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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愁 또는 香水>는 오래 지속된다

후각은 오감 가운데 가장 원시림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냄새학'의 최고 권위자 파트리크 쥐스긴트는 장편소설 『향수』(1985)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역사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냄새라는 덧없는 영역"이라고.

냄새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어느 순간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냄새는 오래 기억/지속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죽여야 사는' 야생 상태의 원시인 사냥꾼에게나 후각은 중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냄새는 일상이다. 순간순간 잊을 뿐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일상의 '냄새' 또는 냄새의 '일상'을 잊고 살았다. 삶의 세련성과 감각의 탐구는 비례한다. 몇몇 일본 소설을 보며 그런 생각이 퍼득 스쳤다.
▲ 냄새학의 권위자 쥐스킨트

이효석은 1930년대 중반 자연과 자연적 충동에 매력을 느꼈다. 「메밀꽃 필 무렵」(1936)의 장돌뱅이 조선달은 지금도 동이와 함께 아름다운 달밤을 거닐고 있다:                                                                        이효석 ▶

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 있다. (중략)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사족은 필요 없다. 영원한 냄새의 여운을 맡으면 된다. 봉평의 메밀꽃은 바람결에 제 향기를 실어보내고 있다. 봉평의 메밀꽃은 올해 9월에도 어김없이 피어날 것이다. 가까운 흥정천 계곡에 신비의 향기 '허브나라 쉼터'가 있는 것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리라. 자연의 냄새 묘사에서 김유정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두 작가는 강원도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냄새 감별사' 김유정의 진면목은 「만무방」(1933)의 첫 장면에서 확인된다:

산골에 가을은 무르녹았다. 아름드리 노송은 빽빽이 늘어박혔다. (중략) 흙내와 함께 향긋한 땡김이 코를 찌른다. 요놈은 싸리버섯, 요놈은 앞 썩은 내, 또 요놈은 송이. ……아니, 아니, 가시넝쿨 속에 숨은 박하풀 냄새로군.

아니, 버섯냄새라니! 버섯 채쥐하는 주인공 응칠의 이런 행동이 있었기에 '만무방'(막된 사람)이 판치는 시대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는지도 모른다. 숲은 어린 짐승들과 인정(人情)을 길렀다. 자연은 인간의 고향이다. 아니, 모든 존재의 뿌리이다. 그것은 존재의 집이다.

지난 1997년 6월, 베트남 여행 때였다. 갑자기 스콜이 내렸다. 아니, '내렸다' 또는 '빗님이 오셨다'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막 퍼부었다,' 그런데 태양은 당당히 하늘에 떠 있는 것이 아닌가. 1주일 내내 그랬다. 이 낯선 상황 앞에서 잠시 인식의 혼란을 겪어야 했다. 황순원의 「소나기」(1953)와는 사뭇 달랐다. 생애 최대의 풍경인 유년기를 아름답게 그린 「소나기」는 알퐁스 도데의 「별」과 함께 거의 무의식적으로 내장되어 있다. 어쩌다 비오는 날, 이 소설을 떠올리면 가벼운 탄식이 나오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소나기 표지 ▶

수숫단 속은 비는 안 새었다. 그저 어둡고 좁은 게 안 됐다. (중략) 소녀가 다시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 바람에 소녀가 안고 있는 꽃묶음이 우그러들었다. 그러나 소녀는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비에 젖은 소녀의 몸내음새가 확 코에 끼얹혀졌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도리어 소년의 몸 기운으로 해서 떨리던 몸이 적이 수그러지는 느낌이었다.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오는 현대소설에서 소나기는 죽음의 의미와 깊은 상관이 있다. 이 작품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소나기는 소년과 소녀의 관계를 순식간에 친밀하게 발전시크는 계기가 되며, 소녀에게는 죽음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소년에게 이 냄새는 오래 지속된다.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은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소나기'의 시대는 지났다. 불모의 사회에서 이 오래된 미래의 감동을 찾는 일은 여간 어렵지 않다. 젊은 작가 윤효는 「모던 타임즈, 1996 유리꽃」에서 이렇게 썼다. "사랑이란 말은 거북하다. 그 함량을 묻는 신경전도 싫다."

이 시대의 화두는 일상이다. 어느 누구도 이 덫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컴퓨터와 전화방에서 누군가와 접속되기를 간절히 열망한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캠디 핸드폰'을 버리고 싶다. 건조한 섹스와 포르노그래피에 탐닉하는 것도 일상을 망각하는 방편이 된다.

롤랑 바르트가 그랬다던가. "삶은 작은 고독의 상처들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윤대녕, 김영하, 무라까미 하루키의 소설은 이 고독의 상처에 대한 헌가이다. 하나의 공통점은 문명의 냄새에 민감하다는 점이다.

윤대녕은 「추억의 아주 먼 곳」 (1996)을 여행하고 있다. "맥주를 마시는 동안 그녀는 그녀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에게선 칠월의 치자 냄새가 나고 있었다. 치자 냄새를 맡고 있으면 나는 시퍼런 낫에 차례차례 쓰러지는 칠월의 황금빛 보리밭이 생각나곤 한다." 이것은 「국화 옆에서」의 변주인 셈이다.
◀ 최루탄은 1980년대 시위에서 빠지지 않았다

카피라이터인 주인공 나는 우연히 그녀를 알게 된다: "그녀를 보았을 때 왜 펄 루즈, 샴푸, 귀 냄새, 소주에 탄 푸른 물감 같은 말들이 느닷없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사람의 귀 냄새라니? 그것은 이미 떠나가버린 사람이 아닌 언젠가 만나게 될 사람의 것일지도 모른다.

최루탄 가스와 향수. 거기에는 향수와 독(毒)과의 관계만큼 친밀한 접점이 없다. 저 80년대를 상징하는 최루탄의 바통을 향수가 이어받았다. 향수는 새로운 밀레니엄의 고독한 '천년후예'이다?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쥐스킨트의 장편 『향수』는 기상천외한 냄새 백과사전이다. 체취가 없는 주인공 그르누이는 '인간의 냄새'를 위해 향수를 만든다. 심지어 그는 향기를 얻기 위해 25명의 소녀를 살해한다. 결국 그르누이의 향수는 '쁘아종'(향기를 머금은 독)이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냄새에 관한 규칙을 제시한다. 첫째, 냄새를 맡는 동안에는 판단하지 말 라. 둘째, 향수에는 생명이 있다.

무라까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에는 스웨터의 냄새에 관한 장면이 나온다. 한바탕 섹스 후 남녀의 대화 장면:

[……좋은 냄새로군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이제 옷을 입어도 좋을까?" 하고 나는 물었다. 여자보다 먼저 옷을 입지 않는 것이 나의 징크스이다. 문명 사회에서는 예의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융적인 상상력과 오컬티즘(Ocultiss: 신비주의)으로 경쾌하게 묘사한 하루키의 작품은 이후 일본 신세대 작가 요시모토 바바나에 큰 영향을 미친다. 섬세한 감수성과 정치한 묘사라는 일본 소설의 특징에는 경제적 풍요가 낳은 삶의 세련성이 깔려 있다.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1996) 또한 냄새학의 측면에서 감수성의 영토를 넓혔다. "화장을 마친 그녀에게서는 사과 냄새가 났다. 염을 끝낸 어머니의 시신에서도 사과 냄새가 풍겼다." 작가는 무엇보다 섹스와 정액 냄새에 대한 지독한 묘사를 통해 외로운 인간 존재의 심연을 보여주었다.

담배 냄새는 어떨까? 이 책 저 책 뒤지며 무척 피곤해졌다. 가물가물한 담배 연기를 맡으며 김형경의 중편 「담배 피우는 여자」에 '중독'된다. <19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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