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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문화가 있는 풍경 / 문화 탐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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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잡지의 계보
'고난의 역사는 고난의 말로 써라 / '사상계'에서 '씨의 소리'까지
<편집자주>
본문 <씨의 소리>는 <씨알의 소리>의 오기입니다. 아래아 표기가 웹 문서에서
지원되지 않아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이 점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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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는 '독재 언어'는 명령 언어와 노예 언어로 형성된다고 말했다.
그랬다.
해방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권좌를 차지했던 부정한 권력은 진보 담론을 철저히
억압하며 오로지 독재(자)의 언어만이 진실인 것처럼 여론을 조작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죽어가는 자유와 민권의 부활을 강력히 주창하며 지배자의 독재 언어에 저항하며 진실을 향한 정론의 정신을 잃지 않은 진보 월간지의 의연한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정론적 월간지의 계보를 살펴볼 때『사상계』를 빼놓을 수 없다.
1953년 4월 '못난 조상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장준하의 신념에 따라
창간된 『사상계』는 정론 월간지의 대명사였다.
이 잡지의 기원은
1952년 9월 피난지 수도 부산에서 발행된『사상』(3천부 발행)이
탯줄이 된다.
이후 장준하는 대(對) 이승만 투쟁의 무기로 1953년 4월,
월간『사상계』(題字 오기석)를 창간했다.『사상계』는 16년 동안
통권 200여 호가 넘는 홋수를 발행하며 이승만·박정희 정권에 맞서
자유·민주·반독재 투쟁에 큰 기여를 했다.
순수 문학, 반공 예술을
지향하면서 독재 체제를 뒷받침했던 이승만·박정희 정권에 맞서
비판 의식을 길러갔던 것이다.
돌베개 장준하의 『사상계』, 정론의 대명사
1958년에 발행 부수 7만부를 돌파한『사상계』는 1960년 4·19혁명의 기폭제
구실을 톡톡히 했던 셈이다.
1962년에는 발행인 장준하는 <막사이사이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인간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고(思考)일 것이다.
사고의 명확성을
잃어버린 개인이나 집단에서 바른 판단과 바른 행위와 바른 생활을
바랄
수는 없다"
고 선언한 창간호의 <편집 후기>는 돌베개 [← 장준하]의 신념
이자『사상계』의 나침반이었다.
이른바 '알 권리와 알릴 권리는 참 언론의
생명이다'는 신조를 견지했던 것이다.
『사상계』의 역사는 한국 잡지사에서 권력에 굴하지 않는 불굴(不屈)의 정론과 투쟁사로 기록된다.
가령, 5·16 군사쿠데타 직후에 발간된 권두언(1961.6)에서 목숨을 걸고 박정희 소장에게 '민정 이양'을 촉구한 것을 비롯해, 저 유명한 함석헌 옹의 독설 넘치는 장문의 논설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1961.7)라는 글은 지금 읽어도 도저한 부정 정신의 극점이 아닐 수 없다.
함석헌의 붓끝을 따라 한 시대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1960년 2월호에 '군부 쿠데타' 발발 조짐을 예견한 <콜론 보고서>를 번역 게재한 것은 이 잡지의 편집 방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5.16 군사 쿠데타는 장준하와『사상계』의 수난을 알리는 서곡에 불과했다.
자유당 정권과의 더 심한 싸움에도 견뎠던 『사상계』는 1970년 5월호에 수록된 김지하의 담시「오적」필화 사건과 함께 야당의원의 자금 지원이 문제가 되어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9월 26일 등록 말소되고 말았다.
1970년대 신화였던 김지하 시인은 가톨릭교구에서 발행하고 문학평론가 구중서가 편집을 맡고 있던 월간지『창조』(1972.4.12)에 담시「비어」를 발표, 또 다시 필화를 겪어야 했다.
어쨌든 그후『사상계』는 1972년 4월, 대법원의 등록 취소 청구 소송 확정 판결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지만, 끝내 복간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상계』는 민족문학의 발전에도 적잖은 기여를 했다.
<사상계 신인문학상>(1955) 제정을 비롯해 민족문학 논의와 해외 작품 소개 등 적지 않은 활기를 불어넣었다.
알베르 까뮈의『페스트』 번역(1952), 위당 정인보의「양명학 연론」연재(1953), 한글 특집은 문화사적으로 큰 의의를 갖는 기획이었다.
특히 [↑ 오적 필화사건]직전에 발간된 4월호의 <문학 좌담>(구중서·김윤식·김현)은 1970년대 리얼리즘 논의의 촉발제였다.
4·19 혁명의 감격을 누렸던 1960년대 초반에 진보 월간지를 창간하려는 움직임이 적지 않았다.
비록 5.16 쿠데타 때문에 미수에 그쳤지만, 조봉암 계열의 혁신계였던 윤길중 의원이 재일교포의 지원을 받아 『신조』(新造)라는 잡지를 창간하려 했던 일화는 단적인 사례다.
유종호 연세대 석좌교수의 회고는 5.16 이후의 우울하기 짝이 없었던 지성계의 풍경을 잘 보여준다.
"그후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5·16이 되었다.
(중략) 발행인 윤길중 명의의 『신조』가 나오고 거기 혹시 편집자문의 명단 속에 내 이름이 끼여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었다."
(유종호,「우리 살아온 세월-나의 5·16」,『작가』, 1999년 여름호)
'황용주 필화 사건'을 일으킨 바 있는『세대』지와 1964년 8월 1일 창간된 월간『청맥』역시 월간 정론지의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잡지들이다.
특히 『청맥』지의 경우 1965년 11월 김종태·김질락·이문규 등이 연루된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인해 폐간의 운명에서 비켜갈 수 없었다.
저 유명한 남정현의 소설 [분지(糞地) 필화사건 →]
(1965)이 이 무렵에 일어난 것을 환기하면
이해가 빠를 듯하다.
"한 작가의 '憤志'를 곡해함
은 '焚紙'의 위험을 초래할 뿐이다"고 선언한『분지(糞地)』필화 재판 변론은 기념비적 문헌이
되었다.
김수영의 시「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1965.11.4)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과 양심을
역설한 당시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한번 정정당당하게 /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 二十원을 받으러 세 번씩 세 번씩 / 찾아오는 야경꾼을 증오하고 있는가"
(제2연)
'10월 유신'의 검은 구름과 필화 재판
1970년대 독재정권 하의 언론의 풍경은 이청준의 중편「소문의 壁」(1972)이 극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박준의 소설은 한마디로, 선량한 독자를 속이고 있다는 것이었다"는 작가의 비판은 당대 언론의 상황에 대한 우의적 비판으로 읽을 수 있을 듯하다.
1970년대는 정론지를 지향했던 모든 잡지에게 수난과 투쟁의 역사로 기록된다.
특히 툭하면 불거져 나왔던 필화 재판은 부정한 권력이 저지른 야만의 극치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필화 사건은 공판 결과가 미치는 영향이 비단 피고인 한 사람의 형사 책임 여부를 분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당시의 정치적 현실과 법 체제에서 보장받을 수 있는 '표현의 자유'의 범위와 한계를 정립하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
김지하의「오적」필화 사건이 채 잊혀지기도 전에 월간 [↑ 다리](1970.9)지 필화 사건이 일어난다.
월간『다리』는 창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행 부수가 6만부를 넘어섰다.
리영희, 한승헌, 박현채, 김지하, 김동길, 장을병 등 시대를 풍미하던 지성들이 지면을 채웠고, 이들의 예리한 필봉은 독자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요 박 정권에게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었다.
1971년 2월 16일, 문학평론가 임중빈을 비롯해 월간 종합지 『다리』의 발행인 윤재식, 주간 윤형두 등 3명은 서울지검 공안부(담당검사 김종건·이규명)에 의해 반공법 제4조 2항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전격 수감되었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1970년 11월호에 실린 문학평론가 임중빈의 「사회 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라는 논문이 국외 공산 계열인 콩 방디 등 극좌파를 비롯한 미국의 뉴 레프트(New Left)주의자들의 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함으로써 "국외 공산 계열 및 반국가 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했다"는 혐의였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3명의 피의자에게 '무죄' 선고가 내려졌고, 이 선고의 여파로 '사법 파동'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화제를 뿌렸다.
이 사건은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야당의 대선 후보가 된 '김대중 선풍'을 잠재우기 위한 박정희의 의지와 중앙정보부의 '작전'이 합작된 사건이었다.
당시 3명의 '피고인' 모두『김대중 회고록』 집필(임중빈), 공보 보좌역(윤재식), 선거 팸플릿 등 인쇄·출판(윤형두) 등 동교동 홍보팀 소속이었다는 점은 이른바 '작전'의 의도를 엿보게 한다.
필화 사건을 겪는 동안 월간『다리』는 두 호를 결호했지만, 김지하의 시「나폴레온 코냑」(1972.9)과 희곡「구리 이순신」(1971.11) 등을 싣는 등 정론을 멈추지 않았다.
김지하의 시「앵적가」(사쿠라)로 인해 자칫 제2의 필화 사건을 겪을 뻔한 일도 있었다.
이 시의 원문 중 "박정희 대통령 만세 / 이순신 대통령 만세 / 김일성 대통령 만세 / 싸말사스 만세"라는 구절 때문이었다.
결국 "김일성 대통령 만세"를 "우물쭈물 만세"로 고치는 우여곡절 끝에 이 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김지하의「오적」사건을 비롯해 필화 재판을 도맡아 법정에서 '언론의 자유'를 역설한 한승헌 변호사의 의연하고 신념에 찬 변론은 역사적 문헌이 되기에 충분하다.
"특히 우리 한국에 있어서는 반공 관계 법률이 위정자의 자기 방어적 편법으로 남용되어 국민의 비판적 언론을 봉쇄하는 데 동원되는 악례가 있다."
어쨌든 목요상 판사의 예외적인 무죄 판결은 1974년 5월 28일 대법원에서 무죄가 최종 확정된다.
그러나 세상은 '10월 유신'의 검은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리영희 교수의 지적처럼, "남한 천지가 유신 독재의 공포에 떨기 시작한 때"였다.
월간『다리』에 대한 박 정권의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다.
사무실 입구에는 항상 종로경찰서 정보과와 기관원이 잠복했고 심지어는 조판소에 보내는 원고를 탈취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결국 월간『다리』는 '10월 유신'의 단행과 함께 문공부의 강권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1974년 1월 14일,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제3호를 발표한다.
그 직후 서울지검 공안부는 김우종, 임헌영, 이호철 등 소위 문인간첩단 사건이라는 이름의 대표적 야만 행위를 저지른다.
박정희 정권은 이들 문인들이 재일교포 문인들이 일본에서 발행하던『한양』지에 원고를 게재한 것을 문제삼았다.
이 잡지가 북한의 사주를 받는 공산주의 계열임을 알고도 이른바 '이적 행위'를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상 탄압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은 '준전시 상태'가 아니라 '전쟁을 하고 있는 상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1974.7.16)는 박정희의 발언은 비판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발작에 가까운 권력자의 내면 심리를 잘 압축한다.
사전 검열과 삭제, 온갖 경고와 간섭, 판매 금지는 유신 정권의 단골 메뉴였다.
함석헌과 『씨의 소리』
유신독재가 파국으로 향하던 1970년 중반 이후 진보적 잡지가 설 자리는 없었다.
합법공간에서 거의 유일한 정론지향의 활동을 했던 잡지는『씨의 소리』(1970.4.19 창간)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잡지는 '씨은 시대의 눈입니다'라는 표현에서 보듯 간접화법을 통한 계몽지의 성격을 강하게 내장하고 있었다.
[← 함석헌]이 주간을 맡고 장준하·계훈제·이태영·천관우 등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이 잡지는 종교 잡지를 표방했지만, 가혹한 사상적 금압에도 불구하고
우회적인 화법으로 민주 수호를 향한 의지를 지면에 담아냈다.
1971년 5월『돌베개』를 펴낸 장준하의 생활 수기「브니엘」과 계훈제의
논픽션「식민지 야화」등이 연재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한국의 간디'로 불렸던 함석헌은 칠순의 나이였지만 정력적인 집필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주로 종교 관련 번역을 많이 했지만 <고전 풀이>와 <씨 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지사적 사상가와 참 언론인의 전범을 몸소 보여주었다.
"선생님의 정신적 고향은 결국 팔레스타인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후학들의 지적은 함석헌이 주도한 잡지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10.26 사태의 결과 박정희 정권이 붕괴했지만, 민주주의의 봄은 오지 않았다.
1980년 저 광주의 학살극을 자행하며 권좌에 오른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민주 언론과 진보 잡지의 싹을 아예 잘라 버렸다.
월간 『말』이 1985년에 폭로한 이른바 [↑ 보도지침 사건]은 야만적 권력의 문명 파괴의 작태를 여실히 증명한 사례가 아니었던가.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저 일제 말기를 무색하게 만든 사상의 암흑 시대가 맞았다.
그러나 양심적 지식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월시> 동인의 결성과 『실천문학』과 『민중교육』의 발행을 통해 무크지 시대를 개척하며 정론을 향한 의지를 좀처럼 꺾지 않았다.
"고난의 역사는 고난의 말로 써라" (1965년 함석헌의 발언)는 금언은 해방 이후 진보적 정론지를 표방했던 잡지들의 불굴의 투쟁 정신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작금의 언론이 권력의 오만을 견제하고 사회의 타락을 비판하는 불굴의 저항 정신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지난해 언론 문건 사태 당시 모 일간지 기자들이 외친 "사장님, 힘내세요!"라는 추문은 언제쯤 귓전에서 영원히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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