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문화가 있는 풍경 / 문화 탐험 << 이전  03  다음 >>
'새 천년' 무엇을 기념하나

지난 5월 백릉(白綾) 채만식 문학 기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20∼30대 젊은 문인 예닐곱 명을 비롯해 문학 지망생 등 모두 30명 남짓한 사람들이 이 기행에 참가했다. 무엇보다 올해 5월은 마침 군산 개항 100주년을 맞는 터라 기행의 의미가 한결 배가됐다. "군산을 살짝 들추면 아픈 현대사가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일행은 지난 해 5월, 군산시 금강 하구둑에 건립된 고 이광웅 시인의 시비를 찾는 것으로 채만식 문학 기행을 시작했다. 채만식 생가 및 묘소를 비롯해 장편소설 『탁류』의 공간인 '째보' 선창, 옛 조선은행, 미두장, 콩나물 고개 등 백릉의 작품 무대를 누볐다.

약관의 나이까지 군산에서 살았던 필자로서는 (비록 나이는 젊지만) 적지 않은 감회에 젖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튿날 숙소 인근에 자리한 '동국사'를 찾는 순간, 쓰거운 심사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동국사는 국내에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사찰이 아니던가. 어느 전직 대통령처럼 당장 그 건물을 때려부수자는 주장은 결코 아니다. 적어도 그 사찰의 내력을 적은 팻말이라도 하나 세워둘 수는 없는 것일까. 역사 의식의 결핍 현장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후 얼마쯤 지나 이번에는 일제하에 「빈처」「운수 좋은 날」 등의 사회성 짙은 작품을 남긴 바 있는 현진건의 생가를 찾게 되었다. 현진건의 생가는 청와대 뒷편의 부암동 '무계정사'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학자 김영복 선생에 따르면, 작가는 이곳에서 양계를 하며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현진건 생가는 화창한 봄 날씨가 무색하게 쓸쓸한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찬바람이 마침 지나갔던가. 시골의 '폐가'를 보는 듯한 착잡함이 엄습했다. 이런 느낌은 비단 필자뿐만은 아니었으리라.

그런데 김병종 교수(서울대 미대)의 『화첩 기행』(효형출판)을 보고 나니까 그나마 이 정도는 나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교수는 책의 서문에서 "석양녘 쓰러져가는 오두막 생가나마 발견하게 된 날은 행복에 겨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고 적고 있었다.

지난 1999년 11월 중순 새천년 기념 사업에 대한 상이한 입장의 두 토론회가 열렸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위원장 김태동) 및 새천년준비위원회(위원장 이어령) 공동 주최 <대토론, 새천년의 국가 비전과 전략> 세미나와 문화개혁시민연대(공동위원장 도정일 김경희 조세희 등)가 연 <새천년 기념 사업, 무엇이 문제인가?>가 그것이다. 100억원의 예산이 책정된 정부의 새천년 기념 사업은 국민 모금을 통한 '평화의 12대문' 건설, 무문자 민족에 한글 보급, '평화 기상대' 건립 등 한결같이 일회성 반짝 '이벤트 마인드'가 개입된 것이었다.

우리가 정작 기념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결국 그 방향은 거창한 이벤트에 있지 않다. 민간 문화예술인의 참여 민주주의를 통한 자율성과 창의성을 십분 살리는 한편, 과거의 유산을 기념해야 하는 것 아닐까. 언제까지 새마을운동 식의 '관제 바람몰이' 문화 행사가 계속될까. 2000년 1월1일 00시 00분 01초, 필자는 차라리 깊은 잠에 취하고 싶다. <1999년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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