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2 때였던가. 어설프기 짝이 없는 글 솜씨였는데도 릴케를 흉내내려고 장장 원고지 50매 분량으로 <18세의 가을>이라는 소설을 쓴 적이 있었다. 셋째 형의 갑작스런 죽음이라는 큰 슬픔의 충격을 그런 식으로 이겨내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원고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치기(稚氣)에도 이르지 못하는 감상의 수사학이라니….

◀◀ 조운시인(좌)과 서해최학송(우)   
◀ 1934년 서해최학송의 묘지제막식에 모인 문인들







◀ 임종을 앞둔 노신
그후 나의 독서는 최서해의 <탈출기>와 노신의 첫 소설집 <납함>류의 작품을 탐독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탈출기>의 주인공이 보여준 자기 운명의 개척 의지와 함께 침통한 붓끝으로 중국 현실을 직시한 노신의 작품에 매료된 것이다. 그러나 소설 읽기는 책을 덮고 나면 늘 뭔가 헛헛했다. 그런 와중에 접하게 된 작품이 바로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의 <자화상>(1937)이 었다. 아 <자화상>! 이 시가 던져준 최초의 충격을 어찌 이 작은 지면에 모두 옮길 수 있을까?

특히 1행의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었다."고 쓴 대목을 보는 순간, 섬광처럼 어떤 전율이 찰나에 온몸의 실핏줄까지 번지는 것을 실감해야 했다. 갑자기 몸이 떨렸고, 두 눈은 고양이 눈처럼 화등잔만해졌다. 단 한 줄에 그 전까지 알고 있던 시에 대한 고정 관념이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실제 아버지가 종이었던 시인의 가계(家系)를 과감히 시에 적용해, 그 세계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23살의 서정적 주체의 자화상을 뛰어난 모국어의 활용으로 그려낸 솜씨는 가위 명편이었다. 2연 16행에 불과한 이 시가 한국시 최고작 중의 하나로 자주 거론되는 이유는 어쩌면 1연 7행의 표현과도 무관하지 않다.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이 바람이다." 바람이 어찌 '나'를 키운 8할의 비중을 차지할 수 있겠는가? 반어적 의미가 큰 이 표현은 '바람'이 상징하듯 어떤 가혹한 외적 고난이면서 거기에 맞서고자 했던 주체의 운동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미당의 첫시집 『화사집』(남만서고, 1941, 발행인 오장환 시인)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 시집은 겨우 100부 한정본으로 출판됐지만, 이 시가 주는 감동은 시대를 뛰어넘어 뭇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꼭지의 제목처럼 이 시의 감동은 누군가 "대신 읽어주는" 것으로 얻어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어쩌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자신의 숙제 또는 어떤 문제를 빨리 해결해달라는 식의 글을 볼 때마다 '발견의 즐거움'이 점차 사라지는 듯해 아쉬움을 느끼곤 한다. 특히 시의 감동은 비록 고될지라도 직접 얼굴을 맞대고 행간의 숨은 뜻을 하나씩 밝혀갈 때 더욱 소중한 자신만의 제2차 경험이 된다. 어쩌면 그 길이 결국 나의 '자화상'을 찾는 과정 아니겠는가? <2000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