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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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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 혹은 봉인된 혀들 |
오*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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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같아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작품들을 모아서 이런 강의를 만들어주시다니ㅠㅠ 앞으로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책을 못읽고 들은 강의가 있어서 그런 건 한번 더 들어보려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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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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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 짱 |
나*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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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강좌 다 듣고 또 듣고 있습니다. 명불허전 김진영 선생님.. 선생님 강좌를 듣다보면 이상하게 몽롱해지는 기분이 들다가 또 정신이 확 들다가 그러네요. 특히 카프카 ... 카프카 강의 너무 좋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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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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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
송*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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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카프카를 좋아합니다. 카프카의 작품뿐 아니라 카프카에 대한 책에도 관심이 많거든요. 자유수강권이 있어서 원래 카프카에 대한 것만 들으려고 했는데 듣다보니 끝까지 다 들었네요. 소설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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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부터 시작하길 잘했다 |
윤*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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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카프카 선고 편부터 들었는데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렸다. 고등학교 때 변신 읽고 그냥 이상한 소설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선생님 해석 들으니까 권력투쟁의 전략이 이렇게 치밀하게 숨어있었구나. 도마뱀과 갑충 비유는 정말 소름 돋았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법이 저항이 아니라 전복이라는 게 신선했고. 7강 전부 다 들을 생각인데 카프카만 벌써 3시간 넘게 들었다. 진도가 안 나간다 ㅠㅠ 근데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면서 듣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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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문학을 이렇게 읽을 수도 있구나 |
박*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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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불문학 전공했는데 그때는 작품 분석이 이렇게까지 깊지 않았다. 김진영 선생님은 텍스트 한 줄 한 줄을 철학적으로 해체하시는 느낌이랄까. 특히 플로베르 순박한 마음 부분에서 펠리시테와 오벵 부인 비교하는 대목은 정말 명강의였다. 부르주아의 권태와 하녀의 순박함이 결국 몰락의 변증법으로 이어진다는 해석. 학부 때 들었으면 졸업논문 주제로 삼았을 텐데. 아쉽게도 이제 직장인이지만 퇴근하고 매일 한 강씩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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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까지 정주행 |
이*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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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2편 다 듣고 3편도 신청했다. 선생님 특유의 느린 템포와 중얼거리는 듯한 말투가 처음엔 좀 답답했는데 지금은 그게 오히려 좋다. 급하게 설명 넘어가는 게 아니라 한 장면 한 장면 음미하듯이 읽어주시니까. 카르멘에서 사랑과 자유의 관계 설명하실 때 미카엘라랑 카르멘 대비시키는 부분 정말 인상 깊었다. 성모 마리아 같은 이타적 사랑은 사실 조건적이고 교환적이라는 거. 카르멘의 자유가 진짜 사랑이라는 해석이 마음에 와닿았다. 다음 편도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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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속도 조절 필요함 |
정*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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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확실히 좋은데 한 작품당 2시간씩 넘게 할애하니까 좀 지루할 때가 있다. 나는 포크너 에밀리 부분에서 좀 집중력이 떨어졌다. 물론 남부의 몰락이랑 에밀리의 순박성을 연결하는 건 흥미로웠지만 2시간 반은 좀... 1.5배속으로 들으니까 그나마 괜찮더라. 선생님이 워낙 천천히 말씀하셔서 배속해도 내용 이해하는 데 지장 없음. 근데 뒤라스 연인 편은 진짜 몰입해서 들었다. 관능과 문학의 공간 이야기는 명강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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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유학파답다 |
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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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독일에서 공부하신 게 느껴진다. 아도르노, 벤야민 이런 분들 인용하면서 텍스트 읽어주시는데 깊이가 다르다. 특히 카프카 해석할 때 벤야민 초기 사진 이론 끌어오신 거나 플로베르 설명하면서 바르트 이야기하신 것도 그렇고. 철학 배경지식 좀 있으면 훨씬 재밌게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철학 문외한인데도 선생님이 쉽게 풀어주셔서 따라가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가끔 독일어 용어 나올 때는 좀 당황스럽긴 함 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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뵐 카타리나 블룸이 제일 좋았다 |
강*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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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중에서 6강 카타리나 블룸이 제일 인상 깊었다. 70년대 독일 사회 비판하는 소설인데 요즘 미디어 환경이랑 너무 비슷해서 소름. 타블로이드가 한 개인의 명예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대중의 집단 무의식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선생님이 니체의 르상티망 개념 끌어오면서 설명하시는데 완전 공감됐다. 지금도 마녀사냥 비슷한 거 계속 일어나잖아. 카타리나가 마지막에 기자한테 총 쏘는 장면 해석도 좋았다. 각성을 바라는 목소리라니. 89분이면 짧은 편인데 내용은 제일 묵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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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아카데미 대표님 강의 |
송*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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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아카데미에서 선생님 오프라인 강의 들었던 적 있는데 온라인도 퀄리티 똑같다. 현장감은 좀 떨어지지만 집에서 편하게 들을 수 있어서 좋다. 선생님이 현장에서도 이렇게 천천히 말씀하심 ㅋㅋ 근데 그게 매력이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듯이 텍스트 읽어주시는데 마치 소설 낭독회 온 느낌? 테네시 윌리엄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56분밖에 안 돼서 좀 아쉬웠는데 그래도 핵심은 다 짚어주셨다. 전체적으로 14,700원에 이 정도 강의면 가성비 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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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전공자한테 추천 |
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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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예창작과 나왔는데 학부 때 이런 강의 들었으면 소설 쓰는 관점이 달라졌을 것 같다. 김진영 선생님은 소설을 분석하는 게 아니라 해부한다는 느낌. 특히 메리메 카르멘에서 말과 웃음의 차이, 절약과 낭비의 대비 이런 거 설명하실 때 소설 쓰는 사람 입장에서 많이 배웠다. 캐릭터를 이렇게 철학적으로 구축할 수도 있구나. 작가 지망생들한테 진짜 도움 될 듯. 물론 일반 독자들도 충분히 들을 만하고. 28교시가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한 강씩 끊어 들으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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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편도 찾아 들었다 |
오*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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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듣고 너무 좋아서 1편 2편도 결제했다. 에세이 리뷰들 보니까 다들 극찬이더라. 특히 카프카 해석이 일품이라는 평이 많아서 기대된다. 3편에서도 카프카 선고가 제일 어려웠는데 동시에 제일 흥미로웠다. 게오르크가 아버지한테 선고 받는 장면에서 사실은 게오르크가 이긴 거라는 해석. 권력이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전략. 이런 걸 학교에서는 안 가르쳐준다. 선생님 책도 사서 읽어봐야겠다. 조용한 날들의 기록이랑 사랑의 기억 이미 장바구니에 담아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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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도가 강의마다 다름 |
김*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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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강의마다 편차가 좀 있다. 카프카랑 플로베르는 정말 재밌게 들었는데 테네시 윌리엄스는 좀 짧아서 아쉬웠고, 포크너는 중간에 좀 지루했다. 선생님이 특정 작가나 작품에 더 애정이 있으신 게 느껴진다. 카프카 설명할 때랑 포크너 설명할 때 텐션이 다름 ㅋㅋ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만족한다. 특히 뒤라스 연인 부분은 정말 아름다웠다. 관능을 탕진해야 문학이 불멸한다는 역설. 이런 문장 듣고 소름 돋았다. 4편 나오면 또 들을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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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록 없는 게 아쉽다 |
임*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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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정말 좋은데 강의록이 없어서 복습할 때 좀 불편하다. 선생님 말씀 놓치는 부분도 있고. 특히 철학자 이름이나 개념 나올 때 정확히 못 받아적을 때가 있다. 뵐플린? 빙켈만? 이런 거. 자막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래도 강의 자체는 훌륭하다. 몇 번 반복해서 들으니까 이해가 깊어진다. 나는 특히 플로베르 순박한 마음 두 번 들었는데 두 번째 들을 때 펠리시테의 순박성이 왜 부르주아보다 더 깊은 몰락으로 이어지는지 확실히 이해됐다. 시간 들일 가치 있는 강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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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정치성을 배우다 |
장*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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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의 듣고 문학이 단순히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특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이나 카프카 선고 같은 작품들. 권력과 개인, 사회와 희생양, 미디어의 폭력성 이런 주제들이 소설 속에 이렇게 정교하게 숨어있다니. 선생님이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개념 설명하실 때 정말 충격 받았다. 우리 모두가 권력 앞에서는 호모 사케르라니. 카프카적 존재들이 사실은 우리 자신이라는 거. 문학을 통해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눈을 갖게 됐다. 인문학의 힘이 이런 거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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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구매 할인 감사 |
정*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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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편 들었던 사람한테 14,700원은 진짜 혜자다. 원래 49,000원인데 70% 할인. 이 정도 강의를 만 오천원도 안 되는 가격에 들을 수 있다니. 다른 인문학 강의들은 몇 만원씩 하던데. 김진영 선생님 팬이라면 무조건 사야 한다. 나는 1편부터 쭉 들어왔는데 3편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선생님 나이 드실수록 해석이 더 깊어지는 느낌? 작년에 나온 책 조용한 날들의 기록도 읽었는데 거기 나온 문장들이 강의에도 녹아있더라. 4편 5편도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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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라스 연인 다시 읽게 됐다 |
안*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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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뒤라스 연인 듣고 소설 다시 꺼내 읽었다. 20대 때 읽었을 땐 그냥 관능적인 사랑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선생님 해석 듣고 나니 완전히 다른 소설이 됐다. 관능을 탕진해야 문학의 공간에 도달한다는 것. 15살 반 소녀의 중절모와 하이힐이 생과 사의 경계를 상징한다는 것. 이런 걸 혼자 읽어서는 절대 못 잡아냈을 것 같다. 쇼팽 왈츠 10번 찾아 들으면서 소설 마지막 장면 다시 읽으니까 눈물 날 뻔. 문학을 이렇게 깊이 읽는 게 가능하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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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수강기간 넉넉하다 |
이*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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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들어도 6개월이면 충분하다. 나는 주말에만 한두 강씩 듣는데 석 달 만에 다 들었다. 그리고 지금 2회독 중. 한 번 들을 때는 내용 따라가기 바빴는데 두 번째 들으니까 선생님이 중간중간 하시는 말씀들이 다 들린다. 작은 디테일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포크너 에밀리 부분에서 철회색 머리카락 하나가 상징하는 게 이렇게 많다니. 처음 들을 땐 그냥 넘어갔던 부분들. 이 강의는 여러 번 들을수록 맛이 난다. 복습용으로도 훌륭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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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김진영선생님 강의 |
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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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의 강의는 풍부한 강의입니다. 오히려 너무 풍부하여 습득하기에 벅찬 강의죠. 그래도 선생님이 좋아서 1,2를 신청하여 들었고 결국 3까지 왔네요. 4,5 쭉 나가길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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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소설들 봉인된 혀들' 3-5강 리뷰:호건에게 에밀리를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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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 봉인된 혀들 3-5강 윌리엄 포크너 '에밀리에게 장미를'리뷰]
호건에게 에밀리를
부레옥잠
출신이란 말은 때로는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발목을 붙잡는 올가미가 될 때가 더 많다. 과거 중세에서는 계급제에 따라 현재와 미래가 정해졌다. 종은 종이었고 주인은 주인이었다. 변하는 것이라고는 얼굴의 주름살 뿐이었다. 근대에서는 자유와 민주를 주장하며 그러한 ‘올가미’를 제거하고자 했다. 하지만 과거를 도려내고 완벽하게 새로운 미래란 가능할까? 어떻게 본다면 요즘에는 ‘-출신’을 더 따지고 있지 않은가? 에밀리는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검은 집’ 같은 존재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마을 사람들에게 묶여 꼼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남부의 ‘미이라’가 될 운명이다. 그녀에게는 선택권이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에밀리는 모든 남자가 한번쯤은 구애했던 것 같은 ‘귀족 아가씨’였고 한번쯤 그 무심한 눈길로 모두를 지나쳤을 법한 ‘옛날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동정한다. 남부란 뿌리를 도려내고 북부의 멋진 잎사귀로 장식한 채. 에밀리는 그 곳에서 나오는 게 허락되지도 않지만, 그녀 스스로도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그녀가 단순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빼앗긴 것’이 많기 때문에 그 빼앗긴 것을 찾으려고 애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도 센이 자신의 이름을 빼앗겼을 때 ‘도망치지’ 않고, 유바바의 이상한 세상에서 일을 하며 빼앗긴 것을 찾으려고 하듯이.
파블로프는 개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이름이다
포크너는 인간이란 고난과 시련을 받으면서도 극복하기 위해 견디고, 그 끝에서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무엇인가? 짐승들 또한 어떤 훈련을 통해 시련을 견디고, 보상을 위해 극복하려 하지 않는가? 에밀리는 마치 철회색의 깃털로 단단하게 감싸인 부엉이 같다. 밤에도 나뭇가지를 굳게 움켜쥔 채 굳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그 커다란 눈으로 모두가 잠든 창문을 또렷하게 응시하고 있는. 그러나 에밀리는 그녀의 본능이나 훈련된 감각으로 인해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유롭게 집과 마을을 드나든다. 그녀의 ‘의지’로.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집에서 나오는 ‘악취’를 통해 그녀를 ‘일반인’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애하고, 그녀를 고정된 이미지로 만들고자 한다. 어떻게 본다면 그 ‘악취’는, 에밀리의 후각이 퇴화되거나 익숙해진 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을 향한 경고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개처럼 정해진 행동을 하고 감탄사와 경애를 받고자 하지 않는다고. 마을 사람들은 그녀에게 항의를 직접 하거나 대낮에 들어와 난폭하게 구는 대신, 마치 도둑처럼-뭐가 영 찜찜한 사람처럼 ‘몰래’ 밤에 와서 소독약을 뿌리고 냄새 제거를 한다. 에밀리는 그들에게 굽히지 않는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을 ‘훈련한다’. 그래서 그들은 에밀 리가 비소를 샀을 때도 ‘어디에 쓸 건지’ 묻다가 대답을 포기했고, 그녀가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에도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저 에밀리를 바라볼 뿐이다.
인형의 집
에밀리의 ‘메마르고 차가운 목소리’는 펠리시테의 목소리와 닮았다. 단순히 이를 묘사하는 형용사가 비슷하다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입을 꾹 다문 도자기 인형과 같다. 인형은 말하지 않는다. 복화술로 다른 사람이 ‘대신’ 말할 뿐이다. 우리가 예상하는 인형의 목소리로. 하지만 에밀리와 펠리시테의 목소리는 다르다. 그들의 목소리는 마치 단단해 보이는 도자기를 깨뜨리는 듯한 목소리다. ‘인형의 집’의 노라는 남편이 원하는 귀엽고 다정다감한 주부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역을 ‘연기’하면서 점점 자신의 내면과는 거리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녀가 진정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순간, 남편은 당황한다.
에밀리의 목소리에는 ‘한’이 있고, 이를 아낌없이 표현한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부러 퉁명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게 바로 그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호건을 사랑했고, 그가 늙어서 죽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최대한으로 표현하려고 애썼다. 호건이 그녀를 향해 포옹하려는 듯 팔을 벌린 건, 그녀의 사랑을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였던 결과였다. 그 사랑은 호건이 받아내기에는 너무 컸고, 온 몸을 먼지로 녹아내리게 만들 정도로 강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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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소설들 혹은 봉인된 혀들 Ⅲ 리뷰 에세이 |
오**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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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전복적 힘
-카프카적 존재들에 대하여
어느 누가 실패를 피하고 싶지 않을까. 단순한 일상에서 실패, 그리고 거듭된 실패로 이룬 몰락은, ‘제발 나에겐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종류의 것이다. 약간의 실패로도 ‘힐링’을 들이미는 우리 세대에게 몰락은 너무나 가혹하고 견디기 힘들다. 하지만 그것뿐인가? 문학이나 예술에선 갈 데 까지 가보는 몰락이란 것이 오히려 빛이 나는 순간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약자를 압박하던 권력을 전복시켜 몰락하면서 무언가를 이뤄내는 카프카적 전략은 독보적이다.
벼랑 끝으로 달려간 두 여인
진정한 자유를 찾으려 했던 두 여인을 그린 로드무비 <델마와 루이스(Thelma&Louise)> (1991)를 통해서도 이러한 전략의 밑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호통만 치는 남편 때문에 삶이 답답한 가정주부 델마와 웨이트레스의 지루한 일상에 지친 루이스는 잠시의 자유를 느끼기 위한 주말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유쾌하게 시작되었던 여행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여정이 되어간다. 델마는 오랜만에 찾아온 해방감에 들떠 휴게소 주점에서 처음 본 남자와 춤을 추지만, 친절하던 남자는 돌변하여 주차장에서 그녀를 강간하려 한다. 비상용 권총을 가진 루이스가 나타나 그를 제압하는데 그는 끝끝내 그녀들에게 모욕적인 말을 내뱉고, 루이스는 홧김에 그를 쏴버린다. 이제 경찰을 피해 도주하는 신세가 된 델마와 루이스. 멕시코로 가서 새 삶을 살겠다는 꿈도 꾸어보지만 중간에 만난 매력적인 건달 J.D.는 돈을 훔쳐서 달아나버리고, 이 때문에 델마는 강도질을 하게 된다. 이 일로 강력범으로 수배된 그녀들은 이제 물러날 곳이 없다. 도로에서 자꾸만 추근대는 유조차 트레일러의 운전수 눈앞에서 차를 쏴 폭발시켜버리는 장면에서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을 알면서도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에 통쾌함과 비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경찰들의 추격을 피하려 질주하지만 결국 그랜드 캐년의 절벽에 다다른 델마와 루이스는, 그녀들을 도와주겠다는 형사의 손길을 뒤로한 채 그대로 질주하여 절경 속으로 떨어진다.
이 마지막 장면은 가히 압도적인데, 그것은 단순히 그들의 파국이 슬퍼서도, 그랜드 캐년의 장엄함 때문만도 아니다. 추락하는 델마와 루이스, 이 장면이 그토록 마음을 흔드는 것은 왜일까? 그녀들은 단순히 추락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벗어날 수 없어보이던 현실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이루었다ㅡ꽉 막힌 남편, 지겨운 식당일, 도무지 도움이라곤 주지 않고 위협하는 남자들, 이러한 현실은 형사 하나가 그들을 이해한다 해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 마지막 장면은 카프카의 짧은 단편 『선고(Das Urteil)』에서 두드러지는 카프카 특유의 실패 전략과 직접적으로 맞닿는 부분이다.
“내가 너를 지금 익사형에 처하노라!”
『선고』의 내용은 간단하다. 상인 게오르그는 일요일 오전에 러시아에 간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그 친구는 게오르그에게 러시아로 오도록 권유하고 있지만 사실 게오르그는 프리다라는 여인과 약혼을 한 상태이다. 게오르그는 아주 조심스레 자신의 약혼사실을 밝히는, 그러나 오지 말라는 뉘앙스의 편지를 쓴다. 이 편지를 들고 그는 아버지 방으로 건너간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기력이 약해지셨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그럼에도 정정하다. 아버지는 게오르그에게 페테르부르크에 정말 그런 친구가 있는지, 아버지 자신은 사실 있는 것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정말 잘 알고 있는 그 친구를 게오르그는 지금 애욕 때문에 배반하려는 건 아닌지 문책한다. ‘너를 낳은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느냐’라고 외치던 아버지는 게오르그에게 익사형을 내리고, 게오르그는 밖으로 뛰쳐나가 강 건너편을 바라보며 난간을 넘어 몸을 던진다.
이 작품은 카프카가 자기 문학의 영토를 확인하게 된 작품이다. 작품을 쓴 그 자신도 ‘마치 사정하는 듯한’ 희열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이 후 그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대립관계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이 작품은, 약혼으로 안정적 지위를 얻은 것처럼 보이는 게오르그가 자신만만하게 아버지와 대결하려 방에 들어가지만, 사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로 인해 약점을 들키게 되고 아버지의 익사형을 받아들이게 되어 몰락을 하게 되는 단순한 이야기 같다. 하지만 카프카가 친구에게 썼던 편지에 ‘갑충 하나가 뒤집어져 옴짝달짝 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도마뱀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한 것을 보았는데, 갑충이 가만히 있으니 도마뱀이 보지 못하고 지나가며 오히려 갑충을 건드려 뒤집어져 있던 그것이 살아날 수 있었다’는 일화를 참고한다면, 『선고』에 얼마나 교묘한 전략이 숨어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게오르그는 아버지와의 대결을 통해, 약혼과 이곳에서의 생활로 잊고 살았던 러시아 친구를 다시 상기한다. 그는 아버지의 권력이 강해질 대로 강해져 마침내 자신에게 선고를 내릴 때 까지 기다린다ㅡ아니, 오히려 그는 그것을 의도한 것만 같다.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아버지의 권력은, 게오르그가 형을 받아들이자 이제 그 힘을 미칠 수 있는 대상이 사라져버려 오히려 무력화되고, 게오르그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된다. 그렇기에 죽지 않으면 어찌 다시 태어나겠냐는 물음의 시처럼 익사형 집행으로 끝나는 『선고』의 변증법적인 몰락은 오히려 희망적이고 삶에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
지금부터입니다. 지금 죽지 않고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지금부터라도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 어떻게 새로울 수 있습니까. 마늘 순이 쑥쑥 솟는 햇빛 좋은 밭가에서 부활절을 기다리는 일요일 아침.
-도종환, 「일요일 아침」 전문
델마와 루이스 또한 세상과 현실이라는 거대한 ‘아버지’와 대립한다. 멕시코에서의 새로운 삶의 꿈을 꾸는 것도 잠시, 돈을 도둑맞고 벌인 강도질은 경찰이 그녀들을 궁지로 몰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아버지가 게오르그를 몰아가듯, 경찰은 점점 더 사고를 치는 그녀들을 절벽으로 몰아간다. 그녀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형사 또한, ‘그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루이스의 과거 강간 기억까지 떠올리게 만들어 상처 받은 현실에 다시 종속시키려는, 아버지의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줄 아느냐!’와 같은 존재이다. 현실이라는 거대한 권력과 맞서 싸울 때,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갑충처럼 한없이 작아지는 것이다. 저항하길 멈추도록 몰아세우는 권력이 한없이 커졌을 때, 그녀들은 절벽으로 질주하여 그 권력에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들의 추락은 몰락인 듯 했으나 오히려 그들이 찾으려 했던 자유를 얻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숭고했다.
카프카적 존재들
이제 이 구도들을 약간 다른 곳에서 볼 수도 있겠다. 조르조 아감벤이 주권 권력의 패러다임으로 제시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는 이러한 카프카적 존재들이다. ‘신성하고 저주받은’이라는 뜻이 있는 라틴어 용어 ‘Sacer’가 붙은 호모 사케르는, 고대 로마법에서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 인간’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러한 존재들은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제외된 존재인 불가촉 천민(不可觸賤民; untouchable)처럼 체계 자체가 세워진 구조를 까발린다. 호모 사케르는 인류 정치사회의 역사 속에서 계보학적으로 이어지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나치의 홀로코스트 속에서 희생된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이다. 이들은 모든 인권을 박탈당함으로서 그것을 박탈한 권력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한다. 어디 그뿐인가? 아우슈비츠 속에는 또한, 무슬림이라는 영도(零度; zero point)의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은 ‘시체같은 자들’, ‘자신의 운명에 완전히 체념한 채 모든 참화들을 신의 뜻에 기반한 것인 양 수동적으로 참아내는 자들’이라 표현된다. 무슬림은 ‘인간성’이라 불리는 것들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인간성이란 것의 경계선을 지나는 영도였다.
모든 것을 박탈당하지만 오히려 권력의 구조를 들추고 나아가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존재들, 카프카적 존재들은 인류 역사를 통해 존재해왔다. 우리와 너무 멀리 떨어진 이야기고 너무 극단적인 ‘전략’인가? 하지만 우리 모두는 주권 권력 앞에서 이러한 카프카적 존재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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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소설들 봉인된 혀들' 3-4강 리뷰: 해가 뜨는 폐허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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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 '소설들 봉인된 혀들3-4강'- 플로베르 '순박한 마음']
해가 뜨는 폐허
찾을 수 있을까, 듀오
오벵과 펠리시테의 공통점은 둘 다 한 남자를 사랑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오벵의 사랑은 우아하기 그지없다. 남자는 돈 까미노였고 여자는 도나 까미나였다. 둘은 부르주아들의 로맨틱한 동화 속에서 정해진 사랑을 했다. 그 사랑은 꽃처럼 풍성하게 피었다가 질 때는 초라하게 썩어버렸다. 겨울이 오게 되면 부르주아는 정원에서 그 꽃을 잘라버린다. 풍성하지 않은 꽃은 꽃이 아니기 때문이다. 펠리시테의 사랑은 통속적이고 빤한 이야기였을지는 모르나 흔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 흔한 새드엔딩, 부르주아가 사랑에 기대하는 결말은 아니었다. 애당초 펠리시테는 사랑의 배반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벵에게 사랑은 그녀가 상대방에게 일정량의 댓가를 지불하고서 받는 ‘환상’이었다면, 펠리시테에게 사랑은 댓가를 치루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그의 약한 모습을 봐 버렸다. 첫 데이트에서 남자가 내야 한다던지 받아 먹기만 하는 여자들이 된장녀라느니, 더치페이의 문화가 공공연히 퍼져야 한다는 공식만큼 사랑의 열을 식히기 좋은 게 없다. 결국 우리는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볼 시간에 각자의 지갑을 꺼낼 타이밍만을 고심하며 기다리기 때문이다. 만약 상대방이 그 공식을 지키지 않는다면, ‘매너’가 좋지 않다면 우리는 쉽게 실망하며 그 사람을 잘못 봤다고 노발대발한다. 허나 펠리시테에게는 그런 공식이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그가 가장 약한 모습을 보였을 때,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
유명한 결혼 정보 업체에서는 개인 정보 뿐만 아니라 이상형을 꼭 적어내라고 요구한다. 예전에는 이상형이 막연했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수치로 연봉과 학력, 집안 사정이 또렷한 이상형들이 ‘모범적 예시’가 된다. 오벵의 사랑에서는 이러한 ‘모범적 예시’에 해당하는 이상형들만이 바람직한 이상형이다. 하나의 연극 무대에 남자 주인공을 캐스팅하는 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은 언젠가 끝나고 그들이 약속하는 영원한 사랑은 한순간 지나가버리는 짧은 대사에 불과하다.
폐허에 다다라
그렇다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연극 무대처럼 몇 시간만 지나면 이전과 별다를 것 없이, 혹은 뭔가 봤다는 ‘성취감’만을 안겨주는 것에 불과할까? 오벵은 딸 빌지니를 사랑하지만, 죽은 빌지니는 사랑하지 않았다. 이미 빌지니의 극은 끝났고 인형은 다 정리되어 관에 담겼다. 오벵은 상실감을 느끼려 할 때마다 재빨리 ‘산책’과 ‘독서’, ‘명상’으로 갈라진 틈을 틀어막는다. 그러나 펠리시테는 다르다. 그녀는 자신의 상실감과 그리움을 속이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온 몸으로 그 감정들을 받아들인다.
무대의 불이 꺼지고 장막이 내려가면, 오벵의 연극 또한 끝이 난다. 오벵은 그동안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한다는 것은 이별과 상실을 동반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부르주아의 사회에서는 쓸모없고 한시적인 것은 옛것으로 치부되어 가차없이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오벵 또한 옛것이 되어 쓰레기통에 처박힐 운명이다. 하지만 그 옛것들을 주워 다락방에 쌓아두는 건 펠리시테다. 하지만 다락방은 다락방이 아니다. 하나의 박물관이다. 그녀는 모든 것에 조그마한 설명들을 달아놓고 ‘기념비’로 만든다.
하지만 이처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상실을 받아들이면서 그 자신의 몰락도 초래하는 것이다. 위험하다. 허나 ‘누군가’가 누구인가. 오벵은 몰락한다. 부르주아의 공식대로. 허나 오벵은 오로지 오벵 혼자서 몰락한다. 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다. 오벵은 부르주아로서의 자신을 사랑했고 그렇기 때문에 부르주아답게 홀로 몰락한다. 수없이 많은 빌딩들 속에서 아무런 소리도 없이 빌딩 하나가 무너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결국 도시 밖에서 보면 다른 빌딩들에 가려 사라진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펠리시테는 끊임없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 자신을 내던질 정도로, 그녀는 빌지니와 앵무새만을 사랑한 게 아니었다. 펠리시테는 오벵과 그 집을 사랑했고 죽음마저도 사랑했다. 그녀는 빌지니의 병을 탓하지 않았고 앵무새의 목숨을 앗아간 죽음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다른 것들의 몰락을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 ‘천천히’ 몰락하고, 덕분에 그 곳은 ‘폐허’가 된다. 뜨거운 고요의 폐허.
레이스 짜기
누군가의 일대기를 소설로 쓴다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장편 소설이 아니라 단편 소설일 경우 더더욱 그렇다. 한 사건을 집어내어 부각시키고 평생에 다시 오지 않을 사건인 것처럼 공공연하게 홍보하는 건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설공주’나 ‘신데렐라’가 끝난 뒤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독자들 앞에서 원작자들은 입을 다문다. 그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다. 독자들의 심술궂은 호기심은 그들이 독이 든 사과를 먹고 계모에게 시달림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는 생의 고난이 다 끝났다고 볼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그렇기에 일대기는 위인전이 되기 쉽고, 혹은 고난들의 나열로 인해 흔하고 자극적인 이야기가 되기에 쉽다. 어차피 일대기를 쓴다는 건 시간을 쓴다는 것이고, 시간은 강처럼 우리가 붙잡을 새도 없이 흘러가버리기에.
이를 거역하고 끊임없이 노를 강물에 두드린다면 어떨까. 언젠가는 붙잡을 수 있을까? 이 모든 일생을 풀어낼 하나의 열쇠를? 하지만 그럴수록 물은 더 흐려지고 우리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내려간다. 노질은 신중해야 한다. 플로베르의 문장은 쏟아내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의 무늬를 짜내는 섬세한 코바늘과도 같았다. 초라한 실뭉치가 더없이 섬세하고 화려한 레이스로 변한다. 문장 하나하나는 일생이 된다. 덕분에 글을 쓸 때 더 무게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강물 바닥에 가라앉은 열쇠를 찾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물의 흐름 속에서 바닥을 들여다 본다. 물은 우리를 어디론가로 데리고 간다. 그게 앞인지 뒤인지조차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그것만을 확인할 뿐이다. 여기에는 없고 언젠가는 찾으리라는 것을. 펠리시테의 사랑은 흙먼지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녀는 끊임없이 찾고, 또 찾는다. 그리고 찾는다. 펠리시테의 일대기를 펠리시테 전傳 대신 ‘순박한 마음’을 플로베르가 제목으로 정한 건, 그 증거다.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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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소설들 봉인된 혀들' 3-3강 리뷰: 새는 날개를 안다 |
오*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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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 '소설들 봉인된 혀들 3-3강 리뷰]
새는 날개를 안다
거울 없는 나르키소스
‘카르멘’에서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카르멘은 호세의 칼 앞에서도 끝끝내 ‘칼 뺏기’를 거부한다. 만약 카르멘의 호세의 칼을 뺏는다면, 그건 호세에게는 ‘사랑의 징표’나 삶에 대한 본능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카르멘에게는 그저 굴복, 포기일 뿐이다. 애당초 호세가 사랑한 카르멘은 그의 발 앞에서 굴복해 납작하게 엎드린 개가 아니라 카르멘이라는 한 여자였다. 만일 호세가 정말 카르멘을 사랑했더라면, 그는 그 강요를 후에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아메리카로 건너가 아이를 안고 더 이상 노래하지 않고 춤추지 않는 카르멘이라니, ‘늙으면 다 그래’라고 으쓱한다면 그 사랑 또한 같이 늙어버리는 것일까. 카르멘은 호세를 사랑했다. 호세를 비웃었지만 호세에게 칼을 내려놓으라고 하지는 않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카르멘은 ‘종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호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세는 카르멘을 죽인 뒤 무언가에 ‘질린 듯이’ 그녀를 숨기고 자수한다. 우리는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진실되게’ 향한 무언가가 선로에서 탈선할 때, 앞에서 절규한다. 하지만 호세는 다르다. 그는 마치 그동안 투명한 막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것을 ‘발견’한 듯이,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스스로 죽지 못하고 자신의 눈을 찌를 뿐이다. 호세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건 카르멘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의 이데올로기였다는 것을. 그의 이데올로기는 새그물이었고 카르멘이라는 새를 잡으려는 그의 노력들은 모두 그 자신의 새그물이 얼마나 완벽한지에 대한 찬양과 구애였다. 허나 카르멘은 그의 새그물을 망가뜨렸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냥에 성공했지만 그 사냥감을 차마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없었다.
오늘의 명작 연극
하지만 카르멘은 그 모든 걸 책임진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새와 같은 자유를 누린다. 새는 무책임하지 않다. 새는 날아오르려 한다. 그건 자신의 날개에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웃고 노래하며 춤추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잘 봐주기를 원한다던가 새삼스레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런 카르멘을 보며 ‘무책임’하게 남자를 꼬여 파멸에 이르게 하는 팜므파탈이라고 비난하지만, 사실 카르멘의 자유가 지는 책임이야말로 진정한 책임일 수 있다. 자유는 족쇄나 수갑이 아니다. 돈이 많을수록, 뭔가 쥐고 있는 게 많을수록 자유롭다고 쉽게 착각하게 된다. 허나 자유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고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바로 모든 걸 안다고 선선이 인정하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몰랐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모른다’는 모든 멋진 인용구와 관청용어로 꾸며진 ‘모른 척 하기’에 불과하다. 그의 재판은 하나의 거대한 연극이었고 배심원들은 관객에 불과했다. 모든 극의 아이러니는 주인공이 ‘모르는’ 데에서 온다. 하지만 카르멘은 분명히 자신이 사랑하는 호세가 ‘새그물’의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고, 그걸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호세였기 때문에 사랑했던 것이다. 카르멘은 호세에게 ‘당신이 언젠가는 나를 찌를 것임을 안다’고 말한다. 호세는 부정한다. 그는 끝끝내 카르멘에게 ‘배신’당하는 주인공으로 남고 싶어한다.
호세가 카르멘의 전 남편이라고 주장하는 동료 도둑을 죽였을 때, 방관하고 있었던 다른 동료가 한 말은 장관이었다. 호세의 관념적 시선에서는 그는 ‘소유주’를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도둑으로써 카르멘을 탈취하고자 한다. 하지만 사실 그 ‘소유주’라고 생각한 이도 사실 카르멘을 소유하지 않고 있고, 만약 호세가 넘겨달라고 한다면 은전 한 닢에라도 선선이 넘겨줄 정도로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카르멘은 그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았다. 호세가 손에 피를 묻히면서 산 ‘카르멘’은, 새의 그림자처럼 시간이 가고 해가 지면 주변으로 녹아 사라질 만큼 허무한 것이었다.
동백꽃
시간의 가치를 안다는 것, 사람들은 모든 것을 적립한다. 빵집에서도, 비행기에서도, 은행에서도. 모든 마일리지를 적립해 더 좋은 것을 더 쉽게 얻길 바란다. 하지만 막상 마일리지를 모으다 보면 계속 그 위의 것을 원하게 되면서 ‘쓰지 않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고를 당하게 된다면, 혹은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다면? 덕분에 마일리지는 ‘쓰이지 않는다’.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하루는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너무 쉽게 혹은 너무 어렵게 간다. 현대인의 고질병인 불면증은 낮 동안에 자신이 겪은 일들의 ‘플래시백’을 겪게 되면서 생긴다. 사실 사람이 죽기 전에 본다는 주마등과 비슷하다. 어쩌면 날마다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하나하나 지워나가면서. 웰스의 투명인간이 되어 모든 걸 다 손에 쥘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게 착각일 뿐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는 춤추고 웃고 노래한다. 그녀는 물 대신 샴페인을 마시며 바느질을 하는 대신 부채를 집는다. 그녀는 카르멘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사실 자유란 없다. 사람들은 그녀를 웃고 춤추게 해주는 대신 그들의 ‘자동인형’으로 만든다. 마치 태엽을 감으면 튀어나와 춤추는 인형처럼. 만일 스프링이 다 늘어지게 된다면, 그 인형은 버려질 것이다. 비올레타의 드레스는 또다른 비올레타를 찾아가고, 그 전의 비올레타는 버려질 것이다. 결국 현대의 ‘카르멘’은 부르주아들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자신들이 ‘관대하게’ 보존하고 있는 ‘미’. 비올레타의 동백꽃은 ‘라 트라비아타’의 무도회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자연물’이다. 비올레타는 동백꽃잎처럼 ‘떨어진다’. 비올레타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지만 그 책임은 또다시 부르주아의 시나리오에 휘말려 ‘로맨틱’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비올레타는 비올레타로서 죽지 못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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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소설들 봉인된 혀들' 3-2강 리뷰 : 뫼비우스의 고리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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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의 고리
부자 아빠 가난한 자식
선고를 내리는 아버지에게는 수많은 무기가 있다. 게오르크를 키워온 건 아버지의 ‘자본’, 권력 아래의 그늘이었다. 현대 가족 관계는 철저하게 자본을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아버지가 내게 해준 게 뭔데’라고 외치는 자식에게 ‘해준 것’이란 이제 아버지의 사랑이나 관심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본력으로 자식에게 준 무언가다. 게오르크가 마지막으로 외친 ‘부모님을 사랑한다’라는 말은 아버지 자신이 휘두른 펀치에 스스로 맞아 K.O 당한 데에 대한 조롱일수도 있으나 어떻게 본다면 안타까움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자본주의에 침식당한 가족 관계에 해결 방법이란 없다. 자본과 물질의 권력은 끝을 모른다. 아무리 늙어도 이제는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 드라마 ‘욕망의 불꽃’에서 나온 것처럼 스위스로 날아가서 몇 년 간 생명연장을 해주는 치료를 받고 자신의 제국을 계속 유지해 나가고자 한다. 게오르크가 문학적 자아로 살아남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전략을 짜야 했다. 전략이란 사실 그대로 말하자면 ‘속임수’고, 거기에는 양심의 가책이 뒤따른다. 리진의 소설 ‘십자 포화 속에서’에서 미국에 이민을 온 중국인 부부가 시어머니를 몰아내기 위해 작전을 짜고 입을 맞춘다. 결국 시어머니가 돌아가겠다고 선언하지만, 아들은 어머니가 그가 어렸을 적에 시험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교문 앞에서 주먹밥과 신을 들고 기다렸던 걸 회상한다. 게오르크가 ‘아버지’를 공격한 순간, 그 또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자본주의가 낳은 비극의 결말에서 ‘살아남는’ 주인공. 아버지가 체조를 잘 하던 그를 ‘자랑스러워했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아버지의 권력-자본 하에서 벗어난 순간에서야 진정으로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고백은 이미 무효하다.
진화하는 적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내가 아니라 적을 먼저 알아야 한다. 게오르크는 아버지를 이기기 위해 아버지의 전략을 이용한다. 이를 위해서는 아버지의 전략을 속속들이 ‘연구’해야 한다.정치권에 들어간 학자들은 ‘새로운 정치’를 외치며 들어가지만 막상 몇 년이 지나고 나면 그 정치의 색에 물들어 버린다. 그들을 쉽게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도 꿈이 있었고 그 꿈은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허나 그들이 생각하는 ‘적’은, 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탈출구를 내는 즉시 틀어막는다. ‘적’은 나날이 진화한다. 예전에는 ‘졸부’라고 운운하며 천박하다고 말했지만 이제 부르주아들은 ‘졸부’가 아니라 고단수의 ‘교양화된 적’, 진화한 적이다. 실제로 에코니 재생이니 하면서 ‘녹색’을 표방한 환경단체들의 운동을 마케팅으로 활용한 예도 있지 않은가.
독서 또한 마찬가지다. 최근 어떤 미성년자의 여중생 살인에 대해 영화 ‘호스텔’을 즐겨봤다는 걸 그 원인으로 들고 있다. 허나 영화에 유죄를 내리는 건 사실 억지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해서 ‘호스텔’이 그 원인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사실 그 매체를 받아들인 미성년자의 ‘감상 방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의 감상력은 너무나도 미약했고 영화 매체가 내보이는 자아는 너무나도 강력했다. 독서는 하나의 싸움이다. 텍스트에게 방심하는 순간, 우리는 텍스트에게 먹혀 버린다. 허나 텍스트가 원하는 건 우리를 ‘해치우는’ 게 아니라, 팽팽히 맞서 싸우는 것이다. 텍스트는 단순히 표면으로만 읽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텍스트에게 패하는 순간, 획득할 수 있는 건 그 표면의 것 뿐이다. 허나 싸우면서 텍스트에게 ‘상처’를 내고 그 상처의 속을 들여다 보는 순간, 우리는 텍스트를 진정으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적 또한 하나의 텍스트다. 아버지를 이기기 위해 게오르크는 아버지의 수를 읽어냈다. 그가 무작정 문학적 자아만을 주장한 게 아니라, 아버지가 발휘했던 무기들-자본과 여자-을 획득했고, 아버지가 자신의 무기와 그에게 휘둘렸던 폭력을 ‘인정’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비늘을 거슬러 읽기, 역린의 전략인 셈이다.
수치없는 맨낯
아버지의 잠옷 너머로 보이는 거인처럼 커다란 몸, 그 앞에서 게오르크는 묘하게 ‘경탄’한다. 아버지의 영생의 권력에 대한 욕망도 욕망이지만 현실에서는 그 욕망이 공공연하게 인정받는다. 채워지지 않을 것임을, 지옥의 불처럼 꺼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성장적’이고 ‘고무적’이라고 추앙받는 욕망. 하지만 그런 욕망과 흔히 변태 성욕이라고 하는 욕망은 별반 다를 게 없다. 게오르크의 문학적 자아에 대한 욕망 또한 마찬가지다. 게오르크는 이기적이다. 그는 문학적 자아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 프리다를 사용했고 그의 문학적 자아를 폐허 속에 방치해 두었다. 그리고서 아버지를 이기고 나자 이제 서슴없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아버지의 ‘선고’대로, 자신의 욕망에 취해 달려가는 것이다.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 날것, 맨낯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문학적 자아에 대한 욕망은 사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유치하고’ 혹은 이전에는 공인되지 않았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띠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녀가 비명을 지른 것은 흔히 아담이라고 부르는 바바리맨이 자신의 알몸을 드러내 보이듯 게오르크의 문학적 자아도 다른 ‘고무적인’ 욕망으로 위장하기를 그친 채 그 욕망 자체로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래서 ‘망측스럽다’라고 생각해서 놀란 게 아니었을까. 온전히 이기적인 욕망, 두꺼운 화장 때문에 잊어버린 그 맨낯을 거울에서 목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건 하녀의 두건 아래 감춰진 욕망의 맨낯-자신의 욕망이 있다는 걸 갑작스럽게 ‘번개처럼’ 깨닫기도 했기 때문에. 게오르크와 자신 때문에 ‘비명’을 지른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을 발견했을 때 돈 지오반니처럼 멋진 아리아를 부르는 게 아니라 초라한 비명을 지르면서 주저앉는 것처럼, 얼굴이 빨개지는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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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소설들 봉인된 혀들' 3-1 리뷰: 전복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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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
사랑하는 부모님
카프카는 욕심이 많았다. 절약과 소비, 유용한 수단을 획득해 ‘견고한 삶’을 구축해 나가려고 했던 유대인 부모들과 달리 그는 모든 걸 가지려 했다. 설령 그게 유용한 게 아니라고 할지라도. 글의 길이가 욕망의 수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카프카는 단문을 썼고 사람들은 카프카에게 마치 고독한 수도승 같은 이미지를 부여하지만, 단문을 쓴다는 건 그 자신의 욕망이 끓어오르는 순간마다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프카는 고독해지길 원했지만 동시에 고독해지지 않길 원했다. 그렇기에 그는 단문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완벽한 문학이란 없었다. 소년 야누흐가 그에게 ‘어떻게 그렇게 놀라운 글을 쓸 수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카프카는 어떤 정확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펠리체 바우어와 끝내 결혼하지 않았지만 거듭 약혼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선고’는 그가 노력한 그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기려고만 했던가? 유대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독일어 교육’을 시킨다. 당시 체코에서 독일어는 교육받은 특권층을 위한 언어였다. 사람들은 독일어로 글을 쓰는 카프카에게 질타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는 아버지가 원한 언어로 글을 썼으나 동시에 아버지의 전략을 폭로한다. 아버지가 썼던 무기를 자신도 쓰려고 했고 아버지의 전략으로 아버지를 이기려고 했다는 사실을.
모든 무기가 적발된 후 아버지는 ‘침대로 쓰러진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처형을 집행한다. 그 순간 외치는 건 어떠한 절망이나 승리의 표현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끊임없이 그들을 사랑했기에, 그 말을 어떠한 거짓도 없이 하는 순간을 기다려 온 것이다. 패배 앞에서 간곡한 구걸이나 승리자의 연민이 아닌, 그 깨끗한 순간 그대로.
태풍의 눈
무당벌레가 도마뱀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동시에 무당벌레는 도마뱀에게 발견되지 않기 위해서 ‘가만히’ 쥐죽은 듯이 멈춰야 했다. 자신의 처형을 기다리는 게 아니다. 게오르크는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권력을 ‘역’으로 읽어낸다. 권력은 그를 읽어내고 그에게 선고를 내리며 그를 지배한다. 힘의 차이에서는 이길 수 없다.
태풍 속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형제가 있었다. 둘은 들판을 나란히 걸어가던 중 회오리바람이 다가오는 것을 목격한다. 아우는 그 회오리 바람을 뚫고 무작정 나가려다가 휩쓸린다. 그렇다면 형은 어떻게 했을까. 형은 무사히 나갈 수 있었다.
형이 좀 더 무게가 나가거나 힘이 세서가 아니다. 어떤 도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모든 걸 파괴하고 뒤집어 놓는 태풍에도 어떤 ‘공허’가 있다. 마치 군신으로 불리었던 아킬레스에게 발 뒤꿈치, ‘아킬레스 건’이 있었듯이.
카프카는 ‘우연’을 ‘우연’하게 맞기 위해서 전략을 짠다. 전략은 모든 걸 꼼꼼히 메우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게 아니다. 전략은 ‘기다리는 것’이다. 게오르크는 끊임없이 ‘준비하면서’, ‘기다린다’. 들판에서 만난 회오리 태풍에서 형이 살아남았던 건 그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 파고들어 기다렸기 때문이다. 게오르크는 ‘읽어냈고’.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하는 순간까지를 ‘기다렸다.’ 단순히 현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만 기다리는 건 승산이 없다. 그는 끊임없이 긴장하면서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경계 한 가운데서 그 힘이 전복되는 순간을 기다린 것이다.
고독한 법정
그 법정의 고발자는 형상이 없다. 피고석에는 피고만이 서 있다. 카프카의 소설 속에서 나오는 법정은 ‘판결자가 너무 많다’. 그를 옹호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변호사도 심지어 그를 변호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불리하게 만들 뿐이다. 결국 그는 스스로를 변호해야 할 입장에 처한다. 카프카는 법정의 판결을 기다리지만 동시에 그 판결을 거부할 순간을 기다린다. '소송‘에서 요제프 K는 ’개같이 죽는다‘. 그건 그 자신이 소송에서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다.
‘성’에서 그는 끊임없이 성에 다가가려고 한다. 하지만 성은 그가 이미 ‘성’에 들어왔다고 말하며 그를 성에서 멀리 떼어놓으려 한다. 성은 다가갈수록 멀어지지만, 그는 계속 성으로 다가간다. 카프카는 끊임없이 법정에서 떠나지 않으려 하는 피고다. 그는 계속 어떠한 판결을 내리는 순간마다 전복시킬 각오를 하고,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전복’시키려고 한다.
요제프 K는 법정의 논리대로라면 그 자신의 판결에 대해 아주 ‘당연하게’ 수긍하고, 수치를 느끼기 보다는 ‘참회’하며 죽어야 한다. 허나 그는 수치를 느끼며 죽었다.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수치를. 왜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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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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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강.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2차 대전 후 독일은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70년대 독일은 이러한 경제적 풍요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상태였다. 하지만 하인리히 뵐은 그러한 70년대 독일 사회의 타락을 문제 삼았다. 그는 이러한 성장의 영광 안에서 희생되는 것들이 있음을 소설로 드러냈다. 어떤 가치였을까? 독일이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일구어낸 부흥에는 국민의 절약 정신 외에 다른 것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파시즘으로부터 물려받은 권위주의적 사회 구조에 대한 암묵적 ‘동의’였다. 독일은 아우슈비츠에 동조한 전범들을 처리하면서, 그에 동조했던 배후 세력들ㅡ그것을 실제 가능하게 했던ㅡ인 교회, 공무원, 학술, 기업가 세력 등은 청산하지 않았다. 이들이 있어야 경제 권력을 보존하고 나아가 부흥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산되지 않은 권위주의, 그로 인해 형성된 ‘순응적 대중.’ 여기에는 탈 권위라든가, 탈 성장과 평등이라든가, 착취 받는 이에 대한 동조라든가, 그런 것들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근대성의 고유 가치들은 내팽겨진 채 오직 자본주의적 가치, ‘헐벗은 정념’만이 남았고, 그런 사회가 만든 문화를 ‘순응적 대중’은 소비하기 바빴다. 이 소설은 그러한 대중이 욕망을 부채질하는 미디어와 손잡고 어떻게 ‘광기의 카니발’ㅡ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인 카니발 속의 또 다른 카니발ㅡ을 벌이는지 보여준다. 70년대 독일을 대표하는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타락해있다. 중산층 계급은 <차이퉁>지와 함께 그녀를 손가락질한다. 카타리나 블룸에게 음탕한 전화를 걸거나, 관음증적 음담이 담긴 편지들을 보내 그녀를 공격한다. 슈트로입레더는 성공했고 인기도 많은, 소위 ‘잘나가는’ 인물이지만, ‘친절’하기만 할 뿐 ‘다정’하지는 않다ㅡ쉽게 말해, ‘껄떡댄다.’ 신부마저도 종교가 반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어떻게 타락한 정념이 되어 희생양을 매도하는 지 보여준다. 그들은 모두 ‘친절’할 뿐 ‘다정’하지 못하고, 헐벗은 정념만이 가득하여 음탕하다. 하지만 카타리나 블룸은 그들과는 동떨어진 세계에 있는 듯하다. 그녀는 전후세대에서 풍요세대로 건너오는 과정에서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주변부’의 여자이다. 절약하고 성실하지만 약간은 ‘경직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는 비오는 날 아무 이유 없이 혼자 드라이브를 다닐 줄 안다. 자본주의적 가치, 그 표면적인 것만을 좇던 광기의 카니발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들이 잃은 내면성, ‘취향’이 있다. 그렇기에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을 슈트로입레더의 구애를, 그가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것이다. 그녀는 다정함을 알고, 그것 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음탕함이 아닌 은밀함을 즐길 줄 안다. 블로르나는 그녀에게 어떤 ‘귀여움’이 있다고 표현한다. 그녀에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심을 느끼게 하는, ‘상처줄 수 없는 순수함’이란 게 있어서 이 때문에 그녀를 한 번 쯤 안아보고 싶게 하지만, 동시에 이 때문에 그럴 수 없게 만든다고 했다. 귀여운 카타리나 블룸, 그녀는 광기의 카니발 복판에서 사랑의 카니발을 벌인다. 그녀는 괴텐에 대한 순수한 정념으로 은밀한 사랑을 꽃 피운다. 광기의 카니발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녀만의 카니발이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해 볼 의문이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차이퉁>과 대중은 카타리나 블룸의 ‘은밀한’ 사랑을 그토록 음탕하게 묘사하여 그녀의 명예를 공격하는가? 단순히 일간지의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떠한 타락한 정념에 휩싸여 말그대로 ‘광기의 카니발’을 벌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광기의 카니발’은 니체가 말한 resentmentㅡ혹은, ‘복수심’ㅡ때문일 것이다. ‘순응적 대중’이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노예도덕’은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해 경멸과 증오를 지니게 되고 모종의 ‘복수심’을 가지게 된다. 그들이 성장을 이룩하면서 스스로 내버린 가치가 있다는 것, 남은 것은 헐벗은 정념뿐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무의식 속에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스스로에게 받은 상처에 대한 복수심, 자기 증오는 다른 희생양에게로 향한다. 순수함과 내면성을 잃지 않은 카타리나, 그녀는 그들이 잃은 것을 아직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치부를 드러낸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병든 집단 무의식은 ‘정의’를 앞세워 그녀의 명예에 폭력을 가한다. 카타리나 블룸은 순수성의 ‘명예로움’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중은 그녀를 놓아둘 수 없었다. 그녀의 명예를 파괴시키려 떠들던 <차이퉁>지에 그녀는 총질을 한다. 그녀에게 “섹스나 한탕 하자”라고 한 기자에게 그녀는 총을 탕탕 쏴버린다. 그리고 그녀가 후회했는가? 그녀는 ‘후회도, 유감도 없었다.’ 그때 울렸을 몇 발의 총성은 병든 집단 무의식에 사로잡힌 대중이 각성하길 바라는 그녀가 낸 마지막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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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강 뒤라스, 『연인(L’amant)』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은 ‘15살 반’의 프랑스 소녀와 30대의 부유한 중국인 남자의 관능적인 사랑을 자전적 어투로 이야기하고 있다. 내면으로의 응시가 두드러지는 이 소설에서, 우리는 ‘글쓰기의 공간(문학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특별하고 어려운 일인지를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개개인으로 파편화되기 때문에 경험의 영역이 전체성을 띠지 않게 되고, 사회 속에 매몰되었기에 사회를 응시할 거리를 갖지 못한다. 결국, 총체성을 지향하며 가장 보편적인 상황을 추구하는 리얼리즘적 재현은 불가능해진다. 이 때, 현대 소설이 이야기를 하게 되는 방식은 자기 내부를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뒤라스 문학의 공간은 어떤 곳이며,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그녀는 어떤 대가를 치렀는가? 글쓰기의 공간은 중국인 남자의 집, 꼴랑의 밀실과 같은 공간이다. 도시 중심부에 있지만 블라인드가 반 쯤 쳐져있는 그곳은, 외부에서는 내부를 알 수 없지만 내부에서는 외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마치 밖에 있는 듯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아주 내밀하면서도 어떠한 공공성을 지니기도 하는 장소인 것이다. 그녀가 내면의 기억들을 진솔하게 털어놓아ㅡ좀 더 자유롭고 진솔하기 위해 취한 형식 또한 특별하다. 시간적 순서에 따라 나열하지 않았고 기억의 빈 곳을 메꾸지도, 겹치는 부분을 정리하지도 않았다. 이야기를 짜낸 것이 아니라 단락이 끝나면 그 기억이 절로 다른 단락을 불러들이도록, 자유연상의 글쓰기를 보였다.ㅡ보여주는 것은 부재하는 것이 오히려 불멸하게 되고, 탕진하였다 생각한 것이 더욱 향기롭게 남는 역설적 논리이다. 메콩 강을 건너던 소녀는 도무지 결합할 수 없는 두 가지를 동시에 발견한다. 그녀는 생에의 충동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관능이란 것의 존재를 어렴풋이 깨닫지만, 그것을 얼마든지 휩쓸어갈 수 있는, 마치 거센 강물과 같은 죽음을 본다. 마치 그녀의 옷차림의 아슬아슬한 모양새처럼ㅡ생사로 만든 원피스, 가죽 벨트로 꽉 졸라 맨 허리, 하이힐과 중절모는 육체성, 관능과 죽음의 경계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ㅡ이제 막 꽃 피려하는 소녀의 관능은 시대적으로나 가족 상황으로나 그를 억누르려는 여러 힘에 의해 쓸려가 버릴 위험에 처해있다. 이제야 그녀는 고백한다. 소녀는 피워보지도 못하고 소멸할지도 모를 관능을 만개시키기 위해서 그것을 모두 탕진하였어야 했다고. 생의 성숙은 하나의 삶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회적 성장과 어우러져 천천히 꽃 피워야 하나의 역사가 되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내 생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꼴랑의 밀실에서 벌인 '실험'으로 다 써버리고서야 비로소 관능은 문학에서 다시 태어나 불멸할 수 있었다. 관능은 무엇인가? 그 자신을 욕망하는 것과 결합하려하는 ‘지성’이다. 소녀는 친구 엘렌 라고넬이 육체는 이미 성숙하였지만 그것을 철저히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본다. 소멸된 관능이 어머니의 생에 우울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도 본다. 사랑이 이루어질 가망은 없지만, ‘부드러운’ 성기를 지닌, 다른 이념이 달라붙을 여지없이 오직 육체, 관능의 관계만을 행할 수 있는 중국인 남자는, 관능을 남김없이 꽃 피우는 데에 꼭 필요한 대상이다. 그들은 관능을 모두 쓰면서 관능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아이로 돌아가고”, ‘말’을 잃는다. 오직 관능만이 있던 자리, 침묵의 공간으로 내려갔던 증거는 음악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등장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소녀는 갑판 위에 울려 퍼지는 쇼팽의 왈츠ㅡ소설에서는 딱히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영화에서는 쇼팽왈츠 10번(B minor Op.69-2)을 쓴다. 슬픔이 배어있는 말투로 조곤조곤 말을 건네는 선율은 소녀의 감정을 끌어올리기에 매우 적합하다는 생각이 드는, 탁월한 선곡이다.ㅡ를 들으며 울음을 터뜨린다. ‘작은 오빠가 죽은 후에야 그의 불멸을 기억해 냈듯이’ 소진된 관능은 오히려 부재하였기에 불멸로 남았다. 소설 첫 부분에서 한 남자는 말한다. “모두들 당신은 젊었을 때가 더 아름다웠다고 하지만, 제 생각에는 지금의 당신 모습이 그때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15살 반 소녀의 관능은 모두 탕진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관능도, 생의 역사도 소진하면서 사랑은 스스로를 꽃 피울 수 있었고, 문학의 영역으로 건너가 불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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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는 남부 명문가의 후손으로 ‘남부성’을 포크너 문학의 본령으로 삼고 있다. 엄청난 토지와 부, 그리고 그에 의한 전통이 있던 남부문화는 남북전쟁으로 북부에 밀려 몰락하는 과정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남부성만이 몰락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북부의 공업과 산업, 물질성 또한 겉으로는 번성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몰락하는 운명을 가진 것이라 보았다. 『에밀리를 위한 장미』에서는 남부와 북부의 시대적인 몰락뿐만이 아니라, 남부성 속에서 한 뼘 더 몰락하는 에밀리의 몰락에 관해 보여주고 있다. 에밀리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나뉘는 남부 문화에서, 지배 계급 내부의 희생자와 같은 인물이다. 몰락해가는 남부 문화의 전통인 아버지는 그녀에게 몰려드는 구혼자들을 내쫓으며 에밀리가 누려야 했던 청춘을 빼앗는다. 아버지가 죽은 후,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아보려 하지만 북부 또한 그녀를 ‘살게’ 하지 않는다. 그녀를 떠난 건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사라진 호머 베론. 남겨진 그녀는 세금을 내는 등의 활동을 하지 않으며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사라지고 있지만 완전히 내버릴 수도 없는 남부성, 그것을 대표하는 에밀리는, 남부성을 위한 희생제의 후에 기념비가 되어버린ㅡ“Poor Emily"ㅡ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에밀리는 몰락의 변증법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 남부의 몰락 속에서 더 몰락하니, 한 송이 장미가 있다. 침실에 부옇게 쌓인 먼지, 힘찬 철회색 머리카락으로 변주되는 이 한 송이 장미는, 살지 못한 삶을 살기위해 끝까지 매달리는 그녀의 노예근성이고 열정이다. 이것은 포크너가 보여주려 했던 가장 ‘인간적인 것’이기도 하다. 세계 대전 후 문명과 근대성에 대한 회의가 커지던 시대 상황에 걸맞게, 포크너는 카뮈의 시지프스와 같은 실존주의적 인생관이 드러나는 수상 연설을 한 바 있다. “나는 인간이 멸망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인간이 단지 견디어 낼(endure) 뿐 아니라, 이겨내리라(prevail) 믿습니다.” 그가 말한 ‘멸망할 수 없는’ 인간은 영웅과 같은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고난을 겪을 수 밖에 없는 그저 피조물이지만, 고난을 견디고 끝까지 가서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가장 인간적인 것은 그 열정ㅡ독일어로 leidenschaft, 영어로 passion, 둘 다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겪는 수난까지 껴안아 ‘열정’이란 뜻을 가지게 된다.ㅡ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에밀리가 그토록 매달리는 열정을 보여준 대상을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녀가 꽃 피우지 못한 청춘, 살지 못한 삶이었다. 그녀는 잃어버린 과거를 포기할 수 없다. 자신의 청춘을 앗아간 아버지의 죽음과 남부의 몰락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을 영영 되찾을 수가 없기에 그녀는 죽은 지 한참 지난 아버지를 살아있다고 한다. 살아있는 아버지, 그토록 독기 어린 수난은 열정이 되어 그녀를 진정으로 살게 한다. 살지 못한 삶들에 매달리는 그녀의 노예근성(열정)은 호머를 독살한다. 단순히 그가 떠나려 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잃어버린 청춘을 성취하기 위해 늙지 않는 상대가 필요했다. 롤랑 바르트가 ‘매혹의 시제’라 부른 반과거ㅡ“그것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움직이지 않는다. 불완전한 현존, 불완전한 죽음, 망각도 부활도 아닌 기억의 기진맥진한 미끼.”ㅡ같이, 그녀는 청춘이 만개한 신혼 방을 정지시킨 채 남겨둔 젊음을 누리며, 진정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남겨진 에밀리의 철회색 머리카락은 우리에게 몰락의 변증법을 말한다. 벤야민이 말한 초기 사진의 시선ㅡ프레임 밖으로 사선의 시선을 보내는 어부의 아내 사진ㅡ으로 그녀는 어떤 것이 진정으로 사는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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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강의노트 |
오**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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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플로베르, 『순박한 마음(Un Coeur simple)』
◆ 작가에 대하여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문학은 차갑고 냉철한 문체로 서술에서는 사실적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뜨겁고 열정적인 낭만에 대해 다루는, ‘낭만적/몽상적 사실주의’의 문학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자연에 도취되어 있던 것이 근본 정서를 만들었고, 외과 의사였던 아버지의 엄격한 통제가 그의 문체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첫 작품 『성 앙뜨완느의 유혹』이 실패한 후 『마담 보바리』, 『감정교육』 등을 집필하였다. 오늘 이야기할 『순박한 마음』은 말년에 쓴 세 개의 이야기 중 하나이다. 플로베르 문학을 이끄는 두 바퀴는 몽상의 기질과, 몽상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부르주아 세계(실리주의)에 대한 환멸이다. 그는 ‘순박함’으로 표현되는 뜨거운 열정과, 부르주아의 욕망, 허영, 그리고 이에서 변주된 권태를 그리면서 기질(temperament)의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였다. 플로베르가 이러한 기질의 세계를 그리는데 사용한 형식은 ‘글쓰기(ecriture)’ 였다. 특히 바자크, 스탕달 등의 사회를 재현하는데 목적이 있고, 형식이 있는 고전주의적 ‘소설’과는 대비되게 그는 ‘글쓰기를 위한 글쓰기’를 추구하였다. 후에 바르트는 「플로베르의 문장」이라는 에세이에서, 플로베르의 글에서 의미나 구성은 중요하지 않고, 욕망 그 자체의 문장만이 있다고 했다. 시니피앙은 단순한 기호로서 시니피에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연쇄적으로 또 다른 시니피앙을 욕망하면서 자꾸만 시니피에에서 미끄러져 나온다. 이러한 시니피앙의 체인이 문장이 되고 ‘글쓰기’가 될 때, 무의미로 엮였지만 오히려 무한한 의미를 생성하는 환유적 글쓰기가 가능하다. 플로베르는 문장의 욕망들의 운동만이 있는, 그러나 육체성이 범람하는 뜨거운 책인 ‘백색의 책(아무 것도 아닌 책)’을 쓰려 했다. 때문에, 범람하는 문장을 잡아내어 쉴 새 없이 쓴 발자크와는 다르게, 플로베르에게 글쓰기는 고된 과정이었다.
◆ 작품에 대하여: 순박함과 몰락
작품에서 오벵 부인은 권태에 찬 부르주아를 대표한다. 실리주의적 이지만 계급의식으로 허영에 찬 오벵 부인은 한 때 허영으로 젊은 남자를 들였으나 그는 죽고 과부가 되어 권태, 히스테리, 멜랑꼴리의 연속인 일생을 보낸다. 그녀는 사랑의 상처와 아픔이라는 순박성을 직접적인 방식이 아닌 교양의 영역에서 해소하는데(딸을 기숙사로 보낸 후 편지를 쓰거나,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는 방식으로 허전함을 달랜다), 그래서 그녀의 순박성은 죽음의 영역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부르주아 특유의 멜랑꼴리는 죽음 너머의 영역을 외면하고, 그녀는 결국 고독한 죽음으로 몰락을 맞는다. 하지만 펠리시테는 다르다. 그녀의 순박성은 부르주아를 지나쳐서 하염없이 멀리 간다. 사랑에 빠졌을 때도 허영이 아니라, 상대방의 어려움을 나누고 자신이 직접 그가 된 것처럼 느끼며 사랑을 한다. 사랑의 상처를 부르주아 식으로 의미화 시켜 해소하려 하지 않고, 흔적이 남은 물건을 간직하는 등의 직접적인 열정을 보여준다. 부르주아가 보기에 어리석다할 만한 매달리기와 열정은 결국 죽음의 경계도 넘어간다. ‘나무인형’ 같지만 ‘목소리가 날카로운’, 바르트 식으로 말하자면 ‘사진같은 여자’인 펠리시테는 사랑에 매달리는 노예근성을 가진 여자이지만, 사실 내면에는 ‘범람하는 성령’처럼 들끓는 열정이 있는 것이다. 끝장을 보는 그녀의 순박성은 오벵 부인보다 더 깊은 몰락, 몰락 속에서 오히려 종교도, 부르주아의 삶도 뛰어넘는 어떤 것이 생성되는 세계까지 도달한다. 부르주아 세계에서는 무시되어 버리는, 심미적 세계, 문학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플로베르의 ‘글쓰기’는 문장안에 있는 ‘순박성’을 연결하는 형식으로, 부르주아는 따라올 수 없는 ‘순박한 마음’을 지닌 펠리시테를 통해 몰락에서 살아나는 세계를 보여준다. 이것은 자연을 넘어서서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고, 예술을 통해서 가능한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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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강의노트 |
오**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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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메리메, 『카르멘(Carmen)』
◆ 컬트의 두 여인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주는 경외감,성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여인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계속 이야기되며 여러 장르로 재생산된다. 『카르멘』에서는 사랑과 자유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볼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두 여인을 생각해볼 수 있다. 비제의 오페라에서는 원작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미카엘라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카톨릭에서 흔희 존중, 관대함, 덕성 등으로 성스럽게 만들어놓은 성모 마리아와 같은 컬트의 여인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은 ‘이타성’이라는 미명하에 순종이라는 덕목을 요구하는, 교환적인 것이다. 이와는 대극적 영역에 있는 카르멘은 이러한 덕성을 위반함으로서, 사랑과 자유의 관계를 미카엘라와는 다른 방식으로 구현하는 컬트의 여인이 된다.
◆ 카르멘에 대하여 - 말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말’을 하는 호세와 달리 카르멘은 말 대신, 욕망의 즉자교환 형식인 웃음과 춤을 사용한다. - 사랑의 영역에서 ‘폭력적’이다: 여기서 ‘폭력’은 큰 힘을 약한 힘에 가하는, 물리적 개념의 폭력과는 다른, 단순히 힘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어떠한 것을 나누어 준다는 의미에서의 폭력을 말한다. 예컨대, 비제의 오페라에서는 가슴에 맞는 것으로 표현되지만, 메리메의 카르멘에서는 카르멘이 던진 아카시아 꽃은 호세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는다. 이는 호세가 추구하던 어떠한 이데올로기(이를테면 미카엘라와 같은 여성성을 향유하는 것)에서의 깨어남, ‘각성’을 의미한다. - ‘낭비’하는 여자이다: 호세는 카톨릭, 부르주아의 규범인 절약을 이야기하지만, 카르멘은 교환가치보다는 사용가치를 추구한다. 그녀의 방식은 시간을 교환가치로 쓰는 자본주의적 삶과는 달리 시간을 사용가치로 쓴다. - 사랑과 자유의 결속을 유지시킨다: 카톨릭의 규범대로 사랑을 하려는 호세는 자신의 사랑이 카르멘의 자유를 뺏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결국 그녀를 죽이게 된다. 카르멘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다. 전적인 이타성을 내걸지만 사실은 조건적, 교환적인 성모 마리아의 사랑과는 대조적으로 카르멘은 사랑의 이름을 내걸어 자유를 빼앗지 않는다. 아도르노가 쓴 비제의 카르멘에 대한 에세이의 변증법적 표현처럼 그녀에게 사랑은 ‘가장 부드러운 것(이타적인 것)’이지만 ‘ 그 무엇에 의해서도 얕잡아 보이지 않는다.’
◆ 죽어가는 검은 눈이 준 메시지
여자란 쓸개즙처럼 쓰다. 그래도 여자에겐 두 차례 좋은 순간이 있으니, 잠자리와 영원한 잠자리에서가 그것이다. - 팔라디스
소설 맨 앞에 등장하는 이 인용구는 『카르멘』에서 주제가 되는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돈 호세는 카르멘을 통해 두 번 메시지를 전달받는다. 인용구의 ‘잠자리’에 대응될만한 순간이 아카시아 꽃으로서 각성하는 순간이라면, ‘영원한 잠자리’ 는 죽음의 순간이다. 호세가 카르멘을 칼로 찌른 후 죽어가는 그녀의 검은 눈은 그에게 진정한 사랑과 자유의 의미를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는 자수를 하지만 카르멘의 시신이 있는 곳은 말하지 않는다. 카르멘의 메시지가 신화화, 기념비화 되었을 때, 그녀의 메시지가 오히려 무력화될 수 있는 것을 막기위한 것이라고도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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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강의노트 |
오**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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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카프카, 『선고(Das Urteil)』
◆ 러시아에 간 친구 이 작품은 카프카가 펠리체와 약혼하면서 분열상태(문학과 육체성, 이중자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중자아는 소설 속에서 약혼녀 프리다와 러시아에 간 친구로 등장한다. 카프카에게 약혼은 문학적 자아(독신 자아)를 배반하는 일이므로, 이에 대해 러시아 친구와 약혼녀가 만나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쓴다. 러시아 친구에게는 결혼을 알리지만 오지 말라는 뉘앙스로 쓰여진, “장난하듯” 봉한 편지로, 약혼녀는 입맞춤으로 달랜 후 자신 있게 아버지의 방으로 건너간다.
◆ 아버지와 아들의 권력투쟁 양상 아버지의 방으로 건너간 후, 아버지에게 옷을 벗기고 담요를 덮으려는 시도, 러시아 친구에 대한 변, 이 두 가지를 통해 권력투쟁 양상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 음모의 들통: “너 정말 페테르부르크에 그런 친구가 있느냐?” 즉, ‘그 친구를 핑계로 나에게 허락을 받으려는 것 아니냐? 너는 결혼을 통해 나를 쓰러뜨리려 했다.’ - 권력투쟁 양상의 변화: “나는 네 친구를 잘 알고 있다.” 게오르그는 편지를 통해 러시아 친구와 여자를 막으려 했지만 이 시점에서 모든 것이 들통나게 된다.
◆ 러시아 친구의 이중화 ‘너의 애욕 때문에 러시아 친구를 배반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아버지의 추궁과 함께 게오르그는 러시아 친구를 상기한다. 이 때, 아버지가 게오르그에게 요구한 러시아 친구의 의미는 순종적인 아들의 모습인데, 그는 문학적 자아로 상징되는 러시아 친구를 떠올리게 된다. 하나의 시니피앙이 두 개의 시니피에로 슬그머니 이중화되는 순간이다.
◆ 강 건너편 언덕 소설의 첫 부분과 마지막에 암시적으로 등장하는 ‘저’ 영역.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할지 깨달은 아들은 아버지의 선고(이 선고로 인해 아버지는 오히려 권력을 박탈당한다)에 굴종하는 척하면서 아버지를 빠져나가고, 문학적 자아의 생존을 이룩한다.
◆ 『선고』를 넘어서 『선고』를 통해 본 카프카적 상황과 전복적 전략을 보았다. 『소송』, 『성』, 그리고 『사이렌의 침묵』 등의 짧은 단편에서도 이러한 것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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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강의노트 |
오**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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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카프카, 『선고(Das Urteil)』 1교시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1883 ~ 1924)
◆ 끊임없는 ‘깨어있기’와 ‘깜빡하기’ 카프카의 문학에서 특징적인 상황은 끊임없이 ‘깨어있기’와 ‘깜빡하기’이다. 불안감이 감도는, ‘산만한’ 상황을 관찰하고 재확인하는 사이에 잠시 ‘깜빡’하는 순간이 모든 상황의 원인이 된다. 이는 카프카가 실제 가지고 있던 불면증의 양가성을 떠올리게 한다. 몽환, 놓아버리려는 습성과 끊임없는 깨어있음이 공존하는 불면증과 같은 증상이 소설에 자주 등장한다.
◆ 카프카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상황 (카프카적인 상황) - 법정의 상황: 자신옹호와 변명. 결국은 살아남기 위한 권력투쟁의 문제. 카프카 문학이 실존주의 등으로 해석되도록 만드는 부분. - 아버지와의 상황 - 여자와의 상황
◆ 카프카 읽기 (intensive ▶ extensive) 카프카의 텍스트는 매우 집약적이므로 이것을 부채를 펼치듯이 펼쳐 읽는 전략이 필요하다. 체코인으로서 독일어의 ‘낯설음’을 문학의 매체로 사용한 것도 구구절절 묘사가 없는 집약적 글쓰기의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 카프카에게 있어서 『선고』 작가에게는 자기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프로젝트를 계속하는 중에 자기 문학의 영토를 확인하는 순간이 있다. 카프카에겐 『선고』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카프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 작품을 쓰고 sexual ecstasy와 같은 것을 느꼈다고 하였다. ◆ 카프카적인 것: 카프카 특유의 권력투쟁의 전략 『선고』에서 주인공 게오르크는 자기의 방→아버지의 방(선고)→다리 위(집행) 의 순서로 이동한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왜소한 아들과 큰 권력을 느끼게 하는 아버지의 대립이다. 이길 수 없는 권력투쟁을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 이에 대한 전략은 카프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마뱀과 갑충의 이야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본인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으니 강자의 힘, 약자를 지배하기 위한 바로 그 힘을 사용하는 전복적 전략이다.
◆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순응해 버릴 수 없는 이유: 문학 카프카에게는 문학적 삶(이하 ‘문학/삶’)과 실제 삶(이하 ‘육체/삶’) 이 대립하였는데, 이를테면 그의 문학적 자아는 독신인데(에로티즘을 거부한 독신자 문학), 에로티즘 또한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카프카에겐 문학이 그저 추상적인 세계가 아니었기에 둘을 갈라서 이분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실제로 펠리체 바우어(그녀는 『선고』에서 프리다로 현현한다)와의 약혼과 파혼을 일생에 걸쳐 3번 반복하는데, 이는 에로틱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독신을 유지하기 위해 약혼자의 존재는 꼭 필요했던 그의 ‘악마적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문학에 등장하는 ‘법정 투쟁’은 끊임없이 ‘살지 못하게 하는 삶(문학없는 삶)’에서 문학/삶을 지켜내기 위한 ‘생존 투쟁’인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대립. 이것은 여전히 힘을 가진 전통의 권력에서 탈출하는 근대성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특히 자연을 투쟁 대상으로 보고 투쟁하지만 결국 육체에서 내적 자연을 발견하게 되는 딜레마와 연결되는 것이다. 애욕적 삶과 독신자 문학의 딜레마에서 카프카는 어떻게 탈출하였나.
2교시 아버지와 아들 혹은 결혼과 권력 ◆ 카프카의 아버지: 공생관계 카프카의 실제 삶에서도 아버지는 강한 존재였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카프카 문학에서 권력투쟁의 모습의 모체이다. 카프카는 실제로 아버지의 권력에 순응하였는데, 순응의 내면화는 그 권력에서 자기가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드는 원인(순응으로 자기를 유지하므로 아버지를 부정하면 자신도 부정하게 되는 꼴)이 되었다. 또한 사랑이라는 명목의 지배는 저항에 대한 죄의식을 심게 된다. 하지만 이 관계가 기생적이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권력 또한 아들의 존재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들이 없으면 권력을 행사할 대상이 없다. 이 관계는 앞의 권력투쟁에 즉시 대입될 수 있다. 즉 카프카의 문학에서 아버지는 자기생존의 조건이면서 문학으로서의 생존을 포기하게 하는 존재, 투쟁해야 할 권력이다. 유일하게 이 싸움을 타파할 전략은 이 공생관계를 비틀어서, 약자를 누르는 힘을 역전시켜 강자를 쓰러뜨리는 것이다. 도마뱀(아버지)이 실수로 갑충(아들)을 툭 치도록 만드는 것, 권력이 실수하도록 만들어서 예기치 않은 전복을 가져오는 것이 그 전략이다.
* 문학에 있어서 이런 ‘전복’은 곧 ‘봉인된 혀’를 푸는 것이다. 벤야민 식으로는 “독서는 써 있지 않은 것을 읽어내는 것”이고, 데리다 식으로는 “독서란 해체”이며, 바르트 식으로는 “코드 없이는 탈-코드 또한 없다”, 즉 들리지 않고 쓰여지지 않은 것을 듣고 보는 것이다.
◆ 『선고』에서의 아버지 “그년이 치마를 올려버렸구나”, “넌 친구(문학/삶)를 배반했어”를 통해 자신의 딜레마를 아버지로 하여금 드러나게 하였다. 몇 번이나 쓰러뜨리려 해도 눕혀지지 않고 고발하던 권력은, “내가 너를 지금 익사형에 처하노라!”라는 실수를 통해 침대에서 고꾸라지게 된다.
◆ 생존전략: 악마와의 계약 카프카 문학은 약혼자와 아버지를 자신을 고발하도록 기능화하고 배반하는 것을 통해 생존전략을 찾는다.
◆ 카프카적 존재들 카프카 소설 속의 아무런 힘도 없기 때문에 스스로 생존하는 존재들, 이들은 아감벤의 호모사케르를 떠올리게 한다. 법적 권력 앞에서 우리는 모두 호모사케르 이기에 이건 우리의 문제로도 환원된다. 구조화된 권력의 존재를 증명하는 존재들. 순응할 것 인가, 싸울 것 인가. 저항을 위해서는 카프카의 생존전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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