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1강
-
-
94분
-
수강하기
-
-
1교시 -
미술 - 모방과 발견의 역사 I
-
17분
-
-
-
2교시 -
미술 - 모방과 발견의 역사 II
-
26분
-
주요내용
-
- 마네 《풀밭위의 점심》,《올랭피아》
- 현대미술의 시작 - 인상파의 태동
-
-
2강
-
-
80분
-
수강하기
-
-
2교시 -
쿠르베, 모네, 세잔느 II
-
21분
-
-
3교시 -
라이벌 고흐와 고갱 그리고 후기인상파 I
-
24분
-
-
4교시 -
라이벌 고흐와 고갱 그리고 후기인상파 II
-
17분
-
주요내용
-
- 쿠르베《세계의 근원》, 리얼리즘과 에로티시즘
- 모네《해돋이》, 인상파를 탄생 시키다
-
-
3강
-
-
90분
-
수강하기
-
-
1교시 -
마티스: 상상력과 야수파 색채를 말하다 I
-
27분
-
-
-
2교시 -
마티스: 상상력과 야수파 색채를 말하다 II
-
23분
-
-
3교시 -
피카소: 모든 현대미술은 피카소로 통한다 I
-
12분
-
-
4교시 -
피카소: 모든 현대미술은 피카소로 통한다 II
-
28분
-
주요내용
-
- 색채의 시인, 마티스
-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 피카소와 마티스의 차이
-
-
4강
-
-
92분
-
수강하기
-
-
1교시 -
프란시스 베이컨과 그 영향 I
-
21분
-
-
-
2교시 -
프란시스 베이컨과 그 영향 II
-
29분
-
주요내용
-
- 칸딘스키, 클림트, 마르셀 듀상, 몬드리앙, 달리
- 쟈코메티. 베이컨, 만 레이 - 프란시스 베이컨의 대규모 회고전 - 베이컨 작품의 특징 - 에곤 쉴레 - 클림트와 색채
-
-
5강
-
-
94분
-
수강하기
-
-
2교시 -
앤디워홀과 복제의 시대 II
-
22분
-
-
3교시 -
제프쿤과 워홀리안- 팝 아트의 공장들 I
-
21분
-
-
4교시 -
제프쿤과 워홀리안- 팝 아트의 공장들 II
-
26분
-
주요내용
-
- 팝 아트 : 20세기의 술
- 데이비드 살레,쥴리앙 슈나벨 - 워홀을 둘러싼 인맥 - 워홀리안(Warholian), 워홀릭(Warholic), 워홀 워너비(Warhol-Wannabe)
-
-
6강
-
-
95분
-
수강하기
-
-
1교시 -
뉴페인팅 그리고 낙서도, 사진도 돈이 되다 I
-
23분
-
-
-
2교시 -
뉴페인팅 그리고 낙서도, 사진도 돈이 되다 II
-
23분
-
-
3교시 -
바스키아, 헤링의 그래피티 회화 I
-
22분
-
-
4교시 -
바스키아, 헤링의 그래피티 회화 II
-
27분
-
주요내용
-
- 27살로 요절한 장 미셸 바스키아
- 키스 헤링과 그래피티 아트 - 바스키아와 헤링의 낙서
-
-
7강
-
-
110분
-
수강하기
-
-
1교시 -
데미안 허스트와 무라카미 다카시 I
-
21분
-
-
-
2교시 -
데미안 허스트와 무라카미 다카시 II
-
19분
-
-
3교시 -
중국의 사대천왕 - 쟝샤오강, 유에민쥔, 팡리준, 쩡판츠 I
-
32분
-
-
4교시 -
중국의 사대천왕 - 쟝샤오강, 유에민쥔, 팡리준, 쩡판츠 II
-
38분
-
주요내용
-
- 데미안 허스트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
- 네오팝 아티스트이자 아시아의 앤디워홀, 무라카미 다카시 - 무라카미 다카시의 피규어 작품《My Lonesome CowBoy》 - 냉소적 사실주의자, 유에민쥔 - 쩡판즈와 가면 시리즈
-
-
8강
-
-
102분
-
수강하기
-
-
1교시 -
인기작가가 미술사를 쓴다 I
-
25분
-
-
-
2교시 -
인기작가가 미술사를 쓴다 II
-
29분
-
-
3교시 -
스타는 탄생하지 않고 만들어진다 I
-
20분
-
-
4교시 -
스타는 탄생하지 않고 만들어진다 II
-
28분
-
주요내용
-
- 국내작가, 배병우의 《소나무》연작
- 모흘리나기(Moholy Nagy) - 사진작가 구본창의《탈》시리즈, 《백자》연작
|
|
|
|
|
|
|
|
|
|
우수
|
[리뷰]알아간다는 것 만큼 나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어디있을까 |
미**트 |
|
|
|
동영상 강좌는 가끔 수강했으나 현장 강의는 처음이다. 처음 도착한 곳은 아트앤스터디 사무실.. 멋쩍어 하는 내게 사무실 직원은 가볍게 미소를 띄며 지근 거리의 강의장까지 친절하게 나를 안내한다. 감사하다. 잘 익은 수박을 고를 때 꼭지 옆 작게 한 조각 칼로 베어 내 보면 우리는 그 수박이 어떤지 안다. 사람도 한 마디 말로 가늠할 수 있듯이 처음 대면한 여직원분의 친절을 통해 아트앤스터디 전체를 마음으로 느낀다. 인문학,인간에 대한 이해는 타자에 대한 배려에서 출발한다고 전제한다면 아트앤스터디의 속살과 생각, 영혼마저도 인문의 숲이라 명명해도 기꺼이 동의하고 싶다. 인연이되어 반갑다.
4층 강의장의 깔끔함은 수도원의 정결함 만큼이나 섬세하게 정돈되어 있다. 예의 친절하고 밝은 미소로 첫 시간 수강생들을 안내하시는 '아트걸'님은 수박 한 꼭지의 믿음을 더 깊게 하여 준다.
김종근 교수님. 모방과 발견으로서의 미술사. 수강생은 열 다섯 분 정도.. 강사의 조심스러움은 청중이 어떠한 수준인가를 가늠하지 못할 때 더 많아질 것이다. 예상대로 교수님은 자연스럽게 예의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수강생들의 상황을 파악하신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학생, 직장인, 다른 학문을 전공하는 학생, 유학을 준비하는 고등학생, 와~ 내가 소리를 질렀다^^ 10대에서 40대까지. 강의 타겟을 어디에 맞추실지 난감하실 것 같다.
이런 경우 강의는 평범한, 아주 일반적일 수 밖에 없는데 풍부한 현장 경험과 사례로 흥미를 부여하며 강의를 진행해 가신다. 나의 경우에는 강의 내용이 또 한 번의 복습과도 같아서 그런 흥미가 아쉬움을 만회하지 못하는 감이 있다. 첫날 전체 강의중 전반부는 모방과 발견에 대한 개념과 이론에 무게를 두고 진행된다. 수강생의 희열은 아무래도 교수님의 사소한 오류를 발견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피카소는'위대한 예술가는 훔치고, 평범함 예술가는 베낀다'는 의미 심장한 이 말은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것이다. 어쩌면 모방의 대가 피카소는 이 명언마저 훔쳤는지도 모른다. 강의 후반부는 미술세계에서 모방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를 작품이미지를 통해 이루어졌다. 역시 현대미술의 출발점이랄 수 있는 '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식사'는 시간의 흐름을 기준으로 마네를 사이에 두고 앞과 뒤로 모방과 패러디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강의 말미 나의 질문 '회화사에 있어서 모더니즘의 출발은 꾸르베의 시기로 보는 관점이 있는데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다'에 교수님의 개인적인 의견은 앵그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질문하지 못한 질문 또 하나 '평면성이야말로 모더니티의 시작이라 보는 비평가(그린버그 등)의 의견에 대한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다, 예술은 평면만이 유일한 것이고 독점적인 것’이라는 그린버그(Clement Geenberg)식의 미적 모더니티 논리에 대한 의견에 대해서..' 다다음주 뉴욕페인팅에서 이야기 될 것인지.. 다음 주 개별적으로라도 여쭈어 볼 사안이다.
피로에 쩔은 날인데 10시가 넘는 강의에 내 체력이 못미친다. 다음 주에는 정시에 마쳐주셨으면~ 그러나 알아간다는 것 만큼 나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어디있을까.
|
|
|
|
|
|
|
우수
|
다음 주에는 어떤 모방의 역사가 이어질지 기대된다! |
정**기 |
|
|
|
드디어 기다리던 미술사 강의 시간이 왔다!
이번에 공부하게 될 미술사는 미술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모방'과 '발견'으로 본 역사이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처럼 미술을 '표현'이라는 단어로 정의하게된 역사는 사실 그닥 길지 않다.
이미 까마득한 옛날부터 서양 미술은 '모방'이라는 단어와 오래도록 친했기 때문이다. 미술에서의 모방설은 19세기까지도 이어져왔었고, 19세기에 들어서야 작가의 개성이 강조되면서 표출설, 즉 예술=표현이라는 공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때문에 우리가 지금 너무도 당연하게 예술을 '창조'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은 미술사에 있어 굉장히 획기적인 변화였던 것이다!
현대로 올수록 미술에서 '창조' '표현, 표출'이 강조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모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절대 아니다. 많은 작가들은 모방을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하면서 각자의 개성을 오히려 더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모방-표현이라는 서로 정반대인 개념을 한데 모아 한층 새롭고 신선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것을 바로 변증법의 원리라고 하는걸까?
Caroline Coon 1983
강사님은 마네의 <올랭피아>를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모방해낸 작품들을 차례로 보여주셨는데, 위의 것이 그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이다. 올랭피아의 구도는 그대로 두고 인물의 피부색과 성(性)만 바꾸었을 뿐이다. 비록 마네를 '베꼈지만' 마네의 올랭피아가 처음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던 것처럼 Coon도 매우 기발한 발상으로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다. 마네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충격 말이다.
수업을 듣다가 갑자기 친구 한 명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대입 수시 면접 때 '진짜 '모나리자'와 그것을 똑같이 그린 가짜 '모나리자'의 차이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있었다고 했다. 사실 위에서 이야기했던 창조적인 모방 말고도 모방은 이렇게 여러 미학적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위조, 표절, 패러디 등등 모방의 다양한 갈래들을 떠올리다보니 어느 새 수업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다음 강의에는 어떤 모방의 역사가 이어질지 기대된다!
|
|
|
|
|
|
|
우수
|
사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
s**hati33 |
|
|
|
사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오늘날의 경향과 현상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이는 21세기를 사는 우리 각자의 미학적 시각의 풍요와 그리고 자기행동양식의 출처가 되어줄 것이다. 또한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창작 동기와 그 작품의 개념을 설정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김종근 선생의 <<모방과 발견의 역사로 본 미술>>을 따라가다 보면 날로 난해해지는 현대미술이 위치한 지점을 파악하고 허와 실을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에 반응하는 자기 자신을 만날 것이며 모호한 생각에 견해를 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울러 맞물려 있는 철학사조와 여타의 예술에 대한 이해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
|
|
|
|
|
|
4 |
모방과 발견, 미술사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 |
김*영 |
|
|
|
미술의 역사를 '모방'과 '발견'이라는 두 키워드로 풀어낸다는 접근 방식 자체가 매우 신선하고 흥미로웠습니다. 마네, 피카소, 앤디 워홀 등 쟁쟁한 대가들의 작품을 통해 이 키워드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명쾌하게 설명해주십니다. 특히 피카소가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는 말처럼 선대 예술가의 작품을 모방하고 그것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영역을 '발견'하는 과정을 들으면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론과 현장 경험을 겸비하신 평론가님의 명쾌한 해설 덕분에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주입식 지식 전달이 아니라, '미(美)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까지 던져주는 강의입니다. |
|
|
|
|
|
|
5 |
현대미술 입문자에게는 조금 어려운 듯 |
박*우 |
|
|
|
강사님의 지식과 경험은 대단하지만, 강의가 다루는 범위(마네에서 중국 현대미술까지)가 넓고 깊어서 미술사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버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표면적으로만 따라가게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서양미술사' 패키지 강의를 먼저 듣고 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
|
|
|
|
|
|
6 |
그래피티와 팝아트, 새로움을 발견하다 |
이*현 |
|
|
|
앤디 워홀의 '공장의 팝아트'와 바스키아, 키스 헤링의 그래피티 회화를 다룬 강좌가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단순히 낙서나 상업적인 이미지로 치부될 수 있는 것들이 어떻게 복제기술과 대중문화를 타고 예술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는지 그 변혁의 과정을 생생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뉴욕 여행 갔을 때 키스 헤링의 작품 앞에서 그냥 지나쳤던 게 후회되네요. 그들의 작품이 가진 사회적 메시지와 파격성을 이해하니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
|
|
|
|
7 |
강의 시간이 너무 길어서 힘들었어요 |
정*혜 |
|
|
|
강의 내용의 밀도는 높고 좋습니다. 하지만 한 강좌의 시간이 90분을 훌쩍 넘는 경우가 많아서 퇴근 후 듣기에는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었습니다. 주말에 몰아서 들어야 할 것 같아요.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50분 내외로 나눠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
|
|
|
|
|
|
8 |
마티스와 피카소의 관계가 흥미진진 |
김*재 |
|
|
|
마티스와 피카소의 숙명의 라이벌 구도를 모방과 발견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한 부분이 최고였습니다. 서로의 작품에서 영향을 주고받고 경쟁하며 현대미술의 두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낸 과정이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았습니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 마티스의 《삶의 기쁨》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 이야기처럼, 단순히 작가 개인의 천재성이 아닌 상호 작용 속에서 예술이 발전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
|
|
|
|
|
9 |
클림트와 에곤 실레, 극과 극의 감각 |
황*아 |
|
|
|
클림트의 황금빛 관능과 에곤 실레의 거칠고 노골적인 표현을 비교하며 들으니 두 작가의 관계가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실레가 클림트의 화려함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감각을 표현하려 했다는 설명이 인상 깊었어요. 예술은 결국 보는 이에게 촉각적 잔상을 남기는 행위라는 베이컨에 대한 해석도 좋았습니다. |
|
|
|
|
|
|
10 |
미술시장의 흐름까지 알 수 있어서 유익함 |
박*호 |
|
|
|
후반부 강좌에서 데미안 허스트, 무라카미 다카시, 중국의 사대천왕 등 21세기 미술의 황제들과 상업미술의 흐름을 다뤄주신 점이 특히 좋았습니다. 단순히 과거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기작가가 미술사를 쓴다는 현실적인 미술 시장의 메커니즘까지 알 수 있어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
|
|
|
|
|
|
11 |
모방의 개념에 대한 깊은 성찰 |
이*민 |
|
|
|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솔로몬의 말처럼, 창조는 모방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작품들을 통해 시각적으로 확인했습니다. 패러디나 차용(패스티시)이 단순한 베끼기가 아니라, 원작의 독창성을 해체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적 행위로 인정받는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까지 짚어주셔서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
|
|
|
|
|
|
12 |
아쉬운 점은 작품 이미지의 질 |
최*우 |
|
|
|
강의 내용과 설명은 훌륭하나, 온라인 강의 특성상 일부 작품 이미지가 선명하지 않아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특히 세부적인 터치나 색감을 설명하실 때 고화질의 이미지가 제공되었으면 몰입도가 더 높아졌을 것 같습니다. |
|
|
|
|
|
|
13 |
마네의 작품을 통해 현대미술의 시작을 이해하다 |
강*호 |
|
|
|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가 당대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그리고 이것이 현대미술의 시작이자 인상파의 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왜 마네를 근대회화의 아버지라고 부르는지 이해하게 된 강의였습니다. |
|
|
|
|
|
|
14 |
베이컨 그림은 여전히 괴상하지만… |
윤*정 |
|
|
|
프란시스 베이컨의 끔찍한 그림이 처음엔 불편했지만, 그의 그림이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감각적 회화론'을 실현했다는 들뢰즈의 철학적 해석을 들으니 그림을 이해하는 새로운 틀이 생겼습니다. |
|
|
|
|
|
|
15 |
미술관 가기 전에 필수 수강! |
배*혁 |
|
|
|
이 강의를 듣고 나니 이제 미술관에 가면 작품을 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질 것 같습니다. 단순히 아름다움을 넘어 모방의 흔적과 발견의 순간을 찾게 될 것 같아요. |
|
|
|
|
|
|
16 |
쿠르베의 충격적인 작품 해석이 인상적 |
오*원 |
|
|
|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을 단순한 외설이 아니라, 창조자로서의 화가의 자부심과 예술과 외설의 경계라는 철학적 문제로 확장시켜 설명해주신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
|
|
|
|
|
|
17 |
동양과 서양, 그리고 시대를 넘나드는 통찰 |
신*철 |
|
|
|
고흐의 자화상 배경에서 일본의 우키요에를 발견하고, 동양의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금언을 서양 미술사에 연결하는 강사님의 통찰력이 대단합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각 덕분에 더 풍부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
|
|
|
|
|
|
18 |
미술이 곧 시대의 거울임을 깨닫다 |
문*린 |
|
|
|
낙서가 예술이 되고, 복제가 창조가 되는 미술의 역동적인 변화는 결국 우리 시대의 정신과 가치관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매우 유익한 강의였습니다. |
|
|
|
|
|
|
19 |
강의는 좋았지만, 끝맺음이 아쉬움 |
조*규 |
|
|
|
강의가 늦게 끝나서 밤 10시가 넘도록 집중해야 했던 점은 아쉽습니다. 다음 강의는 제시간에 끝내주시길 바랍니다. |
|
|
|
|
|
|
20 |
[리뷰]낙서가 예술이 되다. |
김*환 |
|
|
|
낙서가 예술이 되다.
사회현상은 역사와 시대적상황의 개연성과 맥락을 같이한다. 20세기 중후반에 들어, 화장실 벽에서나 발견될 낙서가 거리로 나왔다. 세계적인 도시 뉴욕에서 발견되기 시작한 그래피티는 무슨 유행병처럼 이면도로 상가 셔터나 회벽에 지하철에 스프레이낙서가 그려져 있었다. 검은색이 주조를 이루나 붉은 계열의 색이 간간이 섞여 있어 전체적으로 불안감을 조성하는 출처불명의 낙서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세이모(SAMO)라는 서명이 발견되었다. 세이모는 “Same Old Shit"의 약자로 똑같다, 낡았다, 변함이 없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볼 때 내뱉는 단어이다. 기존의 질서와 가치에 반항하는 정신의 일환인 낙서를 처음엔 경찰이 지웠다. 지우면 언제 왔다갔는지 다시 뿌려져 있고 지우면 다시 뿌리는 숨바꼭질이 되풀이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마천루의 이면도로에 불온한 낙서들이 조금씩 눈에 뜨이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부터였다.
세이모라는 서명을 한 그래피티스트는 장 미셀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이다. 낙서를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은 장 미셀 바스키아는 뉴욕 블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블루클린은 낙후된 지역으로 허드슨 강 건너엔 대조적으로 맨해튼의 마천루가 솟아있다. 그는 회계사인 아버지와 미술에 조예가 깊은 어머니 사이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사립학교를 다닐 정도로 여유가 있었으나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가출을 했다. 거리에서 노숙을 하며 물건을 팔러 다니고 재즈 바에서 디제이를 보는 등 거칠고 험난한 생활을 자초했다. 안락한 가정과 염려하는 부모님을 등지고 거리의 아이로 살게 만든 바스키아의 절망은 무엇일까?
정규교육을 거절하고 날 것의 삶을 산 바스키아는 말했다. “열일곱 이후 나는 스타를 꿈꾸었다. 찰리 파커, 지미 헨드릭스 같은 우상들을 의식하며 살았다. 사람들이 유명해진 방식에 낭만을 느꼈다.”고 했다. 바스키야와 같은 일군의 무리들이 스타를 꿈꾸었다면, 사회의 시선과 무례한 장난질이라는 통념과는 달리 그래피티에 대해 미술이라는 확신과 주장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된다. 그래피티를 하며 스타를 꿈꾸었다면 낙서를 낙서로 본 것이 아닌 미술로 의식한 것이 된다. 그것은 대중예술이라는 확신과 자기철학에서 출발한 것이 된다. 이집트의 벽화나 동굴미술의 현대적 실현으로 생각하여서 그렇게 집요했던 것일까.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런 일련의 행위가 뉴욕의 할렘가나 지하철 내벽에 국한 된 것이 아닌 산발적이나마 다른 나라와 지역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펑키와 히피족의 등장에 이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트랜스 아방가르드로 독일에서 네오 익스프레션이즘이라는 명명을 걸치고 등장한다.
바스키아는 뼈라든가 해골, 눈동자, 지퍼, 경찰관, 만화 캐릭터, 역사적 인물을 회화적 모티프로 삼아 거칠고 투박하고 있는 그대로를 평면적으로 담아냈다. 생명의 추상성을 반항적으로 낯설게 즉흥적으로 문자와 그림을 뒤섞었다. 실패한 종교, 민족주의, 정치에 반항적 메시지를 담은 그리피티는 무엇보다도 삶의 조건에 대한 불만이 관련되어 있다. 흑인으로의 운명에 대한 저항, 백인중심사회에서 겪게 되는 인종차별에 대한 반발과 그들의 정서를 반영한 대중문화를 발설하는 쾌감이 작용했다. 곱지 않게 보는 보수적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타협의 여지없이 날 것으로 드러낼 수 있었던 풍토는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과 가장 미국적인 팝아트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였다. 대표 작가로 잭슨 폴락, 윌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 사이 톰블리 그리고 앤디워홀이란 시대의 총아들의 아우라는 꿈을 꾸게 만들었다. 바스키아는 특히 톰블리로부터 드로잉, 낙서, 그리는 방법들을 배웠고, 무엇보다도 앤디워홀과 만남은 바스키아에게 있어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의 작업을 눈여겨보다가 비범성을 발견하고 인정하고 이끌어준 사람이 앤디 워홀이다. 앤디워홀은 바스키아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으로 협력자이며 스승이고 라이벌이었다. 바스키아의 첫 개인전은 1981년 이태리의 갤러리아 아르테 에밀리오 마촐리에서 열렸다. 일 년 뒤인 82년에는 뉴욕의 아니나 노세이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짐으로 해서 미국의 여타 도시와 유럽, 아시아 각지에서 그룹 초대전이 이어 열렸다. 같은 해, 82년에는 독일 카셀에서 열린 <도큐맨타 7>의 초대작가가 되었는데 176명의 초대작가 중에 최연소 작가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바스키아의 회화는“사이 톰블리의 우아함과 장 뒤뷔페의 야성이 모두 갖춰져 있다”고 평가 받을 정도로 거칠고 상징적이고 언어의 발설쾌감을 보여준다. 그리피티에 등장하는 이미지에 패션업계가 주목하는데 바스키아의 해골과 왕관, 키스 헬링의 빛나는 아기와 어깨동무하트는 의류에 프린트되어 인기를 끌었다. 특히 검은 색상이 주류를 이루는 의류에 해골, 왕관 로고는 아방가르드패션의 트렌드가 되었다.
그러나 바스키아는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2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1988년 8월 22일 사망했는데 앤디워홀이 사망한지 1년 6개월 후였다. 당시에 두 사람의 관계는 다소 소원했음에도 앤디 워홀의 죽음은 바스키아에게는 극복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낙서시절에 쫓겨 다니던 불안과 성공의 뒤편에 자리한 고독과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복용한 마약은 그를 이른 죽음으로 내몰았다. 바스키아의 회고전이 열렸을 때, 그의 후원자이자 화상인 브루노 바숍벨거는 “장 미셀 바스키아는 예술의 역사에 있어서 선택받은 화가이자 시대가 부여한 예술의 흐름을 그렸던 화가였다. 바스키아는 완전한 순수의 표현에 도달한 스타일을 완성시켰다.”는 말로 요약했다.
이른 죽음을 맞은 또 한 사람이 키스 헤링이다. 바스키아와 함께 주목받은 그리피스트였던 키스 헤링은 기호화된 그림으로 대중과의 소통을 원했다. 드로잉이야말로 인간과 세계를 포용하는 도구라 믿었던 치기어린 객기로 휘갈긴 낙서들은 뉴욕의 출·퇴근 시민들을 향한 자유로운 통신이었고 메시지이었다. 이들은 인종차별, 핵전쟁에 대한 공포 등의 사회적인 발언들을 거침없이 담아냈고 공공에 대한 개인의 감정을 적나라한 표출하였다. 전광판의 글자 예술가 제니 홀처의 영향을 받은 그는 그래픽 디자인을 미술로 끌어 올렸다고 평가받았다. 당대의 시인 르네 리카르드가 ‘빛나는 아기’라 불렀던 그림이 헤링의 대표적인 그림으로 로고로도 사용되면서 젊음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어깨동무를 한 두 사람 뒤로 하트가 두둥실 떠 있는 <무제>라는 제목의 그림은 유대와 우정의 염원을 형상화한 것으로 간결한 윤곽선은 순수와 자유를 이야기한다. 모던한 분위기의 색상으로 그려진 그의 드로잉은 그래픽 디자인을 미술로 끌어 올린 성과를 얻었다. 특히 속도감 있는 간결한 선과 검은 필치, 원색적인 한두 가지 컬러감은 강렬한 메시지와 이미지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1990년 31세의 나이에 에이즈로 요절하였다. 영광과 성공을 향유하지 못하였으나 표현주의미술에 이름을 올려놓고 무대에서 사라졌다.
`아기`를 주제로 한 작품은 어린 시절에 대한 동경이라고 한다. 영원한 피터 팬을 꿈꾼 스타작가인 헤링은 작품에 아기 이미지를 새겨 넣는 것으로 서명을 대신했다. "아기가 내 로고나 서명이 된 이유는 인간 존재의 경험이 바로 아기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을 남겼다. |
|
|
|
|
|
|
21 |
[리뷰]프란시스 베이컨 & 질 들뢰즈 |
김*혜 |
|
|
|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보는 것 자체가 적잖이 당혹스럽다. 인간의 신체는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표현되는데 인간과 동물의 살덩어리가 뒤섞여서 불안감을 조성하는 연극무대장치 같은 배경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베이컨의 그림은 영국의 낭만파 화가, 터너 이후에 등장한 헨리무어, 데이비드 호크니, 루시앙 프로이드와 더불어 영국 미술계를 평정한다.
그의 사후에 퐁피두 미술관에서 거의 4개월 가까이 전시되었는가 하면 뉴욕 현대미술관에서는 베이컨의 특별전이 열렸는데 30년대 작품부터 죽기 전까지의 대작과 시리즈작품 및 미공개 작품이 연대별로 총망라되어 전시되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출생한 영국인이다. 부친은 말사육사로 아일랜드와 영국을 빈번하게 오가는 통에 정규교육은 물론 그림교육을 배우지 못하였다. 그는 심각한 천식 때문에 어려서 모르핀을 상습적으로 맞았다고 한다. 그는 16살 즈음에 자기 어머니의 팬티를 입고 있다가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얻어맞고 집에서 쫓겨났다. 그의 직업은 가구 디자이너였다. 1930년 영국 가구잡지에 그의 작품이 소개되기도 하였으며 남색과 노름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드문드문 그림을 그렸고 그는 자기 스튜디오를 털려고 들어온 조지 다이어와 연인이 되어 함께 산다. 7년을 함께 산 연인, 조지 다이어가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하는 등 그의 삶의 굴절과 궤적이 그이기에 가능한 그림들, 유니크한 예술세계를 열어보이게 한 것일까.
가구디자이너였던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피카소의 드로잉전시를 보고난 후였다. 그의 그림에서 피카소의 영향력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베이컨의 예술형성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니꼴라 푸생의 <무고한 학살>이다. 인간에 대한 최고의 절규를 그린 그림으로 이 그림은 그의 내면의 트라우마와 전운이 감돌거나 세계대전의 와중의 불안과 인간존엄성의 부재가 포개지면서 극도의 병리적 현상들이 형상화 된다. 그의 그림 대부분에서 비명을 자르는 듯이 입을 일그러뜨리며 크게 벌린 모습을 찾을 수 있다. 30대 후반에 시작한 인간(신체)탐구는 그의 일생동안 충실하게 심화되어진다. 인간의 육체를 푸주간의 고깃덩어리로 사물화 하여 일그러뜨리고 뒤틀린 변형은 <예수의 수난도>와 피카소의 욕녀>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그는 그의 그림의 모델 상당수가 사진작가의 사진에서 모티프를 차용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사후에 그의 아틀리에에서는 존 더킨의 사진이 40여점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베이컨은 트리피티크 방법으로 작품제작을 즐겼는데 이는 사진 이미지의 연속성 표현에 효과적이었다. 단순한 움직임과 스냅사진의 배열이라는 시각적 효과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909-1992)의 그림들이 구상화로 분류된다. 그런데 구상화로의 분류가 순간 뜨악해지는 것은 왜일까. 회화는 구상적인 것으로부터 형상을 끌어내야 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의 주요 오브제인 신체는 왜곡되어 있고 심하게 변형되어 있다. 구상의 파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베이컨의 예술세계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 것일까. 구상적 형태를 혼란시키는데 감각의 확대가 있다. 시각에 국한된 감각이 아닌 다른 감각기능, 특히 촉각기능이 더했을 때 발견할 수 있는 형태를 산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화전략은 진부함과 추상의 늪에 빠진 회화에 충격을 가했다. 신체를 변형시켜도 남아 있는 판에 박힌 잔재들을 디아그람- 돌발흔적으로 재빨리 벗어나 회화적인 형상을 구성해 내는 것이 베이컨의 회화의 전략이다. 그는 구상을 포기함으로써 재현적 대상성을 극복한다. 그러나 추상의 길을 택하지 않음으로써 화가의 주관성의 농도를 낮추게 되고 여전히 구상의 장르에 편입이 되는 것이다.
장르의 구분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의 작업이 단순히 재현의 논리를 벗어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기존의 사물의 형태를 해체시켜 겉모습을 벗기고 해체된 것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재구성의 질료로 그는 감각의 고유한 힘을 포착하고 세계에 대한 작가의 감각이 시각적 광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촉지적 기능을 실현한다.
들뢰즈는 통념을 부수는 그의 철학, 기관 없는 신체개념이론을 설명하는데 베이컨의 그림들을 활용한다. 기관 없는 신체란 기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 다만 신체란 살아있는 것이지만 유기적 조직체가 없는 것으로 보고자 한다. 조직적 원리에 빠져 있는 우리 인간의 신체를 우리 신체의 질서에 국한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는 자연의 일부인 신체의 유기체적 질서를 거부하는 것으로 들뢰즈는 감각적 회화론의 배경이 되는 이론들이 리좀 모델, 유목 사상,기관 없는 신체 등을 통해 사유의 비자발적인 기호들이 비위계적이고 수평적인,다양성과 이질성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지는 탈위계적인 체계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인간이란 물질 즉, 몸을 중심으로 탈영토화하고 리좀화 할 수 있는 탈주의 길을 마련한다. 이러한 감각론을 바탕으로 들뢰즈는 회화의 본질을 구상을 너머서고 추상에 포획되지 않는 형상의 감각론으로 밀고 나아간다. 베이컨의 그림들을 들뢰즈의 철학에 접목되어 이론으로 무장되고 사물화 된 인간의 신체는 작가의 관점에 따라 여타의 자연물과의 접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서구의 미술사를 가장 오랫동안 지배해온 재현모방은 들뢰즈의 유물론적 존재론의 감각을 비변증법적 변화라는 구도를 통해 세계를 설명함으로써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의 종속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존재와 생성간의 선택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극복하여 재현의 차원을 넘어선 곳에서 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전통과 형식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은 자기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산 그는 당시의 시루를 이루던 추상회화에 휩쓸리지 않고 인간이라는 주제에 천착하였다. 훈제된 돼지고기를 일컫는 베이컨과 그의 이름의 숙명성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일체화 한 것은 아닌가. |
|
|
|
|
|
|
22 |
[리뷰]낙서가 예술이 안 될 이유가 없다. |
이*진 |
|
|
|
20세기 들어서 화가들은 색채와 형태를 파괴하기 시작하고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추상 회화를 그리더니 또 누구나 그릴 수 있는 팝아트라는 것을 퍼뜨리더니 곧 낙서에까지 빠지게 된다. 미술의 역사는 이제 아무렇게나 끄적인 낙서마저도 예술로 받아들이는 너무도 자유로운 시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서로 너무도 닮은 두 스타화가가 등장한다. 장 미셸 바스키아(1960-1988) 그리고 키스 해링(1958-1990)이다.
Jean-Michel Basquiat Keith Haring 1988
둘은 같은 시기에 태어났고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거리로 나가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펼쳤으며, 각각 흑인, 동성애자라는 사회의 아웃사이더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모두 앤디 워홀과 같은 스타를 꿈꿨다. 실제로 앤디 워홀과도 모두 깊은 친분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들은 생전에 스타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운좋은' 화가이자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불행한' 화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절한 '덕분에' 그들은 전설이 되었다. 짧은 불꽃을 태우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그들을, 우리는 자유분방하고 패기가 넘치던, 열정으로 빛나던 청년시절의 모습으로만 영원히 기억한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그들은 변함없는 '젊은 스타'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바스키아의 '낙서'는 참으로 파격적이다. 자신의 모든 걸 분출하듯 정신없이 산만하게 채운 낙서는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파격적이다. 그리고 그 혼란과 광기 속에서 우리는 그의 숨겨진 내면을, 철학을 읽어낸다.
그의 그림은 일종의 '아르 브뤼'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칠고 원시적인 그림, 즉 그 원시성은은 우리가 사회에 너무 길들여지는 바람에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순수함'의 동의어인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솔직할 줄 알았던 바스키아의 그 순수함에서, 우리는 껍데기를 벗고 나오는 진리를 발견한다.
처음에는 낯설기만한 그림에서, 우리는 신선한 충격과 함께 깨달음을 얻는다. 앤디 워홀이 일상의 사물을 가지고 예술의 originality를 무너뜨려 스타가 되었다면, 바스키아는 오히려 전에 없던 더욱 강렬한 originality를 가지고 새로운 스타가 되었다.
파격적인 바스키아에 비해, 키스 해링의 낙서는 너무도 사랑스럽다. 그가 만들어내는 캐릭터들은 그 누구도 좋아할만한 요소를 고루 갖추었다. 알록달록 아기자기하고 세련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참 '쉽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 앞에서 언제나 친절하고 상냥하다. 그 이면의 어떤 심오한 철학이나 메시지를 굳이 찾으려인상을 찌푸리거나 당황하지도 않는다. 단지 보고 즐길 뿐이다.
물론 해링은 자신의 그림에 수많은 메시지들을 담았지만, 그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좀더 많은 대중들에게 다가가길 원했다. 누구나 그의 그림을 사랑할 수 있어야하는 것이다. 그가 바라던대로 지금까지도 그의 그림들은 장난감, 티셔츠, 가방 등 우리 일상 속에서 친근한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요즘 젊은 세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why not?"이다.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굳건한 울타리를 한 방에 무너뜨려버리는 쿨한 한마디. 안 될게 없다는 너무도 간편한 한마디.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은 이런 쿨함을 닮았다. 아니, 우리가 그들의 쿨함을 배웠을지 모르겠다. 쿨한 그들에게 예술은 어렵고 심오할 필요가 없다.
낙서가 예술이 안 될 이유가 없다. 낙서를 하다 경찰에게 걸리면 끌려갔다오면 그만이다. 누가 뭐라하든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면 된다. 종종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어떤 일에 대해 망설였을 때, 나는 그들의 낙서를 들춰보며 그 '쿨함'을 닮아보려 한다. |
|
|
|
|
|
|
23 |
[리뷰]무수한 영감을 안겨준 쿠르베님께 경의를 표하며 |
허*민 |
|
|
|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의
<세상의 기원>과 함께,
이번 강의는 강사님의 전공 분야에 걸맞게 매우 에로틱하게 시작되었다.
Courbet 1866
최첨단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가 봐도 '민망'한 이 작품은 그 기원부터가 다분히 에로틱하다. 한 외교관의 주문에서 시작되어 어느 저명한 철학자 사후에 발견되기까지, 이 작품은 내내 숨겨진 채로 남성의 '은밀한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춘화'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작가 쿠르베 자신의 의도가 '에로틱'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신이 세상을 창조하듯 이 그림을 그렸다" "그 음부는 바로 나" 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창조자로서 화가인 자신 스스로에 대해 큰 자부심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하긴, 19세기 당시 사실주의라는 자신만의 새로운 미술 사조를 유지하기 위해선 그만한 자부심과 굳은 신념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모름지기 역사 속 위대한 화가들은 누가 뭐라하든 자기만의 고집을 갖는 법이다!
위 작품을 모방한 후배들의 작품 역시 (작가의 의도가 어찌되었든 간에) '에로틱'하다.
Orlan 1989
자기 얼굴을 성형수술하는 행위예술로 유명한 오를랑의 작품으로, 모델이 '남성'이 되고 (그것도 힘이 잔뜩 들어간) 제목도 바뀌면서 전혀 다른 느낌의 패러디 작품이 되었다. 작가 본인은 스스로를 '안티 페미니스트'라고 한다지만 이 작품만큼은 참 페미니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Tanja Ostojic 2004
무척이나 기발한 패러디 작품이었다. 작가는 페미니스트이지만 강사님의 말씀처럼 'EU의 기원'이라는 정치적인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최경태 작가의 <여고생>까지 등장하니 예술과 외설 문제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 (십수년간 지나치게 '모범적인' 교육을 받은 나로서 작품을 본 당황스러움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어느 시대에서건 논란이 된다. 그 경계는 사실 무슨 법칙처럼 명확한 것도 아니고 시대마다 다르고 또 변하고 있다. 결국 그 기준은 당대의 여론이 만드는게 아닌가 싶다. 강사님이 예전에 블로그에 쿠르베의 작품을 올렸다가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하셔서 사실 이 작품을 올리는 동안에도 '눈치'가 보인다. 그래도 어쩔텐가. 모두 예술 작품인데 말이다.
어쨌든 이 외에도 모네, 고흐, 밀레 등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옛말을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Millet 1865
Van Gogh 1890
Millet 1850
Van Gogh 1888
"음악에서처럼, 미술에서도 다른 작품의 모방에 대한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강사님은음악과 미술의 속성의 차이로 설명해주셨다. 음의 높낮이나 마디라는 정확성에 기원한 음악과 달리 미술은 색이나 형태의 변화 등 수치적으로 환산 불가능한 다양한 요소에 근거하기 때문에 음악에서 '표절' '저작권' 문제보다는, 미술에선 오히려 '위조'가 더 논란이 된다고 한다.
(넬슨 굿먼 Nelson Goodman에 따르면 음악이나 문학은 위조가 불가능한 '타필적 allographic 예술'미술은 산출의 역사에 의해서만 진품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자필적 autogaphic 예술'이다- 미학대계 2권 <예술작품의 존재> 참고)
또한 '다원주의'를 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로 미술계에서는 이미지의 차용이라는 '패스티(Pastiche)'가 인정받고 있다. 즉 고의적 표절을 통해 원작의 독창성 범주를 해체하려는 시도 자체를 역설적으로 독창적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미학대계 3권 <차용, 그 위반과 역설의 양태와 논리> 참고)
머릿속을 간지럽히던 의문도 말끔히 풀리고
오늘의 강의 끝!
마지막으로 획기적인 발상을 통해
수많은 후배들에게 무수한 영감을 안겨준 쿠르베님께
경의를 표하며. |
|
|
|
|
|
|
24 |
[리뷰]색채의 시인 마티즈를 만나다 |
황*미 |
|
|
|
색채의 시인 마티즈
마티즈와 피카소는 서로를 의식하였다. 서로는 서로의 부족한 것, 흥미로워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서로의 성향과 능력과 한계까지 간파한 그들은 때로는 긴장하며 때로는 모티프를 차용하기도 하면서 두 차례 공동전시회를 개최하였다. 피카소는 마티즈의 색채표현 능력을 인정했고 마티즈는 피카소의 데생능력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의 것이 자기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서로의 재능을 칭찬하는가 하면 단점화하면서 서로를 앞지르려고 노력했다. 푸른색을 단연 으뜸으로 생각했던 피카소는 한때 색채의 언어에 감응되어 강도 높게 색채를 쓰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마티즈가 붓의 안쪽부분을 이용하여 그리는 것을 보게 된 피카소가 무의식적으로 따라하였다. 이들은 상대의 관심사와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며 반응하며 반영하였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마티즈의 을 보고나서 그린 것이다. <삶의 기쁨>은 무아경에 빠진 나체의 남녀는 관능적이고도 자유로운 몸짓을 하고 있다. 무의식을 의식의 바깥으로 불러내었을 때의 모습을 재현한다면 이와 같을까, 틀에 갇히지 않은 캔버스의 인물들은 모두가 주연이고 모두가 조연이었다. 이 원색의 캔버스는 피카소를 매료시켰다. 마티즈의 독창적 표현방식에 충격을 받은 피카소가 부리나케 그린 그림이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그러나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 1907년>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조형물 같은 여인들이 정면을 응시하는 강렬함은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니그로 조각 같은 여자들이 정면을 직시하는 열린 동공과 관람객의 열린 동공이 허공에 마주 걸린다. 당시의 마티즈는 아프리카 콩고의 조각, 이슬람의 문양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국적인 이미지들을 피카소가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마티즈는 그를 산적이라는 말로 심정을 토로하였다. 도둑맞은 기분을 만회할 요량으로 마티즈는 큐비즘 형식의 <이봉 랑베르 양, 1908년>을 제작한다. <이봉 랑베르 양>은 미래의 시간을 사는 존재 같다. 마치 빛이 지나간 자국에 풀이 돋듯이 안테나가 돋아난 우주인의 모습이 연상된다.
<아비뇽의 처녀들, 1907>
동시대인인 두 사람은 인상주의의 유산을 가지고 있다. 순간을 예술로 재현하려는 시도와 빛의 움직임이 빚어내는 분위기를 담아내는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표현방법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진 시대를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기존의 그림들과 변별되기를 바라는 등, 인상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고자 했다. 그것의 한 방법은 기존의 아카데미즘을 탈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성향은 극과 극이었지만 아카데미즘 밖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생각은 같았다. 그들은 아카데미에서 배운 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인정하는 아티스트들에게 배우는 것의 가치를 두었다. 근대주의의 성향이 배태할 수 있었던 저변의 정신은 규칙을 떠나 스스로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었다. 서로 만나서 교류하며, 부딪히며, 자극하며, 깨달음으로써 원하는 새로운 작품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모던이즘의 새로운 전통을 구축하고자 고심했던 두 사람의 자부심은 서로에게 고무적이었다. 마티즈는 스스로를 프랑스 페인팅의 전통을 이어갈 후계자로서의 사명감을 가졌다. 그들은 모더니즘의 출발과 아울러 전통을 성립시켰다.
마티즈를 일컬어 색채의 시인이라고 한다. 마티즈에게 컬러란 기능적 역할 그 이상의 의미였다. 그는 컬러가 담고 있는 감성적, 시각적 언어와 기존의 의미와 기능에 한정시키지 않았다. 붉은 계열을 주조 색으로 한 원색의 향연은 상징적 의미에 포획되지 않는다. 오직 색 자체의 순수함을 사용하는 것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마티즈는 예술과 생활이 별개가 아닌 밀접해야함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그러할 때 창작의 기쁨이 용출되고 그것은 관람객에게 전이된다는 생각을 갖았다. 생활의 사랑, 생활의 열의가 창작의 동기가 된다는 것, 생활과 사이가 좋지 못하면 그림 그리는 행위가 기쁨이 되지 못하고 관람자에게도 기쁨을 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소통을 원했고 공감을 얻어야 할 필요성을 의식했다. “내가 꿈꾸는 예술이란 순수함, 고요함, 우울하고 비판적인 내용을 담지 않는, 안락한 의자 같은 편안함을 연상케 하는 그런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릭 브렛텔은 말했듯이 안락의자의 범주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마티즈의 오브제들은 각종 무늬의 패브릭,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사물들, 신선한 파인애플 같은 익숙한 것들을 오브제로 취하지만 포비즘적 색채와 평면적 구도의 곡선이 간결한 다른 형식을 담아내고 있다. 캔버스 안의 모든 것이 포인트로 관람객의 시선을 분산시키는데 이는 민주적인 정신의 반영으로까지 이해의 확장이 가능하다. 그는 사물이 주변에 끼치는 영향까지 그림에 반영되기를 원했다. 그는 시각뿐 아니라 후각, 촉각, 청각 등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이본 랑베르 양, 1908>
두 사람의 성향은 극과 극이었다. 긍정적 시각으로 세상을 받아들였던 마티즈는 매우 정적이었다. 넥타이에 코트까지 갖추어 입고 작업하는 사진을 보면 웃게 된다. 정장을 하고서라면 벌거벗은 모델의 나체를 장시간 드려다 본다한들 여자로서가 아닌 하나 오브제가 될 상 싶다. 자기검열에 철저했던 마티즈는 엄격함으로 감정의 낭비 없이 작업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팬티바람으로 작업하는 피카소의 사진 또한 쉽게 찾아진다. 이들은 남극과 북극만치나 차이를 갖는다. 그러나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지 않은가.
마티즈가 야수파로의 성격을 굳히기까지, 새로운 화풍의 틀을 확립하기까지 마티즈는 괴롭고 긴 싸움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마티즈의 성격과 삶의 방식에서 유추한 것이다. 단순하고 평면적이고 아름다움에 연연하기 보다는 색채로 내면의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의 화풍은 단순 간결함으로 말미암아 동화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의 자유로움은 우주적 관점의 질서를 조롱하는데 까지 치닫지는 않는다. 딸 쟈클린은 “아버지 마티즈는 바퀴벌레 지나갈 때 그것을 느끼고 잠을 설쳤다.”고 그의 예민함을 회억한다.
마티즈는 한때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다. 그때 12세 연하의 피카소가 그를 다시 작업실로 불러들이기 위해 그의 작품에 대해 여러 의견을 제시하였다. 제안한 내용이 알려진 것은 없으나 마티즈는 용기를 얻고 답례로 <나부>를 그렸다. <나부>는 피카소의 특징을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정면을 응시하는 그림은 그것뿐이었고 본연의 야수적 기법으로 돌아간다. 서로에게 받아들여지는 우정은 그림선물로 마음을 전한다. 피카소는 마티즈에게 연인 <도라 마르>의 초상화를 보냈고 마티즈 역시 우아한 여인의 초상화를 선물했다. 피카소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는 자부심으로 무장되어 있는 것과 달리 마티즈의 그림을 소장하였다. <오렌지가 있는 정물>과 <마그리뜨의 초상>이 그것이다. 서로에 대해서 담담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질투와 경쟁은 서로를 칭찬하는 말로써 숨 가빴던 시간을 승화시킨다.
“딱 한 사람만이 나를 평할 권리가 있으니, 그건 피카소이다.”- 앙리 마티스
“모든 것들을 두루 생각해보니 오직 마티스 밖에 없다.” - 파블로 피카소 |
|
|
|
|
|
|
25 |
[리뷰]그에게 얼마나 큰 상실감을 안겨줬을지 |
이*희 |
|
|
|
자의든 타의든 간에 어느 시대, 어느 분야에서건 경쟁구도는 존재한다. 음식계에는 자장면vs짬뽕. 예전 가요계에는 핑클vsS.E.S, 개그계에는 강호동vs유재석, 피겨계에는 김연아vs아사다 마오, 클래식계에는 헨델vs바흐
그리고 미술계에는 두둥!
피카소vs마티스가 있다.
Pablo Picasso 1938
Henri Matisse 1905
20세기 미술계를 대표하는 두 거장은 같은 시대를 살았고 장수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많은 점이 서로 달랐다. 성격부터 반대였고 서로 다른 길을 향해 나아갔다. 색을 해방시킨 마티즈와 형을 파괴한 피카소는 각각 야수파와 입체파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냈고 후대의 수많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후배들은 두 물줄기가 합쳐지지 않고 각자 뚜렷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낸 것에 대해 감사해야할 지도 모른다.
라이벌로서 두 화가는 종종 불꽃이 튀기도 했다는데, 그 덕에 두 화파가 각자의 개성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던 것이 아닐까.
색채의 시인으로 불리는 마티즈(1869-1954)는 (내가 갖고 있는 책에는 '원색의 마술사'라고 되어있다) 참으로 모범적인 화가였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에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했고 그림을 그릴 때도 정장을 차려입을 정도로 점잖았다. (조선시대 '정승'같은 이미지가 아닐까) 하지만 그는 그림에서만큼은 대범한 시도를 서슴지 않았고, 전무후무한 화려한 원색의 향연을 캔버스에 펼쳐냈다. 화려한 색감과 단순하고 부드러운 형태는 강렬하고 역동적인 조화를 빚어내며 보는 이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다 20대 중반을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미술에 입문했던 마티스와 달리, 피카소(1881-1973)는 어릴 적부터 재능을 일찍 발견한 천재였다. '천재'라는 수식어만큼이나 그는 매우 과격하고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솔직히 얼굴부터가 괴팍한 인상이다...) 그의 여성편력은 이미 너무도 유명하고, 옷을 발가벗고 그림을 그리는 '괴짜'였으며 화가로서 자부심과 야망이 큰 인물이었다.
그는 15만점에 가까운 작품을 남겼고 기네스북에도 올랐다고 한다. 강사님 말씀처럼, 그 엄청난 작업을 하면서
어떻게 또 그렇게 많은 연애를 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이번 수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그간 많은 화가들이 선배들로부터 영향을 받던 것에 비해 두 화가는 라이벌인 서로에게서 영향을 많이 주고받았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들도 세잔의 작품을 보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모방해내는 등 여러 선배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라이벌로서 서로를 은근히 모방했다는 사실은 새롭고도 흥미로운 점이었다.
천재는 천재만이 알아본다고 하지 않던가? 둘은 은근히 경쟁심을 불태우면서도 서로의 위대함을 이미 알아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또 은연 중에 각자의 작품 속에 라이벌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우연인지 고의인지는 모르지만 한 눈에도 모방했다고 보여지는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Matisse 1940 / Picasso 1931
라이벌의 존재는 나를 더욱 발전하게 만든다. 라이벌을 뛰어넘으려는 경쟁심 속에서 어느 새 나 자신을 뛰어넘은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12살이나 어린 피카소가 자신의 라이벌이라는 사실이 마티스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라이벌의 존재가 자신뿐 만이 아니라, 피카소 본인에게도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We must talk to each other as much as we can.
When one of us dies,
there will be some things the other will never be able to talk of with anyone else.
--Henri Matisse to Pablo Picasso
(from http://www.matispicasso.org/default.lasso)
마티스가 죽고 피카소는 오랜기간 애도를 표하며 그를 기리는 작품을 제작했다고 한다.'애증'의 라이벌의 죽음이 그에게 얼마나 큰 상실감을 안겨줬을지. |
|
|
|
|
|
|
26 |
[리뷰]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그림의 베이컨과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그림의 클림트 |
황*길 |
|
|
|
베이컨(1909-1992)의 그림은 괴상하다.
일그러지고 칙칙하고 섬뜩한 그 그림을 보노라면
머릿속엔 물음표만, 팔에는 소름만 가득찬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돌아섰을 때 그 잔상이 가장 강하게 남는 그림이라는 것.
Francis Bacon 1952
참 신기했던 건 처음에는 그토록 징그럽게만 보이던 그의 그림들에
나도 모르게 어느 새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
처음엔 싫어했던 그 쓴 맛에 나중에는 점점 중독되어버리는 블랙커피같은 그림이다.
베이컨의 그림의 매력은 바로 그 기괴함에 있던 것이다.
후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절규'는 푸
생(1594-1665)의 <무고한 학살>을 보고 발견했다고 한다.
"인간에 대한 최고의 절규를 그린 그림"
"이 그림은 언제나 그에게 끔찍한 인상을 남겼다"라고 회상했던
그 그림에서 그는 눈에 보이는 형태나 색상, 완성도 따위가 아닌
끔찍한 '인상' '충격'이라는 그 느낌만을 추출해낸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눈으로 본 그림이 온 몸에 촉각적 잔상을 남기는 경험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우리는 교황의 위엄있는 모습을 '인식'했다면
베이컨의 그림에서 우리는 들리지도 않는 비명을 듣고,
징그러움, 공포감을 몸으로 '느낀다'.
우리의 눈은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인식'하려 한다.
하지만 베이컨은 우리의 그런 무의식적 습관을 혼란에 빠뜨린다.
인식 가능한 형태를 추하게 짓이겨버린 채로
그 무엇도 구분해내기 애매하게 만들고,
그 모습에서 풍기는 기괴함 그 자체를 가지고
보는 이가 몸의 '감각'을 느끼는데에 충실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Bacon 1953
Velazquez 1650
사실 그림을 보고 느낀 감각적 경험을 말로 설명해낸다는 것은 참 어렵다.
그의 그림을 본 그 오묘한 느낌은 느낌으로 남을 뿐...
베이컨 회화에 대한 질 들뢰즈(1925-1995)의 철학 이론이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효자손'이 될 것 같다.
Bacon 1944
전혀 다른 방향이기는 하지만,
클림트(1862-1918)의 작품 역시 베이컨 못지 않게 감각적이다.
눈부시게 화려한 색감과 흘러내릴 듯 젖어들 듯 관능적인 인물들의 모습은
그 누구도 빠져들 수밖에 없을만큼 매력적이다.
우리 집 슬리퍼에도 그려진 클림트의 그림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을 홀리고 다니는 '불멸의 스타'이다.
Gustav Klimt 1901
그는 '빈의 카사노바'로 불릴만큼 여성편력이 심했고
작품에 있어서도 주제가 거의 여성이다.
그런만큼 여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너무도 잘 꿰뚫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죽은 지 거의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여성들까지도 다수가 클림트 팬을 자청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클림트의 <키스>는
대중적인 인기 못지 않게 후대의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안겨준 작품이다.
성적 환상이 가득한 '키스'라는 주제와 함께
화려한 꽃밭, 캔버스 전체를 뒤덮은 금빛 찬란한 물결의 조화로
그는 세기의 걸작을 만들어냈다.
Gustav Klimt 1907-1908
클림트의 키스가 너무도 유명한 나머지
언젠가 봤던 뭉크(1863-1944)의 <키스>가
당연히 클림트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뭉크의 키스가 클림트의 것보다 10년 앞선 것이다.
클림트는 뭉크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던건가?
Edvard Munch 1897
둘이 꼭 껴안고 한 몸이 되어버린 브랑쿠시(1876-1957)의 <키스>는
참 애틋하기까지 하다.
Constantin Brancusi 1916
에곤 실레(1890-1918)는
관능적인 화려함이 가득한 클림트의 그림과 전혀 다르게
지나치게 노골적인 성적 표현과 거칠고 메마른 느낌의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사실 실레는 그 누구보다도 클림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화가다.
초기에 클림트를 면멸히 연구하면서 그의 화려한 표현 양식을 빌렸던 실레는
점차 의도적으로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방식을 개발하면서
클림트와 정반대의 표현 방식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된다.
실레의 <추기경과 수녀>에서 클림트 <키스>의 구도를 그대로 차용하면서
거칠고 파격적인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드러낸다.
Egon Schiele 1912
with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그림의 베이컨 &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그림의 클림트
|
|
|
|
|
|
|
27 |
[리뷰]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솔로몬의 말 |
김*희 |
|
|
|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선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인식이 그래서일까, 후대의 사람들은 기꺼이 감각에 서열을 매기기도 하였다. 오감 중에서 가장 우월한 감각으로 인정받는 것이 시각이다. 미술은 시각에 호소하는 장르이다. 본다는 것은 즉각적으로 정서적 감응을 야기한다. 논리와 이성에 앞서 감정에 작용하는 것이다.
김종근 선생의 두 번째 강의를 인상 짓는 것으로 시각적 자료들을 들 수 있다.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라스코동굴벽화가 그중 하나인데 2~3만년이라는 닫힌 시간의 문을 열고 신비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가하면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과 최경태의 <여고생>은 여성의 생식기를 클로즈업한 것이다.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은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여전히 충격적이고 불편하다. 기원은 근원적으로 감추어져 있을 때가 제격인 것인가. 순간 반사적 저항감, 그 반작용만치나 대단한 집중력을 촉발시킨다. 한 번 보면 결코 잊히지 않을 것만 같다.
동굴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기표이다. 컴퓨터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근자에 회자되는 말이 있다. 남성들은 사랑했던 여자를 각각의 폴더에 저장한다고 한다. 여성들은 처음 사랑 다음에 이어지는 새로운 사랑을 할 때마다 먼저 사랑 위에 덮어쓰기를 한다는 것이다. 농담처럼 회자되는 말은 통계적으로 증명되었는가의 여부에 포획되지 않는다. 대입은 약간의 알레고리만으로도 충분하다.
특히 라스코동굴은 여자가 사랑의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처럼 시간이 만든 퇴적층을 덮어쓰고 있다. 누군가가 제 내부로 와서 새겨놓은 기호들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벽을 긁어서 형태를 만든 그 위에 덧그리는 방법으로 다음 방문자는 제게 인상적이던 무엇을 그려 놓았다.
그것은 큰 동물을 뒤따르는 작은 동물의 배치로 그려졌는가 하면 꼬리가 힘차고 날렵한 들소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게 그려져 동물의 야생성을 부각시켰다. 음각과 양각으로, 그런가하면 섬세하고 부드러운 드로잉은 바윗덩이에 그려졌다는 것을 잠시 잊게 만든다. 그 위에 희고 노란계열과 갈색 천연 염료가 돌에 스며들고 세월에 발효되어 깊이 있는 신비감을 더해준다. 사슴, 원숭이, 사람 등등 복합적 형태의 그림들은 몽띠악, 지역에 실제 하는 동물들로 당시, 구석기인의 척박한 생활상과 그들의 생각과 관심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미술사의 기원이 된 동굴벽화는 축약된 기호들로 새겨놓은 시간의 축조물들인 것이다.
귀스타프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이 빛을 보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흥미롭다. 그려진 계기와 그림이 실종되었다가 드러나기까지 그 그림을 대했던 사람들의 태도에서 유추할 수 있는 심리상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기원>은 1899년 터키 외교관 카릴 베이(Khalil Bay)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다. 카릴 베이의 주문내역서는 이러하였다. 벌거벗은 여인을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이어야 하고 혁신적이고 감동적인 그림을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쿠르베는 고객의 주문을 만족시킬만한 것이 무엇일까 고심했을 것이고 고객이 주문한 심리적 배후를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의 기원>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림을 그리고서 쿠르베는 <불로냐 성>이라는 풍경화를 덮개그림으로 사용하였다. 그림 주문자인 카릴 베이는 그 그림을 은밀한 장소에 커튼으로 가려놓고 감상하였다고 한다.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은 오랫동안 소재를 파악할 수 없었다. 마침내 1955년 정신분석학자인 쟈크 라깡의 유품 가운데에서 문제의 그림이 발견되었다. 유족들은 그림의 두께가 예사롭지 않고 포장지 위에는 X로 표시된 그림에 유의한다.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마송의 그림 밑에 사실주의자의 그림이 감추어져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나에게 신을 보여 달라, 그러면 그리겠다”는 말은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명제이다.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양상을 달리했을 뿐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문제이다.
쟈크 라깡은 그 그림을 2억 4천만 원에 샀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자의 유품 속에서 발견된 <세상의 기원>은 잠자는 공주처럼 120년 간 잠을 자다가 깨어나 라깡의 유명세를 타고 더욱 신비로움이 더해졌다. 오르쉐 박물관이 소장한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은 관람객의 발길을 가장 오래 붙잡아 두는 그림이 되었다.
쿠르베는 마네와 동시대인으로 “나는 신이 창조하듯이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를 하며 마티에르기법의 스케일이 큰 명쾌한 구성의 사실적 작풍으로, 19세기 후반의 젊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다는 것이 시대에 따라서는 매우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시대적 사고가 억압의 기재로 작동하는 것의 저항으로의 직시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미술은 단지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충격이 되고 환기시키는 힘을 갖는다.
모든 예술은 시대에 빚을 지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박물관으로부터 사전에 등록된 전업 작가인 경우 박물관 내에서 그림들을 스케치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한다. 예술가들은 대개 전범이 있으며 영향을 받은 작가의 작품에 천착하는 시기가 있게 마련이다.
미술계는 특히 패러디를 한 장르로 인정한다. 패러디는 흉내 내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역발상적 사고의 전환에서 출발한다. 해학이 넘치는 골계화이다. 순수전통적인 것을 시대의 정서 및 예술가의 개성에 의해 재해석하는 것이다. 존 쿠린(Jhon Currin)와 빅 뮤니즈 (Vik Muniz), 등 많은 포스터 모더니스트들이 <세상의 기원>을 패러디 했지만, Tanja Ostojic 패러디를 주목하고자 한다. 팬티 앞면에 유럽마크를 새겨서 통합된 유럽의 탄생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이 패러디는 통합유럽을 선포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명징하다. 이런 케이스는 정치적으로 활용된 비근한 한 예로써 실용성까지 획득하였다. 그러나 현대예술은 실용성이나 합리성 너머에 있다. 자칫 무의미해 보이는 낙서도 예술로 인정받는다.
예술이 독창성을 생명으로 삼고 있지만 여타의 예술가들의 작풍을 숙고한 후에 자기 색깔을 찾는다. 빈센트 반 고흐도 예외는 아니다. 고흐는 밀레를 전법으로 삼고 있다. 모방이 곧 창조라고 했던가. <씨 뿌리는 사람>, <휴식>, <숲의 소녀> 등 밀레를 사숙하면서 그린 모작들이다. 고흐가 밀레를 모작했다고 해서 그를 밀레의 아류라고 말하지 않는다. 고흐는 그만의 색감과 터치로 재해석하는 개성을 보여주었다. 미술계에서 모방은 자기의 개성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고흐는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중에 귀 잘린 자화상의 배경그림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것은 일본의 우끼요에 풍의 그림이다. 우끼요(浮世)는 모든 세상 것들이 슬프고 덧없다고 말하는 불교 낱말이다. 중세 이전의 일본인들의 인생관은 현세는 한낱 덧없는 뜬 세상에 지나지 않는 허무한 순간일 뿐 인간 삶의 목적은 내세인 정토에서 성불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이 근세를 맞이하면서 종교적 함축성이 약해지고 순식간에 지나가는 현세이니 살아있을 때 즐기며 지내자는 생각이 강해지면서 향락주의적 인생관에서 배태된 그림이다. 19세기 유럽은 자뽀니즘이 유행을 하던 때이다. 동서양이 활발하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던 시대에 고흐의 방에도 우끼요에 풍의 그림이 걸렸던 것이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솔로몬의 말로 두 번째 미션을 마친다.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