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가을,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캠퍼스에는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주디스 버틀러 교수의 연구실 창문으로 따스한 오후 햇살이 스며들었다. 책장들은 니체, 푸코, 데리다, 보부아르의 저서들로 가득했다. 연구실 한쪽 벽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버틀러는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원고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사유의 흔적이 역력했다. 펜을 잠시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녀의 눈에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한 드랙 퍼포머(드랙 퍼포머(Drag performer)란 성별 표현을 예술적으로 과장하거나 반대로 표현하는 공연 예술가다. 가장 잘 알려진 형태는 드랙 퀸으로, 남성이 여성성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이며, 드랙 킹은 여성이 남성성을 표현하는 경우다. 버틀러는 이러한 드랙 퍼포먼스가 젠더의 모방적 구조를 드러내고, 젠더가 본질이 아닌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수행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로 사용했다.)가 보였다. 그 모습은 우연히 그녀에게 중요한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젠더는 본질이 아니라 수행이다..." 버틀러는 중얼거리며 다시 펜을 들었다. "우리는 젠더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 행위를 통해 '수행'하는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메모를 했다. "여성성과 남성성은 자연적 범주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각본이다. 우리는 그 각본에 따라 연기한다. 그리고 그 연기를 반복함으로써 젠더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버틀러는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의 유명한 말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었다. 젠더는 단순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수행되는' 것이었다.

"모방과 반복을 통해 우리는 젠더 정체성을 형성한다. 하지만 그 모방은 항상 불완전하며,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 저항과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가 펼쳐져 있었다. 푸코는 권력이 어떻게 몸과 성을 구성하는지 분석했지만, 버틀러는 젠더 자체의 수행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문화적 구성을 넘어서는 급진적 재고였다.

"드랙은 젠더의 모방적 구조를 드러낸다." 버틀러는 계속 적었다. "드랙 퍼포먼스는 젠더가 원본 없는 모방임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매일 젠더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잠시 멈추고 자신이 쓴 문장들을 다시 읽었다. 그것은 혁명적인 사유였다. 젠더가 본질이 아니라면, 그것은 변화 가능한 것이었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었다.

"이성애적 매트릭스는 젠더 이분법을 통해 작동한다. 하지만 그 매트릭스 자체가 불안정하며, 그 불안정성이 저항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버틀러의 사무실 문이 열리고 한 동료 교수가 들어왔다.

"주디스, 뭘 그렇게 열심히 쓰고 있어?"

버틀러는 미소지었다. "젠더 수행성에 관한 책이야. '젠더 트러블'이라고 부를 것 같아."

"흥미롭네. 어떤 내용인데?"

"젠더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수행되는지에 관한 거야. 젠더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것이라는 관점이지."
동료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꽤 급진적인데. 기존의 페미니즘 담론을 뒤흔들 것 같아."

"그럴 수도 있지." 버틀러가 대답했다. "하지만 내 목적은 페미니즘 내부의 젠더 본질주의를 비판하고, 보다 포용적인 정치적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거야."

동료가 떠난 후, 버틀러는 다시 원고에 집중했다. 그녀는 앞으로 이 책이 학계와 사회에 미칠 파장을 예상하지 못했다. '젠더 트러블'은 단순한 학술서가 아니라 퀴어 정치학의 토대가 될 것이었다. 그녀의 수행성 이론은 젠더뿐만 아니라 정체성 자체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었다.

창밖으로 석양이 물들고 있었다. 버틀러는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젠더는 본질이 아니다. 젠더는 수행이다. 그리고 그 수행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