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미술 연구의 역사, 개념, 범주

제잔재 청산에 관한 주장과 견해, 실천과 연구 수준은 해방 이후 58년이 지난 지금 2002년에도 여전히 꽃조차 피우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상당한 연구자들이 당위성을 거론하고 또 자료를 발굴하여 공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느낌이 지배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해당 미술인들의 반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미술인들 다수가 해방 뒤 누린 명성이 여전하고 그 제자들이 미술계 곳곳에서 권력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나름으로 『한국근대미술의 역사』1)안에 친일미술과 그 행위를 실증의 방법을 적용해 총망라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일제시대 친일 부역미술가와 친일미술에 대해 해방 이후 지금껏 연구자들과 미술인들이 펼친 주장과 견해의 발자취를 단계에 따라 살펴볼 작정이다. 먼저 해방 직후의 잔재 청산론을, 다음으로 전후 분단 이후 침묵의 세월을 거쳐 이경성이 포문을 열었던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0년 동안의 연구사를 살펴보겠다. 그리고 개념과 범위, 시대설정을 제기함으로써 향후 친일미술 연구에 기여하고자 한다.


해방 직후

해방 직후 논객들은 일제 식민유산 청산과 그 대안을 제시했다. 오지호는 암담 애매한 일본적 감각의 청산과 명랑 섬세 명확한 조선적 감각의 회복을 주장했다. 2) 박문원은 식민지적 자본주의 위에서 성장한 부르주아 미술과 그 연장선상에 자리잡은 기회주의자들의 책동이야말로 조선문화건설의 장애물이라고 규정했다. 박문원은 식민지 부르주아 미술은 관학파와 재야파로 나눌 수 있다고 하면서, 재야파가 민족주의 문화건설을 꿈꿨지만 그것조차도 식민문화를 주장하는 국가주의 배외주의적 파시즘과 같은 것이라고 비판하고 대안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하 민족문화노선을 제창했다. 3)
오지호는 생리학적 인간 감각을 기준으로 삼아 일제잔재 청산을, 박문원은 계급과 민족의 성찰을 통한 일제잔재 청산을 주장했던 것인데 이들의 주장은 각각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았다. 오지호의 견해에 대해서는 예술지상주의 또는 국수주의라는 비판이, 박문원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민족문화 건설 단계를 인식치 못한 급진주의 편향이라는 비판이었다.
이에 대해 오지호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 생리학적 특질은 민족적이며 특히 조선의 인민성을 머금은 것으로 세계적인 것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으며 4), 박문원은 자신이 펼쳤던 견해의 폭을 넓힌 혁명적 로맨티시즘을 계기로 한 진보적 리얼리즘 창작방법론을 제창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지호나 박문원은 결코 자신들의 미학 핵심을 수정하지 않았다.
그밖에 김주경은 1946년 일제의 소극성 문화를 청산하고 적극성 문화를 확립, 보급해 나가야 할 것을 제창했으며6) 길진섭은 작품의 내용과 형태, 묘사 등 모든 면에서 억압당했던 자유성을 회복하고 나아가 인민을 위한 창조, 자주국가 수립을 위한 대중과 함께 하는 미술을 이루어 나갈 것을 제창했다.7)
윤희순은 일제시대 때 첫째 일본정서의 침윤과 회고주의라 할 일본식 조선향토색, 재야파의 순수주의까지 모두 아울러 퇴폐적 경향이라고 지적하고 이것을 제국주의 퇴거와 더불어 숙청해야 할 대상이라고 규정했다. 나아가 현실을 대담하게 응시하는 새로운 리얼리즘을 제창하면서 희망과 신념을 주고 환희와 계시로써 명일의 추진력이 되는 정신적 요소를 주는 평민적인 조형미를 그 핵심으로 제시했다.8)
그러나 이 같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미술계는 물론 모든 면에서 미군정의 책략과 보수 반동세력의 준동으로 말미암아 일제잔재 청산은커녕 오히려 변형된 형태의 잔재가 세를 더해갔다. 이처럼 잔재가 청산은커녕 부활함에 따라 1947년에 접어들어 부활한 잔재에 대응할 필요가 생겼다.
오지호는 1947년, 일제 때 뿌리내린 자유주의적 요소, 이기주의 경향이 청산은커녕 강화되고 있으며 새 세대들조차 일제에 의해 성장이 중단됨에 따라 사상이 앞서고 기량이 뒤쳐진 불구가 되었으므로 신민족미술 수립을 낙관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탄식했다. 이를테면 오지호는 해방 이후 고희동 일파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다시 작가의 사상적 경향을 볼 때 일제를 통해서 미술인의 뇌리에 깊게 뿌리박은 자유주의적 요소, 이기주의적 경향은 좀처럼 청산되지 못하고 가장 진보적 부면에 있어서까지도 이 고질은 모든 조직과 활동에 가장 심한 지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미협 간부(*조선미술협회 회장 고희동)에 의해서 구호처럼 부려진 미술인은 미술만에 전력하는 것이 곧 건국을 도웁는 것이다라는 관념이 어렴풋이지마는 아직까지도 다수의 미술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이 말은 현실적으로는 자유주의를 합리화하려는 한 개의 표현인 동시에 그 관념 자체는 전쟁기에 있어 왜적이 조선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자국의 인민에게도 강요한 소위 직역봉공(職域奉公)의 정신을 번역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데에 담당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일제의 정신적 유산인 이와 같은 그릇된 관념은 참된 민족미술의 수립은 참된 민주국가의 건설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필수조건으로 한다는 단순한 진리의 이해를 곤란케 하고 이것은 외형적으로는 민주노선에 적응하려고 하면서도 실천에 있어서는 이와는 배타되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게 했다.
이상과 같은 미술인 일반의 사상적 불확실의 일면에 있어서는 의식적인 미술반동이 계획되고 진행되고 있는 것을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는 과거에 있어 왜적에게의 아부와 추수(追隨)의 대상으로 얻는 기허(幾許)의 이익으로 현실을 만족하려고 하는 노예근성의 계승이오 재현임에 불외(不外)한 것이다. (다만 그 상전(上典)의 빛갈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활동은 물론 미술운동이 아닌 일종의 모리행위로서 예술적 견지에서 운위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반동적 역할과 무의식적 대중에게 주는 영향력은 결코 경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9)

친일파가 상전을 미국으로 바꾸어 친미파로 우뚝 서고 있는 현실에 대한 오지호의 이 탄식에 가까운 비판에도 불구하고 식민미술 잔재 청산은 너무나도 빨리 청산당했다. 그러나 역사는 지워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뒷날 연구자들은 그 감춰진 역사를 들춰내 되살려 놓고서 다시 그 청산의 역사를 일깨운다.
이쾌대는 1949년, 해방 이후 일제 36년간 쌓이고 쌓인 모진 독소를 송두리채 뽑아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그럼에도 일제시대 때 수상작품을 전람회장에 내놓거나, 일본인 초상화가 전람회장의 주인공으로 자리를 잡는다거나, 서구명화 모사품이 행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일제의 잔재를 씻어 버리고 봉건사상을 청산하므로써 우리 민족미술의 세계사적인 위치에 앙양하자는 것이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부면에 있어 뒤떨어진 우리들의 형편으로서 남보다 몇 10배 몇 천배의 노력이 필요함은 두 말 할 것도 없을 터이지만 우리 화단은 야릇한 가장행렬로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고 속상해 했다.10)

1950-1960년대

전쟁과 분단은 친일미술, 일제잔재 청산의 과제를 침묵과 암흑의 뒤안길로 보내버렸다. 1950년대를 거쳐 1960년대 전기간 동안 미술대학과 예술원, 미술협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기구 등 미술과 관련한 어떤 단체 및 기관에서도 친일, 잔재 따위 낱말을 거론한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그 기관과 단체를 장악한 미술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거침없이 행동했고 자신에게 해로운 요소에 대해서는 광적인 폭력을 가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자주와 민족, 평화와 통일의 과제는커녕 반외세, 반봉건, 반독재의 당면한 현실조차 외면한 당대 모든 미술인들의 침묵은 지금 돌이켜 보면 절망스러운 시절 오직 개인의 이해를 따르던 미술인의 탐욕스런 초상이었다.

1970년대 11)

이경성은 1973년,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에 대해 일제의 식민지문화정책의 일환으로 강렬하게 추진된 한국문화말살의 거점이었으며 일제말의 조선미전 귀족들은 어느 의미로나 반민족적인 결과를 저지른 것으로 의당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경성은 다음과 같이 썼다.

"한마디로 식민지 잔재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좁은 의미의 것으로 이른바 일제 잔재가 그것이다. 또 하나는 넓은 의미의 것으로 8.15해방 후 현대 문화의 수입에 끼어든 외래적인 요소들이다. 일제 잔재는 그들이 영토와 주권의 야심을 내걸고 적극적으로 강요한 식민주의이기 때문에 식별이 곤란하다. 그러나 한국미의 주체성에 국적을 흐리게 하고 병들게 하는 점에서는 둘 다 독소적 존재이다. 더우기 일제 잔재는 옛날의 것과 현재의 것이 있어 옛날의 것은 이미 침략을 멈춘 역사적 회고가 되었지만 현재의 것은 미술 잡지 등 매스미디아를 통해 젊은 세대의 적극적인 지적 갈망 속에 자리잡기 때문에 그 식별은커녕, 정리조차도 어려운 지경이다." 12)

이경성의 이 같은 주장은 오랜 침묵의 장막을 걷어치운 것이었다. 특히 이경성은 청산만이 아니라 해방 후 상황을 거론하는 가운데 단지 인적 청산이 아니라 식민주의 청산과 한국미의 주체성을 앞세움으로써 식민잔재 청산을 미의식의 수준으로 헤아렸다. 지난날 박문원과 오지호, 이쾌대의 잔재청산과 극복 대안 추구라는 논리의 복원이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뒤를 이어 김윤수가 그 논리를 복원하는 대열에 동참했다.
김윤수는 과거 잔재가 어떻게 현재로 계승되어 내면에 흐르고 있는지에 집중했다. 1975년, 조선미전은 미술이 정치와 사회와는 무관하다는 신념을 심어주고 그 모범인 서구 근대미술과 일본적 아카데미즘을 익히고 시험하는 경연장이었다면서 결국 예술지상주의 미술만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것을 식민지미술의 굴절과 경화 현상이라고 규정한 그는 해방 뒤에도 일본정서가 다소 제거된 것 외에 나머지는 크게 변하지 않았거니와 작가들의 의식 속에 예술의 순수성, 자율성, 다시 말해 반사회성, 반민중성에 대한 신념과 그 신념이 낳은 보수성과 봉건성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잔재라고 규정했다.13) 이어 1977년에는 원로 미술가들이 일제시대 조선미술전람회를 권위 있는 미술전람회라고 회고하고 있으며 전후세대 미술가들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조선미술전람회와 엄연히 다른 것으로 과거에 비할 일이 아니라고 내세우고 있는 현실을 두고 지적하기를, 조선미술전람회는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제도, 사상, 인물, 사고방식 따위의 하나로 그것이 시간을 두고 증폭, 확대재생산되어 오늘의 현실을 낳게 했던 것이고 또 그 속에서 자라난 제도, 인물, 사고방식, 예술관, 예술양식까지 모두 대한민국미술전람회로 그대로 넘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미전의 잔재를 예술을 하기 위해 일제의 지배를 용인하는 순응주의, 일신의 영달과 출세를 위해 현실과 타협하는 출세주의에 사로잡히고 이해관계를 위해 도당과 분파주의를 일삼는 생리를 익힌 것이라고 썼다. 또한 여전히 남아 있는 일본화풍, 일본적인 취향, 일본색, 그 예술관과 더불어 현실과 유리된 채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는 두 가지 예술양식, 다시 말해 소수 부르주아지의 귀족취미를 반영하는 자연주의 경향, 소수 엘리트 예술로 시종하는 모더니즘 경향이 횡행하고 있다고 썼다. 그리고 조선미술전람회의 잔재를 없애는 대안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폐지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14)
김윤수는 이경성의 주장과 각도를 달리해 1970년대 미술의 반민중성을 비판하는 역사의식의 잣대를 내세움으로써 작가의식의 성찰을 꾀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또한 제도의 개혁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현실 의식의 차이에 따라 현실에 대한 견해와 주장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구열과 오광수가 현대미술통사를 서술하는 가운데 일제 잔재문제를 거론했거니와 이들은 문제의 핵심 의제를 다른 것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이구열은 1976년 『한국현대미술사(동양화)』에서 「단구미술원과 일본색 문제」항을 통해 단구미술원이 일본화풍의 극복과 우리 화맥의 계승 및 전통의 재창조를 내세웠다면서 그런데 누가 봐도 일본화법으로 보여지던 그림은 해방 뒤 감정적으로 더 이상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면서 그런 화가들은 전통 필법과 묵법을 그동안 수법에 절충시키거나 완전히 새방향을 시도했다고 썼다.15)
오광수는 1977년 『한국현대미술사(서양화)』에서 「식민지 잔재의 문제」항을 통해 거론하기를 해방 직후 가장 커다란 이슈가 일제식민지 잔재의 불식과 민족미술의 건립이었다고 쓰고는 윤희순이 해방 직후 제기한 일본적 감성의 침윤과 일본적 해석의 향토색 비판과 오지호의 견해를 인용하는 수준에서 멈추고 말았다.16) 그 뒤 오광수는 이 글을 증보한 책에서 일본적 색채 문제는 동양화에서 더욱 심했다고 지적하고 조형이념 형성의 논리적 배경, 이념적 주체성이 너무 빈약하여 구체적 방향을 갖지 못한 채 값싼 감상취향에서 맴돌았다고 썼다. 오광수는 그러나 서울대학교에서 김용준, 장우성이 문인화의 현대적 해석을 통한 동양화의 조형성의 재발견을 추진,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존 남화산수의 맥과 더불어 일본화적 잔재를 극복했다고 평가했다.17)
이구열과 오광수는 1950년대 이후 일제잔재 청산이 자연스럽게 이뤄졌으며 또한 새로운 창작을 통해 극복되어 나간 것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일제 잔재를 단지 일본화법, 일본화풍으로 집약시켜 보았으므로 그렇게 판단했던 것이겠다.
일제 잔재란 단지 기법이나 미감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에 숨쉬고 있는 인간성, 이념으로부터 기법에 이르는 광범위한 범주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핵심을 놓치고 단지 기법과 미감에 제한했으므로 잔재청산과 극복의 문제의식 수준이 제약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경성이나 김윤수의 수준을 유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 또는 제한함으로써 성찰의 높이를 낮추고 또 극복 대안은커녕 숱한 잔재를 외면하는 결과에 이르러 잔재를 회피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하는 구실에 머무르고 말았다.
결국 1970년대 친일미술, 일제잔재 미술에 관한 연구나 견해는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경성과 김윤수는 식민주의 의식과 민중성 회복과 같은 기준을 세웠고 이구열과 오광수는 일본화 기법의 청산을 기준으로 세웠다는 것이 전부다. 해방직후 친일잔재 청산론의 핵심을 계승한 이경성, 김윤수의 성취에 비해 잔재 청산론의 극히 일부만을 계승한 이구열과 오광수의 후퇴로 요약할 수 있는 1970년대 식민잔재 연구는 1980년대로 넘어가 새 국면을 맞이했다.

1980년대

1970년대 친일미술과 그 잔재에 대한 개괄적인 지적을 거쳐 1983년에 9명의 필자 김윤수, 문명대, 박용숙, 안휘준, 이경성, 이구열, 임종국, 정양모, 최순우가 나선 「한국미술의 일제 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18) 은 친일미술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규명과 비판을 수반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해당 미술인들의 격렬한 반발과 항의를 몰고왔다는 점에서 해당 과제에 관한 문제의식을 광범위하게 확산시킨 획기적인 성과였다.
먼저 9꼭지의 글 가운데 「한국미술의 비극적인 재출발」의 필자는 일본 채색화의 영향을 받은 작가로 김은호와 그 제자들, 이영일, 이한복, 박생광, 천경자를 지목했다. 또한 유채화 분야에서도 일본 인상파 아류의 수용과 더불어 일제의 향토적 서정주의 권장과 조선미술전람회 관학파의 정착 및 그것의 계승으로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아카데미즘 형성 따위 계보를 일제 식민잔재로 규정했다.
「일본미술의 이입과정」의 필자는 김은호, 이한복, 최우석과 김은호 문하인 이유태, 조중현, 김화경, 박래현, 천경자를 거론하면서 이들이 모두 일본화, 일본화풍의 침윤을 받은 화가라고 평가했다.
「황국신민화 시절의 미술계」의 필자19) 는 미술인의 사회활동 발자취를 통해 일제 식민잔재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가장 많은 미술인 명단을 거론하고 있는데 구본웅, 김은호, 그리고 조선미술가협회에 참가한 심형구, 김은호, 이상범, 이영일, 이한복, 김인승, 배운성, 이종우, 장발, 김경승, 단광회 참가 미술인인 김만형, 김인승, 박영선, 손응성, 심형구, 이봉상, 국민총력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으로 참가한 심형구, 이상범 그리고 황기2600년 봉축 기념미술전에 참가한 김인승, 윤효중, 이국전, 조규봉, 일만화 연합 남종화전람회 참가자인 김은호, 이상범 등을 지목했다.
「민족미술을 위한 지상의 과제」 필자는 이한복, 이영일, 김은호와 그 제자들인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이유태, 안동숙, 그리고 최우석, 박래현, 천경자와 이들에게 교육받은 박노수, 서세옥, 장운상은 모두 식민지적 잔재를 지니고 있으며 고희동, 김관호, 나혜석, 이종우, 도상봉, 이인성, 이봉상, 김흥수, 심형구, 김인승, 이중섭, 김환기, 구본웅에 대해서는 모두 일본식을 수용한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식민지 미술의 파장과 여파」의 필자는 식민지 시기 미술이 끼친 해방이후 악영향을 거론했는데 첫째, 미술제도상 문제로 조선미술전람회가 모태인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지닌 관(官) 우월의식이 낳은 모든 병폐. 둘째, 미술형식에서 아카데미즘의 확대 유포로 조선미술전람회가 허용하는 양식, 다시 말해 무기력한 인상주의, 소박한 향토성만을 인정했던 양식이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그대로 이양,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 셋째, 작가정신의 문제로 일종의 순수주의가 끈질기게 작용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삶에 대한 사회적, 실존적 차원의 탐구로써의 예술을 터부시 한 일제식민미술의 계승으로써 가장 심각한 병폐의 하나라는 점을 지적했다.
「우리의 미감을 회복하는 길」의 필자는 식민잔재 청산 과제가 시급히 요청되는 까닭을 첫째, 주체적이고 선별적인 수용이 아니라 일제에 의한 타율, 강압에 따른 수용이라는 점. 둘째, 민족 독자의 미의식, 미감을 혼탁케 함으로써 참된 민족미술 형성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 셋째, 식민잔재가 몸에 밴 작가들이 후세 교육을 담당하여 끼치는 악영향이 심각하다는 점을 들었다. 청산 범위에 대해서는 첫째, 스스로 일제 미술교육을 받고 그것을 반성없이 추종하며 이를 후세에 전수한 작가의 작품과 그 영향. 둘째,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작가로서 입신출세를 하면서 우리 것을 찾지 않고 오히려 외면하며 일본화된 양식을 추종한 작가의 양식. 셋째, 일본 남화와 채색화, 그리고 일본에서 정착된 인상파 아류의 유화 찌꺼기를 추종하는 작가라고 규정했다. 구체적으로는 김은호와 그 추종자를 예로 들었다.
이에 대한 반응은 친일미술가로 지목 당한 미술인 일부와 그 밖의 추종자들이 나서서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를 묻는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20) 성명서에 참가한 미술인들은 일제 잔재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가 일반에게 묻고 싶다고 주장했는데 아마 그들에겐 일제 잔재가 안보였거나 그런 역사 사실을 배운 일이 없었는지 모른다. 실로 일제가 물러간 지 37년이 지났음에도 일제 잔재가 오늘 아침에 버린 쓰레기처럼 썩은 냄새를 풍기며 미술계를 더럽히고 있었던 것이다.21)
『계간미술』은 다음호에 「사고(社告)」22)를 발표했는데 몇몇 원로작가에게 본의 아니게 누가 됐다면, 또 필자 여러분에게 언짢은 결과가 빚어졌음에도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23) 라는 매우 짧은 문장을 앞세워 놓았다. 더구나 『계간미술』은 이 문제에 관해 계속 지면을 제공할 것이라고 밝히는 한편 성명서를 낸 주축 몇 분에게 공개 청탁을 함으로써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사과는커녕 다분히 반격을 펼치는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는데도 그렇게 흥분했던 숱한 미술인과 단체들은 더 이상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싱겁고 우스운 일이었다.
특히 성명서 사건의 주도자 장우성은 해방과 함께 일본 색채에서 벗어나 우리의 것을 찾자는 노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작가 자신들이 부단한 노력을 했고 서울대학교에서 후세들에게 가르칠 때도 일본화가 북화의 영향을 받은 밝은 채색화이기 때문에 우리는 남화의 전통을 살린 수묵화를 우선으로 교육했다고 하면서 교육을 그르쳤다는 말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거듭 주장했다.24) 사건이 일어난 지 몇 해 뒤인 1987년 오광수가 서울대학교 교수를 중심으로 한 일부 동양화가들이 시도한 문인화에 대한 재인식과 문인화풍의 현대적 변주야말로 친일미술 청산과 극복의 대안이었음을 내세웠는데 이는 장우성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다.25)
『계간미술』 필자로 참여했던 원동석은 얼마 뒤 일제잔재 미술 시비론이란 부제로 「민족미술의 정립문제」를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한국미술의 일제 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에서 제기한 여러 문제를 보다 심화시켜 나갈 부분을 검토한 다음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원동석은 다음처럼 썼다.

"일제의 창구를 통하여 근대과정을 겪었던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적인 영향은 비단 미술계 뿐이 아니었고 자기 완성이 미숙한 청년기에 일본화풍을 받아 출발한 사례를 들어, 한 테두리에 묶는 것은 지나친 논리비약이다." 26)

이런 주장을 근거로 원동석은 김환기, 이중섭, 이상범, 김기창을 거론하며 청년기 일본화풍을 일탈해 민족의 미의식을 추구했던 작가들의 사례를 선별할 수 있고 노, 장년기 활동과 비교해 보는 신중한 비평이 있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친일미술을 헤아림에 있어 선후를 따져 이후 일본화풍을 버리고 새로운 화풍을 모색한 경우 과거 일본화풍 이식 행위는 묵인하거나 사소한 일로 지나쳐도 좋을 것이라는 선후분별론을 편 것이다. 이러한 선후분별론은 오광수나 장우성의 주장과 같은 논리를 지닌 것인데 친일잔재 극복에 노력한 바가 있다면 과거 행위에 대해 묵인할 필요가 있다는 일종의 공과론이라 하겠다.
따라서 원동석은 어떤 요소가 일본풍이며, 그에 대응하는 한국풍은 무엇인가를 따져 양식상 미학논쟁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는 공과의 무게를 따져 김은호, 이한복의 경우 일본적 채색, 선묘는 일제시대에서도 거론된 바 있다면서 인상파 아류격인 일본 유화법을 구사한 작가로 심형구, 김인승, 이종우, 도상봉, 박영선을 들고 이들이 국전화풍을 주도 지배한 사실을 거론했다. 같은 공과론, 선후분별론이라 하더라도 차이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기법, 형식을 중심 대상으로 설정해 일제잔재, 친일미술을 논하는 성찰 방법론은 논의의 초점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여러 미술인들이 친일 사회활동을 펼쳤고, 해방이후 반사회적, 반민주적 활동을 상당한 수준에서 펼쳤다는 점에서 기법, 형식의 변화 노력만을 잣대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다. 그렇게 하다보니 친일 잔재를 비판하는 주장에 대해 매우 당당한 반대와 항의를 의연히 펼치는 미술인들이 속출했던 것이다.
원동석은 다시 1985년 「일제미술 잔재의 청산을 위하여」27) 라는 글에서 그처럼 당당히 항의하는 미술인들의 논리를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친일미술론이 외세주의 배격의 의도라면 오늘의 서구미술도 아울러야 할 터인데 굳이 한쪽만 몰아세우느냐는 주장. 둘째, 일제시대의 한국풍, 일본풍 따위는 동양풍 또는 국제풍으로 아우를 수 있을 만큼 구분이 필요 없었는데 오늘에 와서 친일화풍을 가려내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처럼 친일미술론을 외세미술의 영향 정도로 치부하는 태도는 친일미술, 일제잔재를 기법이나 형식의 문제로 제한했을 때 성립할 수 있는 논리였다. 게다가 일본, 한국을 묶어 동양풍이니 국제풍 따위로 설정하는 관점도 마찬가지로 친일미술을 기법, 형식에 제한시켰을 때 가능한 논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러한 생각은 내선일체, 대동아공영권의 논리를 고스란히 적용한 관점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심각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주장을 당당히 펼 수 있었던 것은 친일미술을 비판하는 논객들이 펼친 선후분별론, 공과인정론의 허술함과 함께 그 선후, 공과를 기법, 형식에서 찾았던 탓이기도 했다.
그런 주장에 대해 원동석은 탈역사의 자기 보호막일 뿐이라고 매섭게 질타했지만 그러나 이러한 일축으로는 그 미술인들의 당당함을 제약할 수 없었다. 결국 원동석은 기본적인 자료조사와 발굴을 통해 엄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정리, 분석할 것을 강조하는데 머물렀다. 이러한 실증의 강조는 공과와 선후를 가릴 근거였고 또한 옥석을 구분할 수 있는 기초였기 때문에 그로서는 매우 당연한 귀결이었다.
물론 원동석은 해방 후 친일 잔재론의 좌절과 일제시대 일본풍의 만연 현상만을 거론한 것은 아니었다. 「일제미술 잔재의 청산을 위하여」란 글에서 내선일체에 동원, 활동한 미술인과 단체, 창씨개명 미술인을 거론하기도 했다. 원동석의 이 연구는 지금껏 발표된 친일미술의 사실관계를 집약한 것이었지만 스스로 밝혔듯이 새로운 사실을 밝힌 것은 아니었다. 윤범모도 같은 해 과연 일제잔재는 청산되었는가?란 부제로 「광복 40년 미술계의 반성」28) 을 발표했는데 기왕에 밝혀진 친일미술행위 사례를 거론하면서 잔재의 청산을 매우 강한 어조로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실 발굴이 이뤄지지 않고 있던 조건에서 친일미술을 옹호하는 논리가 횡행하던 터에 친일미술과 일제잔재에 관한 실증과 새로운 각도의 비판이 요청됐고, 그같은 새로운 단계에 부응했던 성과는 1980년대가 끝나가던 때 제출됐다.
최열은 1988년 「미술의 사회적 이념과 현실」29) 에서 기존 연구자들이 해방공간을 혼란, 난맥상, 이합집산이나 또는 이데올로기 분쟁에 희생된 미술 따위로 묘사하는 것에 대해 역사 이해의 저급한 수준에서 비롯한 왜곡, 폄하라고 비판하고 당시 미술계의 전과정을 새로운 눈으로 볼 것을 제창한 다음, 동시대 미술가들이 식민지 시대에 범했던 반민족적 요소를 청산하고 새로운 형상형식을 탐구해 나가는 과정에 눈길을 돌리되 그 이전에 윤희순이 지적한 바 정치 경제의 해방 없이는 조형예술의 해방이 없다는 것을 상기해 그 전과정을 적극적으로 헤아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민족적 과제에 충실한 미술운동의 이론적, 실천적 활동 주체를 대부분 포괄하고 있던 미술가조직이 단독정부 수립으로 말미암아 잠적, 해소 당하는 과정을 거론하면서 그 과정이야말로 식민잔재 청산과 같은 시대적 과제를 담당할 주도세력의 소멸을 뜻한다는 견해를 펼쳐보였다.

"반민족행위자라고 분류되어 해방공간에서 모든 조직에서 배제되었던 적극적인 친일미술가로서 김은호, 이상범, 심형구, 김인승, 윤효중, 김경승 등이 대한미술협회에 가입, 중요직책을 확보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맡아 막대한 기득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일제잔재의 청산이니 봉건적 잔재의 청소니 하는 과제는 어디론가 실종되었고, 민족미술이나 리얼리즘이란 용어는 불온한 것이 되어버렸다." 30)

이같은 해석과 지적은 선후분별론, 공과인정론의 연장선상에서 그 선후가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 공과인정에서 과오가 어떻게 되풀이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는데 특히 좌우대립과 같은 이념이나 단독정부 수립과 같은 분단고착화 정치과정에서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지배이데올로기 구실을 한 반공노선과 그 이념을 배경 삼아 남한 미술계의 주도권을 잡은 미술인들의 관점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이었다.
「한국미술의 일제 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에서 봇물 터지듯 제창된 친일미술 청산론은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그 잣대를 미술의 민족성, 자주성을 회복하는 데 두어 친일미술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청산해 나가자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이없는 반발을 불러 왔다. 이 같은 현상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친일미술의 부정적 요소들이 고스란히 미술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더욱이 앞서 보았듯이 장우성과 오광수가 내세우는 일본화풍 극복의 대안인 남화풍의 수묵화 또는 고답적인 정신주의에서 한국 고유의 미의식을 찾으려고 한 문인화의 재평가 그리고 젊은 동양화가들에 의해 시도된 조형실험도 새로운 동양화의 창조라는 시대적 열망을 좇은 것31) 이란 평가는 친일미술과 그 잔재의 범위를 제약하는 것이었다.
반면 원동석, 윤범모는 이경성, 김윤수의 견해와 주장을 이어받아 그 폐해를 강조하고 지속적인 청산을 거론했으며 특히 실증의 중요성과 그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친일미술 연구의 강화를 제기해 여론을 환기시켰다. 최열은 창작의 형상형식만이 아니라 해방 직후 미술운동 과정을 통해 친일미술 및 일제잔재의 발자취를 또 다른 각도에서 헤아릴 수 있는 관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해방 3년의 미술운동」32) 을 발표해 해방 직후 미술계의 동향을 사상과 미학, 조직의 범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기초를 제공했던 것이다.

1990년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출판물에 의한 반민족문제의 대중화가 확장되고 있던 터에 미술분야에서도 친일미술 연구자의 교체와 확대가 이뤄졌다. 선두주자가 이태호였다.
이태호는 1991년 「친일미술인의 몇 낱 작품사례」를 발표하면서(?) 조선식산은행사 사보 『회심』에 실린 삽화, 월간지 『소국민』, 『신시대』의 표지화나 삽화들을 소개했다.33) 그는 회화나 조소예술보다 대중접촉면이 넓은 잡지 삽화, 표지화 분야의 친일미술 사례를 밝힘으로써 그 영역을 확장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이태호는 친일미술가에게로 눈길을 돌려 1993년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란 부제로 「김은호」, 스승에게 물려받은 친일화가의 길이란 부제로 「김기창」,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이란 부제의 「심형구」, 도쿄미술학교 우등생이 친일에도 우등이란 부제의 「김인승」34) 을, 다음해에도 「윤효중」, 「김경승」35) 을 발표해 친일미술가의 행적을 집약해 냈다. 그 밖에 최석태는 1990년 「일제하 미술가들의 변상도」36) 를 발표했으며 1994년 거장의 향토색에 가려진 친일행적이란 부제의 「이상범」37) 을 발표했다. 이처럼 전에 없이 연구발표가 활발히 이루어지던 때 그 대상의 한 사람인 김기창이 자신의 이름을 딴 기념관을 짓겠다고 나섰다.
김기창은 1993년 자신이 살고 있던 충청북도 청원군 북일면 거주지 8만 7천여 m2에 대규모의 운보기념관 건립계획을 세우고 행정당국에 국토이용계획 변경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경상대학교 신경득 교수가 본받을 것이 있는 사람이나 세우는 기념관을 짓는다고 하는데 친일행각을 일삼은 사람의 기념관을 짓는다니 애국선열이 잠을 깰까 두렵다며 우리 자식들에게 친일을 해도 그림만 잘 그려라고 가르칠 수 없다는 요지의 글을 발표했다.38) 이에 따라 충북 지역에서 운보기념관 건립반대운동이 일어나 7월 13일 충북역사정의실천위원회가 창립됐다. 친일미술 행위를 둘러싼 논쟁으로 두 번째이자 그 규모, 내용, 형식면에서 가장 첨예한 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자신의 계획에 대한 반대운동이 펼쳐지자 김기창은 사상적인 친일로 무장했다거나 일제의 정책에 적극 가담했다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결코 아니라고 단호히 부인하겠어라고 반박했고 또 배를 곯지 않으려고 했던 그림에 대해 무슨 사상이냐며 그럼 일본사람이 주는 배급도 먹지 말았어야지, 미술이면 미술로 봐줘. 일제의 하늘아래 살던 사회 시대적 문제로까지 가면 나는 정말 할 말이 없어라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친일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은 실력이 없었다. 당시 뽑힌 사람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인데 높은 나무가 바람을 많이 받는 것처럼 나는 지금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나의 일생에 대해 잘잘못이 있다면 낱낱이 밝혀질 것이고, 나의 예술에 대한 평가는 후세의 미술사가나 후학들이 내려줄 것이라고 당당하고 의연히 주장했다.39)
이같은 주장은 친일 부역행위자로 지목된 자신에 대해 부정하고자 했던 것이라 할지라도 역사의식, 작가의식에서 상당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구나 1940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로 추대됐으며, 1941년 채화(彩畵) 보국의 열의로 총후의 대작을 망라한 구신회(九晨會)전람회에 출품한 구신회 회원이었고, 1942년 반도총후미술전에 초대작가로 출품했으며, 조선남화연맹에 참가 전람회에 출품 그 판매수익금을 정부, 육해군에 헌납하는 사업에 참여했고, 1945년 4월 조선미술가협회가 주최하는 종업원 위문 및 증산 자태의 작품화를 위한 증산 제일선 파견사업에 참여했던 일은 지울 수 없는 친일 부역행위이다. 이 경우 해당 전람회에 어떤 작품을 출품했건 무관하다.
그런데 김기창의 그 같은 변명과 주장을 옹호하는 견해가 제출됐다. 먼저 오광수는 「억지논리와 감정론의 위험」40) 이란 글에서 일제식민잔재는 미술교육제도와 화풍 상에서 남아있으며 조선인 미술가들의 구체적 친일행위로는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미술보국정책에 부역한 사실을 들 수 있다고 전제를 깔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품 이외에는 작품상에서 투철한 친일의식에 의한 것은 없다고 단정하면서 당시 미술인들의 의식수준이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하기에는 미흡했다고 주장했다. 친일미술 연구의 접근방법론에 대해서도 이원론적인 제도와 민중이라는 경직된 틀 속에 맞추고 있으며 미리 답을 정해놓고 꿰어 맞추기 식이고 여기에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합쳐진 궤변이 나오고 있다고 하여 기존의 민중권 미술이론가들의 연구를 비판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김기창이 겸허하게 고해성사하는 기분으로 당시를 회고하는 부분은 당당하고 또 사상적 친일은 없었다고 하는 주장도 솔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감쌌다. 덧붙여 친일미술가를 거론할 때 진지하고 객관적인 검증이 필요하다고 썼다.
다음 이구열은 친일미술 연구가 기초단계에 머무르고 있거니와 앞으로 당시의 모든 기록자료를 낱낱이 조사해서 친일협력 성격에 드는 모든 사례 기록을 파악 정리하여 일제식민지시대의 민족의 수난과 치욕을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밝히는 일을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구열은 미술에 있어서의 친일행위란 어느 미술가의 개인적 친일 언동이나 일제부역보다는 그의 특정 작품의 주제와 내용상의 일제정책 협력형태가 지적되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어 어느 화가의 몇몇 일제협력 작품 사례를 들어 그의 예술 생애 전체를 가차없이 친일화가로 매도해 버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주장하고 그 예로 당시 이루 열거할 수 없이 많았던 여러 화가들의 친일협력 그림행위들 중에서 김기창이 한층 두드러지게 친일적이었다는 점은 없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41)
이구열의 견해는 특정 작품의 주제와 내용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그 주제와 내용이 일제정책 협력형태여야 한다는 것으로 친일미술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나아가 그와 같은 기준에 일치하는 작품이 몇몇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친일화가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또 하나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이구열의 기준을 따른다면 20세기 한반도에 친일화가를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이를테면 식민지 조건에서 태어나 화가로 입지를 세우는 순간 일제정책 협력형태의 주제와 내용을 취해 작품 제작을 하기 시작하다가 해방이 되건 안되건 죽을 때까지 또는 화가로 붓을 놓는 순간까지 그런 작품 제작에 혼신을 다해야만이 친일화가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작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작가상을 전제해 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내세운 것은 논리의 오류만이 아니라 김기창이 친일미술가가 아님을 증명하고자 했던 의도가 낳은 오류라 하겠다.
이 같은 사태를 지켜본 이규일은 시시비비는 가리되 그것은 감정이 아닌 뜨거운 가슴으로, 명석한 머리로해야 할 것이라면서 학자는 학문 연구로, 평론가는 냉철한 작품 비평으로 친일 내용과 색깔을 가려내자고 주장했다.42)
논쟁과 사건의 한쪽에 선 이태호는 식민잔재 극복의 어려움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첫째, 실력 있는 친일미술인들이 분단 이후 남한미술계를 주도해왔고 둘째, 해방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친일미술 문제가 거론된 적이 없을 정도로 연구성과가 편협된 관점과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셋째, 김기창의 변명에서처럼 민족사의 현실 앞에서 그림만 잘 그려 개인적 출세만 하면 된다는 몰역사적, 반사회적 개인주의 풍토와 맞물린 그릇된 예술관이 화단에 팽배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태호는 식민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친일미술 연구가 시급하고 중요한데 그동안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대강 윤곽이 잡혀 있으나 출발단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체계적인 공동작업, 사회적 관심, 행동적 지원, 대중운동으로의 활성화가 모색되어야 한다며 친일미술 백서 발간, 미술교과서에 친일미술 항목을 삽입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43) 또 이제 출발선상에 선 친일미술에 대한 연구는 냉철한 문제의식 아래 방증자료의 발굴과 더불어 친일작가의 행적과 역할, 친일하게 된 배경, 세계관과 현실, 역사의식, 작품세계를 검토해 나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연구의 관점은 민족미술의 바로세움은 물론 그 시대가 남긴 예술적 성과와 한계, 실패를 규명하는 미술사적 기준에 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44)
이와 같은 주장에 이르기까지 친일미술에 관한 연구는 되풀이를 거듭하였을 뿐, 새로운 사실과 새로운 관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은 원동석 이래 이태호에 이르기까지 실증과 해석이 여러모로 소략했던 때문이었다. 또한 이태호가 제시한 친일미술 연구 방향과 청산을 위한 실천 방책 모두가 여전히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윤범모는 1994년, 일제시대 미술연구자들이 서화협회를 민족미술단체로 규정하는 대목과 일제탄압이란 용어를 남발하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일제시대 때 탄압받은 미술가는 프로미술가들 뿐이었음을 강조하면서 대개의 미술가들이 받은 탄압 사례가 쉽게 간취되지 않음을 지적하고 또 조선미술전람회 불참작가라고 해서 저항작가라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대개 친일미술 하면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 당시까지를 일컫는데 이는 2차 친일미술기이고 또 하나의 친일미술기간으로 1910-1920년대까지 제1차 친일미술기를 설정할 수 있다고 천명했다.45) 또한 1999년 「항일미술과 친일미술」이란 논문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친일미술 작가와 작품을 망라하고 특히 이를 항일미술가와 조선에서 활동한 일본인 미술가를 비교해 친일미술 연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한국근대미술사학』제7집, 청년사, 1999) 물론 윤범모의 이 같은 천명은 세부 연구를 수반한 것이 아니라 뼈대만을 제시한 개요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친일미술 연구의 관점을 확장시키는 문제제기였다. 그 밖에 윤범모는 1993년 「일제를 위하여 붓을 잡은 화가들」을 통해 김은호, 김기창, 김인승, 심형구, 정현웅, 노수현의 회화, 삽화, 만화를 분석해 놓았다.46)
최열은 1998년 『한국근대미술의 역사』에서 1940년부터 1945년까지 각 항목마다 전시체제 미술활동란을 두어 이른바 제국에 부역한 미술과 미술가의 역사를 실증해 나갔다. 앞선 시대의 연구 성과는 물론 새로운 사실을 추가해 광범위한 친일미술활동상을 서술함으로써 친일 부역미술 활동을 또렷하게 새겨놓았다. 나아가 서화미술회, 서화협회를 비롯한 식민지 초기 친일미술상도 엄격한 실증을 통해 서술했다. 특히 사실관계와 함께 해당 개인과 집단의 사상과 노선을 연관시켜 추적하는 방법론을 적용함으로써 이른바 개화자강노선과 그 변주의 추이를 헤아려 그 식민성, 예속성을 상당부분 드러냈던 것은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념과 범위

20세기 막바지에 이르러 관점과 실증 양쪽에서 일정한 열매를 거둔 근대미술사학계는 21세기에 이르러 또 다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운보기념관 설립과 저지운동과 같은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2000년 서울대학교 김민수 교수가 장발을 친일미술가로 언급한 정도의 일로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사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다만 그 여파로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항의운동이 일어났을 뿐이다.
장발은 1941년 조선미술가협회 제2부 서양화부 역원(役員) 및 평의원으로 참가한 바 있다. 장발에게서 친일 부역행위로 드러난 뚜렷한 사실은 그 뿐이다. 그렇다면 그 행위만으로 그를 친일미술가로 규정할 수 있을까.
먼저 조선미술가협회에 관해 살펴보자. 조선미술가협회는 그 목적을 국가의 비상시국에 직면하여 신체제 아래서 일억일심으로 직역봉공(職域奉公)하여야 할 이 때, 미술가 일동도 궐기하여 서로 단결을 굳게 하고 또한 조선총력연맹에 협력하여 직역봉공을 다함으로 내세웠다. 또한 1943년 3월 21일 채택한 〈신규사업 내역〉은 다음과 같다.

1. 반도인 작가에게 일본정신의 진수를 체득케 하기 위해 성지순례를 한다.
2. 국경 경비에 정진하고 있는 황군용사, 경관, 관원, 관리들을 위문하기 위해 만화가를 파견한다.
3. 반도총후미술전람회는 주로 보도미술, 생산미술에 중점을 두어 역작을 모집한다.
4. 회원의 시국인식 앙양을 기념하기 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강연회, 좌담회를 개최한다.

앞서 밝힌 이구열의 기준으로 보면 이와 같은 조직에 참가한 사실만으로는 친일미술가라 할 수 없다. 장발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부역행위를 펼친 김기창조차 친일미술가일 수 없다. 논란의 여지가 있다하더라도 일제 정책에 협력하는 의도의 지면에 작품을 발표했음에도 친일미술가일 수 없는데 그런 작품 창작조차 시도하지 않은 장발이 어찌 친일미술가일 수 있을까.
그러나 뚜렷한 것은 장발이 저와 같은 목적과 사업을 펼친 단체의 평의원, 역원 따위로 참가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은 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중앙위원이자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경기도 책임비서를 역임하면서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 자주독립국가 건설투쟁에 나섰다가 체포, 투옥돼 6년의 징역생활을 겪었고, 출옥 뒤에도 대중적인 미술운동을 지지, 후원 또는 1938년 형성(型成)미술가집단에서 보듯 민족미술운동 일선에 직접 참여했던 반제 민족해방 미술운동의 상징인 김복진조차도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로 추대됐으며 또한 애국채권을 구입한 명백한 사실이 있다는 점과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다.
김복진은 그 이전에 반제 민족해방운동을 펼쳤기 때문에 그런 행위는 사소한 것이어서 묵인해도 좋은 일인가? 장발은 김복진에 비해 친일부역행위 정도가 약한 것일까, 아니면 강한 것일까.
여기서 처벌을 염두에 두고 김기창, 장발, 김복진을 비교하면 죄질을 따져 그 의도와 행위 정도에 맞게 형량에 차별을 두어야 할 것이다. 처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간의 가치와 민족 사회의 규범이란 잣대를 갖고서 그가 했던 행위를 공개한다고 하더라도 해당 당사자의 의도와 행위의 정도를 따져 그 비인간성과 반사회성, 반윤리성, 반민족성 따위를 밝히고 또 그것을 청산하고 극복하는 대안이 무엇인지를 밝혀 두어야 할 것이다.
나는 친일 부역미술 행위 및 친일미술 창작을 판단함에 있어 어느 쪽이건 모두 인간, 사회, 윤리, 민족의 가치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각각 해당 항목마다 심각하고 광범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은 알고 있으나 그건 해당 분야 전문가의 몫이겠다. 다만 일제의 침략과 지배 과정에서 그들이 저지른 그 숱한 야만과 폭력의 범죄로 말미암아 파괴당한 인간과 인간성을 모든 기준의 절대치로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흔히 예술은 인간 영혼의 거울이라고 하며, 작가는 인간 영혼의 기관사라고 비유한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영혼을 다루는 예술의 한 분야인 미술, 미술인, 미술계야말로 그 영혼의 담지자인 인간과 인간성의 추이에 관해 가장 엄격하고 철저하게 임해야 할 것이다. 인간성이 폭력으로 파괴되고 있다면 예술가는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군가는 리얼리즘의 시선으로 누군가는 심미주의 시선으로 그 영혼의 파괴에 조응할 터이다.
이와 같이 인간성을 기준으로 하는 친일 부역미술에 관한 개념을 세울 때 많은 문제가 간명해 진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 민족에게 저지르는 파괴행위에 동참하고 심지어 능동적으로 나서서 스스로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굳건히 표현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자랑스레 밝히는 정도라면 이미 의식의 내면까지 철저히 야만의 제국 인간형으로 전환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친일 부역미술 행위의 잣대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사회적 약속에 따른 대사회활동이며 또 하나는 의식이나 심리의 추이에 따른 창작의 표현 형식이다. 두 가지 잣대에 따라 친일 부역미술의 개념과 범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의 예를 들자면, 총독부가 주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와 관련해 창설 당시 서화협회 회원들이 대거 협력했고 출품했던 일을 염두에 두고, 또 그 뒤 응모, 출품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의제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응모, 출품자들은 모두 친일 부역미술 행위를 한 것인가? 그에 대한 답변을 구하기 위해 거꾸로 응모, 출품하지 않은 미술인은 모두 항일미술 행위를 한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친일 부역 행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응모, 출품을 둘러싼 해당 미술인의 의식 상태를 헤아림으로써 판단을 구할 수 있을 터인데 그런 까닭에 해당 미술인들 또는 이후 연구자들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응모, 출품했다는 회고 또는 옹호를 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조선미술전람회 창설 당시 그 제도의 마련 과정에 참가, 협력한 미술인과 심사원 따위로 나선 미술인 및 단체에 관해서는 강요, 자발 여부와 관계없이 친일 부역미술 행위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뒷날 참여나 추천작가로 임명받아 활동한 미술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도 이인성의 경우 판단하기 매우 어려운 점이 있다. 총독부는 1937년에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로 추대했고 이인성은 이를 수용했다. 문제는 다음이다. 이인성은 그 뒤 어떤 단체, 친일 부역미술 동원단체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1944년까지 추천작가로 꾸준히 출품하는 활동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참여 미술인과 달리 단체에 참가하지 않았던 점은 매우 의문스러운 대목이다. 조선미술협회니 단광회, 구신회 따위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총후미술전에도 초대작가나 위원작가 대열에 불참한 사실은 이인성의 의식과 행위를 평가함에 있어 친일 부역의 능동성 부재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일지 모르겠다.
두번째 잣대인 의식이나 심리의 추이에 따른 창작의 표현 형식의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직접 표현형식이다. 이미 잘 알려진 김은호의 〈금채봉납도〉나 김인승의 〈유기헌납도〉, 김인승, 박영선, 김만형, 손응성, 심형구, 이봉상, 임응구의 〈조선징병시행 기념〉의 경우 더 말할 나위 없이 친일 부역미술로서의 성격이 뚜렷하다. 따라서 더 거론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앞선 논객들이 지속적으로 제기한 일본색, 일본풍의 이식과 침윤 또는 유채화에서 일본식 인상파의 이식과 침윤 그리고 일본식 관학파 양식의 번성과 지속 따위를 어떻게 파악하고 볼 것인가 하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1943년 8월 징병제실시 감사결의 선양운동 주간에 『매일신보』가 기획해 연재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란 시화 연재물에 삽화를 그린 고희동, 배운성, 김인승, 김중현, 이상범, 김기창, 이용우의 작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미술계 일반을 풍미한 일본식 미술의 이식과 침윤, 지속과 변형 따위는 개별 탐구 과정에서 적용해 나가야 할 전제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준은 대단히 광범위하고 폭이 넓어 단순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대상을 찾아 적용한다고 해도 논란의 여지가 상당한 부분이다. 이를테면 외세주의 비판이란 잣대를 결합시켜 일본미술 또는 일본식 서구미술의 이식과 침윤 현상을 강렬하게 보인 작가의 작품을 거론하거나, 식민지 이전 중국미술의 이식과 침윤 현상을 보인 작가의 작품을 거론하는 것, 그리고 해방 뒤 남한에서 서구미술의 이식과 침윤 현상을 보인 작가의 작품을 거론하는 가운데 그것이 보이고 있는 모방 일변도 따위 경향에 대해 창조성의 결여를 비판하는 것과 아울러 식민성 비판이라는 매우 일관된 하나의 논리 틀, 평가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미술사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교미술사학의 보다 다양하고 풍요로운 성취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관점과 태도를 제약한다. 따라서 확대보다는 시대마다 상황에 따른 접근과 성찰을 강조해야 하겠다. 식민성이란 작가마다 시대마다 매우 다양한 굴절을 겪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식민지가 아닌 조선시대의 미술이 주고받은 영향은 동북아시아 미술 교류사의 수준으로 보아야 할 터인데 이것을 두고 중국미술의 식민지미술로 규정한다면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적용하는 친일미술론의 왜곡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일제 식민시기를 통해 성장한 식민성, 식민미술, 친일미술은 당대만이 아니라 해방 뒤에도 그 식민성의 논리가 오지호의 표현처럼 상전(上典)의 빛깔만 달리하였을 뿐 그대로 관철되는 것이라면 문제가 달라질 것이다. 이를테면 미군정이라는 점령국가 미국의 직접 통치 아래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또 종속성이 짙어 신식민지 분단국가로 존속해 오던 시절 미국, 서구 미술과 남한의 미술 관계는 그 신식민성을 핵심 요소로 삼지 않았겠는가?
다음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와 같은 기획 지면에 참가, 출품한 행위의 결과물로서의 삽화나, 삽화 그리기를 직업으로 삼아 해당 잡지사나 신문사에 적을 두고 제작한 삽화나 만화, 그리고 청탁에 의한 삽화나 만화 따위를 문제삼는 방식이다. 이 경우 사안에 따라 가볍고 무거움을 헤아리는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테면 징병제실시 감사결의 선양운동 주간 기획물에 청탁을 받아 그에 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친일 부역행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김기창은 그 때 청탁받아 그려 준 작품에 대해 이웃에 살던 분으로 아들이 일본군에 끌려가 전사한 뒤 늘 먼 하늘을 쳐다보며 상심에 잠겨있던 분을 그렸으며 노부부는 또 다시 손자를 일본군에 입대시켜야 했는데 그 장면을 그린 것으로 동네 노부부의 허망하고 처참한 심사를 그림으로 남겼던 것이라고 말했다.47) 이 말을 그 작품이 발표되던 1943년 8월 7일 전후에 했더라면 징병제실시 감사결의가 아니라 징병제의 비인간성, 일제의 비윤리적 야만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인본주의 미술의 걸작으로 인정받아 왔을 것이고 나아가 당시 언론 편집자나 검열 당국에서 그것을 발각하지 못한 일이 오늘날까지 하나의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왔을 터이다. 그러나 김기창은 그 창작의도를 작품 발표 50년 뒤, 그리고 해방 47년이 지난 뒤에 발표한 것이다. 게다가 해당 작품에 대해 징병제를 선전하기 위한 작품으로, 종군하게 되어 감격스러운 듯한 학도병의 진지함과 장한 아들을 굽어보는 아버지의 표정에 선전효과의 의도가 다분하다는 해석48) 이 나온 뒤에 그에 대한 답변으로 제출한 변명이기에 거꾸로 들린다.
그 인본주의를 반세기 내내 감춰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 시절 그 정도 밖에 못했다는 부끄러움일까, 아니면 누군가 그 숭고한 인본주의의 심오함을 발견해 주길 원해서 보물 감추듯 감췄던 것일까.
회고담을 역사의 자료로 채택하기 위해서는 매우 신중한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김기창의 그 회고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오광수가 이태호의 의견을 비판하고 김기창의 의견을 지지해 오히려 근심스러운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라고 해석49) 했음을 상기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이구열이 그 점을 두고 일제 협력 주제의 그림을 그린 사실의 시인과 당시의 정황 입장 해명은 그것대로 들어볼만은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라고 평가50) 한다 하더라도 김기창이 징병제 실시를 감사해 하고 선양하는 운동의 대열에 참가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남는 말 한가지. 친일 부역행위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남긴 작품의 예술성, 조형성은 다른 것이라는 생각에 관해서다. 이 대목에서 떠올릴 것은 세계관과 예술작품의 일치와 불일치가 언제나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 점은 작품에 대한 매우 엄격하고 치밀한 연구를 수반함으로써 답을 구해야 할 과제이지 지레 평가하고 판단할 일이 아니다. 예술작품의 가치는 여러 다양한 각도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단지 해당 작가가 친일을 했다고 해서 모든 관점, 모든 각도, 모든 기준에서 미달하는 것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친일 부역미술인의 작품이 형식주의 관점과 기준에서 뛰어날 수도 있을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 시대에 가장 절실했던 형식주의 예술 가치를 머금고 있는 것인가는 또 다시 분석하고 평가해 보아야 할 일일 것이다.

시대설정

끝으로 친일미술의 개념과 범위에서 시대설정은 연구의 심화, 사실의 인과관계 추적을 위해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전기 친일, 1차 친일, 2차 친일, 후기 친일로 시대를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친일이란 낱말을 식민이나 부역이란 낱말로 바꿔 헤아릴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전기 친일은 개화파, 개화자강노선 따위 안에 자리잡은 친일사상과 의식에 이어져 있는 미술행위라 할 것이다. 1910년 식민지 전락 직전의 미술계를 살펴보면 문화재 약탈과 파괴 행위 및 조사 행위 등에 대한 대응과 함께 개화자강노선을 따르던 오세창, 안중식의 일본 왕래 따위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거니와, 특히 안중식의 스승 장승업이 강한 반일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사실도 아울러 헤아려야 하는 시기이다.
1차 친일은 식민지로 전락한 다음부터 이뤄진 숱한 친일미술행위를 대상으로 삼는 시기다. 서화미술회, 서화연구회, 서화협회의 활동, 그 밖에 여러 미술가들의 친일미술행각은 식민지 미술의 식민성이 뿌리내리는 거점이자 그 자체로 식민성의 구현이었던 것이다.
2차 친일시기는 이미 잘 알려진 바와 마찬가지로 1937년 또는 1940년부터 행해진 전시체제 미술활동을 대상으로 삼는다.
후기 친일 시기는 해방 이후 식민성의 청산을 과제로 삼았던 시기인데 식민성의 상징이자 제국의 요구에 따른 심미주의 일변도 미술, 회고적 조선성과 향토색 따위의 봉건주의 미술 경향을 청산하고 리얼리즘, 모더니즘 미술을 아울러 이른바 민주주의 민족미술을 이룩해야 하는 절호의 시대였다. 그러나 분단이 고착되는 과정에서 남한은 이념과 정치의 배제를 외치며 친미 미술행위를 꾀하고 조선미술전람회와 조선미술가협회를 복원한 고희동 일파를 비롯, 숱한 순수주의자들 일변도 화단으로 고정되고 말았다. 이들에 대해 곧바로 후기 친일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이름의 뜻을 어긋내는 것이지만 그것이 머금고 있는 내용에서 식민성, 봉건성, 반동성으로 보면 고스란히 일관된 바가 있다.

맺음

임헌영은 「친일파의 정의와 범주」란 글에서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반민족행위자처벌법에 원용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모르는 바가 아닐 터인데도 이 법을 원용한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을 마련해 그것을 국제법으로까지 확대하여 조선 및 조선인은 물론 일본 및 일본인까지 처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던 것이다.51)
나는 국가보안법의 비인간성, 야만성을 헤아리는 입장에서 차마 그렇게 하자고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사상을 처벌하는 국가보안법, 찬양과 고무, 불고지까지 처벌하는 이 엄격하고 광범위한 국가보안법의 성격으로 미루어 친일 부역미술 행위에 대한 처벌에는 매우 적합하고 합리적이며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원용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영혼을 부정하고 야만스러운 내용으로 세뇌했거나 변화시키려고 의도해 그 영혼의 산물을 제작, 생산, 배포한 행위는 그야말로 인간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반인간적인 행위라 할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를 유지시켜 주는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를 견지하고 지향하며 추구하는 인간, 사회, 국가, 민족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것을 짐승이나 독재세력에게까지 부여해야 할 것인가? 일제 식민지 치하의 지배자 일제는 파시즘의 야만으로 무장한 짐승이었으며 그에 능동, 수동형으로 가담한 영혼의 기관사인 조선인 미술가는 그 짐승의 대리인 또는 짐승 자체였다고 볼 것이다.
범위를 확대해 당시 조선, 조선미술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책략을 세우고 또 개입해 정책을 수행한 일본인, 일본인 미술가들도 국제전범으로 처리,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을 원용하여 가차 없는 처벌을 꾀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미술사학자 관야정, 유종열 따위가 조선과 조선미술에 개입한 행위, 조선미술전람회를 조직하고 또 거기에 동원된 역대 동경미술학교 교장 따위가 그 처벌 대상일 것이다. 물론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숱한 일본 미술가들과 미술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미술문화정책을 입안, 시행한 자, 문화재를 도굴, 약탈, 반출해간 자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임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터이다.
제국과 식민지 범죄자를 처벌하는 시효는 없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친일 부역미술과 그 미술인에 대한 자료 조사와 발굴, 연구가 얇고 가벼운 조건에서 심판은 격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따라서 사실 복원이 더욱 시급한 일임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을 증명해 줄 자료의 발굴이 불가능해 보인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밝혀진 역사적 사실에 대한 논리적 검증을 수행한다면 열매는 풍성해질 것이다. 특히 지금껏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았던 어떤 작가의 작품이 지닌 심리학, 상징론, 기호론, 도상해석학 따위 다양한 분석 도구를 적용해 본다면 전혀 새로운 해석에 도달할 가능성도 열려있다.
해방 58년이 흐른 지금, 처벌이나 심판보다는 어쩌면 그와 같은 예술학, 미학, 미술사학의 해석과 평가를 통해 친일 부역미술 행위를 처벌하고 단죄하는 일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뼈저린 아픔은 감옥에 간다고 커지는 것이 아니다. 생전의 엄청난 재산과 그 행복이 말년에 또는 죽음 이후 잿가루로 변해 바람에 날아가 폐허로 변했을 때 그 때가 더욱 서글프지 않겠는가.
친일 부역미술인들이 남한 독재정권 아래서, 국민의 정부 아래서 훈장을 받고 명성을 획득하며 재산을 늘려 후손들이 풍요로운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남긴 그 숱한 창작품이 예술적, 시대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해석, 평가되어 쓰레기로 바뀐다면 그처럼 아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상전벽해라, 빛은 곧 어둠으로 바뀔 것이다.

각주

1. 최열, 『한국근대미술의 역사』, 열화당, 1998.
2. 오지호, 「조선미술의 일본적 독소」, 『예술』, 1945.12.
3. 박문원, 「조선미술의 당면과제」, 『인민』, 1945.12.
4. 오지호, 「해방이후 미술계 총관」, 『신문학』, 1946.11.
5. 박문원, 「미술의 삼 년」, 『민성』, 1948.8.
6. 김주경, 「문화건설의 기본방향」, 『춘추』, 1946.2.
7. 길진섭, 「미술계의 동향」, 『신천지』, 1946.8.
8. 윤희순, 「조형예술의 역사성」, 『조형예술』1, 조선조형예술동맹, 1946.
9. 오지호, 「미술계」, 『예술연감 1947년판』, 예술문화사, 1947.5.
10. 이쾌대, 「고갈된 정열의 미술계」, 『민성』, 1949.8.
11. 박용숙은 1972년 「식민지시대의 미학비판」을 발표했는데 이는 미술사학 분야에 대한 것이다. 『월간 다리』, 1972.5.(민족미술협의회 편, 『한국현대미술의 반성』, 한겨레, 1988. 재수록)
12. 이경성, 「한국근대미술사 서설」, 『홍대논총』제5집, 1973. (이경성, 『한국근대미술연구』, 동화출판공사, 1974. 재수록)
13. 김윤수, 「광복 30년의 한국미술」, 『창작과 비평』, 1975년 여름호. (김윤수, 『한국현대회화사』, 한국일보사, 1975. 재수록)
14. 김윤수, 「선전의 잔재와 그 극복」, 『미술과 생활』, 1977.11. 같은 지면에 이구열은 「선전의 형성과 전개」를 발표했는데 조선미술전람회 창설 배경이나 운영에 관한 내용이 부실한 자료에 근거한 탓에 해석의 오류가 군데군데 자리잡고 있다. 이를테면 조선서화협회를 대단한 민족미술단체나 되는 듯 전제하는 오류, 조선미술전람회 창설 과정에서 총독부가 조선인 미술가들에게 유형무형의 압력과 협박을 가했다거나 교묘한 회유책 따위를 썼다는 식의 사실 왜곡은 물론, 더욱 심각한 것은 조선미술전람회같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또는 그 시대의 일본의 다른 온갖 위세에 정면으로 불복한 자세의 행동을 보인 작가가 있었던가라고 스스로 물은 다음, 고희동이 조선미술전람회를 보이코트하면서 오로지 서화협회와 협회전 운영에만 애썼던 사실 정도가 유일하고 확실한 민족적 의지의 반영으로 평가될 수 있다고 고희동이 마치 대단한 민족미술가인 것처럼 평가하는 일, 그리고 글 마무리에서 선전 출품자들에 국한된 어떤 추궁이나 비판은 그 시대의 상황을 편협되게 해석하는 일이 될 것이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으니 사실의 왜곡이 빚은 해석의 물구나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5. 이구열, 『한국현대미술사(동양화)』, 국립현대미술관, 1976.(이구열, 『근대한국화의 흐름』, 미진사, 1983.)
16. 유준상, 오광수, 『한국현대미술사(서양화)』, 국립현대미술관, 1977.
17. 오광수, 『한국현대미술사』, 열화당, 1979.
18. 김윤수, 문명대, 박용숙, 안휘준, 이경성, 이구열, 임종국, 정양모, 최순우, 「한국미술의 일제 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 『계간미술』, 25호, 1983년 봄호.
19. 이 글의 필자는 미술 전공자가 아닌 이로 유일한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인 듯 하다.
20. 이 특집이 세상에 발표되자 4월 15일 오후 5시 예총회관 강당에서 장우성, 김기창, 안동숙, 박노수, 이영찬, 신영상, 송영방, 이규선, 임송희, 오태학, 이종무, 김원, 류경채, 이준, 홍종명, 최덕휴, 김영주, 김흥수, 김경승, 정관모가 참석한 모임이 열렸다. 이들은 『계간미술』의 해당 글에 대한 경위 설명과 토의를 했으며 당일 발표하려고 준비한 성명서를 수정해 21일자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발표하기로 했다. 이들이 이날 신문 광고로 발표한 성명서는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를 묻는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해당 글이 일제 36년간과 해방 후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미술가는 친일파이고 모든 미술작품은 일본 식민잔재이며 미술교육도 잘못되어 후진들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게 했다고 쓰고 있다고 규정했다. 이어 그러한 규정이야말로 실로 어처구니 없는 망설이라고 하면서 한국미술 전반이 마치 일제 잔재인 양 매도하고 은근히 한국 문화 전체가 그러한 듯한 인상마저 비추어 우리 문화의 현실을 부정하고 결과적으로 사회 여론을 오도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고 단정지었다. 또 이들은 해당 글이 작고 작가와 현역 미술인 대부분을 부관참시식으로 난도질하면서, 자신들만이 초연 결백한 양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고, 과거 민족 수난의 불행했던 역사는 외면한 채 방관자처럼 비양거리면서 민족미술 창조라는 허구에 찬 궤변을 늘어 놓았다고 한껏 비판했다. 게다가 성명서에 참가한 미술인들은 성명서 끝에 일제 잔재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가 일반에게 묻고 싶다고 썼다.
21. 이들은 성명서에서 『계간미술』 편집책임자를 해임하고, 집필자는 공직을 사퇴하고 또 해명할 것이며, 과오를 인정하고 각 일간지 상에 공개사과를 하라고 요청했다. 참으로 후안무치한 요구였는데 더욱 가관은 이런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적절한 법적 조처를 취하겠다고 천명하면서 『계간미술』과 관계를 단절하고, 모 일간지 주관 미술행사에 불참할 것이며, 9인의 사이비 미술평론가들의 전람회 주례사도 거부하겠다고 단호히 선언했다. 서명한 단체 명단은 다음과 같다. 신기회, 대한산업미술가회, 홍익조각회, 시공회, 오리진회, 현대화회, 한국서예가연합회, 한국구상조각회, 한울회, 백양회, 낙우회, 한국현대조각회, 창림회, 한국수채화작가회, 청구회, 청조미술가회, 영토회, 앙가주망회, 창작미협, 현대시공회, 한국여류조각회, 아방가르드회, 한국신미술회, 청동회, 문우회, 후소회, 목우회, 한국화회, 구상회, 한국여류화가회, 한국현대판화회, 가톨릭미술가회, 한국미술청년작가회, 신형상전회, 서울조각회, 국전출신작가회. 또 신문 광고료는 장우성이 거액을 냈으며 뒤에 관련작가 몇이 작품 한 점씩을 내서 동산방화랑이 이를 판매, 이미 쓴 경비를 보전해 주었다.(이규일, 「친일화가 파동의 속 얘기」, 『뒤집어 본 한국미술』, 시공사, 1993.)
22. 중앙일보사계간미술, 「사고(社告)」, 『계간미술』, 1983년 여름호.
23. 여기서 심심한 사의의 뜻이 매우 애매하다. 謝意라면 대개 감사의 표시로 해석하는데 때로는 謝過의 뜻도 포함하고 있으므로 문장 구조상 앞의 몇몇 원로작가에겐 사과를, 필자들에겐 감사를 뜻하는 것으로 읽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필자들에게 사과할 일이 아니므로 하나의 뜻으로 작가든 필자든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뜻으로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논리적으로 보면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뜻으로 읽을 때 뜻이 어긋나지 않는다.
24. 이규일, 「친일화가 파동의 속 얘기」, 『뒤집어 본 한국미술』, 시공사, 1993.
25. 오광수, 「해방 전후의 미술-보국체제와 일본 잔재의 극복」, 『한국근대미술사상 노트』, 일지사, 1987.
26. 원동석, 「민족미술의 정립문제」, 『마당』, 1983.6.
27. 원동석, 「일제 미술잔재의 청산을 위하여」, 『실천문학』, 1985년 여름호.
28. 윤범모, 「광복 40년 미술계의 반성」, 『문예중앙』, 1985년 여름호. (윤범모, 『미술과 함께, 사회와 함께』, 미진사, 1991 재수록)
29. 최열, 「미술의 사회적 이념과 현실」, 『숙대학보』, 숙명여자대학교, 1988.
30. 최열, 「미술의 사회적 이념과 현실」, 『숙대학보』, 숙명여자대학교, 1988.
31. 오광수, 「해방전후의 미술-보국체제와 일본 잔재의 극복」, 『한국근대미술사상 노트』, 일지사, 1987.
32. 최열, 「해방 3년의 미술운동」, 『해방전후사의 인식 4』, 한길사, 1999.
33. 이태호, 「친일미술인의 몇낱 작품사례」, 『가나아트』, 1991.7-8~11-12. (이태호, 「1940년대 초반 친일미술의 군국주의적 경향성」, 『근대한국미술논총』, 학고재, 1992. 재수록)
34. 이태호, 「김은호」, 「김기창」, 「심형구」, 「김인승」, 『친일파 99인(3)』, 돌베개, 1993.
35. 이태호, 「윤효중」, 「김경승」, 『청산하지 못한 역사(1)』, 청년사, 1994.
36. 최석태, 「일제하 미술가들의 변상도」, 『역사산책』, 1990.12.
37. 최석태, 「이상범」, 『청산하지 못한 역사(1)』, 청년사, 1994.
38. 신경득, 「의병대장이 통곡한다 - 친일화가 김기창기념관 건립 부당」, 『충북대신문』, 1993.6.10.
39. 편집부, 「운보 김기창은 친일화가인가」, 『월간미술』, 1993.8.
40. 오광수, 「억지논리와 감정론의 위험」, 『월간미술』, 1993.8.
41. 이구열, 「역사 규명과 특정인 매도의 차이」, 『월간미술』, 1993.8.
42. 이규일, 「미술사적 논의의 당위성과 전제조건」, 『월간미술』, 1993.8.
43. 이태호, 「일제잔재의 현주소와 청산의 길」, 『월간미술』, 1993.8.
44. 이태호, 「매일신보 삽화에 나타난 친일 사례」, 『가나아트』, 1993.9-10.
45. 윤범모, 「한국근대미술사 연구를 위한 몇가지 노트」, 『가나아트』, 1994.11-12. (윤범모, 『한국의 근대미술』, 한길사, 2000. 에 「한국근대미술사 연구를 위하여」로 제목을 바꿔 재수록)
46. 윤범모, 「일제를 위하여 붓을 잡은 화가들」,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사비평사, 1993.
47. 「미술사가 이태호 교수가 제시한 친일작품 - 운보 김기창화백의 해명과 반론」, 『월간미술』, 1993.8.
48. 「미술사가 이태호 교수가 제시한 친일작품 - 운보 김기창화백의 해명과 반론」, 『월간미술』, 1993.8.
49. 오광수, 「억지논리와 감정론의 위험」, 『월간미술』, 1993.8.
50. 이구열, 「역사규명과 특정인 매도의 차이」, 『월간미술』, 1993.8.
51. 임헌영, 「친일파의 정의와 범주」, 『한국근현대사와 친일파 문제』, 아세아문화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