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첫 번째 개념뿌리_타자들(the others)

◆ 타자(他者)에 대해서

▲ 현대사상의 개념뿌리의 의미_복합적 의미의 일상 언어

이번 학기에 여러분하고 같이 공부할 내용은 ‘현대사상의 개념뿌리들’, 이러한 제목으로 현대사상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뿌리들을 한 번씩 검토해보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개념뿌리라고 부르는 말들은 전문용어가 아니라 일상 언어인데, 그것이 굉장히 복합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들이죠. 약간 비유적인 말로 쓰면 어떤 의미론적인 두께가 있는 말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 말이 어떤 하나의 맥락이나 하나의 대상을 가리킨다거나, 어떤 한 가지 의미를 가진 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아주 두텁게, 켜켜이 쌓인 그런 의미론적인 두께를 가지고 있는 말들이죠.

예를 들어서 시간이라든가, 우연이라든가 하는 말들, 가능성 이런 말들은 전문용어가 아니죠. 특정한 철학자가 쓰는 전문용어가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말인데, 그런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에 어떤 오랜 세월동안 쌓여온 의미의 두께가 있는 그런 말이죠.
그래서 현대사상에서 주로 많이 등장하는 그런 개념뿌리들을 보려고 하고,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타자’라고 하는 것을 보려고 합니다.

▲ 핵심적인 개념뿌리_타자(他者)의 개념

타자(他者), 영어로는 the other 또는 복수로는 others에 해당하는 말이고, 불어로 하면 l'autre(로트르)죠. 로트르에 해당하는 말이 타자고, 현대사상의 아주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가 이 타자라고 하는 개념이 됩니다. 타자라는 말은 축자적으로 이해하면 다른 존재죠. 다르다는 거죠.
타인의 반대말은 자아죠. 자아, 자기. 그러니까 자기라고 하는 것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서 타자의 내용도 달라지죠. 타자가 뭘 가리키느냐고 하는 것은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이 사용되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어떤 것에 대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성립하는 개념이 되겠죠.

예컨대 내가 아닌 타인도 되고, 그다음에 우리 가족이 아닌 다른 가족, 우린 직장이 아닌 다른 직장도 되고, 그다음 조금 넓게 본다면, 인간이 아닌 존재, 동물이나 식물 이것도 인간에 대한 타자죠. 인식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인식의 저편에 있는 것, 우리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파악 불가능한 것, 그런 것도 어떤 면에서는 타자입니다.
심지어 나에게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게 있다고 파악할 때에는, 타(他)가 내 안에 있을 수도 있는 거죠. 원래 타(他)라고 하는 것은 자아 바깥에 있는 거죠. 원래는 바깥에 있는데 그 타(他)가 자아 안에 들어올 수도 있겠죠. 자아 안에 타자가 있을 수도 있어요.
어쨌든 그 타자라고 하는 개념은 우리가 어떤 철학적인 사고를 할 적에 반드시 등장하는 피해갈 수 없는, 핵심적인 개념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현대사상을 흐르는 정조(情調)_타자

전통적인 사고, 전통적인 여러 사상을 보면 현대인들보다 타자에 대한 문제의식이 비교적 약해요. 그러니까 현대철학의 어떤 특징이라고 할까? 특징을 넘어서 정조, 정조란 말 아시죠? 정조(情調). 현대 사상을 흘러가는 어떤 정조죠. 일종의 타자라고 하는 것은. 특징을 훨씬 넘어서 현대사상에 깊이 배어있는 그런 어떤 정조. 그게 타자라고 하는 거예요. 현대사상은 타자라는 것에 대해 유난히 민감하고, 현대사상의 심장부에서 둥지를 틀고 있는 게 타자라고 하는 개념이죠.

▲ 세계와 세상의 차이, 인식변화

그런데 상대적으로 (저는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고?중세의 사고들은 대체로 타자에 대한 의식이 현대만큼 민감하지 않아요, 비교적. 그건 왜 그러냐. 두 가지 정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세계화의 친근성이죠. 세계라는 것. 세계의, 월드(world), 세계라고 하는 것의 어떤 친근성. 세계라고 하는 게, 세계하고 세상은 다르죠, 그죠? 세상이라는 것하고 세계는 다르죠.
세상이라는 것은 아주 힘겹고 전쟁과 가난과 폭정에 시달리는 그런 거지만, 세계라고 하는 것은 비교적 친근하고 낙관적인 것으로 봤어요, 대체로.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얘기지만.

그리스 사람이든 동양 사람이든 간에 세계라고 하는 것에서는 대체로 낙천적이고, 비교적 우리보다 따뜻하게 세계를 본 거죠, 쉽게 말하면 세계라고 하는 것을. 그리스 사람도 이 세상을 뭐라고 그럴까, 어떤 아름다운 것으로 봤고, 또 우리 동양 사람들도 천인합일, 하늘과 인간의 합일이란 말이 나타내듯이 기본적으로 이 우주, 이 세계는 아주 위대하고 아름답고, 어떤 우리 인간의 포근한 보금자리라고 하는 그런 인상이 강했죠, 우리보다.
현대인들은 이 세계에 대해서 개인차가 있겠지만, 대체로 전체분위기를 볼 때에, 세계라는 것에 대해서 옛날 사람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낙천적인 방식으로 보기에는 힘든 세상이라고 봐야 되겠죠.

그래서 19세기 초에 활동한 헬덜린, 헬덜린이라는 시인이 있는데, 헬덜린이라는 사람은 우리의 삶을 고향을 잃어버린 거다. Heimatlosigkeit, 실향성이라고 그러죠. 실향성(失鄕性)이다. 고향을 잃어버렸다. Heimat(하이마트)를 잃어버린 거죠. 맥줏집에 Heimat라는 맥주 많죠. Heimat는 고향, 독어로 고향이라는 뜻입니다. 고향을 잃어버린 거예요. 고향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라도 내가 돌아가면 따뜻하고, 나를 감싸주고, 익숙하고 이런 곳인데, 그런 Heimat가 사라진 그런 시대로 자기시대를 특징짓고 있죠.

▲ 공동체성, 커뮤니티의 확보_타자의 개념 희박

그다음에 또 하나 중요한 게 뭐냐 하면 공동체성, 커뮤니티가 확보가 되었다는 거죠. 공동체성이라고 하는 게 헬라스사람이든 인도사람이든, 인도는 조금 이제 약간 다르죠. 워낙 민족이 많으니까. 여하튼 중국이든 간에, 대체로 옛날 사람들은 자기네가 태어난 그 공동체에 살다 죽기 때문에 같은 언어, 같은 의복을 입고, 같은 언어를 쓰고, 또 같은 삶의 양식을 공유하고, 같은 윤리시스템 안에서 살기 때문에 낯선, strange, 낯선 사람 이런 개념이 희박해요.

그러니까 옛날에 제주도에 하멜 선장인가 그 사람이 표류했잖아요. 저번에 내가 제주도 가니까 그 사람 기념관이 있데, 배도 있고. 또 그 사람을 봤을 적에 눈이 푸르고, 머리가 금발이고 막 기겁을 한 거지, 제주도 사람들이 경악 한 거죠.
그만큼 뭐냐, 생김새, 언어 이 모든 게, 커뮤니티가 안정된 거예요. 그 세계에 태어나서, 그 세계에서 죽는 거지. 그 세계가 다인 줄 알고. 그러니까 타자라는 개념이 지극히 희박하죠. 그런 커뮤니티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타자라는 게 민감하지가 않습니다. 타자라는 게. 그래서 유교나 그리스 철학이 대체로 밝고 낙천적이고 긍정적이고,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이상하게 뒤틀어지게 안보고, 이런 성격을 띠는 게 이런 자연과의 친근함, 그다음에 커뮤니티의 어떤 동일성, 정체성 이런 게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고…….

▲ 유목민이 우리에게 담론을 남겼더라면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건, 우리에게 담론을 남긴 민족들이 대게 그런 민족이라는 이유도 있어요. 예를 들어서 저 북방 유목민이 어떤 많은 담론을 남겼다면 또 조금 다르겠죠. 왜냐하면, 유목민들은 항상 돌아다니니까 무수한 타자들을 만나겠죠.
그런 민족들은 대게 담론들을 안 남겼죠. 우리에게 담론을 남겼던 민족들은 그리스, 중국, 인도 몇 개 한정되어 있잖아요. 그런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죠.

옛날 사람이라고 해서 타자성을 못 느꼈을 리는 없거든요, 그럴 리가 없죠. 우리에게 주로 남긴 민족들이 유난히 어떤 동일성 속에 강한 민족들이었다는 것, 그것도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 사상의 타자성이 없다고 보기 힘들고, 전통적인 사고에서도 어떤 철학적인 의미에서 타자라고 하는 게 존재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신이라든가 하늘 같은 어떤 초월자예요, 초월자.
그러니까 인간의 차원, 인간의 경험세계를 넘어선 그런 초월자들. 신의 섭리라든가 하늘의 뜻 같은 거죠.

▲ 신과 인간 사이에 대한 논쟁

서구사회에서 항상 논쟁이 되고 문제가 된 게 뭐냐 하면, 신과 인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죠, 그죠? 신과 인간을 연속으로 만들어 놓으면 그건 불경한 게 되겠지. 근데 신과 인간을 불연속으로 만들어 놓으면, 신과 인간 사이에는 어떤 소통이 안 되겠죠.
그러니까 연속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냐, 불연속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냐, 신과 인간 사이에 어떤 소통의 끈이 있고, 사다리가 있고 뭐가 있느냐, 아니면 신과 인간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그런 거리를 가지고 있느냐, 이게 서구 문화사회에서 중요한 문제에요. 서구문화사회에서 예컨대, 신이 인간에게 내려오는 게 뭡니까? 계시죠, 계시.

그다음에 인간이 신한테 올라가는 건 뭐에요? 그게 바로 신비주의지, mysticism. mysticism이라는 건 뭐냐 하면, 신과 인간의 거리를 없애고 신과 딱 합일해버리는 거예요. 접신 이른바. 접할 접(接)자에 신(神)자예요.
그런데 이제 중세철학에서 신비주의는 대체로 뭡니까? 그게 이단이거든요, 기본적으로. 왜냐하면 신비주의라는 것은 신과 인간의 거리를 없애려는 거니까 이단취급을 받지요. 예를 들어서 장미의 이름에 이교도들 나오잖아. 그런 게 신비주의에요.

▲ 이해할 수없는 하늘의 뜻, 운명

동양 같은 경우는 뭐가 있냐 하면 하늘의 뜻인데, 인간에게 그 하늘의 뜻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는 거죠. 왜 착한 저 사람은 저렇게 고생을 해야 하고, 저 악독한 인간은 왜 저렇게 떵떵거리며 잘사는 거야, 이 사람은 착하게 살았는데 재산을 다 잃고 비참해지고, 이 사람은 아주 악독한 사람인데 저렇게 떵떵거리며 산다 이거냐, 어떻게 된 거냐 도대체. 하늘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는 거죠. 평소에는 하늘의 뜻에 따라서 살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뜻이 있다. 그러니까 보통 우리가 하늘의 뜻에 따라 사는 거는 사명(使命)이죠.

그런데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하늘의 뜻은 뭐냐 하면, 운명(運命)이죠. 운명. 사명과 운명은 좀 다르죠. 명(命)은 명(命)인데, 삶은 명이에요. 그러니까 전통적인 사회에 살던 사람들은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삶인 거죠. 왜? 우리 삶이 명이니까, 우리 삶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 없이 생긴 것이 아니라 명(命)이에요. 너는 이렇게 살아라하는 우리 삶을 밑받침해주는 확고한 근거가 있는 거지, 확고한 근거가. 우리 삶이 명(命)이니까. 내가 명(命)봐서 사는 거니까 지금. 그런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하늘의 뜻이 있다. 그게 운명이죠.

▲ 이(理)라는 속성

또 하나 전통시대 사람들에게 타자라고 하는 관념이 예민하게 다가오는 건, 이방인 또는 이교도죠. 지금이야 뭐 이교도 그러면 다른 종교 믿는 사람 이런 뜻이지만, 옛날에 이교도라는 그 단어는, 우리 군정시절에 보안법위반자, 이런 것하고 똑같은 사람이죠. 옛날에는 이교도라는 말은 거의 저놈은 죽여라 이런 뜻이죠. 그 정도로 강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이(異)를 못 참는 속성이 있어요, 인간한테는. 그래서 인간이 참 이상한 존재에요.

나 어렸을 적에 시골에 살았었는데, 장이 열려요. 읍에 가면 장이 열리는데, 장에 구경하러 혼자 못가요. 혼자 가면 다른 동네 애들이 막 돌을 던져.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잡아다가 완전히 죽사발을 만드는……. 겁이 나서 혼자 못 가. 그래서 갈 적에 항상 떼 지어 가죠. 그러다 패싸움 한 번 하고.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이(異)라고 하는 거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그런 속성이 있어요, 기본적으로. 그래서 이교도나 이방인으로서의 타자가 존재했고….

▲ 논리학 속에서의 타자의 개념

논리학 또는 아주 추상적인 존재론적인 의미에서의 타자. 그러니까 A의 타자는 BA이다. A와 A는 모순관계다. 어쩌고저쩌고… logical 한 얘기가 있죠? 그런 것이 처음으로 명료하게 전개된 게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 그래서 타자의 문제를 논리학적으로 접근하려면,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를 읽어야 돼요. 이 책은 아주 추상적인 책이에요. 하나와 여럿, 같음과 다름, 뭐 이런 거 있잖아요. 인과 아님(이다와 아니다). 이런 아주 logical 한 개념들을 분석해놓은 책인데, 이 책이 어떤 존재론적인 타자론의 효시죠.
어쨌든 전통사상에서도 타자라는 개념이 없다고 얘기하면 그건 과장이지만, 상대적으로 현대철학자들이 타자에 대해서 민감한 걸 감안한다면, 비교적 그래도 타자에 대한 개념이 약했다는 거죠.

▲ 인식론적 맥락의 타자개념_경험주의의 등장

인식론적 맥락에서의 타자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경험주의의 등장부터예요. empiricism, 경험주의. 물론 경험주의라는 게 옛날에 소피스트들도 있고,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경험주의라고 하는 게 아주 본격적이고 큰 세력을 얻는 건 뭐냐 하면, 17세기 영국 로크의 경험론이죠.

▲ 무한의 중세철학_actual infinity

중세철학은 무한의 철학이에요. 그리스인들에게 없지만, 중세철학에는 있는 것을 꼽아봐라 라고 얘기했을 때 1순위에 들어오는 게 무한개념, infinity 개념이에요.
물론 그리스 철학에서도 infinity는 있죠. 무한은 있어요. 어디 나오죠? 그리스 철학의 그 무한은 어디에 나옵니까? 제논의 역설에 나오죠, 제논의 역설. 다 아시죠, 그죠?
거북이가 있고, 이만큼 가봐라, 가봐라, 가봐라 이렇게 쪼개잖아요. 이게 무한이지. 거북이가 아킬레우스를 끝내 따라잡지 못하는 그 비결은 어디에 있는 거냐. 이 분할이 무한하다는 데 있는 거지. 그런 무한은 있어요.

그런데 그런 무한이 아니라 단적인 무한, 그러니까 이렇게 조작해서 무한이 아니라, 이만큼 뭐해서 여기까지 왔다. 왔다. 왔다 하는 이렇게 조작하는 무한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무한. 하나의 무한.
그거를 이제 우리가 보통 actual infinity라고 해요. 이거는 virtual infinity, 잠재적인 무한. 이거는 그냥 잘라보면 무한이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어떤 존재가 있는데, 그 존재가 딱 무한한 거지. 그게 actual infinity. 당연히 이건 뭐겠어요? 당연히 신이지, 신. 그래서 그리스철학에 없는데, 중세철학에 등장하는 게 뭐냐 하면, actual infinity 개념이야. 현실적 무한.

▲ 무한(infinity)에 대한 사유가 중세미술에 끼친 영향.

미술사에서도 그리스 미술이나 근대미술보다 중세 미술이 더 모던하다고 그러지. 중세 미술의 상상력이 더 풍부하고, 고대미술에 들어 있던, 그 어떤 제약들이 많이 무너지게 되죠. 그렇게 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infinity예요. 무한에 대한 사유죠. 무한을 자꾸 사유하고, 무한을 형성하려고 하다 보니까 유한한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형상들을 상상하게 되는 거지. 목을 길게 그린다거나 그런 게 나오지.

▲ 17세기까지 영향을 미친 무한의 사유 infinity.

어쨌든 간에 그리스철학에 비해서 중세철학의 가장 특징은 뭐냐 하면 infinity고, 그 무한의 사유가 17세기까지 갑니다. 데카르트라든가, 라이프니츠, 또 스피노자 이런 사람들의 형이상학도 역시 무한의 형이상학이에요. 사유하는 자아와 연장을 가진 물질, 이게 이원론이죠. 데카르트는 그죠? 이 두 개는 뭐냐 하면, 유한실체죠. finite substance예요. 이 두 개하고 또 뭐가 있습니까? 무한의 실체로서의 신이 또 있죠. 스피노자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죠. 신은 무한히 자기를 표현하죠. 그죠. 라이프니츠도 마찬가지고, 모나드가 무한한 그 속성들을 가지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