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무한성에 대한 믿음 속에서, 빠르든 늦든 진보라는 궤도 위를 굴러가는 인간과 시대의 속도만을 구분하는 역사관이 있다. [...] 다음에 이어지는 역사관은 반대로, 역사가 어떤 초점에 집중되어 정지해 있는 상태를 지향하고 있는데, 이는 오래 전부터 사상가들의 유토피아적 이미지가 그랬던 것과 비슷하다. 궁극적 상태의 요소들은, 형상 없는(gestaltlose) 진보의 경향으로서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위태롭고 무시당하고 조롱받는 창조물과 사유로서 매 순간 현재 속에 깊이 내재되어 있다. 완전함의 내재적 상태를 그대로 절대적인 상태로 형상화하고 또 그 완전한 상태를 가시화하여 현재 속에서 지배적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역사적 과제이다.” (1914년에 벤야민이 쓰고 연설한 <대학생의 삶>, Ⅱ/1, 75)

“유물론적 역사서술은 어떤 구성적 원리에 근거를 둔다. 사유에는 사유의 운동만이 아니라 사유의 정지 또한 포함된다. 사유는 긴장으로 포화된 성좌 속에서 갑자기 멈추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성좌에 충격을 가하게 되고, 그 충격에 의해 성좌는 하나의 단자로서 결정화된다.” (Ⅰ/2, 702-703)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급브레이크일 것이다.” (Ⅰ/3, 1232.)

   벤야민에서 정지상태의 변증법은 역사의 매 순간을 위기의 순간으로 간주하며, 역사의 전(全)과정을 담지하고 있는 ‘세계’라는 총체성으로서의 이념, 단자로서의 이념을 그에 합당한 태도로 서술하는 사유 방법론이다. 정지상태의 변증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극단들이 반정립 하는 가운데 빚어내는 ‘긴장의 순간’이고, 그 긴장의 순간을 사유가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지 상태에서 이뤄지는 사유를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 벤야민의 “각성(Erwachen)”개념이다. 그것은 깨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가상의 상태로부터 ‘깨어남’이다. 벤야민은 꿈과 같이 미망에 잠겨있는 의식, 반대로 깨어있는 의식, 꿈에서 깨어남으로서의 각성을 변증법적 구도로 볼 수는 없는지 묻는다. “각성은 꿈 의식이라는 명제와 깨어있는 의식이라는 반명제로부터의 종합이지 않을까?”(Ⅴ/2, 1028) 그러나 이때 각성이라는 종합은 꿈 의식과 깨어있는 의식이 극단들 속에서 반정립 하는 순간의 깨달음이라는 점에서 정과 반의 발전운동을 통한 종합이 아니다. 그것은 결정화이다.
   정지상태의 변증법은 ‘사유의 정지’라는 점에서 일견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태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 이 변증법은 사유의 충격을 통한 성좌/이념의 단자화(化)라는 점에서, 지양과 종합의 매개적 과정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벤야민이 사유대상에 대해 ‘객관적’이라 파악한 관점에서 비롯한 것이다. 대상에 대한 객관적 해석을 위해서, 첫째로 벤야민은 ‘극단들’이라는 사태 자체를 구체성의 종합으로 사유할 것을 필수적 형식으로 주장한다. 둘째, 그는 대상에 내재되어 있는 양면성에 주목한다. 예컨대 바로크 비애극은 주인공인 왕을 순교자이자 폭군으로 그리며, 죽음과 부활의 현상들이 극단들로 공존하는 세계이다. 서구 유럽의 근대는 유토피아적 잠재력과 파국의 현재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으며, 진정한 진보의 개념은 파국의 이념 속에서 기초를 세운다. 이러한 양극의 독법은 벤야민의 예술비평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그는「초현실주의」론에서 초현실주의 문학가 브르통(A. Breton)의 『나자 Nadja』가 이전 그 누구도 지각하지 못했던, “낡아 버린 것” 속에 나타나는 “혁명적 에너지”를 찾아냈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Ⅱ/1, 299) 이렇게 극단들 내부에 대립적인 성질 또는 잠재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벤야민은 이 극단들이 빚어내는 긴장의 순간에 결정화된 성좌/이념을 사유의 정지상태로 각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로 이념을 성좌 구조로 설명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벤야민은 모든 본질들은 “제반 현상들로부터 만이 아니라 특히 서로로부터도 독립된 독자성과 불가침성 속에 존재”한다고 본다. 진리는 이 독자성과 불가침성에 기인한 불연속성의 “본질들의 울림 관계”이다. 때문에 이 본질들 사이의 “지양할 수 없는 거리”를 사유해야 한다.(Ⅰ/1, 217-218)

 

2. 기술(Technik)

“해방된 기술은 사회의 근원적 힘들을 제압하는 일을 자연의 근원적 힘들을 제압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포함한다. (태고에는 그와는 반대의 관계가 지배했다. 즉 자연의 힘을 지배하는 것이 특정한 사회적 근원력을 지배하는 일을 포함했다.)  (Ⅰ/3, 1047.)

“제1의 기술은 개인의 독자적 경험을 배제했었다. 모든 마법적 자연 경험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개인적 경험의 최초의 단초는 유희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뒤 그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과학적 경험이 발전한다. 최초의 과학적 경험들은 구속력 없는 유희의 보호막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고 나서 이 경험은 수천 년의 과정 속에서 제1의 기술이 상응했던 자연에 대한 표상과 함께 어쩌면 그 자연의 현실까지도 사라지게 만든다.” (Ⅰ/3, 1048.)

   벤야민의 용례에서 ‘기술’은 직접적으로는 예술의 기술/기교와 산업 및 과학의 테크놀로지를 지시하는 동시에, “기술복제 시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기술이 전면화 된 모더니티 사회의 양상을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시대적 개념이다. 사실 벤야민의 사유와 미학에서 이 용어는 초 ? 중기에 속하는 『독일 낭만주의에서 예술비평의 개념』과 『비극서』에서는 예술의 ‘기술’로 한정돼 있다. 그러나 1925년을 기점으로 ‘테크놀로지’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게 그 의미가 예술 외부의 사회 현실 쪽으로 확장되고, 그의 연구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벤야민은 20세기 초 반(反)기술주의나 기술 물신적 입장을 “테크놀로지의 진정한 목적(telos)을 폭력화한, 도착적 기술 개념”이라 비판하고 자신의 후기 이론에서, 테크놀로지가 제2의 자연이 된 모더니티 사회에 합당한 사회적 의식과 예술을 제안하며 통합적 의미의 ‘기술’ 개념을 제시했다. 여기서 그의 기술 개념은 기술 또는 기계장치, 매체라는 물질적 또는 물리적 조건만이 아니라 그것을 다룰 “생산자”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다. 즉 개념상 작품을 ‘생산’하는 예술가 내지는 지식인 저술가를 향해 있는 것이다. 브레히트에 영향 받아 쓴 「생산자로서의 작가」에서, 벤야민은 “작가적 기술(die schriftstellerische Technik)”이라는 말로 이를 분명히 한다. 즉 여기서 “기술”은 예술가,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일을 생산수단과 기술과의 관계 하에서 혁명적으로 철저히 사고”함으로써, 사회변혁과 “계급투쟁”을 위해, 테크놀로지 기반의 제반 생산기구들을 “기술적으로 혁신”하고 “기능전환” 시키는 ‘정치적’ 실천의 방법론적 개념인 것이다.(Ⅱ/2, 689; 691) 무엇보다도 우선 후기 사유의 벤야민 자신이 이러한 “작가적 기술”을 자신의 사유와 글쓰기를 통해 시도했다.

“이 연구[Passagen arbeit]의 방법은 문학적 몽타주이다. 나는 아무 것도 말할 게 없다. 단지 보여줄 뿐이다. 나는 귀중한 어떤 것도 사취하거나 기지에 찬 표현들을 전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넝마들, 폐기물들을 목록으로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으로 그것들이 자체의 권리를 찾도록 할 것이다.” (Ⅴ/ 1, 574)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 위 인용문은 벤야민의 사유방법론이 세계의 극단들이 언어로서 스스로 전달하는 바를 지각하고, 그것을 당대 아방가르드 예술 또는 영화의 기술인 ‘몽타주’ ―이 용어는 애초 제품생산 분야에서 나왔다― 로서 서술하기를 지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여기서 우리는 벤야민이 논한 ‘작가적 기술’의 한 가지 방법을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철학적 사유의 글쓰기에 전통 철학의 논리가 아니라, 실험적인 예술의 표현 방법론, 그리고 산업 기술의 원리에 따라 생산 및 수용의 양 방향에서 새롭게 조직되는 이미지와 지각의 경향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에 입각해 볼 때 그의 철학은 이미지적 방식을 취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3. 변증법적 이미지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휙 지나간다. 과거는 인식 가능한 순간에 인식되지 않으면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사라지는 섬광 같은 이미지로서만 붙잡을 수 있다. “진리는 우리에게서 달아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켈러의 말은 역사주의가 추구하는 역사의 이미지를 표현해주는데, 바로 이 지점이 역사적 유물론자에 의해 혁파되는 곳이다.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매 현재가 스스로를 그 이미지 안에서 의도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을 경우 그 현재와 더불어 사라지려 하는 과거의 복원할 수 없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Ⅰ/2, 695.)

“과거에 지나간 것이 현재에 빛을 비추거나, 현재가 과거에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라는 것은 그 속에서 어떤 이미 흘러간 것이 지금과 만나 섬광처럼 성좌를 이루는 무엇이다. 달리 말해 이미지란 정지상태의 변증법이다. 현재가 과거에 대해 갖는 관계는 순전히 시간적 ? 연속적인데 반해 과거에 있었던 것이 지금에 대해 갖는 관계는 변증법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즉 후자의 관계는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지적 본성을 띠는 관계이다. 변증법적 이미지들만이 진정으로 역사적인, 즉 태곳적이지 않은 이미지들이다.” (Ⅴ/1, 578)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인과적 논리에 의한 연속성의 시간개념이 아니라 연속성의 고리로부터 파열된 ‘순간’, 과거와 과거에 대한 현재인식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불연속성의 “현재시간(Jetztzeit)”이라는 시간개념을 근간으로 한다. 그는 역사에 대해 “그것이 본래 어떠했던가?”(L. Ranke) 알고자 하는 입장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이는 역사주의의 심리로서, 벤야민은 주관을 개입하여 역사를 사실로 나열하고,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의 연속체로 서술하는 역사주의에 반대한다. 벤야민에게 역사의 진리는 인과의 견고한 고리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인식가능성의 순간에 영원히 되돌아올 수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리는” 섬광 같은 이미지이다.(Ⅰ/2, 695) 우리는 ‘성좌’, ‘섬광 같은 이미지’, ‘인식 가능한 순간’, ‘현재시간’과 같은, 벤야민의 이론적 표현에서, 그의 역사철학적 시간관을 파악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의 사유는 ‘카이로스적 시간관(Chairology)’ 이라 칭할만한 시간관에 근거한다.
   벤야민은 앞서 봤듯 과거와 현재가 꿈과 깨어남의 짜임관계라는 의미에서, “변증법적 이미지”라는 이름을 생각해 내며, 이것의 내용을 “정지상태의 변증법”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변증법적 이미지와 정지상태의 변증법은 벤야민 사유가 전개된 시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며, 용어상의 일관성을 찾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정리해 볼 수 있다. 『파사젠베르크』를 위해 쓴 1935년 개요와 「역사철학」, 『파사젠베르크』의 <N 인식이론, 진보이론> 에 그 근거가 있다. 1935년 개요에서 변증법적 이미지는 ‘집단 무의식 속의 소망과 꿈의 이미지’로 한정된다. 이후 벤야민은「역사철학」등을 통해 1935년 당시와는 다른 변증법적 이미지와 정지상태의 변증법에 대한 개념을 개진하게 된다. 이렇게 개정된 변증법적 이미지란 무엇보다도 “각성”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제 변증법적 이미지는 과거가 인식 가능성의 지금과 관계 맺는 형식이자, 점진적인 역사의 발전과정이라는 연속성의 고리를 파괴하고 역사적 존재의 의식에 스치듯 나타나는 과거의 ‘진정한’ 형상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지표”(Ⅴ/1, 577)를 갖고 있어, 위기의 순간에 읽혀지며, 과거에 대한 각성을 추동하는 이미지이다. 벤야민은 <N> 항목에서 위에 인용한(Ⅴ/1, 578) 문장으로 변증법적 이미지를 정의한다. 여기서 변증법적 이미지는 과거와 현재의 변증법적 각성에 있어 “방법론적 정수”이다. 관념론과 실증주의 역사주의가 가정하는 직선으로 연속 운동하며 진보하는 것으로서의 시간과는 다른 차원의 시간(또는 非시간/이미지) 개념으로서 ‘정지’ 또는 공시적 시대 결합의 ‘지금 순간’에 인식은 변증법적 이미지를 포착해 읽어낸다. 벤야민은 현재가 과거에 대해 맺는 관계는 ‘시간적인 것’이지만, 과거가 그 과거를 인식하는 지금 현재와 맺는 관계는 ‘변증법적 이미지의 관계’라 말함으로써, 인식의 방법론을 재정립하고 있다. 즉 여기서 인식은 추상적 관념 속에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정지 상태 속에서 변증법적 이미지를 읽어내는 일이다.
   벤야민이 인식의 방법론으로 사유의 정지 상태 속에서 변증법적 이미지에 대한 독해를 주장하는 것은, 사유에 주관의 개입과 가상적 연속성을 중단 ? 파괴하고 현재의 진정한 상황을 각성하기 위해서이다. 그러한 파괴 과정을 거쳐야만 가상이 말소된 역사의 이념, 모자이크처럼 깨어진 파편들로부터 구성되었으며 과거가 지금 현재와 만나 이룬 성좌가 가능하고, 그 역사의 이념을 독해 ? 서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