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있다”와 “이다”의 옛꼴 들어보이기
1. 이두(吏讀)의 보기들
(1) “있다”의 경우
有(이시/잇): ① 있다, 가졌다. ② -았, -었, -였.(283 쪽부터 살펴보십시오. “있다”의 보기들이 여러 꼴로 보이고 있습니다.)
有齊(잇졔): ① 있다, 있음. ② -였다, -였음.(284 쪽)
有置(잇두): ① 있다, 있음. ② 있기도. ③-였다, -였음.(285 쪽)
(2) “이다”의 경우
是(이): ① 이, 인(잡음씨-指定詞). ② 이, 가(임자토-主格助詞). ③ 이, 이것(대이름씨-代名詞)(173 쪽부터 살펴보십시오.)
是齊(이졔): -이다, -임.(207 쪽)
是置(이두): ① -이다, -이오. ② -이어도, -이더라도, -이기도.(208 쪽)
(3) “있다”와 “이다”의 높임말의 경우
在白(견-견삽-겨삽): 겨삽다, 겨옵시다, 겨시다.(295 쪽)
敎(이시/ 이샨-이신): ① 이시, 께서, 께옵서, 임자말의 높임토(주격조사의 경칭). ② 이신, 이옵신(잡음씨가 매김말로 될 때에 높이는 말). ③ 하신, 하옵신(움직임씨가 매김말로 될 때에 높이는 말). ④ 하시다(움직임씨로 높이는 말).(104 쪽부터 살펴보십시요.)
2. 중세 국어의 보기들
(1) “있다”의 경우
現在 나다잇 뉘오(월인석보 2:21-1): 여기서의 “나다잇다”는 “나타나 있다”의 뜻.( 동아 새국어사전 의 “나다잇다”/“나댓다” 항목 참고)
白骨이 塵土ㅣ 되여 넉시라도 잇고 업고/ 님 向 一片丹心이야 가싈 줄이 이시랴.(정몽주의 시조 중): 여기서의 “잇고/이시랴”는 “있고/있으랴”의 뜻.( 국문학신강 , 국문학신강편찬위원회 편, 새문사, 1990, 132 쪽. 이 책에는 “잇다”에 관한 많은 보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2) “이다”의 경우
梨花에 月白 고 銀漢이 三經인제.(이조년의 시조 중): 여기서의 “인제”는 “인 때에”의 뜻.(앞의 책, 133 쪽)
아마도 변티 아닐 바회뿐인가 노라.(정철의 시조): 여기서의 “인가”는 오늘날의 “인가”와 같은 뜻.(같은 책, 143 쪽)
 살핀 책: 이두사전, 장지영 지음, 정음사, 1984 중판.
나.있음에 대한 뜻매김
“있다”와 “이다”는 오늘날 낱말의 꼴(형태)과 기능(문장에서의 역할) 그리고 의미에서 많은 차이를 갖는다. 그 낱말꼴은 “ㅆ”의 있고 없음을 통해 분명히 가름되고, 그 기능 또한 전혀 다르다. 보기를 들어, “나는 있다.”라는 말은 하나의 완전한 문장(글월)을 이룰 수 있지만, “나는 이다.”라는 말은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이로 미루어볼 때, “있다”는 형용사나 동사의 기능을 가질 수 있는 반면, “이다”는 그럴 수 없다. 물론 “이다”는 활용(活用, conjugation)의 특성을 가지므로 동사 내지 형용사일 수 있다. 그 둘의 의미 또한 분명 다르다. “나는 서울에 있다.”라는 말은 내가 서울에 머무른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만, “나는 서울 사람이다.”라는 말은 내가 나를 ‘서울을 고향으로 둔 사람’으로서 밝히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있다”는 ‘머무름’을 뜻하지만, 뒤의 “이다”는 ‘자신을-누구로서-매김함’을 뜻한다.
다만 이 둘 가운데 “있다”의 뜻이 보다 근본적이라고 여겨진다. 다음의 보기를 보자.
(ㄱ). 後(후)엔 韋諷(위풍)이 잇고 알핀 支循(지순)이로다(後有韋諷前支循)(두초 16: 39)
(ㄴ). 方丈山(방장산) 三韓(삼한)ㅅ 밧기오 崑崙山萬國(곤륜산만국)ㅅ 西(서)ㅅ녀긔 잇니라(方丈山三韓外崑崙山萬國西)(두초 19: 13-4)
윗글 (ㄱ)에서 “잇고”는 “有”를 푼 것이고, “이로다”는 ‘위치’를 나타내는 “있다”를 대신해 쓰인 것이다. 이해하기 쉬운 보기를 들어보자. “우리 마을 뒤쪽에는 산이 있고, 앞은 들판이다.”라는 말은 “뒤쪽에는 산이 있고, 앞쪽에는 들판이 있다.” 또는 “뒤쪽은 산이고, 앞쪽은 들판이다.”와 같이 바꿔 쓸 수 있고, 이는 다시 “뒤쪽 산, 앞쪽 들판”이나 “산은 뒤, 들판은 앞”으로 줄여 쓸 수도 있다. 이는 “앞은 들판이다.”라는 글월이 “우리 마을은 앞이 들판이다.”처럼 읽혀야 함을 뜻한다. 즉 여기서 “이다”는 ‘우리 마을’이 놓여 있는 위치나 방위를 지정해 준다. (ㄴ)에서도 “이오”는 위치를 나타내는 “있다”를 대신해 쓰였다. 그런데 “이다”가 이러한 방식으로 쓰일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있다”와 짝(대구, 對句)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다”는 “있다”에 기초해 쓰인다. 이는 곧 “있다”가 “이다”에 비해 더 근본적인 바탕이 됨을 뜻한다.
1. “있다”가 쓰이기 위한 ‘앞선 규정들’
(1) “있다”는 때(언제)에 의해 앞서 규정된다
“있다”는 낱말로서 문장의 시제(時制)에 따라 그 꼴이 바뀐다(활용). 보다 중요한 사실은 “있다”가 시제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기능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有’자는 동사의 과거 시간을 적는 데 쓰였다. “이시-”는 말줄임되어 “시”가 되고, “시”는 다시금 “ㅅ”으로 짧아졌고, 오늘날에는 “았/었”과 같은 된소리로 소리나게 되었다. “었/았”에 대한 보다 체계적 연구에 따르자면, “었”은, “어 잇”의 응축형이 발달하여 형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어 잇”은 단축형 “엣” 그리고 “엇”으로 응축되어 현대국어의 “었”이 되었다고 한다.
“있다”는 시제(時制)를 나타내는 데 필수적인 낱말이다. 시제란 어떤 일(사건)의 “시간적 위치”를 나타내는 “언어 형식”을 뜻한다. 시제는, 말하자면, 어떤 일을 그것의 일어남의 “때”와 관련해 표현하는 “언어적 방식”을 의미한다. 만일 어떤 일이 과거에 일어났다면, 그 일에 대한 언어적 기술은 “과거시제”로써 이루어져야 하며, 그 일이 현재에 일어나고 있다면, “현재 시제”로써,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면, “미래 시제”로써 기술되어야 한다.
만일 시제(時制)가 일의 일어남의 “때”에 대한 “언어적 규정 방식”을 뜻하고, 이러한 규정을 위해 “있다”라는 낱말의 여러 “바뀐 꼴들”이 필수적이라면, “있다”에 대한 이해 속에는 ‘때(시간) 자체’에 대한 ‘앞선 이해’와 그에 따른 ‘시간 규정(이미, 이제, 아직 등)’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 만일 시제가 한국어의 모든 동사와 형용사 등에 두루 미치는(보편적인) 것이라면, “있다”는 모든 동사와 그에 상응하는 낱말들과 결합할 수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 그 낱말들의 시제적 사용을 가능케 하는 것이어야 한다. 시제가 “때”에 대한 앞선 이해 내지 앞선 판단 또는 앞선 규정에 바탕해 결정되는 한, 시제어로서의 “있다”는 그때마다의 “때-매김 자체”에 의해, 다시 말해, “언제에 대한 자리-매김”에 의해 앞서 규정되어 있는 셈이다.
(2) “있다”는 곳(어디)에 의해 앞서 규정된다
살핀 책: 이두사전, 장지영 지음, 정음사, 1984 중판.
이두사전 , 89 쪽.
時制 相 敍法, 이남순, 월인, 1998. 252 쪽.
국어학개론, 122 쪽.
“있다”가 쓰인 글월은, 암시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그 글월의 주어의 “처소(處所)”가 앞서 드러날 때에만 그 글월의 뜻하는 바가 뚜렷해질 수 있다.  “있다”는 언제나 “…에 있다.”이다. 이때의 “…에”는, “있다”와 관련해서는, “처소격 조사”로서 말해질 수 있다. 보기컨대 “나무는 있다.”는 보기말은 거기에 “산에”라는 처소적 표현을 끼워 넣음으로써 그 의미가 보다 뚜렷해질 수 있다. “있다”는 “처소”를 뜻하는 모든 명사와 짝하여 쓰일 수 있다. 이 말은 “있다”가 장소나 자리로서의 “곳 일반”에 의해 앞서 제한되거나 규정되어 있어야 함을 뜻한다.
“곳 일반”은 산이나 집, 또는 하늘이나 마음 등과 같이 모든 공간을 가리킬 수 있다. 심지어 나무는 “꿈속에 있다.”고 말해질 수조차 있다. “있다”의 쓰임에는 그것에 의해 서술될 수 있는 ‘주어 일반’의 ‘자리 전체성’이 앞서 이해되어 있다. “있다”가 말해지는 곳에서는 그것에 의해 서술되는 주어에 대한 ‘곳-매김’이 어떻게든 이미 주어져야 한다. “있다”는 낱말은 ‘곳-일반’에 대한 ‘앞선 이해’에 의해 앞서 제한되고 규정되어 있다. 어디에도 없는 것은 “있다”고 말해질 수 없다. 어떤 것이 “있다”에 의해 서술될 수 있으려면, 그것이 머무르거나 놓일 곳이 우리에게 앞서 이해되어 있어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시제 상 서법의 130 쪽부터, 그리고 특히 150 쪽 살피삽.
(3) “있다”는 이(누구)와 것(무엇)에 의해 앞서 규정된다
‘풀이-낱말’로서의 “있다”는, 그 낱말이 풀어 밝혀야 할 ‘임자-낱말’이 앞서 놓인 곳에서만 제구실을 다할 수 있다. “있다”의 ‘임자-낱말’이 될 수 있는 것은 문장의 주어 자리에 올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즉 산이나 분노 등의 이름씨뿐 아니라, 어떻게든 “있다”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자리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있음은 언제나 있는 것의 있음이고, 있는 것은 언제나 있음에서의 있는 것이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옮겨 놓은 것과도 같다. “있다”는 낱말은 ‘있는 모든 것’의 풀이말이 될 수 있지만, ‘있는 모든 것’은 이미 저 “있다”는 낱말에 의해 앞서 뜻매겨져[의미부여되어] 있어야 한다.
“있다”의 ‘임자-낱말’이 될 수 있는 이름은 말로써 일컬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즉 “있다”는 낱말로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됐든 모두 “있다”의 ‘임자-낱말’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무엇”과 “누구”에 대한 “대꾸-낱말(대답말)”이다. “무엇”은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그것의 이름을 묻는 말이고, “누구”는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 그의 이름을 묻는 말이다. “무엇과 누구”는 “있다”의 ‘임자-낱말’로서 이미 “있다”는 낱말에 의해 어떻게든 앞서 규정된다. 물론 이때의 규정은 긍정, 부정, 전칭, 특칭 등 다양한 형태로 가능하다.
“있다”는 낱말은, 그것이 글월에서 쓰일 때, 앞서 놓인 ‘무엇’ 또는 ‘누구’에 대한 ‘풀이-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자면, “있다”는 낱말은 주어에 대한 풀이말이 아니라, ‘무엇’ 또는 ‘누구’와 같은 주어를 정립하는 말일 뿐이다. 정립한다는 것은 앉혀 놓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따를 때, “사과는 있다.”라는 말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사과”라는 말로 가리켜진 어떤 것이 그의 지각(知覺) 속에 앉혀졌다(지각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낼 뿐 사과가 무엇이고, 그것의 성질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는 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사과는 있다.”라는 말은 우리가 그것(사과)의 있음의 때와 곳을 앞서 이해하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사과)이 ‘어떤 갈래(범주)’-무엇인지 누구인지-에 속하는지도 앞서 가를 수 있을 때만 제대로 말해질 수 있다. 붉은 것으로서의 사과도 있지만, 이성적 동물로서의 나도 있다. “있다”는 사과와 나처럼 ‘서로 다른 갈래에 속하는 것들’에 모두 쓰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있다”가 “무엇”과 “누구”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것을 말할 뿐, 그것들을 전혀 가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뜻할 수 없다. “있다”는 낱말은, 그것의 ‘임자-낱말’을, 비록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방식으로는 아니지만, 갖가지 갈래로 풀어낸다.
“있다”는 낱말은, 그것이 비록 ‘주어-앉힘-말’로서 이해될 수 있다 손치더라도, 그것의 ‘임자-낱말’을 단순히 ‘가름 없는 있음의 사실’ 위에 앉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앞서 가름된 저마다의 갈래에 따라 갈라-앉히는 것’이다. 그 갈래는 크게 ‘무엇의 갈래’와 ‘누구의 갈래’로 나뉠 수 있다. 물론 갈래란 것은 가르기 나름이다. 이러한 가름은, ‘있는 모든 것’의 갈래를 나눌 수 있는 낱말로서의 “있다”에 대한 ‘앞선 이해’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있다”는 낱말은 이렇게 크게 “무엇”과 “누구”에 의해 앞서 규정되어 있다.
(4) “있다”는 그 까닭(유래/왜)에 의해 앞서 규정된다
만일 어떤 것(누구/무엇)이 [언제 어디에] 있다면, 그것은 그 나름의 ‘있음의 근거(根據)’를 가져야 한다. 그 근거는 “그것은 없지 않고 왜 있는가?”라는 물음을 통해 물어질 수 있다. 이 물음은 ‘그것의 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확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있다”고 말한다. 이때 우리들에게 그것의 있음의 까닭은 마치 자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때의 자명성은, “그것은, 그것이 있기 때문에 있다.”와 같은 ‘상식적 근거’에 바탕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있으니까 있다’는 논리는 있음의 까닭이나 근거에 대한 궁극적 해명은 가능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해명할 필요도 없다는 자명성의 논리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신화나 전설 또는 남들에게 듣거나 책에서 읽은 이야기들을 통해 수많은 종류의 ‘있는 것의 있음의 까닭들’을 이미 알고 있거나, 알아 나가고 있거나, 스스로 파헤쳐 보고 있거나, 아니면 알기를 포기하고 있다. 오늘날 ‘있음의 까닭’은 대개 과학적 이야기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제멋대로의 괴변에 가까운 ‘있음의 근거들’도 믿는다. 또 우리는 ‘있는 모든 것의 있음의 까닭’을 저마다의 이해에 따라 자기 나름대로 말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있다”는 낱말을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보기컨대 우리가 “귀신은 있다.”고 말하는 누군가에게 “귀신이 정말로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귀신의 있음의 까닭을 어떻게든 제시하려 할 것이다.
“있다”는 낱말은 우리가 ‘있음의 까닭’에 대한 자기 나름의 앞선 이해를 갖고 있을 때에만 쓸 수 있다. 이때 이해된 ‘까닭’이 과학적인지, 신화적인지, 상상적인 것인지 등은 우선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있다”는 낱말은 저 ‘있음의 까닭’을 묻는 의문사로서의 “왜”에 의해 앞서 규정되는 셈이다. 만일 누군가 “나무가 있다.”라고 말했다면, 그는 이미 그 나무가 왜 [그때 그곳에] 있는지를 나름대로 앞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만 그 또는 우리에게 그 나무의 있음의 까닭이 문제시될 수 있다.
“있다”는 낱말은 이러한 숨겨진 의문사로서의 “왜”에 의해 앞서 규정되어 있다. 그것도 대개는 습관적으로 그리고 자명하게 대답되어 있는 방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가끔 이러한 자명한 ‘있음의 까닭’ 때문에 고통을 받기도 하고, 권태나 무의미성 등에 빠져들기도 한다. ‘있음의 까닭’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언제나 알고 있는 듯도 하지만, 그러나 그 까닭이 우리 자신에게 진지하게 문제시될 때면, 우리는 그 ‘있음의 까닭’에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러나 ‘있음의 까닭’이 다시금 일상의 평온함 속에서 자명하게 이해되자마자,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리고 아무런 고통이나 고민 없이 “있다”는 낱말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2. 있음에 대한 뜻매김
“뜻-매김”은 어떤 것의 뜻을 그것의 드러남의 자리에 매긴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매김”은 서로 다른 뜻들의 경계 내지 가장자리를 서로 가지런하게 맞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뜻”이, 어떤 것이 그것답게 두드러지게 드러난 것이라면, ‘뜻’에는 이미 그 뜻이 드러나 오고 있는 ‘열린 자리’, 즉 관점이나 지평이 속해야 한다. “뜻-매김”은, 서로 얽힌 뜻들을 그것들 나름의 질서로써 가지런하게 하는 것을 일컫는다. “정의(定義)”는 이러한 “뜻-매김”의 한 가지이다. “정의”는 어떤 것이 속한 줄기(類)와 가지(種)를 가름하는(指定) 것이다. 보기를 들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또는 “동물은 움직이는 생물이다.” 등은 사실은 “인간, 이성, 동물, 움직임, 생물” 등에 대한 ‘앞선 뜻-매김’, 즉 그것들 사이의 ‘질서-매김’ 없이는 불가능하다.
“있다”에 대한 뜻매김이 반드시 ‘줄기-가지-가르기(종차+최근류)’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아니 ‘있음’은 정의가 불가능하다. 그것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려면, “있다”는 낱말이 어떻게든 그것보다 더 넓은 낱말의 줄기에 속해야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있다”는 낱말과 나란히 그 줄기에 함께 속할 수 있는 다른 낱말들이 주어져 있어야 하는데, “있다”는 낱말은 그것에 대한 부정어와 반대어를 가질 뿐, 그것보다 넓거나 같은 뜻을 갖는 낱말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불교나 유학에서 쓰이는 “하나(一)” 또는 “태극(太極)” 등의 낱말이 유무(有無)의 근원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면, “있다”와 “없다”는 태극을 통해 정의될 수 있다. 문제는 “하나”나 “태극”이 그 자체로 언어적 차원을 떠난 것이라는 데 있다. 그 어떠한 가름도 없는 곳에서 말은 결코 어떠한 발언권도 얻지 못한다.
그런데 “있다”는 국어사전에 실린 헬 수 없이 많은 낱말들 가운데 하나로서 적어도 사전적 뜻매김을 갖는다. 만일 “있다”는 낱말이 ‘가장 넓은 뜻’을 가졌고, 그것이 ‘모든 것’을 가리킬 수 있으며, 그것보다 더 높은 개념이 없다면, 이 낱말은 ‘그 자체로 그리고 모든 것에 앞서’ 이해되어야 하고, 그것에 대한 ‘뜻-매김’ 또한 이러한 ‘앞선-이해’에 따라 주어질 수 있다. 그 이해는 곳 방금 위에서 밝혀진 “있다”가 쓰이기 위한 다섯 가지 ‘앞선 규정들’을 말한다. 그러나 “있다”의 뜻은 이러한 ‘앞선 이해’로 다 밝혀지지는 않는다.
1) 있음은 ‘나타남-이어나가기’이다
‘있음’의 ‘앞선-규정들’은 나타남의 현상에 포괄된다. “나타나다”는 자동사이다. 자동사는 움직임의 작용이 주어 자신에게로 미치는 동사를 말한다. “나무가 있다.”라는 말은 “나무가 나타나다.”라는 말과 같다. 이 말은 무엇보다 먼저 ‘나타난 것 자체가 바로 주어 자체, 즉 나무 자체’임을 뜻한다. “나타나다”는 낱말은 어떤 것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말한다. 나무가 있다는 것은 나무가 생겨나 자라온 그 모습 그대로 지금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는 것을 뜻한다.
나타나는 것은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한 자리를 필요로 한다. 어떤 것의 나타남은 그것이 이제까지 숨겨져 있었음을 전제한다. 숨겨짐은 어떤 것이 특정한 장소에 감추어졌거나 눈에 띄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나타남은 숨김이 들통 난 것과 같다. 숨겨짐은 ‘어디에도 없음’이 아니라 ‘나타나지 않은 채 있음’이다. 숨음과 나타남은 숨바꼭질을 벌이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이 나타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고, 그것이 숨어 버리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나타날 수 없다. 다만 어떤 것의 숨겨져 있음은 그것의 나타나지 않음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만일 어떤 것이 ‘언제-어디에서’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면, 그것의 나타남은 곧 생겨남이다. 나타남은 그것이 처음으로 일어난 것일 때 생김을 뜻한다. 생김은 창조, 제작, 창작, 자연 발생 등 다양한 유래를 갖는다. “세상에 자동차가 처음으로 나타났다.”라는 말은 자동차가 처음으로 제작되었음을 뜻하고, “비디오 아트가 백남준에 의해 처음 나타났다(출현).”라는 말은 백남준이 새로운 예술의 창시자임을 말한다. 만일 우리가 생겨남의 방식으로 나타나는 어떤 것을 발견했다면, 우리는 그것의 ‘있음’의 처음(始作)을 본 셈이다. 자연물의 나타남은 그것이 우리가 그것의 유래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는 어느 때에 절로 생겨났었다는 것을 뜻한다. 생겨남으로서의 나타남은 만들어져 나옴을 말한다. 거기에는 재료(감)와 형태(모습) 또는 목적(쓸모) 등이 필요하다.
생겨났던 것은 그것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한 과거의 것이다. ‘지나가 버린 것’은 더 이상 현재에 나타날 수 없다. 그것은 나타나는 것을 통해 자신을 내보일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어떤 것의 나타남에 이미 그것의 ‘숨겨져 왔음’이 속하고, 이 ‘숨겨졌던 동안’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의 나타남은 온전한 나타남일 수 없다. 더구나 그것에게 그것의 미래가 남겨져 있다면, 나타남의 불완전함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나타나는 것에 과거와 미래가 함께 속하는 한, 어떤 것 그 자체의 나타남은 언제나 유한할 수밖에 없다. 유한하다는 것은, 말하자면, ‘끝-매겨져-있다’는 것, 즉 매겨진 끝을 결코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나타남은 언제나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
나타나는 것은 나타남의 자리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나타남의 뜻은 두 갈래(존재론 갈래/인식론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나타난 것이 차지한 시간과 공간, 즉 그것이 생겨난 때로부터 이제까지 이어져 온 ‘때-길이(시간)’와 그것이 그 동안 놓여 있던 ‘곳’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나타난 것이 ‘무엇’으로서 알려지기 위한 자리를 뜻한다. 나무가 있다면, 그것은 생겨난 때로부터 현재까지 그것이 놓인 곳에서 ‘나무’로서 나타난다. 나무가 있다면, 그 나무는 이러한 나타남을 줄곧 이어온 셈이다.
어떤 것의 있음은 그것이 자신의 나타남을 이어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있음은 ‘나타남 이어나가기’이다. 나타남의 반대는 사라짐이다. 나무가 사라졌다면, 그것(나무)은 무엇에 가리거나 옮겨져 보이지 않게 되었거나 불에 타 없어졌거나 했을 것이다.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생겨난 때로부터 사라지지 않고 그것의 나타남을 이어나간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이어나감이 지속되려면 나타난 것은 그 나름의 성질을 가져야 한다. 천 년을 사는 은행나무는 그 생김이 한 철로 사라지는 풀과는 달라야 할 것이고, 사냥을 하는 호랑이는 풀을 뜯는 토끼와 그 생김이 달라야 할 것이다. 이때 생김은 생겨난 모습뿐만 아니라 그 몸을 비롯한 다양한 능력 전체를 두루 일컫는 것이다.
나무의 모양과 빛깔은 시각을 통해 나타나고, 그렇게 나타난 것은 ‘참나무’나 ‘초록빛’으로 알려질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칸트 인식론을 통해 잘 설명될 수 있다. 이에 따를 때 우리 마음이 알 수 ‘있는 것’은 ‘[마음 바깥으로부터] 마음에 주어진 것’과 ‘마음이 스스로 생각한 것’뿐이다. 무엇이 마음에 주어진다는 것은 마음이 그릇처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뜻한다. 주어짐을 위해 마음에는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일 길(통로)이 나 있어야 하고, 마음 안에는 ‘주어진 것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정리된 것들을 저장해 둘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마음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주어진 것들’로부터 ‘새로운 어떤 것’을 창안해 낼 수 있는 ‘생각 능력’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여기서 생각은 주어진 것들을 개념적으로 또는 자유롭게 결합(結合)할 수 있는 힘, 즉 서로 다른 것들을 하나가 되게 맺어 주는 힘을 말한다. 마음은 자라면서 생각의 능력이 생겨나고, 그 능력은 ‘주어진 것들’을 정리하는 가운데 자신이 배운 것들과 스스로 생각한 것들을 통해 ‘생각의 틀’, 즉 개념의 체계를 세워 나간다.
그러나 나무의 ‘있음’은 감각과 지각을 통해 내보여지긴 하지만 그러한 것을 통해 나타나기에는 너무 크다. 나무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나타났어야 할 뿐 아니라, “나무”로서 알려지고 만나져야 하며, 그것의 어떠함(성질들, 속성들)과 재료 그리고 다른 것들과의 관계 등이 앞서 밝혀져야 한다. 나무의 ‘있음’은 이러한 모든 것을 포괄한 것, 즉 ‘감싸 안은 것’이다. 나무의 나타남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한꺼번에 감각하거나 지각하거나 생각(결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나무는 자신의 나타남을 이어왔을 뿐 아니라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줄곧 이어나갈 것이다.
있음에 대한 탐구는 인식론적으로는 이미 너무 좁은 연구가 된다. 인식론이 비록 있음의 나타남의 기초(基礎/Fundament)를 문제시하긴 하지만 그것은 있음의 뜻을 올바로 매김할 수 없다. 만일 누군간 있음의 뜻을 그것(있음)이 그 자신에게 알려지는 한에서만 매김하려 한다면, 그것은,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어둠 밤 자신이 잃어버린 동전을 찾기 위해 그곳을 떠나 밝은 가로등 아래를 살피는 것과 같다.
‘있음’은 언제나 ‘나타남 이어나가기’이다. 이어나감은 어떤 힘을 나타낸다. 나무가 있다는 것은 그것(나무)이 그 자신의 있음을 이루어간다는 것을 뜻하고, 돌멩이가 있다는 것 또한 그것(돌멩이)이 그 자신의 동일성(同一性)을 지탱하는 힘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나타남에는 ‘나타나는 것 자체’와 나타남의 ‘때와 곳’ 그리고 ‘누구와 상황’ 등이 함께 속한다. 있음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무엇의 있음으로서 나타남’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나타남 이어나가기로서의 있음은 숨김을 뚫고 나온 것일 뿐 아니라 사라짐의 운명에 맞서 싸우는 것이며 그것의 ‘무엇-임’에 대한 해석과 갈등을 빚는다.
2) 있음은 깨달음과 같은 것이다
어떤 것의 나타남은, 그것이 시야에 나타날 때, 즉 시야 속으로 들어올 때, 보임을 뜻하고, 이러한 방식으로 들림, 만져짐, 느껴짐, 생각됨 등을 뜻한다. 이러한 것들에는 다시금 봄이나 들음, 만짐, 느낌이나 생각함 등이 대응된다. 그런데 어떤 것의 나타남에는 ‘눈에 띔과 띄지 않음’의 방식이 속한다. 나타나는 모든 것이 누군가에 의해 두드러지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개의 것들은 그저 우리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어떤 것이 누구에게 나타난다는 것은 결코 그것이 그에게 인식된다거나 의식된다는 것과 동일한 것을 뜻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들 가운데 빙산의 일각만을 의식하거나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것의 있음(나타남)은, 그것이 이러한 여러 갈래의 ‘들임-능력들(감각 기관들)’을 통해 조각조각 들어오는 것이라기보다 ‘누군가에게’ 통째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같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나무의 모양이나 빛깔과 같은 것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소리와 같은 것이다. 나무의 있음은 눈이나 귀로 보거나 들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있음은 인식되는 게 아니라 이해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무의 있음은 그것(있음)이 우리에게 이해되는 만큼 받아들여진다. 그럼에도 나무는 그 자체로 나타난 것이지, 우리에게 감각되는 만큼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무의 있음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하이데거가 이해(理解/Verstehen)이라 부른 것과 그 내용이 비슷하다. 만일 내가 나무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나무는 나타날 수 없다. 그것은 내게는 나무가 없다는 것과 같다. 이러한 사태는 있음이 깨달음에 그 나타남의 바탕을 갖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깨달음은 어둠이 가시고 밝은 곳에 들어서 모든 것이 환희 드러난 상태를 말한다. 깨달은 것은 언제나 그때마다 전체에 대한 것이다. 이 깨달은 바를 말로 풀어내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있음의 깨달음은 감각과 지각 그리고 생각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그것이 이해되고 해석되는 다양한 지평까지 포괄한다. 우리는 있음의 사실과 그것의 의미와 유래를 자기 나름대로 환히 깨닫고 살기 때문에 그 깨달음에 따라 행동해 나간다. 있음이 깨달음에 근거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누군가의 ‘이해의 구조’와 ‘해석의 구조’에 따라 엮이거나 풀린다는 것을 뜻한다.
3) 있음은 삶과 머묾으로 나뉜다
사람의 있음은 삶을 살아 나감이다.
사물의 있음은 머무름이다.
4) 있음은 가짐이다
[나는] 돈이 있다.
[나는] 시간이 있다.
[한국에는] 산이 있다.
“…은(는)/이(가) 있다.” > 동사 > 상태를 나타냄 > 나타남의 뜻 > 보) 그는 집에 있다. 공룡은 백악기에 한반도에 있었다. 그가 집에 있다. 공룡이 백악기에 한반도에 있었다. 산신령은(이) 있다. 나는(내가) 있다. 수(가능성), 때, 곳, 필요성은(이) 있다. ⇒ ‘[언제, 어디에, 누구에, 어찌] 나타나는 모든 것’은 어떻게든 ‘있는 것’이다.
5) 있음은 관계함이다
다. “이다”에 대한 뜻매김
1) 도로-매김
“산은 산이다.”
“[그래도] 학생은 학생이다.”
2) 이름-매김
“이 분은 홍길동입니다.”
“이것은 컴퓨터이다.”
3) 자격-매김
“철수는 학생이다.”
4) “이다”는 “뜻-풀이-매김-낱말”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라. 연계사로서의 “이다”문제
(1) 아리스토텔레스
‘S는 P이다.’라는 명제는 그 둘의 결합을 뜻한다.
‘이다’란 사유 속에서 사유된 것의 결합되어 있음이다.
‘S=P’는 결합일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분리이기도 하다.
“이다”로써 가리켜진 것은 사물들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 지성 안에 있다.
(2) 토마스 홉스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이 말에는 두 개의 이름들이 시제어[동사] ‘이다’에 의해 연계되어 있다.
명제 안에서 주어란 앞의 이름이고, 술어란 뒤의 이름이며, ‘이다’는 연계이다.
낱말들의 연계로서의 연계사란 동일한 사물에 두 가지 이름들이 맺게 되는 동일한 관련가능성의 근거를 알리는 사유의 표지이다.
(3) 존 스튜어트 밀
언어적 명제 내지 본질적 발언 속의 ‘이다’는 ‘그것은…을 의미한다.’는 것과 같다.
(4) 로체: 연계사의 존재와 이중판단이론
‘S 곧 P’란 말의 의미는 ‘S는 P이다. 그래 그것은 참이다’이다.
‘S 곧 P가 아니다’가 의미하는 바는 ‘아니 그것은 참이 아니다. 말하자면 항상 정립적 판단으로 밑바탕에 놓여 있는 S 곧 P가 아니다’이다.
마. 있음의 뜻하는 바
오늘날 나타나는 것들은 ‘자기 정체성’이 심각하게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것이 ‘자기 자신’으로서 나타날 때와 곳을 잃어버린다는 것, 달리 말해,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들이 아무데서나 그리고 아무 때나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것에게 더 이상 ‘자기 자신’으로서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것과도 같다. 오늘날 모든 것은, 모든 것이 서로 뒤섞일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나타난다. 나타나는 모든 것은 너무 가까워지고 만다. 게다가 나타남의 역사는 무시되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진정한 가까움은 사라진 지 오래다. 가까움이 없는 곳에 멂도 다름도 남아나지 않는다. 즉 나타남의 자리 자체가 순간순간 바뀌는 바람에 모든 것은 모든 것에게 낯설지만, 경악스럽게도 모든 것은 이미 ‘똑같아져 버렸다.’
‘있음의 문제’를 통해 하이데거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철학은 이제 나무의 있음과 같은 것을 그것의 나타남 자체에서 사물적으로 또는 형이상학적으로[생성의 유래와 근거 찾기] 탐구하는 것을 떠나 나무의 있음의 뜻하는 바를 결정짓는 운명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모험, 즉 ‘있음에 대한 물음’을 새롭게 던지는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나무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는가? 그것은 날씨가 추우면 땔감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우리보다 더 오랜 동안 이 지구에 뿌리를 내린 채 살아온 생명체로서 그 생명을 이어갈 권리를 지니고 있음을 우리가 존중해야 하며,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을 넘어 예술 작품 등으로 해석해 나갈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나무의 있음은 자본주의적으로 또는 소비사회적으로 이해되고 해석된다. 나무가 나타나는 방향은 오직 돈벌이와 유용성이다. 이러한 해석 방향을 결정한 것은 누구 또는 무엇인가? 있는 모든 것의 있음이 나타나는 줄기는 어떻게 뻗어나가고 있으며, 그 방향은 무엇에 의해 조정되고 있는가? 기술은 있음의 줄기를 부품화의 방향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학문은 경제성에 종속되고, 예술 또한 자본을 위한 장사가 되어 가고 있다. 있음에 대한 물음에서 그 대답을 지배하는 것은 누구인가?
나무의 있음은 사람에게 나무가 땔감으로 쓸 수 있고, 집을 지을 수 있고, 그 자체로 보존할 수 있고, 지구의 생명을 지키는 파수꾼일 수 있음 등을 뜻할 수 있다. 있음의 뜻하는 바는 나무 자체에 대한 인식을 통해 얻어질 수 없고, 오직 나무의 있음에 대한 깨달음과 그것에 대한 물음과 그 물음에 대한 다양한 대답들을 해 나가는 가운데 밝혀질 뿐이다. 이러한 일을 우리가 생각하기라고 부른다면, 있음의 뜻바는 오직 생각하기를 통해서만 열린다.
나는 출근길에 손전화기를 집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손전화기가 없다. “손전화기는 집에 있다.”라는 글월은 나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오늘 걸려올지도 모를 중요한 전화를 받을 수 없다. 그것은 내게 어떤 기회를 앗아가 버릴 수도 있다. 나는 출근길을 서둘렀던 것을 후회하면서 하루 종일 손전화기의 없음 때문에 마음을 졸인다.
이러한 보기는 우리가 손전화기와 같은 하나의 도구를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하는지를 잘 말해 준다. 우리는 손전화기를 두고 다니지 않으려면 늘 신경을 써야 한다. 하물며 ‘자기 자신의 있음’에 대해서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있는 모든 것’의 있음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이해를 갖추고 있다. 우리는 있음의 의미를 이러한 이해에 맞춰 풀어낸다. 있음의 의미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우리에게 앞서 갖춰져 있다(‘앞서-가진-바’/앞서-가짐/Vor-habe). 이해의 갖춤은 의미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마치 여러 가닥을 한데 엮어 하나의 매듭으로 묶듯 한 자리에 모으는 일과 같다. 이렇게 엮인 의미 다발은 그때마다 다양하게 풀이될 수 있다. 하나로 그 갖춤의 정도에 따라 풀어냄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시제 상 서법의 130 쪽부터, 그리고 특히 150 쪽 살피삽.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은 어떤 것의 생겨남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인(질료, 형상, 목적, 운동)을 밝힌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존재와 시간』, 31절과 32절 살핌.
“은(는)”은 ‘열린 풀이’가 제시될 것임을 나타낸다. “나무는 가지를 갖는다.”는 보기말은 나무가 가지만을 갖는 게 아님을 함축한다. 가지는 나무에 딸린 것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나무는 가지만 갖는 게 아니라 잎이나 뿌리 등도 갖는다. 반면 “나무가 가지를 갖는다.”는 말은 ‘가지를 갖는 것이 다름 아닌 바로 나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때 우리는 ‘나무’를, 이를 테면, 자동차나 돌멩이 등과 비교하여 ‘가지를 갖는 것’으로 분류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나무는 있다.”와 “나무가 있다.”는 말을 이러한 가름 틀에 따라 설명한다면, 앞말은 나무가 단순히 ‘있기’만 한 것이 아님을 나타내지만, 뒷말은 나무가 바로 ‘있는 것’의 대표적 보기임을 나타낸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는”이 쓰일 때는 목적어와 동사 부분에 놓일 것들이 비교가 되는 데 반해 “가”가 쓰일 때는 주어에 놓일 것들이 암묵적으로 비교된다는 점이다.
“그는 집에 있다.”라는 말은 그가 집, 도서관, 식당 등에 있을 수 있(었)음을 나타내지만, “그가 집에 있다.”라는 말은 ‘집에 있는 사람’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해는 수많은 가닥들을 한데 모아 엮음으로써 하나의 매듭을 짜는 일과 같고, 해석은 이해의 매듭을 가닥가닥 풀어내는 일과 같다. 엮임과 풀림(이해와 해석)의 틀은 ‘매듭-짓기’와 ‘풀어내기’로써 만들어진다. 풀어내기는 펼쳐내기, 갈라내기, 이끌어내기(추론, 추측), 헤아려 나가기, 미루어나가기(살피기) 등으로 잘게 나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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