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우수
|
미니마 모랄리아I에 이어서 |
김*현 |
|
|
|
아도르노 기본 강의, 미니마 모랄리아 I에 이어서 듣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해주었던 강의었습니다.
남성성, 기계와 같이 평소에 별로 생각하지 않았던 주제까지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좋았습니다. |
|
|
|
 |
김서현 님:)
와, 주말에 공부 많이 하셨네요. 히히 김서현 님 같은 분이 있어 저희도 힘이나는 것 같아요. 김진영 선생님의 아도르노 강의는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하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관리자 (14.9.11) |
|
|
|
|
|
|
|
우수
|
[애도와 더불어] 바야흐로 '한 줌의 도덕'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
김*신 |
|
|
|
누구보다도 인문학을 하는 이들이라면 꼭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합닌다 어느 것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으면서 자유로운 척 자발적 자위에 나서는 저를 비롯한 님들은 더더욱 최소한의 장치로 갖고 있어야할.
우리의 얼굴은 지금 천사입니까, 악마입니까 우리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의 혀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심연은 어둡습니까 심연은 만져볼 수 있긴 합니까
김진영샘도 많이 아프시겠지요 요즘처럼 내 새끼, 내 가정에 골몰하는 때도 없을 겁니다 한 다리 건너면 우린 모두 혈연관계입니다 알면서 잊고 살고 있습니다
부디 이 번엔 상처의 흔적을 없앴다고 멀쩡하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그 상처 부위는 물론 주위도 살펴봐야합니다
우린 늘 슬펐지만 제대로 울지 못해 눈물에 체해 있습니다 자위하면서 동시에 타인의 등도 따독여 줘야 합니다
죽지 말아야할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상처를 남겼습니다
우리는 모두 상처투성이고 우리는 모두 악마의 옷깃을 스쳤습니다
|
|
|
|
|
|
|
우수
|
인터넷으로 교수님 강의 듣고 있습니다. |
m**kooks |
|
|
|
김진영 교수님의 아도르노 강의와 미니마모랄리아 첫번째 강의 수강하고, 이번 강의도 듣고 있습니다. 교수님 강의를 듣고 있으면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라는 어쩌면 상투적인 표현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조금 어렵기도 하지만 이번 강의 역시 많은 걸 느끼게 해주는 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강의록 역시 제공됩니다. 교재에 강의록 없음이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강좌보기 중에 오른편에 강의자료 제공되고,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운영자 분께서는 수정해 주시면 더욱 많은 학생들이 수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니마 모랄리아 첫번째 강의를 듣지 않았어도 수강하는데에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추천합니다. |
|
|
|
|
|
|
4 |
절망 속에서 '버티기'의 희망을 찾다. |
박*영 |
|
|
|
아도르노의 철학은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사유의 책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용기였습니다. 특히 '버티기(Standhalten)'와 '부정 변증법적 희망'에 대한 해석이 와닿았습니다. 불가능성 속으로 '마주 들어서는 것'을 통해 가능성이 깨어난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시멘트 바닥을 천공하는 지렁이의 사유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
|
|
|
|
|
|
5 |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체감하게 하는 강의 |
이*서 |
|
|
|
김진영 교수님의 아도르노 강의를 들으면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문화를 차가운 메두사의 시선으로 응시하면서도, 인간의 상처와 고통에 공감하는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어렵지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강의입니다. |
|
|
|
|
|
|
6 |
너무 난해하고 산만한 강의에 큰 혼란 |
김*은 |
|
|
|
아도르노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의 내용이 너무 난해하고 산만하여 집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각 강좌의 주제는 흥미롭지만, 논리가 명확하게 이어지지 않고 교수님의 개인적인 상념이 지나치게 개입되어 정리가 안됩니다. 제게는 아도르노의 사유가 아니라, 혼란스러운 파편들만 남았습니다. |
|
|
|
|
|
|
7 |
사랑과 소유, '나리타 이혼'으로 본 연애의 사회학 |
최*훈 |
|
|
|
4강의 '실연, 사랑의 권리와 정의'와 5강의 '사랑과 소유'에 대한 분석이 매우 현실적이었습니다. '나리타 이혼'처럼 결혼이 모든 사랑을 완성하는 봉합이 아니며, 사랑의 도덕은 객관적 권력의 시장성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라는 아도르노적 해석에 감탄했습니다. |
|
|
|
|
|
|
8 |
유령'과 '죽음'에 대한 이론적 고찰이 깊이 있었다. |
정*진 |
|
|
|
7강 '유령에 대해서'와 9강의 '상처와 허파'를 통해 죽음과 삶, 그리고 유령이라는 경계를 철학적으로 다루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죽음'이 경제적으로 관리되고 산 자들이 죽어가는 자를 추방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가슴 아팠습니다. |
|
|
|
|
|
|
9 |
강의 도중에 헤매는 모습이 거슬렸어요. |
박*수 |
|
|
|
김진영 선생님의 지식과 사유는 깊지만, 강의를 진행하면서 논리적 구축이 다소 미흡하고 중간중간 헤매는 모습이 보여서 흐름이 끊기곤 했습니다. 17시간이 넘는 긴 강의인데, 명료한 진술이 부족하여 수강생이 스스로 내용을 정리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
|
|
|
|
|
|
10 |
복수형만 있는 명사'로 본 조폭의 상징성 |
이*현 |
|
|
|
1강의 '복수형만 있는 명사'와 조폭의 상징성에 관한 고찰이 매우 신선했습니다. 은밀한 조폭성과 보편적인 조폭성을 통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 문화를 해부하는 교수님의 시선에 놀랐습니다. 평소 생각하지 않았던 주제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었습니다. |
|
|
|
|
|
|
11 |
아무르' 영화 해석을 통한 사랑의 정의 |
강*아 |
|
|
|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아무르(Amour)』에 대한 해석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사랑의 권리 주장이 폭력이 되는 순간과, 진정한 사랑은 권리의 주장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호소로서 끊임없이 발명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드는 깊이 있는 강의였습니다. |
|
|
|
|
|
|
12 |
영재가 필패하는 이유에 대한 통찰 |
오*우 |
|
|
|
5강의 '온실식물'을 통해 영재와 천재가 어른이 되어 필패하는 이유를 분석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경제적 성공이라는 규격에 의해 재능이 물화되고, 불행은 행복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보상금으로 슬픔이 봉해지는 구조를 비판하는 내용이 와닿았습니다. |
|
|
|
|
|
|
13 |
언어는 육체의 고통과 억압으로부터 발생되었다. |
김*현 |
|
|
|
2강의 '단어'에서 '음식'까지를 다루는 강의가 좋았습니다. 언어와 육체의 관계를 탐구하며 언어가 육체의 고통과 억압으로부터 발생되었다는 관점은 철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단어를 씹어 먹는다는 표현이 강렬했습니다. |
|
|
|
|
|
|
14 |
불면은 곧 깨어남이라는 역설적인 희망 |
이*연 |
|
|
|
6강 '불면'에 대한 아도르노적 해석, 즉 불면은 곧 깨어남이라는 메시지가 좋았습니다. 효율적인 시간 배치를 거부하는 공백의 시간인 불면 속에서, 우리는 객관적 권력의 논리에 의해 포장된 사유가 아닌 순수한 불안과 정직한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
|
|
|
|
|
|
15 |
글쓰기의 미학, 생략의 미학 |
박*호 |
|
|
|
9강 '글쓰기, 폭력'에 대한 논의에서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아름다운 사유를 하는 것이며, 글을 위해 버려진 것들이 그 글을 좋게 만든다는 생략의 미학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인문학자로서 글쓰기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게 해준 귀한 강의였습니다. |
|
|
|
|
|
|
16 |
남성성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바라봄 |
최*람 |
|
|
|
터프 베이비'나 '군도' 등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의 남성성이 어떻게 구성되고 변형되었는지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점이 좋았습니다. 강한 남성을 연기해야 하는 남성들의 고통과 그들의 사도마조히즘에 대한 분석이 깊이 있었습니다. |
|
|
|
|
|
|
17 |
데리다의 차이 개념을 아도르노와 연결 지어 사색 |
신*민 |
|
|
|
벤야민과 아도르노, 미학을 전공하신 교수님답게, 벤야민의 두려움과 매혹의 변증법이나 데리다의 차이 개념 등 다양한 철학적 논의를 아도르노의 사유와 연결 지어 사색하게 해주었습니다. 철학적 지평이 넓어지는 강의였습니다. |
|
|
|
|
|
|
18 |
미니마 모랄리아 I을 듣지 않아도 무리 없습니다. |
한*수 |
|
|
|
강의 제목에 Ⅱ가 붙어 있어 앞 강좌를 들어야 하나 걱정했지만, 수강해 보니 미니마 모랄리아 첫 번째 강의를 듣지 않았어도 수강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도르노의 핵심 사유를 충실하게 다루어 주셨습니다. |
|
|
|
|
|
|
19 |
미인에 대한 아도르노의 차가운 시선 |
이*은 |
|
|
|
4강 '미인'을 '무익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며 아름다움이 물화되고 재테크로 변질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단면을 비판적으로 해부하는 시선이 차가웠습니다. 김수영의 시에 읊는 '미인'을 함께 다루어, 미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할 수 있었습니다. |
|
|
|
|
|
|
20 |
아도르노... |
김*옥 |
|
|
|
아도르노의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사유의 책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철학'...한국 정치가들이 제발 이런 최소한의 책임이라도 배웠으면 하는 생각이 불현듯 지나갑니다...세월은 흐르고 간곳없이 허전함이 가득하지만 배움을 일깨워준 감동만은 늘 함께 할 것입니다... |
|
|
|
|
|
|
21 |
<리뷰어> 2-8강 리뷰 네 이마의 붉은흉터 |
정*혜 |
|
|
|
네 이마의 붉은 흉터
사드들
성인을 대상으로 한 미국 성인 드라마 ‘럭키 루이’에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뭘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미성년자도 볼 수 있는 장면이고, 모두가 공감하며 웃을 수 있었다. 루이는 평소와 별다를 것 없이 평온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식탁 위에서, 갑자기 딸이 ‘질문’을 시작한다. 루이는 대충 대답하지만 그럴수록 딸은 ‘왜?’라고 집요하게 캐묻는다. 난감해하는 루이를 보며 우리는 웃는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루이의 상황에 처한다면 어떨까. 저 한심한 루이보다는 훨씬 더 낫게 ‘왜?’를 물리칠 수 있을까? 답하지 못한 이는 몇 밤 자고서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답을 받지 못한 이는, 그 물음마저 금지당한 이는 어떨까. 잊어버린 것 같다가도 떠오른다. ‘왜?’ 답하지 못한 이유는, 그 ‘왜?’에 대해 대답할 만큼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 질문이 아주 간단하고 명쾌하게 심연을 푹 찌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했던 것들을. 아이들은 그 질문을 금지당한 것에 대해 자신도 모르는 분노를 가지고 있다. 수많은 민담들 속에 나오는 ‘원한을 품은’ 구미호와 요괴들은 끝내 그 원한을 풀지 못한다. 누군가에 의해 가로막힌다. 필사적으로 달려들어도 마찬가지다. 분노를 풀지 못한 채 죽거나, 아니면 더 큰 분노를 안은 채 사라진다. 아이들은 사라지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한다. 억지로 살아가야 한다는 기로에 놓인다. 원한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튀게 된다. 원한 관계와는 별 상관 없을 것만 같은 상대에게, 아니면 그에게 이전의 ‘분노’를 떠올리게 하는, 그들과 비슷한 수동적인 대상에게. 의사와 정치인, 그리고 투사들은 그 대상을 향해 칼을, 배신을, 그리고 함성을 내지른다. 하지만 그건 풀리지 못할 분노다. 왜냐하면 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수동적 인간’들은 어떻게 보면 어렸을 적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를 객체화하여 타인과 과거의 자신을 동일시한 뒤, 그리고 또다시 자신이 당했던 ‘고통’을 그대로 가한다. 그리고 수동적인 대상들은 그들 자신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이상해진다’. ‘이상해지는 이들’ 또한 그 원한을, 클로로포롬으로 인해 기억과 함께 지워져 버린 ‘고통의 근원’을 잊어버린 채 또다시 타인에게 공격을 퍼붓는다. 악순환은 끝없이 계속 이어진다. 로드킬의 운명
현 시국을 가장 빨리 파악하고 대입할 수 있는 장르는 무엇일까. 첫 번째는 드라마이고 두 번째는 영화, 세 번째는 시, 가장 꼴찌는 소설이다. 어떤 문제가 소설 속에서 드러난다면 그건 ‘이미 지나간 과거’이자 ‘깊이 새겨진 상처’다. 우리는 그 상처를 모르고 지나친다. 그러나 소설로 인해 그 상처의 존재를 깨닫게 되고 동시에 그 상처가 자신의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여행을 다닌다는 것, 일상의 모든 것들을 뒤로 미루거나 던져버리고 계획을 짜는 것이다. 내일은 어디로 갈지, 무엇을 먹을지. 보는 것마다 새로워 보이고 신기해 보인다. 해외가 아니라 국내 여행이라도 마찬가지다. 동네 주민들에게는 시큰둥할지 몰라도 그 벽화를 보기 위해 먼 곳에서 달려온 이에게는 경이로울 뿐이다. 그 감탄사를 어떻게든 표출하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자신이 여기에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그러나 숙소에서 잠들고 깨어나 아침을 맞은 순간, 낯선 방은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는 ‘새로운 기회’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모든 사물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여관은 다른 사람들이 왔다 간 흔적이 있고, 얇은 벽 너머로 타인의 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 잠깐의 고독이 치유되는 것 같은 환상을 품게 한다. 하지만 호텔은 다르다. 체크아웃을 한 이의 얼굴도 생각나지 못하게-그 사람은 여자였나? 하이힐을 신고 다녔나? 어떤 립스틱을 발랐는가? 어디로 갈 생각이었을까? 왜, 혼자, 왔을까?-모든 것을 새 것으로 바꾼다. 호텔에서의 아침은 냉랭한 침묵의 아침, 일회용 수건 봉투를 가방에 쑤셔 넣는 건 ‘어차피’ 이 수건은 버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엔 물방앗간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이제는 ‘고독’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 냉정하게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 내던져 주는 보리수 그늘로 변해버렸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어들지만 그 전화는 체크 아웃 시간을 알리는 전화에 불과하다. 만약 그 시간 내에 퇴실하지 않으면 퉁명스런 청소부가 문을 열고 얼른 나오라고 소리칠 것이다. 사람들은 저항할 생각조차 해보지 못하고 재빨리 도망친다. 이 고독을 확인시켜 주는 장소로부터.
신들의 황혼
오페라 연출가 스티븐 로리스는 ‘오페라는 가장 정치적인 장르’라고 말했다. 현재 사람들의 인식을 생각해본다면 좀 의아한 말일수밖에 없다. 화려한 드레스와 정적인 무대 장치,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난해한 클래식과 아리아들. 사람들에게 ‘오페라’는 고급, 귀족과 연결되는 말이지 당대 정치를 표현한다고는 볼 수 없는 장르다. 오페라는 하나의 ‘박물관’ 유물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현재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실황 중계’ 오페라들에서는 정통성만 강조되는 게 아니라 ‘재해석’이 가미된다. 단순한 스토리 플롯에 불과하지만 배우의 연기나 무대 연출로서 다르게 형성되는 것이다. 가령 최근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안드리에 세니예, 혁명기에 누명을 쓰고 살해당한 세니예에 대한 오페라다. 단순한 러브 스토리로 끝날 수 있는 이 오페라의 무대는 특이하다. 기존 평면적인 무대가 아닌 마라 형상의 무대. 왜 죽은 마라가 여기서 다시 기억되어야 했는가? 이 점에서 오페라는 재미있는 장르다. 어떤 식으로든 변형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허나 사람들은 오페라를 끊임없이 ‘고급 취향’으로 만들고자 한다.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고, 흥미로워할 요소들 대신 ‘우아함’과 ‘고급’을 먼저 내세우려 하는 것이다. 그 예시로는, 예전에 영화관에 오페라 실황 라 트라비아타를 보러 갔을 때 겪은 일을 말해볼 수도 있겠다. 옆에 세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중년 여성들로, 양손에는 모 백화점의 봉투들과 고급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백들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영화관으로 ‘티타임’을 즐기러 온 것인지 무릎에 온갖 간식거리들을 꺼내 놓았다. 하지만 채 십분도 되지 않아 영화관 안에는 코고는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결국 자리를 옮겨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영화관을 나오면서 그들은 서로 아리아와 전주곡에 대한 찬사를 펼쳤고 ‘다음에 또 보러 오자’는 말을 했다. 그들이 ‘무식하다’거나 ‘천박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서경식은 바그너가 친 히틀러적이었다는 걸 인지하고, 인종차별주의에 잠식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환희에 차올랐다. 그는 이 알 수 없는 환희에 대해 거부했고, 어떻게든 떨쳐내고자 했다. 하지만 음악은 잔인하게 그의 심장 속을 파고들었다. 그는 이 환희에 굴복했다. 그리고 어떤 록밴드의 음악을 좋아하는 ‘교수님’이 계셨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에 대한 강박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음악을 좋아한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교수님’은 일렉트릭 기타 소리가 울릴 때마다 자신의 심장이 재빠르게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교수님도 이 환희에 굴복하고 싶어했다. 두 환희는 성질상 같은 것이 아닌가. 취향은 우열을 가리는 순간, 취향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열등한 취미이든 우월한 취미이든 자신이 정하는 게 아니라 결국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고 ‘정하게 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
|
|
|
|
|
|
22 |
<리뷰어> 2-6강 리뷰 한 줌의 정직 |
정*혜 |
|
|
|
한줌의 정직
황무지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인자여, 너는 말하기는 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더미뿐 그곳엔 해가 쪼아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너라) 그러면 너에게 아침 네 뒤를 따르는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 주리라. 한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 주리라.
-T.S 엘리엇 '황무지' 中-
‘사건’과 ‘사고’의 차이점은 ‘필연’과 ‘우연’, 그리고 ‘귀환’의 가능 여부라고 한다. 사고는 자연 재해나 갑자기 차가 달려드는 것으로 분명한 ‘우연’이며 그 뒤에 수습이 가능해 일상 생활로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건의 경우 우리는 ‘우연’으로 여기지만 이전부터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으나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발밑의 ‘파열선’과 같아서, 깨닫는다 해도 이미 ‘사건’이 일어났다고 인지한 순간에는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는다. 객관적 권력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링 위에 올려 보낸다. 일대 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링 위에 올라가 단 한 명만 살아남게 하는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돈을 걸었는지도 모른 채,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삼고 싸워 나가야만 한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도 ‘고독’이라는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들은 그 결과를 ‘운명’으로 잘못 인지하는 ‘착란증’을 일으키고, 서로 윽박지르고 강요하다가 그 착란을 현실로 만들고 만다. 이러한 규칙은 본래 있었던 것이며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받아들여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객관적 권력의 사회는 만약 그 링에서 마음대로 내려가면 링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을 얻지 못할 거라고 위협한다. 링에서 내려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상상도 못한 ‘파멸’이 들이닥칠 것이라고,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천사’를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그 견고한 링이-현실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사각형 모양의 링이 ‘연극 무대장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태엽과 나사, 송판과 밧줄로 만들어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장치. 그 순간 느끼게 되는 건 어떤 희열감이 아니다. 트루먼이 느꼈던 ‘탈출에의 용기’도 아니다. 절망이다. 객관적 권력의 참 모습은 그들에게 링 위에서 살아남은 대가로 자유를 약속했지만, 사실은 그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었다. 링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두르고 있던 모든 방패와 갑옷들, 날카로운 무기들-그들을 ‘규정’해 주었던-은 이제 하잘것없는 연극 소품에 지나지 않게 되고, 그들은 이제껏 그들이 진실로 외면해 왔던 두려움-존재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황무지에 꽃이 피는 사월이 찾아오지만, 그 사월은 황무지의 ‘존재’에 대해 다시금 일깨워주는 잔인한 존재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그들이 바라던 ‘순종적인 그림자’ 대신에 그들이 인지하지 못했던 불안, 공포를 ‘붉은 돌의 그늘’에서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그늘’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일까. 두렵다면, 피하면 되지 않겠는가?
거울 속의 악마 아기들을 키울 때 어머니들은 노심초사하며 그들을 지켜본다. 무엇이든지 입 안에 집어넣고 무엇이 위험한지도 모르고 손을 들이민다. ‘무지’만 아니라면,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냥 피하면 될 테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정보’가 곧 안전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그 ‘정보’가 과연 안전할까? 요제프 K는 그가 가진 ‘도구적 이성-정보’들로 어떻게든 무죄 판정을 받기 위해 애썼고 마커스의 부모들은 그들이 가진 ‘상식’ 선에서 마커스를 보호하려고 애썼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건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죽음의 구덩이’ 뿐이었다. 요제프 K는 무죄를 주장했다. 그에게 유죄 선고를 내린 사회 속에서는 그는 분명한 ‘유죄’였다. 그가 진정으로 무죄일 수 있는 곳은 그 사회의 바깥이었다. 하지만 K는 여자들의 ‘도주 권유-사회로부터의 도주’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사회의 테두리 내에 머문다. 왜일까. K는 기존에는 ‘벨’을 누르면 밥이 올라왔던, 그를 충분히 납득시켰고 일어날 일을 미리 예상할 수도 있게 했던 사회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가 그에게 유죄를 내렸을 때, 그는 분개했다. 그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법정에 찾아가지만 늘 거절당하고, 그러면서 그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사회의 ‘모순’을 들여다본다. 허나 그는 그 ‘모순’에 대해 지적하다가도 끝내 받아들인다. 그는 그러한 ‘강압성’의 논리 앞에서 항의했지만, 동시에 그 강압성에 항거하기 위해 ‘여성들’에게 강압적으로 대한다. 그 권력의 휘장 뒤에 얼마나 초라한 ‘개죽음’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이다. 권력은 매혹적이다. 가장 안전하고 따뜻하게 당신의 삶을 보호해줄 수 있다고 속삭인다. K는 그 권력을 잘 이용만 하면, 그는 틀림없이 무죄가 될 거라고 믿는다. 탈주? 자칫하면 영원히 그의 사회에서 ‘탈주자’로 낙인찍히고 편안한 침대와 벨만 누르면 올라올 식사를 포기해야 할텐데. 그래서 그는 그 권력 안에서 자신을 유지하고자 한다. 똑같은 ‘강압성’을 휘두르면, 그 권력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허나 객관적 권력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만약 그가 진정으로 객관적 권력이 휘두르는 ‘유죄’라는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그는 그 폭력 뒤에 숨을 게 아니라 그 ‘그늘-심연’을 들여다 보아야 했다. 니체의 말마따나 내가 ‘심연’을 들여다보는 순간,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 서로가 응답하는 순간, 그 공허함에 몸서리칠 지라도. 그 공허함에 진정으로 ‘두려워하면서도’ ‘매혹되어야만’ 그는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앙겔루스 노부스, 천사는 폐허를 등지고 도망치지 않는다. 그래야만 심연의 공허함 속에서, 죽음의 구덩이 속에서 헤쳐나올 수 있다. 하지만 요제프 K는 그 죽음의 구덩이 앞에서 등을 돌리고 버티려고 애쓰기만 했고, 끝내 그 구덩이 속에 ‘굴러 떨어졌다’. 희망은 곧 절망이고, 절망은 곧 희망이었다.
기계;인간
‘성공’을 위해서는 아침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슬로건부터 몇 시간 동안 잠을 자야 뇌 운동이 활발해진다는 의사의 애정어린 충고까지, 현대 사회는 ‘잠’에 대해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수면의 시간’은 하루를 계획하는 시간표 중 유일하게 ‘공란’으로 표기해도 부끄럽지 않은 시간이다. 사람들은 그 시간마저 ‘계획적’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충분한 휴식’을 그 때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기계처럼, 너무 오랫동안 쓰면 과부하에 걸려 고장날 수 있으니 몇 시간을 쓰면 그에 따라 몇 시간은 끄고 ‘쉬게 해줘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네시간 밖에 자지 않으며, 그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닌다. 그런 게 자랑거리가 된다는 건-그게 ‘성공의 여부’를 가린다는 듯이 말하는 건- ‘수면의 시간’을 그만큼 하찮게 여기고 있다는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허나 ‘불면’의 순간은 그러한 시간의 효율적인 배치를 불가능하게 한다. 분명히 이 시간에는 ‘잠들어야만’ 하는데, 잠들지도 못하고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가만히 누워서 잠들기만을 바라면서 꼼짝없이 누워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히려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되려 잠들지 못하게 방해한다. 모든 것들이 조용해지는 공백의 시간. 이 시간마저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주장마저도 힘을 잃는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우리가 느끼는 건 편안함이 아닌 불편함이다. 우리는 그 다음날 아침 밀려들 피곤함에 대해 걱정한다. 하지만 그 피곤함은 잠시 뿐이다. 우리가 분주하게 쳇바퀴를 돌 듯 살아왔던 일상들은 그 순간 정지한다. 딱딱한 돌 동상처럼 굳어버린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어제 오늘 해왔던 일과 내일 할 일에 대한 계획과 쓸데없는 회상뿐이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생생하게 빛나는 바늘 끝처럼 나를 찔러대던 계획들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무색해지는 것이다. 내가 정했던 목표가 있었다.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느라고 잊어버렸던 것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정말로, 내가 제대로 ‘내가 원하는 것’에 가고 있는 걸까? 우리는 우리가 잊고 싶지 않았던 ‘순수한 꿈’에 대해, 우리의 사유에 대해 자신감을 품고 나아가고 있었다. 허나 객관적 권력의 세계에서는 이 사유를 쉬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타협’한다. 사유를 객관적 권력의 ‘논리’의 틀에 끼워맞추는 것이다. 그 순간 사유는 변질되고 만다. ‘불면’의 순간은 그 순간 ‘사안-사건’으로 찾아든다. 뭐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순수한 불안’, 그 자체로 정직한 ‘것’이다. 과연 네가 원하던 것이 이런 것이었는가? 불안은 너무 정직하게, 직구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소중한 사유를 내보이며 변명하려 하지만, 이미 객관적 권력의 논리에 의해 포장된 사유는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있는 것이다. 그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 애써 외면하고 잠드는 것, 평생 잠들 수 없을 것이다. 깨어나는 기쁨-무사히 밤을 보냈다는-보다도, 우리가 그동안 바래왔던 ‘순수한 기쁨’은 바로 내일을 기다리며 잠드는 기쁨이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내일을 또다시 견뎌야 할 ‘오늘’로만 볼 뿐이다. 결국 ‘끝없는 오늘’만이 찾아오는 것이다. 객관적 권력은 그러한 사이클을 ‘바람직하다고’ 여기라고 한다. 하지만 그 순간 ‘호랑이’가, 불면의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정직하게’. |
|
|
|
|
|
|
23 |
<리뷰어> 2-7강 리뷰 그리고 죽음 |
정*혜 |
|
|
|
그리고 죽음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복음 12:24)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서문-
죽음은 한 인간의 필연적인 결말이다. 진시황이 얻고자 했던 영생의 불로초는 수백, 수천 돈의 금을 뿌려도 얻을 수 없었다. 진시황도 죽어야 했다. 죽음은 허망한 결말이지만 동시에 살아 있는 자들에게 하나의 수업이기도 했다. 태곳적 인간들은 죽은 자들은 죽지 않고 또다른 세계로 ‘옮겨 간 것’이라고 믿었고, 그들에 대한 선망과 질투라는 이중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죽음은 제거될 수 없는 물음이었기에 ‘헛된 공상’이 깨끗하게 제거되곤 했던 ‘결벽증’의 ‘계몽’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물론 과학은 ‘신이 없고’, 그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발명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바르트의 말마따나 ‘신 없이 사는 것’과 ‘신이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태곳적 인간들부터 중세의 인간들은 모두 ‘죽음’에 대해 일종의 ‘경의’를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해 ‘겸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돈 지오바니는 석상을 큰 소리로 비웃었지만 끝내 지옥으로 떨어져야 했다. 그것이 최선의 발악이었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죽음’이 베푸는 강의의 내용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누군가의 죽음에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기 보다는 ‘죽음’이 예고된 몇 시간 전에 분주하게 장례식을 잡고, 장례식 비용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는지 걱정한다. 게다가 장례식장에서 제공하는 ‘음식’들-공식도 다 정해져 있다-은 밖에서 먹는 것보다 ‘비싸다’. 사람들은 낸 돈만큼 ‘식사’를 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른들은 테이블 곁에 놓이는 소주병 수를 세고 비싼 숙취해소 음료는 몰래 뒤로 숨겨놓는다. 끝나면 걷은 돈을 계산하고 발인하기에 적당한 묘를-혹은 납골묘를 찾는다. 이틀 장사를 하는 셈이다. 그 와중에서 진정한 슬픔은 발생하지 않는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진정한 슬픔에 대해 느낄 새도 없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슬픔을 가르쳐 주지 않고, 상실의 의미에 대해 깨우쳐 주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딱하다고 혀를 차면서도 계속 손가락을 꼽아볼 뿐이다. 객관적 권력은 손들의 용도를 변경한다. 손은 이제 눈물을 닦는 대신 숫자를 헤아려 볼 때 쓰이게 된다. 아이들은 ‘죽음 수업’ 뒤에 어른이 된다. 객관적 권력이 강조하는 어른이-우리는 상조 보험에 미리 들어놔야 하며 부채 상황을 미리 파악해야 하고 장례식 때에는 효율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납골묘는 위로 올라갈수록 비싸다-되는 것이다. ‘파리대왕’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아이들이 이보다는 더 순수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그들은 마지막에 안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끄러워서 ‘울었다’.
앰뷸런스 비즈니스
최근 신문에서 어떤 기사를 읽었다. 장의업자가 구급차 기사와 짜고 시체를 ‘훔쳤다’는 것이다. 발단인즉슨 요즘 경기가 불황이었기에 ‘살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검찰의 무선 통신을 도청했고 덕분에 미리 사고가 나서 사망자가 발생한 지역을 알아낼 수 있었다. 미리 포섭해 둔 구급차 기사에게는 ‘시체 한 구당 십만원에서 이십만원’을 주겠다고 거래를 해 둔 상태였다. 유가족이 사건 현장에 달려오기도 전에, 혹은 생존자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구급차가 나타나 ‘시체’만 싣고 달아난 것이다. 기자는 시체를 ‘도난’했다고 썼다. 사회에서는 이미 ‘시체’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물건’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불과 몇분 전만 해도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던 존재가, 순식간에 ‘딱딱한 책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객관적 권력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물건이 아닌 것’과 ‘물건’으로 구분하려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것도 눈속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모두 다 ‘경제적 가치’가 있으면 ‘물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장의업자는 그들의 논리에 따른다면 ‘영리한 사람’이 된다. ‘염쟁이 유씨’에서 나오는 ‘죽은 자에 대한 마지막 인사-염’이라는 제의는 사라지고 이제는 ‘죽은 자’를 ‘시체’로 격하하며 동시에 장의‘업’의 재원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간극에 대해 사람들이 자신도 ‘저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불안해 할 수 있다. 그러자 객관적 권력은 ‘죽어가는 자’들을 재빨리 ‘산 자’와 분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집’에서 ‘병원’으로 분리해 놓고, 그들에게 ‘치료’라는 이름의 ‘생체 실험’을 가한다. 이제 수술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몇 퍼센트의 성공확률이 있다는 말로 끝맺는다. ‘산 자’들은 ‘죽어가는 자’들을 만나도, 예전에 그들이 알던 ‘밖에서의 그’와 ‘안에서의 그’ 사이에 큰 간극이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말을 삼가고, 눈짓을 하며, 답답해하다가 내일 오겠다며 나가버린다. ‘죽어가는 자’는 이미 ‘죽은 자’로 취급받는 것이다. 최근에 본 일본 영화 ‘엔딩 노트’는 말기 암으로 생이 몇 개월 남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영화 감독 딸의 다큐멘터리였다. ‘아버지’는 딸의 나레이션 속에서 아주 단조롭게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다. 그가 원하던 장례방식이나 유산 분배, 그리고 장례식에 불러야 할 사람들을 정하고 그가 이전에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해본다. 동시에 그의 삶에 대한 ‘회상’이 있고 그 ‘회상’과 함께 ‘후회’가 찾아든다. 그가 살아오면서 못 했던 것들, 놓쳤던 것들에 대한 후회가. 사실 이 ‘훈훈한 영화’에서도 객관적 권력이 도사리고 있지 않냐는 짖궂은 물음도 가능했다. ‘말기암 환자’로서 가망이 없다면, 그냥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 번거롭지 않게 죽을 준비를 마쳐야 한단 말인가? 허나 감독은 아버지의 성격에 대해 재차 설명한다. 아버지는 ‘자기가 할 일은 자기가 해야 성미가 풀리는 사람’이었다고. 그는 자신의 ‘삶’ 그대로 ‘죽음’도 그렇게 진행되길 원했다. 그리고 그는 ‘죽음’을 넋놓고 받아들이는 대신, 상태가 극도로 나빠지는 순간에도 의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최선을 다할 테니 의사 선생님도 최선을 다해달라’고 요구했다. 객관적 권력 사회 속의 의사는 ‘판결’을 내리는 존재였지만, 이 영화 속에서는 ‘죽어가는 자’, 아버지의 ‘생’에 대한 협력자가 된다. ‘죽어가는 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 선 이다. 그는 경계에 서서, 양쪽을 쳐다보며 고요히 미소를 짓는다. 너무 ‘고요하다’고 불평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스나다 도모아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할 것이다. ‘어쩌겠어. 이게 내가 정한 마지막 엔딩인걸.’
아 무 르 Amour
안느는 조르주에게 부탁을 한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할, 그리고 조르주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지켜줘야 할 부탁. ‘병원에 보내지 마’. 조르주는 그 약속을 지킨다. 설령 안느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고 그에게 몇 번이고 다짐을 시켰던 것도 잊어버린 지경에 다다랐을지라도. 조르주에게 안느는 영원히 ‘안느’다. 그에게는 ‘안느’와 함께 한 과거의 시간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그는 그걸 포기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딸 에바는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녀에게 ‘안느’와의 과거는 추억보다는 악몽으로 치닫는다. 현실이 얼마나 끔찍한 지 깨닫게 해주는 악몽인 것이다. 조르주가 에바에게서 안느를 감춘 건 그러한 딸의 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바는 ‘안느’를 이제 과거의 존재와는 분리된 현재로, 하나의 ‘문제’로 인지한다. 그래서 그녀는 조르주에게 ‘엄마’를 ‘병원’으로 보내라고 말한다. 하지만 조르주는 에바의 요청을 거부한다. 그는 과거의 ‘안느’를, ‘안느’를 포기할 맘이 없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안느의 시중을 들고 안느에게 다시 말을 가르치려 한다. 사람들은 ‘과거’를 구식이라고 생각하며 무작정 흘려보내거나 현실을 악몽으로 만드는 ‘쓸데없는 감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거를 붙잡고 있는 것도, ‘유령’을 ‘유령’으로만 만드는 것일 뿐이다. 진정한 애도, 정직하게 관계를 맺고 유령을 잘 보내주기와는 거리가 멀다. 안느의 ‘과거’를 부정하는 에바도, 안느의 ‘과거’를 붙잡고 있는 조르주도 어떻게 본다면 안느의 ‘과거’, 유령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조르주는 끊임없이 유령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햄릿은 그의 어머니와 숙부 간의 결혼을 보고 ‘의심’을 품는다. 그는 아버지의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식을 듣고 망루에 올라간다. 이전까지는 어느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았던 유령은 햄릿에게 ‘말’을 한다. 아니, 햄릿은 ‘유령의 말’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본다면 유령의 말은 유령이 진짜로 말한 게 아니라 햄릿의 ‘의심’이 투사된, 일종의 메아리일 수도 있다. 햄릿에 제기된 수많은 의혹들은 그 메아리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되었다. 조르주 또한 안느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의사소통을 하려고 하지만, ‘죽어가는 자’인 안느-현재의 안느에게 ‘과거의 안느’에만 집착해 말을 거는 것은 소용이 없다. 무엇보다도 그는 ‘과거의 안느’를 온전히 다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캠프가 싫으면 엽서에 ‘싫다’라는 말 대신 ‘별’을 그려 보내라는 어머니의 말을 들었고, 그래서 엽서에 빼곡하게 별을 그려넣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캠프로 그를 찾으러 오지 않는다.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조르주는 그 순간 깨닫는다. 그는 ‘안느’를 사랑했지만, 안느의 ‘과거’는 차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을. 죽음은 하나의 한계였고, 그는 그 한계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결심한다. 그 가 집어든 베개는, 사랑의 어려운 증명이었다. |
|
|
|
|
|
|
24 |
<리뷰어> 2-5강 리뷰 '퍼가요' |
정*혜 |
|
|
|
'퍼가요'
‘나리타 이혼’
새로운 사랑 앞에서 느끼는 갈등은 ‘사랑의 도덕’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프로이트는 리비도(욕망)는 어느 한 곳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다. 바람둥이의 변명거리로 치부해 ‘새로운 사랑’에 대해 합리화하는 정의로 보일 수도 있다. 허나 그렇게 되면 기존의 사랑은 ‘낡은 사랑’이 되어버리고 만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식으로 ‘본능적 변명’을 한다는 건 사실 그 자신에게 독이 든 사과를 주는 것과 같다. ‘근원적 두려움’과 그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관용’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건 동시에 그 자신 또한 그러한 ‘패배의 운명’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돈 지오반니는 카르멘과 달리 그가 거쳐갔던 수많은 여자들에 대한 ‘리스트’를 작성한다. 그 리스트에는 각 나라별, 지역별로 유혹에 성공한 여자들이 몇 명인지 적혀 있다. 이 리스트는 그의 ‘성공’과 ‘실패’를 의미하는데, 그는 리스트에 계속이고 명수를 추가하며 그들을 숫자로 규정하지만 그 추가는 ‘끝이 없고’, 그에게 휴식이란 찾아볼 수 없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교환하는 것이다. 반면 카르멘은 ‘리스트를 작성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낡아진다는 건 동시에 그 자신 또한 낡아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사람들은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하지만 그 ‘영원한 사랑’을 어떻게 획득해야 하는가. 객관적 권력이 판치는 사회에서는 그 ‘영원한 사랑’에 대한 해답마저 재빨리 내놓는다. 그건 바로 ‘결혼’이다. 신데렐라 공식이 판치는 드라마에서는 ‘결혼 후’에 대한 상황을 비추기 싫어한다. ‘결혼’으로 모든 이상적인 사랑이 완성된 것처럼 봉합하지만, 진실은 그 봉합이 ‘서투르고’, ‘언젠가는 안에 있는 것이 터져 나올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결국 ‘첫날밤’을 보낸 신혼부부는 ‘나리타 공항’에서 자신의 트렁크를 가지고 각자의 길로 ‘갈라진다’.
‘나는 봉골레 스파게티를 굉장히 좋아해.’ 아도르노는 ‘사랑의 도덕’은 객관적 권력이 제시하는 시장성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노화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시간은 우리가 부정해도 흘러간다. ‘폐기되어야 한다’는 시간의 강요를 거절하는 것, 내민 손에 내 손을 얹지 않는 것. 그건 바로 상대방에 대한 ‘재발견’이다. 이는 상대방에 대한 ‘온전한 소유’를 향한 욕망이지만 동시에 그 ‘소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몸부림이다. 바르트는 이를 두고 ‘욕망 주체’, 아도르노는 ‘미메시스적 주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재발견’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단순히 끊임없이 상대방을 ‘살펴봐야 하는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에서 나오는 오래된 커플, 지나와 루디는 그들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계속 싸운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불꽃이 점화된다. 허나 그들은 이러한 일에 ‘진저리를 내면서도’ 서로를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
-당신 아무리 그래도 그들에게 봉골레 스파게티를 다 줘버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지? -보면 알게 될거예요. 지나가 말했다. 루디는 절망해서 멈춰 섰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두 팔을 들고 서 있는 그는 말을 연상시켰다. 그는 영원히 말을 닮을 것 같았다. -그럴 수는 없어. 설마 다 주지는 않겠지. 그는 말했다. -내가 주고 싶으면 다 주고도 또 더 줄 수 도 있어요. 당신은 호텔에 가서 먹어요. -나는 봉골레 스파게티를 굉장히 좋아해. 지나는 그걸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 줘버리려는 거야. 루디는 쟈크를 잡고 설명했다. 지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라의 팔을 잡아 끌었다. 남자는 다이아나와 함께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맹세할 수도 있어. 그녀가 오늘 저녁 대신 점심에 봉골레 스파게티를 줘 버리려는 것은 내가 그걸 무지무지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야. 갑자기 내가 봉골레 스파게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가 떠올랐던 거야. 루디는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틀림없어. 쟈크는 이렇게 말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지나는 사라의 팔을 놓고 유유히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산 위의 노인네들에게 스파게티를 더 빨리 가져다주기 위해서 그렇게 뛰어내려간다고 했다.
그러나 과연 이 ‘끝없는 싸움’이 올바른 해답이 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전쟁에 나가다가, 어느 순간 우리는 백기를 들게 되지 않을까. 어떻게 본다면 이 싸움이 진행될수록 둘 다 그 싸움의 본질을 알게 되고, 패턴을 파악하며 그 싸움 자체를 ‘구식’으로 여기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또다른 사람에게 간다면 또다시 처음부터 ‘싸움’을 번복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지속을 억지로 지속시키려는 시도를 하지만, 이는 ‘욕망’이 ‘절망’이 되는 순간이 아닐까. 뒤라스는 그 순간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지나는 루디의 외침에 별반 눈에 띄게 답하지 않았다. 다이아나 말이 맞았다. 그들은 정말 다투었던 것이 분명했다 사라나 쟈크처럼 루디와 지나도 많이 싸웠다. 혹독하고 긴 말다툼은 온 해변을, 밤을 그리고 바캉스를 중독시켰다. 그녀들은 바위 뒤로 가서 옷을 벗었다. 그랬다. 하잘것없는 말다툼인데 삶 전체에 그 독소를 퍼뜨리기도 하는 그런 말다툼들이 있다. 여하튼 그녀가 왔다는 사실에 쟈크는 만족했다. 쟈크와 사라, 그들이 서로 사랑한 것은 7년 전부터의 일이다. 처음과 똑같은 열망이 언제나 변함없이 그들을 결합시켰다. 다이아나는 사라를 기다렸다. 그녀들은 함께 바위에서 내려왔다. 어쩌면 사랑만이 아니라 욕망도 너무나 변치 않고 지속되면 절망적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또 하나, ‘리사이클링’은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있을까? 객관적 권력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는 없다. 실제로 ‘리사이클링’은 자본화로 포장된다. 비료 포대나 헌 모자를 잘라 ‘잇 백’으로 디자인해서 그 가방을 사는 이들로 하여금 ‘환경주의자’, 그린 피플-선량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대신 이전 비료포대 가격보다, 혹은 기존 팔리고 있는 가방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이 돈을 치르게 되면 그들은 ‘최신 트렌드’를 따르는 사람이며 ‘깨친 사람들’이 된다. 하지만 이는 기존 재료에 대한 ‘부정’이 앞따르지 않는가. ‘볼품없는 비료포대가 이렇게 변했다’라는 ‘마법’에는! 사랑의 ‘리사이클링’이 객관적 권력에 오염되는 순간, ‘본래의 사랑’에 대한 부정을 은근히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 ‘나를 사랑한다면 늘 변신해줘’, ‘변해줘’라고.
‘온실’
모 방송사에서 토요일 저녁마다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거기에 자주 나오는 어린이들은 대부분이 ‘영재’거나 ‘천재’다. 그들은 일곱, 여덟, 열자리가 넘는 숫자들을 계산기를 쓰지 않고 암산할 줄 알고 어른들도 추기 힘든 춤을 능수능란하게 춰보이며 천사같은 목소리로 노래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재주에 박수를 치며 호응해준다. 허나 이 프로그램을 계속 시청할수록 깨닫게 되는 건 프로그램이 ‘천재-영재’로 인정하는 ‘재능’에는 어느 정도의 ‘규격’이 있다는 것이다. 일정 형태의 일정 상태에 도달해야만 ‘재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행사’를 뛰며 어린 나이에 큰 돈을 벌면 ‘효도’하고 ‘영재’로 기억될 수 있다. 허나 과연 그게 진정한 영재일까. 영재는 결국 고립된다. 두 방향의 전문성으로 사회에서 ‘전문화’되어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거나 반대로 내적으로 ‘전문화’되어 자폐증으로 치부되거나. 한국에서 ‘자폐증 환자’들의 어떤 분야에 대한 능력이 ‘영재’로 인정된다기보단 ‘기이한 현상’으로 인지되는 이유는 그들이 객관적 권력 하에서 경제적으로 쓰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중 한 현상은 아주 미묘한, 비판하기에는 좀 미묘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쉬운 글에 대한 강박’이다. ‘글을 잘 쓴다’는 기준은 이제 ‘쉽게 쓴다’는 것이 되어버렸고, ‘어려운 글’은 ‘잘난척한다’며 비판을 받는다. ‘단번에 술술 읽을 수 있다’는 것, 그게 과연 좋은 것이기만 할까. 여러번 읽는다는 것-끊임없이 독해하는 것. 이는 ‘헛되어 보이지만’ 끊임없는 소통의 시도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피네건의 경야’는 해독불가능하다. 그들의 기준에 의해서라면 ‘나쁜 글’이다. 그런데 왜 계속 읽히는가. 오히려 단번에 읽히면 ‘좋은 글’이라는 건 그만큼 빨리 파악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고민하는 순간’을 빼앗아가는 것일수도 있다. 한 권의 책을 ‘해치우면’ 또다른 책을 사게 되고, 그러면 경제적인 이득이 생긴다. 이건 시장성에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 영재가 둔재로 변하는 건 객관적 권력 하에서, 그리고 그 개인의 ‘양심’-모든 것에 대한 배반 하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과거 ‘온실’은 귀한 것을 보존하는 곳이었다. 그 귀한 것은 이국에서 온 식물이거나 그가 사랑하는 꽃일 수 있었다.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했고 들어선 순간 기쁨을 선사했다. 허나 이 온실은 경제적인 가치를 따질 수 없었고 그렇게 따지는 건 ‘소유주’를 화나게 했다. 허나 이제 온실은 경제적인 이익이 꼭 사료되어야 하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그건 소유주의 태도 변화가 아닌, ‘온실에 대한 보상’이 가능해졌다고 여기는 ‘보험사’의 ‘보험 액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열심히 심고 가꾼 딸기가 냉해로 인해 죽으면, 우리는 슬퍼하지만 보험에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어차피 그들이 몇백, 몇천을 보상해 줄 것이라고. 지폐로 온실을 상실한 슬픔은 봉해진다. 재능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 ‘보상기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불행해질 것이다. ‘불행’은 ‘행복’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 사회에서, ‘모순’을 인지하지 않는 사회에서 내미는 보상금은, 그대로 우리의 통장에 입금되어버린다. 그러나 과연 그 ‘보상’이 우리를 위해, ‘우리를 위로하는 데’ 쓰일까? |
|
|
|
|
|
|
25 |
<리뷰어> 2-4강 리뷰 아무르 |
정*혜 |
|
|
|
아무르
조 길리스들의 죽음
미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들 한다. 순수미, 백치미, 평범미 등. 무슨무슨 미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미디어 뿐만 아니라 그 미디어를 시청하고 듣는 이들조차도 어떻게든 '미'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 왜? 그들은 혜택받기 때문이다. 그게 어때서? 그 혜택에 대한 이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이든 증오든 '관심'을 받고 텔레비전에 '출연'한다. '일반인'이라는 명칭으로 구분지어가며 그들을 특권화하려는 건 동시에 그들이 가진 '아름다움'이 또렷해지면서 '물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그들을 선망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 물화된 '아름다움'을 잘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잘 활용하지 못하면 그들은 금새 뒤쳐지고 잊혀진다. 브라운관에서 빛나고 있는 그들은 환하게 웃는다. 그들은 마치 '행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비틀거리는 순간', '행복'은 눈녹듯이 사라지고 만다. 특히 여자 연예인들에게는 '결혼설'과 '열애설'이 '비틀거리는 지점'이다. 가장 큰 화두가 된다. 그들이 누구와 만나느냐에 따라, 또 그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그들의 평판과 미래가 달라진다. 결국 결혼은 그들에게 또다른 '재테크'가 된다. '행복한 미인' 혹은 '불행한 미인'이 되는 것, 미래는 그들이 어떤 버튼을 누르느냐에 달라진다. 사람들은 이 선택을 두고 그들을 '똑똑하다'거나 혹은 '영 허술하다'고 평하곤 한다. 동시에 그들의 행복과 불행은 모두 다 그들이 자의적으로 얻은 것, 그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사유재산'이 된다. 이 '사유재산'은 영원히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들이 그들의 아름다움을 조리있게 써서 '행복'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치자. 하지만 그들의 아름다움은 '순간'에 그치지 않는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하거나 다른 '미'를 탐색한다 해도 어느 '순간'에 이르면 한계가 찾아오게 된다. 결국 끝에 가서 그들은 깨닫게 된다. 그들이 손에 든 와인 글라스에 비치는 '세상'은 사실 그들의 소유가 아니었다는 것을. 오히려 그들이 '세상'의 '소유'였다는 것을. 이를 인식한 순간부터 그들은 급속도로 늙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물건도 영원히 쓰지 못하게 한다. 언젠가는 새 물건이 헌 물건이 되게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장으로 던져 버리게끔 한다. 결국 그들은 쓰레기장에 처박히게 된다. 하지만 '그렇구나'라고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한 때 맛보았던 그 '영원한 행복'의 약속이, 무색하게 변해버렸다고 해서 곧장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들은 계속이고 깨닫고 부정하면서 또다시 깨닫는다. 부정하면 그들은 '구식'이 된다. 하지만 깨닫는 순간은 더 잔인하다. 그들은 '쓰레기'가 되어버린다. 빌리 와일더의 '선셋 대로'의 노마 데스몬드가 방아쇠를 당긴 건 단순히 조 길리스에 대한 원한 뿐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또다시 그 깨닫고 부정하는 과정을 번복하는 것뿐이다. '게임은 끝났는데 과거의 영광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녀는 저무는 해 끝에서 그녀가 예상하지 못하는 또다른 내일이 오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택한 그 방법은 또다시 그녀를 깨닫게 하고, 또다시 그녀를 '쓰레기'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그렇게 '쓰레기'가 되고서도 그녀는 생생하게 과거를 기억해낼 수 있다. 그 과거들이 그녀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그녀는 조 길리스들을 죽인다. 조 길리스는 노마 데스몬드의 '불행'을 떠올리게 한다. 노마 데스몬드는 우리가 생각하는 '불행한 미인'일까? 그녀는 그녀가 '영원한 행복'을 누렸다고 생각했을 당시에 '행복한 미인'이었고 그 누구보다도 재테크를 잘했다. 허나 재테크의 끝은 파산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귀한 아름다움을 지켜내지 못했다. 사실 그녀를 불행하게 만드는 건 조 길리스가 아닌 노마 데스몬드 자신이다. 사회는 모든 운명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린다. 이제 운명은 운명이 아닌 합리적이고 계산가능한 등식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그녀는 그녀의 '영리함'으로 인해서, '불행한 미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눈을 감겨줄 뿐-행복한 왕자
'행복한 왕자'는 행복해 보였다. 영롱하게 빛나는 사파이어로 된 눈과 루비로 장식된 검집, 그리고 온 몸이 황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한 여자애는 천국으로 된 계단이 황금으로 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여자애에게는 ‘행복한 왕자’야말로 천국에 가장 가까운, 혹은 천국에 다다라 있는 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허나 어느 날 한 제비가 무심코 그의 혼잣말을 듣는다. ‘행복해’가 아닌 ‘불행해’라는. 제비는 그의 ‘사랑’을 도와준다. 그가 점점 초라해져 가는 모습을 보며 제비는 그를 더 사랑하게 되고 그에게 빛나는 모습을 다시 되찾아주겠다고 수없이 약속한다. 허나 제비는 계속 떠나지 못하고 왕자의 곁을 맴돌다가 죽음을 맞는다. 납 동상이 되어버린 ‘추한 왕자’와 싸늘하게 얼어붙은 제비 한 마리. 동화는 단순히 ‘가진 자’의 연민과 선행의 올바른 방향을 가르치고자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느님의 나라에 다다를 수 있다는 백지 보증서를 내놓는 것도 아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왕자는 점점 초라해질수록 행복해하고, 주면 줄수록 자신을 아까워하지 않고 더 주려고 애쓴다. 왕자는 그렇게 세상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는 자신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세상이 그에게 되돌려 준 건 멸시뿐이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불행한 미인’들은 그런 이들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건지지 못한 ‘영리하지 못한 이들’. 그러나 그런 이들에게서 우리는 되려 아름다움의 끝자락을 보게 된다. 우리가 잊어버렸던 것들. 사유의 끝에서 보게 되는 끝나지 않는 것, 스스로 무너지는 몰락을.
끝나지 않는 소꿉놀이
권리와 정의는 서로 충돌한다. 마치 평생 원수라도 진 것 마냥 천천히 거리를 좁히면서 서로에게 다가가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 떨어진다. 타인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보답받을 권리와 상대를 존중해야만 하는 정의.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한 두 요소가 서로 일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아무르’의 텍스트는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으며 되려 누군가가 비명이라도 지를라치면 입을 틀어막곤 했다. 안느는 반신불수가 된 뒤부터 꼿꼿이 몸을 세워 앞만을 바라본다. 마치 자신의 결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이, 초연한 태도로. 남편이 집을 잠시 비운 새에 그녀는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에게 ‘한심한 짓’이라고 몰아세우며 끊임없이 그녀를 감시한다. ‘병원’에 보내지 않는 대신, 그녀를 살려두기 위해 애쓴다. 그녀가 더 이상 나아지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점점 영화가 진행되어갈수록 그 시도들이 아침에 하는 다큐멘터리 방송처럼 희망과 행복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 시도들은 점점 짙어져 가는 어둠 속에서 손을 휘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간신히 버티는 것’.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행동이다. 그리고 그가 안느에게 했던 약속, ‘병원에 보내지 않겠다’는 것. 허나 안느와 안느의 남편이 생각했던 그 이후의 말은 달랐다. 안느는 ‘병원’이라는 장소, 끊임없이 그녀에게 억지로 생을 이어가게 할-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닌-공간이 두려웠고 온전하게 생을 끝내고 싶어했다면, 남편은 그 말을 ‘자신 안에서의 거주-보호’를 요청하는 것으로 들었다. 이는 카르멘을 잡아 자신의 가슴 안에 가두어 두려 했던 호세의 행동과 비슷하다. 그의 선의는 사실 선의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온전한 소유와 보호, 품안에 비둘기를 붙잡아 놓고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해도 비둘기는 언젠가는 날아가야 한다. 그가 가두고 있었던 건 안느 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안느를 위해 진정으로 해줄 수 있었던 건 안느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머리를 빗겨주면서 보여주는 ‘소유의 행동’이 아니었다. 아무리 안느에게 ‘공감’을 하려해도 그는 끊임없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 벽에 부딪칠 뿐이었다. 그가 안느에게서 본 건 ‘안느’가 아니라 그의 ‘고집’이자 ‘욕심’의 거울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안느를 풀어준다. 그녀가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던, 부족했던 한번의 발돋움을. 그리고 손짓을.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꽃들로 방안을 채우고 가장 예쁜 옷으로 갈아입혀 주는 것. 다시는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게 방문을 테이프로 막아주는 것. 그는 안느를 ‘풀어주고 난 뒤’, 그 뒤에서야 진정한 안느를 되찾는다. 안느는 이제 그에게 말한다. ‘나갈 준비 안 해?’ 그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이기 위해 재빨리 외투를 입고 따라 ‘나간다’.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순간 사랑이란 것은 상대방을 가두고 그 자신마저 옭아맨다. 사랑의 권리가 폭력이 되는 순간이다. ‘아무르’가 두려운 건, 사람들이 생각했던 클리셰-노년기에 완성된 완전한 사랑-를 뒤집기 때문이다. 사랑은 끊임없이 ‘발명된다’. 권리의 주장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호소로서. |
|
|
|
|
|
|
26 |
<리뷰어> 2-3강 리뷰 모순의 운명 |
정*혜 |
|
|
|
모순의 운명
모순의 운명
골룸 애덤 스미스는 자유주의적 경제를 움직이는 건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르주아들이 시장의 자유를 오염시킬까봐 경계하며 정부와 국민들이 이 ‘보이지 않는 손’, 경제적 자유를 인지하고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나 현대는 어떤가. 경제 뿐만이 아니다. 이제 이 사회를 움직이는 것의 다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는 단순히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다는 게 아니다. 인간의 에너지인 욕정이 객관적 권력에 의해 억압되고 병리화되면서 쓸데없는 ‘정념’이 되어버렸다. 과거 자연과 다른 ‘조화’, ‘프랑스식 정원’을 꿈꾸며 ‘보이지 않는 손’을 찬양했다. 하지만 지금은 도리어 정원사의 가위가 ‘미’가 아닌 약육강식의 논리를 추구하며 자연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사람들은 이제 어떤 이상이 아닌 정념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정념의 자유’를 주장하는 그들은, 오히려 자유라는 가치를 왜곡하고 그들 자신을 정념으로 밀어버린다. 진정한 자신은 그 밑에 깔려 찌그러지는 것이다.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섬세한 나’는 찍 소리도 못하게 된다. 그리고 남은 헐벗은 욕정들은 두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사회는 이러한 참극을 가리기 위해 ‘옳은 방향의 정념’과 ‘옳지 않은 방향의 정념’으로 둘을 가른다. 옳지 않은 방향의 정념은 욕정주의자로, 어떤 구분도 없이 달려드는 것이다. 그들을 보며 우리는 ‘짐승’ 같다고 한다. 그리고 옳은 방향의 정념은 지극히 우리가 ‘열정적이고 자신의 일에 집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이들을 닮자고 선동하는 것이다. 그게 설사 권력이든 돈이든. ‘부자 되세요’가 제일의 덕담이 되면서 이러한 선동은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골룸은 조그맣고 반짝거리는 반지를 정념의 대상으로 삼는다.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지하로 숨어들어 그 자신만의 세계에서 행복해 한다. 그에게는 모든 이들이 악당이다. 그의 반지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그의 반지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도 다 반지를 빼앗아 가버릴 악당인 것이다. 허나 반지만을 좇은 결과, 골룸에게 남은 건 무엇이었는가? 어둠. 그러면 끝내 다시 되찾은 반지가 그에게 준 건 무엇이었는가? 빛, 그리고 죽음.
소녀들의 심리학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을 위한 핀업걸 포스터가 유행했다고 한다. 허나 전쟁이 점점 길어지자 군수공장의 인력이 부족하게 되자 국가에서는 핀업걸들로 전향한 여자들에게 ‘강인한 여자’의 포스터를 보여주었다. 여성들은 ‘강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남성들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한 ‘여성’들이었을 뿐이다. 당시 공장에서 일했던 여성들도 많았고 남자들처럼 머리를 짧게 깎는 숏컷도 유행했다. 하지만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여성에 대한 차별은 존재한다. 왜일까. 정숙한 마리아를 강요받다가 직업 여성이 되고, 전문직 여성이 되어도 그들에게는 여전히 유리천장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또한 거기에서 내려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복수의 정신은 미로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 원한을 풀 상대는 미로 속에서 같이 헤매다가 마주치는, 똑같은 방황자 뿐이다. 소녀들은 강자와 약자를 가린다. 그리고 약자에 대한 흑색선전을 마구 퍼붓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지극히 ‘온순하고 착한’ 얼굴을 보인다. 이를 두고 남성들은 ‘가증스럽다’거나 ‘무섭다’고 말한다. 허나 이렇게 약자를 배제하면서 살아남는 방식은 누가 가르쳐 주었던가? 만약 그 약자가 강자의 자리로 올라오려고 시도한다면, 그 시도는 성공할까? 안타깝게도 사다리를 빼는 법까지도 배웠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추궁’이 들어오면, 그들은 ‘정숙한 여인’의 표정을 하고 묻는다. ‘저는 그러지 않았는데, 대체 ‘무엇이’ 잘못된 거죠?’
내 손을 내게 남녀 간의 섹스란 없다고 단언한 라캉의 말마따나 여성들이 첫경험에 대해 느끼는 건 어떤 설레임이나 의기양양함이 아닌 두려움이다. 수많은 드라마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던 클리셰들은 진부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회에 통용되는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고 하면서 울음을 터뜨리면 남자가 답답한 듯 담배를 뻑뻑 피운다. 그리고 잘하면 결혼, 거기서도 여자는 끊임없이 시댁의 눈치를 봐야 한다. 잘된 것만은 아니다. 까닥하면 애를 지우니 마니 소란을 피운다. 하이라이트는 바로 남자의 어머니다. 돈을 던지면서 ‘앞날이 창창한 우리 애를...’ 단순히 한국만의 정서일까? 그런 것만은 아니다. 대다수의 여자들이 이상형으로 꼽는 남자의 요건 중 하나가 ‘날 지켜줄 수 있는 남자’라는 것만 봐도. 이는 그 ‘보호막’ 아래에 자신이 기꺼이 숨겠다는 의사가 아닌가. 돈 지오반니는 시골 처녀에게 ‘당신의 손을 내게’라고 아름다운 아리아를 부르면서 유혹하려 한다. 그가 내놓는 ‘유혹’은 커다란 성과 재력, 그리고 신분 상승이다. 그녀는 손을 내밀 뻔하다가 이내 지오반니에게 버림받은 여자의 제지로 인해 손을 거둔다. 하지만 카르멘은 다르다. 그녀는 돈 지오반니가 그렇게 부르면서 손을 내밀었다면 되려 내밀었던 자신의 손마저 거두며 ‘내 손을 내게’라고 부를 여자다. 그녀는 자신을 ‘보호해 줄 남자’를 원하지 않는다. 그녀가 돈 호세와 마주쳤을 때, 그녀는 투우사 카스티요의 등 뒤에 숨는 대신 호세에 대한 짜증스런 감정을 마구 쏟아낸다. 돈 호세가 그녀에게 내미는 모든 카드는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러니까 그를 진정한 그녀의 ‘보호자’로 생각한다면. 허나 카르멘은 이를 거부한다. 그녀가 바람둥이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사랑’이란 한 마리의 새처럼 아름다운 것이다. 새는 풀려나 있을 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만약 그 새를 억지로 잡아 가둔다면 찢어지는 절규로 화답할 것이다. 돈 호세에 대한 그 모든 공격은 바로 ‘그녀 자신의 것’이다. 그렇기에 카르멘과 돈 호세는, 방패와 칼처럼 자신을 '향해' 서로에게 부딪칠 수밖에 없다. 과연 어느 쪽이 이길까. 이는 '어리석은 짓'에 불과할까. 결국 방패는 칼에 뚫리고 말까. 아니면 칼은 방패로 인해 휘어지고 말까.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카르멘의 결말이다. 카르멘은 죽어가면서 '후회'하지도 않고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는다. 그녀는 지극히 옳다. 그녀에게는. 그리고 그걸 바꿀 마음도, 이 죽음을 돌이킬 마음도 없을 것이다. 카르멘은 보호자를 바꾼 게 아니라, ‘다른 가지’로 날아가 앉았을 뿐이기에.
|
|
|
|
|
|
|
27 |
<리뷰어> 2-2강 리뷰 마르셀은 마르셀일 뿐이다 |
정*혜 |
|
|
|
마르셀은 마르셀일 뿐이다
책 읽어주는 여자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기준 중 하나는 ‘소통 가능 여부’이다. 이는 바벨탑의 언어처럼 ‘하나의 언어’를 추구하거나 ‘다양한 언어의 습득’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소통의 언어는 ‘문자’ 뿐만 아니라 신체언어도 포함하고 있다. 과거에는 문자를 배우지 않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읽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소통의 언어는 문자언어의 습득을 강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근대화, 문명의 도래 이후 언어와 신체의 간극이 생겼다. 언어와 신체 간의 근본적인 친화력이 부정되는 것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어린 마르셀은 어머니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요청한다. 단순한 동화책이 아닌 자유연애소설, 조르주 상드의 ‘프랑수아 샹피’를. 왜 굳이 어머니에게 그 책을 읽어달라고 말할까? 어머니는 단순히 그 책을 그대로 읽는 게 아니라 어떤 ‘결락 지점’을, 일종의 자체 검열로 몇몇 부분을 빼고 읽는다. 아무리 거짓말에 능수능란한 사람이라도 ‘바로 앞에서’ 책을 읽으면서 ‘결락 지점’을 온전히 메꾸면서 읽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어머니가 그 ‘결락 지점’에서 느끼는 부적절함-부끄러움은 어머니가 마르셀 앞에서 감추고 싶어하는 육체성, 그녀 자신이다. 마르셀은 어머니의 육성에 의해 그 책을 ‘읽고’, 그 어색한 ‘지점’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채워나가면서 ‘프랑수아 샹피’를 다시 쓴다. ‘침대 머리맡’에서 마르셀은 자신의 첫 책을 ‘쓰면서’ 첫 성적 경험을 겪게 되는 것이다. 플로베르의 ‘욕망의 글쓰기’ 또한 심해에 가라앉아 있던 육체성들이 ‘들끓으면서’ 휘몰아치고, 그로 인해 수많은 문장들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겨우겨우 막으면서-허나 계속 막게 되면 언젠가는 상상 못할 압력으로 터지게 되는 법이다-조금씩 물줄기를 들여 보내는 것으로써 작용한다. 그러나 현재 개인은 이제 골방에 틀어박혀 소리 내지 않고 눈으로 문자를 읽는다. 육체는 객관적 권력 하에 관리되고 억압되어야 할 존재가 된다. 이 ‘분열증’으로 인해 인간은 ‘언어적 불감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일종의 ‘노스탤지어’ 때문인지 몇몇은 ‘오디오북’의 출간을 도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도’, 누군가가 책을 읽어주는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책을 읽는다는 시도는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오디오북의 선결 요건은 우선 ‘청결’이다. 발음 뿐만 아니라 목소리, 속도까지 ‘청결’해야 한다. ‘청결’-이 결벽증은 결국 인간적인 것의 배제, 기계성을 요구한다. 반면 ‘낭독극장’의 경우 의외로 선전했는데, 이는 오디오북과 똑같이 ‘책을 읽어주는 것’이었다. 다만 배우들이 직접 책을 들고 나와 감정을 담아 읽는다는 것, ‘현장성’이 있다는 것이 달랐다. 처음에는 ‘청중’들을 집중시키기 위해 텍스트 내의 ‘효과음’을 집어 넣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남는 건 배우들의 목소리뿐이다. 그들은 기계와-그리고 전문성우들과 다르게 ‘망설이고’ ‘실수한다’. 그리고 아무 장치도 되어 있지 않은 텅 빈 무대는마르셀의 ‘투사 체험’처럼 내적 텍스트의 외적 공간이 된다.
욕쟁이 할머니 체인점 100호 달성을 축하하며
천박하고 교양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모님들은 자신들만의 ‘언어 습관’을 만든다. 이 ‘은어’는 기존 언어와는 다른 의미를 내포하며 그로 인해 ‘급’이 올라간다. 반면 다른 ‘은어’, 하층민들의 ‘욕설’은 ‘급’이 내려간다. 상욕들의 본래 의미를 담아서 누가 창녀인지 아닌지 사실여부를 가리지 않는, ‘무의미한 언어’들. 상층부는 하층부를 혐오한다. 그렇기에 ‘접촉’을 꺼린다. 수준이 맞아서 못 놀겠다는 건 변명에 불과하다. 혐오란 자신과 다르다고 굳게 믿고 있던 사람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까봐 지레 겁을 먹는 데에서 온다. 그들은 하층부와 ‘접촉’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경고’하기 위해 직접 전화하는 대신 통지서를 보낸다. 결국 하층민들이 제대로, 넘치게 받을 수 있는 건 언어뿐이다. 그들은 굶주렸기에 언어라도 대신 씹어 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홧병’으로 죽어버릴 것 같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언어와 육체의 ‘근접성’은 이 욕설에서 발견된다. 언어는 물질화가 되고 육체의 홧병은 언어화가 된다. 이 ‘배설’의 과정을 두고 상층부는 또다시 하층민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대중 문화-뉴스, 예능에서 욕설을 금지하는 반면 영화에서는 허용하는 이유는 ‘객관적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서이다. ‘교양어’와 ‘현실의 언어’의 간극이 아니라, ‘교양어’와 영화에서 주로 그려지곤 하는 ‘하층민들의 언어’와의 간극이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욕쟁이 할머니의 국밥집’은 힘들지만 정이 많고 각박하지만 이웃을 챙기는 따뜻한 서민층을 표방한다고 한다. 그래서 꼭 어떤 특정한 연말에는 텔레비전에서 인기가 좋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정다움’의 표상이 된다. 평소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좋은 음식점의 ‘조건’은 ‘서비스가 좋고’ ‘깨끗하며’ ‘친절해야 한다’는 세 가지로 나타난다. 소비자들은 자신의 돈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야만 한다’. 반면 ‘욕쟁이 할머니’가 있는 음식점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인기가 좋다. 앞에서 말한 낭독극장에서의 ‘언어-육체’ 간의 노스탤지어 때문인가? 이는 사실 ‘객관적 권력’의 ‘보이지 않는 손’에 가깝다. 소비자들은 욕쟁이 할머니가 표상하고 있는 ‘이미지’를, 정다운 고향 어머니의 이미지를 사고자 한다. 그래서 모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풍자해 ‘욕쟁이 할머니 체인점’을 소재로 내놓기도 했다. 어떤 평범한 할머니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권력이 제공하는 ‘이상적 언어’를 자기 것인 양 포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또다시 ‘속고’, 할머니는 텔레비전에 나올 수 있다. 결국 진정한 욕쟁이 할머니가 아닌 카피된 욕쟁이 할머니들의 시뮬라크르들만 들끓게 되는 것이다.
사냥터에서
인터넷 공간에서는 하루에도 수백번씩 큰 ‘싸움’들이 벌어진다. 그 중 대다수는 사실 남녀 편가르기로 인한 싸움이 많다. 그 중 특히 극심하게 ‘편’이 갈리는 주제는 ‘군대’와 ‘결혼’이다. ‘남자는 군대에 가서 나라를 지켜야만 하고’, ‘여자는 아기를 낳고 시부모님과 남편을 잘 돌봐야 한다’. 마치 트로이의 목마처럼 ‘말을 내뱉는 건 쉬우나’ ‘도로 되돌릴 수 없다’. 과거 조선의 경우 남존여비의 사상이 있었고, 이는 근대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로 인해 ‘여자’는 ‘약자’라는 풍조가 있었다. 허나 아도르노의 ‘손바닥 뒤집기’를 생각해 본다면, 과연 ‘강자’의 위치를 유지해야 하는 남성들은 어떨까. 그들은 ‘강한 남성’을 연기해야 한다. 그게 아니면 ‘약한 남성’.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두 유형’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믿는다. 결국 ‘터프 베이비’들은 ‘무섭다’거나 ‘아프다’라는, 솔직한 고백을 경멸하게 된다. 이 ‘경멸’은 타인을 향한 화살이지만 동시에 그 자신을 향해 겨누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도마조히즘은 스스로를 더 몰아붙인다. 한 때 ‘강한 아버지들’이 얼마나 ‘약한가’를 보여준 사건이 있었다. 바로 IMF 사태였다. 수많은 ‘샐러리맨 아버지’들은 순식간에 ‘낙오자’가 되었고 카프카의 ‘벌레’가 되었다. ‘경제적 권력’은 그들의 정체성마저도 하락시켰다. 이는 그들을 둘러싼 주변인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그 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에게 그들 자신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는 그들에 대한 구제책을 마련해 놓지 않는다.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권력의 회복’은 오로지 ‘경제적인 능력’을 재탈환하는 것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로 인해 ‘샐러리맨 신화’에 이어 ‘창업 신화’의 시대가 왔고, 이제 또다시 그 신화의 막이 내린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모 유명 교수의 말에 반박하듯 몇몇 사람들은 ‘아프다면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고 외쳤다. ‘아프다’=‘청춘이다’라는 공식을 악의로 만든 것이 아니기에 적잖이 당황했을 테지만, 이와 같은 반발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기존 허무맹랑한 일반화들-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수능 올 1등급은 교과서만 보고 예습복습만 잘하면 됩니다. 대학 가면 살 다 빠져-은 우스갯소리로 치부되는 반면, 왜 그 일반화에는 날카롭게 반응을 했던 것일까. 이는 ‘일반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누군가에 대한 반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
|
|
|
|
|
|
28 |
<리뷰어> 2-1강 리뷰 달팽이도 화낸다 |
정*혜 |
|
|
|
달팽이도 화낸다
랜슬롯 이야기
‘아서왕 이야기’는 중세 로망스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아서에게만 뽑히는 엑스칼리버, 성배를 두고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들, 아름다운 요정과 마녀들. 허나 이 이야기 중에서 진정한 ‘로망스’는 바로 기사와 고귀한 숙녀, 랜슬롯과 귀네비어 사이에서 새어나온다.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주군의 아내라는 이유로 차마 다가설 수 없어 늘 한발짝 뒤에서 바라보는 랜슬롯과 아름다운 귀네비어, 허나 랜슬롯은 분명 귀네비어를 차지할 수도 있었다. 귀네비어는 랜슬롯에게 마음이 있었고 이를 표시했지만 랜슬롯은 오히려 ‘몸서리를 치며’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왜 그랬을까? 그래야만 ‘로망스’가 완성되기 때문일까? 랜슬롯이 거부해야만 아서왕 이야기는 ‘전설’이 될 수 있다. 만약 랜슬롯이 귀네비어의 마음을 확인하고 받아들였다면 아서왕 이야기는 아서왕 이야기가 아니라 랜슬롯 이야기로 바뀌어 버렸을 수도 있다. 랜슬롯은 그가 처한 ‘상황’에 얽매여 있었다. 사회의 관습과 예절, 그리고 그가 꿈꾸던 이상에. 눈에 보이지 않는 밧줄들이 그를 얽어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황들은 어떻게 본다면 쉽게 ‘격파’하고 나갈 수 있을 것들이었다. 그러나 랜슬롯에게는 ‘그게 당연했고, 응당 그래야 했고, 그럴 방법밖엔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가 처한 물이 어떤 모습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이 물 밖을 나가면 숨쉴 수 없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귀네비어와의 사이에 칼을 두고 잠들었던 것이다. 현재 사람들은 ‘아서왕 이야기’를 읽으면서 랜슬롯이 사로잡혔던 그 ‘강박’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그를 숭고하게 여기거나 혹은 머저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도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매트릭스’처럼 일상에서 자신을 튕겨내는 충격이 없는 한, 그 상황이 아주 당연한 것이고 거기를 벗어나면 살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이제 너무 익숙해진다. 호랑이 사장보다 친절한 사장이 더 무섭다는 말마따나 호랑이 사장 앞에서는 늘 긴장하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지만, 친절함 앞에서는 어느새 경계를 풀고 흐물흐물하게 무뎌져 버린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뒤섞인다’. 무엇과?
달콤한 인생
명절 때만 되면 꼭 나오는 영화 레퍼토리가 있다. ‘조폭 영화’다. 가난하고(혹은 가난하지 않고) 착한 주인공이 나온다. 그리고 그 주인공을 애지중지 여기는 보스가 있다. 그리고 어느 날 보스가 평상시와는 다른 부탁을 해온다. 주인공은 그 부탁을 선뜻 들어주기로 한다. 어떤 파급이 닥쳐올 지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보스에게 버려지고 주인공은 뼈아픈 복수를 결심한다. 전형적인 시나리오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유치하다거나 저급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조폭 영화는 계속 나오고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보는 관객들마저도 저급해지는 걸까? 그들이 저급하기에 조폭 영화를 계속 보고 조폭 영화가 계속 양산되는 걸까? 이런 식으로만 치부해 버리고 조폭 영화를 저쪽으로 밀어 놓으면, 그러면 어떻게 될까. 애당초 왜 조폭 영화가 ‘나오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을까? 과거 사람들을 ‘온순하게’ 만들기 위해 한 정부에서 쓴 방책, 3S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었는가. 우리는 예술을 진실을 밝히는 등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예술성’이 높은 작품들을 더 선호하고 사랑한다. 허나 등불은 모든 것을 다 비출 수 없다. 어둠 속에서 등불은 자신의 빛이 허용하는 곳까지만 비추고 그에 따라 인식되는 풍경은 사뭇 달라진다. 친근한 동네 마실길이 될 수도 있고 곧 있으면 유령이 튀어 나올 것 같은 지옥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어둠속에서 길을 밝힐 수 있는 것이 등불이지만, 동시에 어둠 속에서 길을 잃게 할 수도 있는 것이 등불이다. ‘조폭 영화’의 현상도 그저 ‘저급’으로만 치부하고 넘어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보스에게 복수하는 방식은 보스가 성공했던 방식과 똑같다. 주인공은 똑같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이지만, 그 또한 결국 ‘폭력의 세례’를 받는다.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에서 주인공은 보스에게 ‘복수’한다. 하지만 그는 그 뒤에도 그닥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혼란스러워한다. 그가 원했던 건 사랑인가, 아니면 보스에게 다시 인정받는 것이었나? 애당초 그는 보스를 죽이고 싶어했던가? 그는 결국 보스와 똑같이 피를 묻히고 선 ‘도플갱어’가 아닌가? 그는 보스를 믿었지만 보스는 그를 배반하고 버렸다. 그는 그 자신이 ‘보스’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믿었다. 주인공은 죽고 영화는 비극으로 끝난다. 그리고 ‘장자몽’이 나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나비가 나인가, 아니면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던 모든 것이 마치 꿈처럼 허무하게 흩어져 버린다. 복수에 성공했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면 승리한 건 누구인가? 챔피언의 메달
조폭영화인 ‘초록물고기’는 이제 과거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조폭영화도 똑같지만은 않다. 이제는 그 시선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부하’가 아닌 ‘보스’가 주인공이 되었고 ‘비극’보다는 ‘희극’에 가깝다. 이제는 부하의 애환이 아닌 보스의 애환을 다룬다. ‘보스’의 정당한 자리를 부하들이 뺏으려고 하지만 결국 뺏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남기면서.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애당초 보스의 자리가 성골과 진골을 판별하는 것도 아닌데. 아도르노의 ‘객관적 권력’은 오래 머물러 있는 ‘왕’의 정당화를 시도한다. 씨름으로 치자면 ‘굳히기’ 쯤이 될 것이다.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달팽이’는 손가락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 느리다. 더 커다랗고 가벼운, 공기같은 이 ‘무언가’는 소리없이 다가올 것이다. 아니면 달팽이의 집 안에 계속 처박혀 있는 것은? 그대로 처박혀서 죽어버린다면 보기 좋은 ‘화석’이 되어버릴 것이다. 결국 달팽이는 메달이 되어 버린다. 우리가 그들에게 선사하는 승자의 메달. 결국 계속 기어나올 수밖에 없다. 혹자는 ‘어차피 맞을 줄 알면서 왜 기어나오냐’며 한심하게 여기지만, 맞았을 때 온 몸이 바짝 서고 딱딱하게 굳는 건 그저 ‘놀라서’, 그리고 ‘공포’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또다른 상황에서도 온 몸을 긴장으로 바짝 세운다. 언제? ‘분할 때’.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