 내용이 원한일지라도 리비도가 운동하긴 할테니까.
그런데 통과제의를 잘 거쳤다고 생각되는 자아의 건강성도 실은 자신의 일부를 타자화시켰을 때 갖춰지는 균형이라고 했다. 남성적 자아는 뱉는다, 여성적 자아는 삼킨다. 독일어 fressen이란 표현. 먹기와 먹히기의 역설. 여성은 남성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보다 남성을 더 잘 알고 있다(남성 시스템에 과잉적응한 여성은 남성보다 더 남성적이다), 하인은 주인보다 주인을 더 잘 알고 있다, 신하는 군주보다 군주를 더 잘 알고 있다. 크리스테바의 '비체' -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이질적인 것, '혐오스러운 맛있는 음식'. 이 혐오스러운 맛있음의 양가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이 있었는데 김기덕 영화의 여성들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다. 평소에 좋아하는 선생님이 김기덕 영화의 여성들이 남자들에게 얻어맞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그 폭력이 '혐오스러운 맛있'어서가 아닐까 하고.
먹기와 먹히기의 사례로 카프카의 변신Der Verwandlung과 단식광대를 예시로 들었다. 어느 날 갑충으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는 식욕을 잃어버린다. 여동생은 그가 평소에 좋아했던 우유와 신선한 채소를 갖다주지만 그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 배불러서가 아니다. 맹렬한 허기를 느끼지만 무엇을 먹고 싶어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40일 이상 단식을 지속하면 안 된다는 금기를 깬 단식광대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먹고 싶어. 그런데 맛있는 음식을 찾을 수 없어' 먹기에서 쾌락은 먹히기에서 온다고 한다. 나Ich의 자아 정체성을 유지하는 먹기는 단순히 영양소섭취에 머물지만 자아 정체성에 균열을 일으키며 내가 아닌 다른 것, 즉 타자성을 내 몸 안으로 들어올 때 도취는 일어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논의를 마무리하고 아도르노의 역사철학, 문명사적 논의로 이어지면서 차원을 확장했다.
선사 시대(애니미즘) - 마술적 단계 - 신화 단계 - 종교 단계 - 고대-중세-르네상스-근대-현대)
이 문명의 발전사를 인간의 주체화 과정으로 읽는 것이 아도르노의 틀이었다고 한다.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신화인데, 그것이 근대성modernity의 원천으로 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에게 신화는 '자연'이라고 하는 불가해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이야기이다. '서사의 권력'. 이 신화의 서사가 자연을 설명하고 지배하는 동시에 배제와 추방이 이뤄진다. 특히 근대는 사회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하려는 기획이었고, 이 근대성의 폭력에 반발해 다양성을 들고 나오는 포스트모던의 비판이 뒤따랐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이 근대라는 시스템이, 아우슈비츠의 참극이라는 처참한 실패로 사형선고를 받은 근대(화)가 이성에 의한 필연적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근대화는 폭력에서 비폭력으로 진행되는 과정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는데 실상은 폭력이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주먹도끼나 돌도끼가 아닌 원자폭탄 같은 첨단과학기술이나 관료제 같은 복잡한 법-시스템의 폭력으로 대체된 것뿐이라는 진단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철학자들이 로그스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크리스테바의 비체 개념에 대한 숙지(혐오스러운 맛있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와 법폭력 이전의 근원적 폭력으로서, 폭력의 원형식으로서 언어/이성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남겼다.
p.s 어떤 분이 질문해주셔서 김진영 선생님의 말씀을 좀 더 들어볼 수 있었다. 요약하면 공부의 존재론/윤리학이랄까. 공부하기 힘든 시대이고, 공부를 하면 끝에는 그리스 시대처럼 빛나는 진리가 아니라 쓰레기가 있는데 공부를 안 하면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는 시대이다. 소극적 방어를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위,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에 가슴이 뜨거워지진 않았지만(멜랑콜리커라서 그런걸까?) 역시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구나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세를 다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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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리뷰]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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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멜랑콜리와 철학 3강을 듣고-
애도하는 사람
‘슬픔과 우울증’에서 프로이트는 정상적인 사회에 회귀하는 것을 전제로 죽은 사람과 애도하는 사람을 바라본다. 그에게 죽은 사람이란 이미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중요한 건 아직 살아 있는 애도하는 사람 뿐이다. 그에게는 끝까지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의 리비도는 계속 움직이려고 한다. 이러한 리비도의 움직임을 거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동물에게는 욕구만 있다는 점이며 인간에게는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욕구는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의식주의 충동이라면 욕망은 죽음 욕망까지도 포괄한다. 욕망은 인간 스스로에게 자기 자신을 되묻게 한다. 과연 그 자신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살아남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방어 기제는 기만으로 작동한다. 우울증은 방어 기제의 정체를 통렬하게 밝힌다. 사라진 사람의 자리를 어떻게 메꿀 수 있겠는가. 생활을 위해 억지로 가두고 괜찮다고 틀어막은 수도꼭지의 뚜껑은 언젠가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기만한 슬픔은 되돌아온다. 그 슬픔은 우리에게 한 때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는 아련한 노스탤지어의 감성을 느끼게 하는 대신, 우리는 처음부터 혼자였으며 아무리 애써봤자 죽을 때마저도 혼자 남을 것이라는 선고를 내린다.
영웅의 몰락
오이디푸스는 테베 시의 스핑크스를 물리쳐 준 영웅으로 칭송받았지만, 그는 영웅이 될 수 없었다. 비단 그의 출생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그의 눈을 너무 믿었다.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죄인을 데려오라고 명령한다. 바로 ‘그의 눈 앞에’. 그에게 진짜 범인을 알려준 사람은 장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였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의 눈을 찔러 자신의 오만했던 생각을 벌한다. 그가 알지 못했던 자신의 상처는 점점 파열되면서 그 자신마저 몰락시킨다.
오늘날 영웅들은 어떤 큰 규모의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다. 현재 ‘영웅’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자본이나 지식과 같은 일정한 근거를 가지고 사건을 해결하고자 한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랑은 거부당하고 의심받는다. ‘썸’이나 ‘밀당’은 결국 그 사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행동이자 그 사람을 계속 의심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 귀착점이 과연 믿음이 될 수 있을까. 밀리고 당기는 와중에 그들이 원하는 것은 ‘승리’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져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의 확신-그 사람은 나를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져주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져주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을 확인하며 그 사람에게 사랑받는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헤어질 대 다른 사람에게 가장 상처를 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사랑이 변했어.” 라는 그 명대사는 사실은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날 사랑하는 너를 좋아했어.”
결국 우리는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으며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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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리뷰]버티는 성실함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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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성실함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8강 정리+리뷰-
무서운 자화상
발터 벤야민은 어렸을 적 아버지와 동반해 간 파리에 매혹되는 한편, 나치의 탄압을 피해 도망쳐 온 파리를 경멸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 자연사는 시간에 의해 그를 매혹했던 모든 것-보들레르의 파사주는 퇴색하고 아름다웠던 과거-들이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점점 갈수록 나아질 수 있다고 점진적 진보를 주장하는 보수주의와 온건한 부르주아 마르크시스트들의 논지와 점점 갈수록 폐허로 치달을 뿐이라는 벤야민의 예언은 이 점에서 일치한다. 보통 예언은 앞으로의 운명을 순응하고 받아들이라는 징조인가, 아니면 그 운명을 거부하라는 충고인가? 사람들은 예언의 실현으로 인해 얻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치를 다하거나, 혹은 그 예언을 실현시키지 않기 위해 애쓴다. 오이디푸스는 예언을 실현시키지 않기 위해 양부모 곁을 떠나고 스핑크스를 물리쳤으나,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한 노인의 살해로 인해 예언을 현실로 만들고 만다. 어떤 ‘저항’ 또한 예언의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결국 예언은 절대적인 것이 되며 우리의 저항은 사실상 무력한 것이 되고 만다. 사실상 어떤 안전책도 결국 ‘안전하지 않다.’ 배가 가라앉은 것은 그 배의 안전성이나 경영진의 부도덕이 직접적인 원인일 수 있지만, 간접적인 원인 또한 그 운명을 재촉하는 꼴이 되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고, 사람들은 그 파멸의 전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신뢰’의 파멸이 실제로 드러나자 사람들은 일제히 불신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향한, 불신을 위한 불신이 바이러스처럼 매복해 있다가 따뜻해지면 피어오르는 꽃처럼 일제히 터져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벤야민은 혁명을 위해서는 기존의 자연사적 시간관보다는 새로운 시간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시간은 바로 순차적 시간을 방지하는, 파우스트가 외쳤던 ‘이대로 시간이 멈춰라’라는 외침과 같겠지만-그러나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으로 인해 ‘시간’에 의해 패배하며, 그에게 남은 건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의 신 밖에 없다.-동시에 과거와 현재, 미래의 가치 판단을 없애는 ‘판단의 중지’와도 같다. 그림과 사진이 위력을 지니는 이유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바로 ‘초상화’다. 초상화는 이미 몇백년 전에 죽은 이를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우리는 그 시선 앞에서 허둥거리다가, 그들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자연사적인’ 안심을 촉구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한없이 냉정하다. 이는 모든 그림과 사진이 사유 이미지로서 작동할 계기를 부여한다. 파리의 거리를 찍은 사진이나 클레의 천사 그림은 우리가 망각하고 지나쳤던 것, 우리가 잊어버리고 해몽책이나 뒤적이며 ‘미래’를 알려고 하는 꿈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메시아를 기다리지만, 그 수동적 기다림은 ‘고도를 기다리며’와 달리 끊임없이 준비하는 데에서 능동적인 움직임으로 변모될 수 있다. 벤야민은 계속 파리에서 ‘기다렸으나’ 그 기다림은 좌절에 의한 멈춤이 아니라 적극적인 ‘기다림’이었다.
광해
‘광해’의 왕은 자신과 꼭 닮은 광대와 독대하며 흥미로워하는 한편 그를 철저하게 증오한다. ‘광해’는 늘 혼자 있으며, 모두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한다. 그는 아무 것도 믿지 못하며, 그 자신이 입은 용포의 위력조차도 의심한다. 모든 미친 왕들은 다 혼자 있고 싶어했다. 그들은 어떤 누구에게도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국 그의 질문을 대답으로 되풀이할 것이며, 그의 결정을 촉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신은 그들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폭군 앞에서의 신하들은 폭군에게 쉬이 말하지 못하지만, 그 침묵은 폭군을 의기양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미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성군’들은 가신과 함께 다니며, 그 가신은 그에게 조언을 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폭군과 성군의 연출 차이가 드러나는 지점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사극에서의 ‘간신’들은 재물에 눈이 먼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 재물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존재적 ‘비극성’이 드러나게 된다. 그들이 무릎이 닳도록 빌고 굽실거린 왕은 그들을 구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들은 ‘재물’을 모은다. 소위 ‘개미’가 늘어나고 소비가 줄어드는 현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끊임없이 스스로의 이념을 배신하고 살아남기를 택한다. 동전 한 닢은 그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고, 더 오래 돌아다닌다. 자본주의의 최종점은 형체가 없는 ‘사이버 머니’라고 하지만, 결국 이는 자본주의의 이념의 최종에 다다른 것에 불과할 뿐, 자본주의의 폐지를 뜻하는 게 아니다. 완전한 이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신’으로서 자본은 격상되었고, 이제 인간은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배반할 일만 남았을 뿐이다.
우울할 때는 벤야민
모순적이게도, 벤야민의 멜랑콜리와 함께 대두되는 것은 알레고리다. 멜랑콜리는 그 자리에 멈춰선 정지라면, 알레고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생성되는 어떤 것을 표현한다. 로마와 그리스, 어떤 시대가 ‘어떤 시대’로 명명되었고 그 시대가 후일에 모범의 사례가 되듯 이 파국의 전조도 어떤 반면교사의 사례로 언급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제목은 이제 소망이 되어버린다. 도시의 꿈은 이제 꿈의 끝에서 깨어나기 위해 파국을 맞이해야 한다. 호접지몽은 꿈의 혼란을 뜻하기도 하나 동시에 꿈에서 비롯되는 존재의 자유로움, 한 고유명사 안에 갇힐 가능성과 한계를 뛰어넘는 데에서 온다.
벤야민의 멜랑콜리는 분명히 철저하게 파리의 통속적인 모습과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면들을 해부해내나, 이는 단순한 ‘관찰’만이 아니다. 미국으로 간 아도르노의 청에 불복했던 것은 그의 단순한 낙관주의나 깊은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는 스탈린과 부르주아들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타협하지 않는 미래’에 스스로를 주어버린 것이다. 만약 그가 그 국경을 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절망’해야 했다. 그의 극단적 선택은 그의 병리적인 면에서 비롯된 게 아닐지도 모른다. 혹은 어떤 담론으로 이상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병리적인 면’으로 치우쳐 그의 결말을 해석하는 것 또한 과도한 시각에 해당할 수 있다. 니체가 우울증과 진지한 사람들을 위한 철학으로 쉽게 오해되고, 그의 디오니소스에 대한 해석만이 대두되는 데에 비해 아폴론적인 면에 대한 시선이 축소되는 이유는-그가 전자에 치우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확한 것 하나는 그들은 자신의 담론이 예언으로 축소되거나 확대되는 것을 경시했고, 그래서 그들의 현재에서 끊임없이 그 ‘기미’를 찾아내고자 했다. 그 기미는 수많은 재료들 끝에서 태어나는 한줌의 황금처럼-혹은 그 황금의 기미를 드러내는 다른 어떤 것처럼 희미했을지도 모르며, 때문에 다른 재료들에 비해 덜 주목받을지도 모르고 별다른 성과가 아닌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어떤 것’, 기나긴 관찰과 좌절 끝에도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그들의 명랑성이 단순한 조울증 증세로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을 환기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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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리뷰]5강 |
양*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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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더 이상 걸음마를 할 수 없다. 걸음을 걸어버린 우리는.
아도르노는 계몽주의자, 합리주의자였다. 그래서 의식할 수 없는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는 일종의 소설이라고 프로이트를 비판했다(실제로 어떤 평론가는 프로이트를 최고의 소설가 중 한 명이라 하기도 했다). 통과제의적 성격을 지닌 오이디푸스 단계에 대해서도 둘의 의견을 갈렸다. 프로이트는 분리와 미분리 상태를 명확히 구별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아도르노는 두 상태가 중첩돼 있다고 보았다. 아도르노는 동물/인간의 도식에서 동물이 분리/통과 이전에 이미 인간의 자의식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달팽이의 더듬이의 은유가 흥미로웠다. 달팽이는 하나의 육질덩어리인데 달팽이집에서 나오면서 육질덩어리가 더듬이로 변했다고 한다. 이는 미분리 상태(더듬이가 몸에 붙어 있으므로)이면서 동시에 분리 상태(더듬이가 바깥으로 나와 있으므로)-중첩 상태를 보여준다. 육체이면서 동시에 의식인 달팽이의 더듬이는 통과제의 이전의 미분리 단계에 있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그러니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말 것!).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분리의 고통/상처는 끊임없이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열린 상처이다
기존의 명제들이 반복학습되었다.
아이는 달팽이라고 볼 수 있는 존재다. 아이는 왕성한 호기심으로 모든 사물에 다가간다. 즐거움을 위해 욕동하는 순수한 호기심에 몸을 맡긴 부드러운 존재. 하지만 그는 상처를 입게 된다. 이 상처로 인해 생긴 경계심이 호기심을 억누른다.
mimic과 mimesis의 비교.
mimic은 똑같아 지려는 것이고, mimesis는 비슷해지려는 것이다.
위협당한 벌레를 보자. 그는 살아 있으나 죽음을 mimic모방한다. 죽은 척. 그는 살기 위해 죽음에 잠시 몸을 내맡긴다. 그는 부활하기 위해 죽는다. 죽음에 언제든지 몸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위태로운 삶의 피신처로서의 죽음이라는 토포스.
벌레만 죽은 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k.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하면 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의 수동성은 묘하게 적극성을 띤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k에게 누군가 찾아온다. 법.(k는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가. 그는 어떤 일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일단 행동을 하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다가오는 미래를 끊임없이 유예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로 인해 그는 현재라는 지점/모멘트에 당도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행복한 분리는 없다. 분리는 불행하게 이뤄진다. 문명/문화라는 이름으로 실행되는 폭력.
문화를 또 이렇게 설명한다. 참을 수 없는 기억(크리스테바 식으로 비체)을 쫓아내기 위한 시스템. 비체는 배설물이나 피 같은 것이다. 생명의 근저를 이루지만 밖으로 '드러났을' 때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현대문명은 샘-위생적인 (그렇게 보이는) 하얀 변기를 발명해내며 더러운 배설물로부터 인간들을 분리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뱃속은 똥으로 가득 차 있다. 아도르노는 아담이 죽인 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약자에 대한 최초의 원초적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명은 폭력, 문명이 극복하고자 했던 야만보다 더 야만적인 폭력으로 이뤄진 신화라는 것.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모든 문화는 쓰레기라고 고발한다.
다시 아이들.
아이들은 질문한다. '나 어디서 나왔어? 나 어떻게 태어났어?' 억압되지 않은, 분리되지 않은 영혼은 순수한 질문을 던진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한다. 보이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이들에게 그 발화는 폭로가 된다. 이 굴절은 보임과 보이지 않음, 뭔가를 보게 만들고 보지 않게 만드는 시선-말의 지배하는 통치성에 기인한다. 그 그물에 포섭되지 않은 아이와의 대화는 우리의 잠들어 있는 부분을 일꺠운다. 아이들과 대화하다 보면 놓치고 있었던 부분, 대답을 받아냈어야 할 근원적 질문을 잊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아이들의 입을 틍러막는 폭력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혹시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기존의 체제에 균열이 생길 것을 염려한 어른들의 검은 손이 아닐까. 기형도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안개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적었듯 문명/폭력의 양식에 가담하고 있는 어른들의 세계에 내던져진 아이들은 상처의 기원을 찾지 못한다. 그렇게 멜랑콜리에 빠지게 된다. 이 상처의 내면화는 타자화로 부를 수도 있다. 우리가 말하는 건강한 주체는 사실 자신을 타자화시킴으로써 만들어졌다. 시스템이라는 왜곡의 양식에 적응해내면 왜곡이 정상이 왼다.
많은 사람들은 이 통과제의를 나름대로 해내지만 여기에 결정적으로 불화한, 실패한 하위주체들이 있다. 괴물들(프랑코 모레티의 <공포의 변증법>은 이런 관점에서 흥미롭게 읽힌다). 요괴, 구미호 등등... 그들은 '인간이 되고 싶다'고 한다. 인간이 되긴 됐는데 온전하지 못한 인간이 되지 못한 이들. 정상적인 표준질서에 편입되고자 했으나 태생적으로 인간이 아니었던 이는 인간이 되어도 그 과정 속에서 고통 떄문에 인간이 아닌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근원적 불화.
이 고통은 의식에 기입되지 않지만 몸에 기입된다. 몸은 증상을 드러낸다. 하지만 대부분 이 증상을 읽어내지 못한다. 병든 사람들. 병들었는데 병든 줄도 모르는 사람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날 이후 모두 병들었고 모두 아픈데 고칠 생각을 안 하고 더 나쁜 쪽으로 달리는 사람들. - 돈을 그렇게 많이 벌고 있으면서 세금/겅강보험료를 뺴돌리는 부자들... 물신, 도착... 언제 잠깨는가
마취에 대해. 클로로포름. 고통이 척추[중추]에 모였닥 뇌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하고 발명된 마취의학. 뇌는 고통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몸은 기억한다, 모두. 우리는 문명화가 인류의 집단마취는 아니었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전신마취, 심한 마취에서 깨어난 이를 본 적 있다면 떠올려보라. 깨어 있으나 깨어나지 않은 것 같은 그 멍한 얼굴을.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자신이 병들었는지 아닌지, 상처의 기원이 어디인지 알아야 최소한의 치유의 길이 열린다.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다. 21세기를 배회하고 있는 멜랑콜리의 유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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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김진영 선생님의 멜랑콜리와 철학 |
양*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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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와 철학. 이 조합에서 처음 연상되는 건 발터 벤야민/베냐민(베르그손처럼 베냐민으로 표기가 정착될까요?)이었습니다. 김진영 선생님이 이 수업을 듣게 된 동기를 물으셨을 때 저는 발터 베냐민에 관심 있다고 대답했지만 아트앤스터디 팟캐스트를 통해 조금이나마 들어본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강의를 굉장히 좋았고, '풀버전'으로 맛본 이번 강의 역시 기대를 뛰어넘어 굉장히 만족스러웠습니다. 어떤 분이 김진영 선생님과 이번 강의 주제가 딱 들어맞는다는 논평을 해주셨는데 수업을 듣고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어떤 강의였는지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학기에 진행되는 멜랑콜리와 철학, 다음 학기에 진행될 예정인 멜랑콜리와 예술에 대한 전반적인 스케치를 하셨습니다. 전자는 멜랑콜리란 주제를 철학에서 어떻게 다뤄왔는지 해석사를 살펴 보고, 후자는 뒤러의 그림, 김광석의 목소리, 이은주의 얼굴, 현대클래식 음악 등 예술작품에서 멜랑콜리가 어떻게 표현됐는지 살펴 보는 시간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강의에서 다루고자 하는 멜랑콜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먼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 멜랑콜리가 담론화되어 있기 때문에 논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멜랑콜리와 멜랑콜리적인 것의 구분을 강조하셨습니다. 멜랑콜리가 담론화되고 교양화된 (죽어 있는) 개념에 가깝다면, 멜랑콜리적인 것은 실제로 감각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느낌, 상태에 가까운 것입니다.
독일어로 우울을 뜻하는 schwermut의 풀이로 멜랑콜리를 이해하는 데 한 걸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우울schwermut는 무거운 마음이다(schwer(무거운)와 mut(마음)). 아무리 기뻐도 남아 있는 무거운 마음, 이것이 우울이다. 이 무거운 마음을 벗어날 때 우리는 주이상스(향유)나 황홀경을 경험했다고 하지만 그런 초월적 경험은 일상에서 잘 발생하지 않는다.
1. 왜 멜랑콜리인가
오늘날의 사회를 양극화 사회라고 하는데 선생님은 양극화라도 있으면 다행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좋은/나쁜, 부/빈, 이렇게 명확하게 대치하고 있는 안티테제가 있으면 전복의 가능성이 있을 텐데 오늘날은 멜랑콜리 안에서 통합된 것에 가까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있는 자들은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지셨고, 이 질문에 동의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멜랑콜리의 대기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매일매일' 멜랑콜리는 마시고 있다는 진단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는데 왜 노력할수록 나아지는 게 아니라 나빠지는가. 이 자기배반의 상황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멜랑콜리의 대기권에 갇혀 있는가. 그러면서 한국문학이나 영화가 상류사회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지적을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렇다면 상류사회의 멜랑콜리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어떤 작품을 꼽을 수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최근에 나온 영화로 보면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 마틴 스콜세지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정도? 김진영 선생님이 다른 강의에서 다룬 적 있으신 필립 로스의 텍스트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로사회, 투명사회, 단속사회 등등 ~~사회란 제목으로 사회를 진단하는 책들이 일종의 트렌드를 형성했고, 그 중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가 독일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는데 과연 피로사회가 한국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개념인가 하는 반문을 하시면서 들뢰즈가 말했던 소진사회와 피로사회를 비교하셨습니다. 피로는 힘을 많이 써버린 상태이고, 힘을 회복해 다른 상황을 희구해볼 수 있는 변화의 잠재적 가능성이 존재하는 상태이지만, 소진은 힘이 '고갈된' 상태라서 잠재적 가능성이 부재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소진된 사회의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로 사무엘 베케트를 꼽았습니다. 베케트의 대표작인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얘기를 잠깐 해주시면서 무대장치를 최소화한 무대, 잎이 다 떨어진 나무 한 그루만 있는 배경,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린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고도를 기다린다고(고도가 올 거라는 믿음이 있다고) 볼 수 없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육체뿐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피로사회/인간과 소진사회/인간의 구원 양상이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 강의를 통해 묻게 될 질문이 될 거란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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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9강 인류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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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김진영 선생님 '멜랑콜리와 철학' 9강 정리+리뷰-
홀로 남는 왕
크레온은 안티고네에게 피조물로서의 사형을 내리면서 역설적으로 안티고네의 승리를 인정하게 된다. 그는 법과 도덕에 대해 안티고네에게 끊임없이 설교하며 그녀가 저지른 죄의 무게를 체감하게 하고 그가 느끼는 당혹감에 대해 ‘공감’을 요구하지만, 안티고네는 그에게 끊임없이 반박하고 그녀 자신의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든다. 크레온은 그의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 안티고네를 끝내 제거하게 된다. 그는 가족의 법도를 지키기 위해 안티고네를 제거하지만 결국 그 자신의 아들과 아내를 잃으면서 ‘가족’을 무너뜨리게 된다. 안티고네는 스스로의 도덕과 윤리를 보존하기 위해 ‘무덤-신혼방’으로 가버리고, 크레온은 폐허가 된 현실 앞에서 절망한다. 권력으로서 작동하는 혈통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 규범과 도덕을 지킬 것을 강조하며, 그로써 그들의 권력이 계승되고 보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위 재벌집 드라마에서 ‘감히 네가’ 운운하는 것은 그들의 보존과 안전한 계승을 위한 ‘짝짓기’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주디스 버틀러는 권력의 계승과 혈통의 보존으로 지속되는 한 ‘가족’의 찬란한 영광보다 가족에 속한 한 주체의 존재를 중시한다. 이는 한 재벌집-왕가 뿐 아니라 사회 전체, 남녀의 체계를 통해 ‘인류’의 보존과 번식을 주장하는 ‘인류’라는 권력에 대한 저항에 대입해 읽을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생산’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부과받고, 때문에 인간의 최종형은 기계가 되어버린다. 왕은 혼자 남아도 왕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곁을 떠나도 그 자신은 떠나지 못하고 옥좌에 남아 있어야 한다.
나는 당신과 자지 않았어요
최근 한 방송인의 막말로 인해 페미니즘 논쟁이 다시금 끓어오른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기다. 과거에 이미 사과한 일인데도 굳이 화두로 끌어 올릴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고 그의 사고가 남녀 평등 정신에 위배될 뿐 아니라 휴머니즘의 측면에서도 윤리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사실상 한국에서 가장 붙이기 쉬운 싸움은 남녀의 싸움이며, 이들은 서로에 대한 공격을 통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자 한다.
이에 대항하는 페미니즘의 초기 양상은 ‘여성’이 아닌 다른 물적인 것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아브젝시옹, 혐오적인 것으로 외면되고 방어대상이 되어버린 것의 ‘패배 정당성’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 것을 늘 배제해 왔으나, 그 배제 기준이 과연 ‘생존’을 위한 것이었는지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생존’이었는가, 아니면 ‘죽음’이었는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고심해 왔으나, 결국 제자리 걸음이었다는 결론 앞에서 인간에게 남은 건 자결 뿐인가?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편견으로, 페미니스트는 연애에 실패해 패배 의식에 차 있는 못 생긴 여자로 규정되곤 한다. 혹은 다른 ‘정상적인 여자’들과 다른 모습, 레즈비언으로 취급된다. 이에 페미니스트들의 대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레즈비언’의 배척으로 이어지고, 여성적 가치를 보존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남성과 싸우기 위해 소위 남성적인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즐기는 척하거나 그들과의 구분이 없고, 혹은 그들의 도덕을 계승하고 있다는 듯이 ‘레즈비언’의 배척을 주장하나 이는 그들 자신을 공격하는 것을 역순으로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는 그들의 나약함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십여년 넘게 그들은 어떤 ‘규범’을 되풀이 해 배워왔고, 무의식에 뿌리박은 이 편견은 쉽게 사라질 수 없다. 끊임없는 사유와 토론, 성찰만이 ‘페미니즘’과 ‘휴머니즘’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게 해줄 수 있다. 스테파니 스털의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는 책을 읽고 공부하며 토론하는 페미니스트들, 한 인간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한 인간을 보여준다. 그녀는 ‘노란 벽지’의 여주인공처럼 미쳐 버리기 전에, 그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기 위해 ‘공부한다.’ 그녀가 자신의 딸을 사랑하고 남편과 함께 사는 삶을 택했다 해서 그녀를 ‘좌절한 페미니스트’-순응자로서 읽는 건 지나친 오독이다. 그녀는 자신을 어떤 존재로 규정짓는 사람들에 대해 ‘자신’을 알지 못한다고 자신있게 지적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녀의 독서 편력 뿐 아니라 성찰, 그리고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콜비츠와 인류
그렇다면 그녀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끊임없는 자기 존재에 대한 낙관이나 아이에 대한 사랑 때문일까? 그녀의 책에는 딸에 대한 사랑보다는 딸의 칭얼거림, 갑작스런 병에 대한 불평과 한탄이 더 많다. 그녀는 딸에 대해 무작정 찬양하는 대신 ‘핑크’를 주장하는 딸에 대해 의문시하고 짜증을 느끼기까지 한다. 딸은 그녀의 분신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작고 거대한 타자다. 그녀의 존재에 의문을 던지고 그녀가 ‘자신으로서 분명히 살고 있는 것인지’를 묻게 한 계기이기도 하다.
최근 번역된 로베르 앙텔므의 ‘인류’의 표지에는 케테 콜비츠의 그림이 실려 있는데, 이 그림은 사람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거나 껴안으면서 하나의 원을 유지하고 있는 ‘단단한 그림’이다. 원 속에서 고개를 내미는 아이들은 밖의 상황을 궁금해 하는 ‘천진난만’한 표정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원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결심에 찬 비장함 뿐 아니라 두려워하고, 끊임없이 밖을 살핀다. 그래도 그들은 그 결속을 풀고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그림은 단단하면서도 불안하다.
타자성은 어떤 기호로 환원될 수 없는 불확실한 것으로 존재의 견고함에 위협을 가하는 ‘치명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타자성은 동시에 상실될 수 있는 ‘연약한 것’이기도 하다. 스테파니 스털은 딸이 그녀의 인생을 망치고 방해하는 ‘치명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동시에 딸이라는 존재가 순간 상실되어 버릴 수 있을 만큼 ‘연약한 것’이며, 그녀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고 있는 근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녀는 ‘딸’과 함께 살아나갈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슬픔의 공동체’인 동시에 ‘기쁨의 공동체’일 수 있으며, 불가능한 삶과 애도를 지속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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