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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는 바울의 서신 가운데 가장 짧다. 게다가 그 내용도 빌레몬이라는 한 추종자에게 보내는 바울의 사사로운 편지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정전(canon)에 포함된 문서치고는 빈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왜 이 서신이 오래전부터 중요한 문서의 하나로 분류되어 왔는가? 어떻게 정전에 포함될 수 있었을까?

[그림1] 성 오네시모(작가미상)
우선 이 서신이 오네시모라는 인물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바울을 승계하려는 경향이 뚜렷한 후속 바울 서신에 속하는 「골로새서」(Epistle to the Colossians)에는 오네시모가 바울의 동역자로 소개되고 있다. 더 나아가 (‘사도 교부’로 알려진)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 테오포루스[Theophorus]로 알려짐, 주후 50~117경)가 에베소인들에게 보낸 서신(2세기 초)에 따르면, 오네시모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노예였던 자, 그것도 도망이라는 범법을 저지른 자가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장 대표적 교회의 하나인 에베소 교회에서 최고의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는 입지전(立志傳)적 변화 과정의 출발점에 관한 글이 남아 있다는 점, 그것도 다름 아닌 바울이 쓴 글 속에 남아 있다는 점이 이 텍스트가 특별히 기억되고 전승되었던 결정적인 동기의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서신이 교회에서 주로 활용된 것은 그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노예제도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다루는 실천적인 글이라는 점이다. 즉 이 텍스트는 일찍부터 해방주의적이고 일탈적인 신비주의 운동집단이라는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교회를 방어하는 데 안성맞춤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읽혀졌던 것이다. 요컨대 그리스도교회는 제국 로마에 해악을 끼치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교회는 도망한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준법 집단이었으며, 주인으로 하여금 도망한 노예를 가혹하게 처벌하는 대신 관용하고 사랑하도록 권고하는, 미덕을 갖춘 전통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빌레몬서」에 대한 이러한 관점의 수용사는 고대 로마제국 시대뿐 아니라, 중세와 근대까지도 계속된다. 동시대의 혁명적 급진주의자들과 대비해서 교회는 체제 전복적이지 않으면서도 체제의 가혹함을 사랑으로 전환시키려는 미덕을 보여주는 전범이 바로 「빌레몬서」에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서신의 이러한 해석사를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려 한다. 과연 이 텍스트가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쓰였는가? 이것은 바울을 「빌레몬서」에 얽힌 교회의 해석사로부터 분리시키는 작업이요, 동시에 그를 승계한다던 교회 자체로부터 분리시키는 작업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바울의 변증론을 펴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바울을 그의 해석 전통에서 분리시켜 역사 속에서 다시 검토함으로써 그의 가능성과 한계를 재점검하려는 것이다. 나아가 오늘 우리가 그를 재전유하기 위한 해석 가능성의 범위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요컨대 바울을 넘어서기 위한 바울 읽기의 일환으로 우리는 「빌레몬서」를 보려 한다. 그것은 특히 문제가 되는 주인과 노예에 관한 바울식의 사회윤리 내지는 신학적 윤리에 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대비시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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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네시모는 빌레몬 집안의 노예였다. 필경 그는 대농장(라티푼디움)에서 일하는 노예가 아니라, 소유주가 기거하는 집안에서 일하는 가내노예의 하나였던 것 같다. 특히 18절, “그가 그대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나 빚진 것이 있으면 그 책임을 나에게 지우시오”라는 구절이 시사하고 있듯이 집안에서의 그의 업무는 주인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칠 수 있는, 사소하지 않은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는 주인집의 회계를 관장하는 중책을 맡은 노예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는 주인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노예였겠다. 그런 이가 주인으로부터 도망쳤다.
자유를 갈망해서였을까? 아니면 무슨 중대과실을 범해서, 처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도주를 결행하게 된 것일까? 둘 중의 하나일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 물론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도망했다. 노예의 도망은, 로마 사회에선 중차대한 범죄다. 한니발로 유명한 제2차 포에니 전쟁(Second Punic War, BCE 218~201년) 이후, 즉 공화정 말기 이후 로마는 노예 노동에 대한 의존성이 대단히 커진 사회였으니, 노예의 도망이란 사회질서를 교란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체제 자체를 와해시키는 행위에 속한다. 요컨대 주인과 노예의 정상적인 관계를 뒤흔드는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도 로마는 관용을 베풀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노예의 도망은 빈번한 현상이었다는 점이다.

[그림2] 고대로마의 노예시장(작가 미상)


‘도망노예’는 가능한 한 주인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멀리 도주하는 게 최선이다. 아마도 지리상 먼 곳이 아니라면, 구성이 복잡한 도시가 도망지로서 안성맞춤일 것이다. 물론 주인과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있는 곳을 피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바울에게로 갔다. 주인 빌레몬과 바울이 절친한 사이임을 그가 모를 가능성은 그 반대의 가능성보다 훨씬 낮다. 요컨대 그는 의도적으로 바울을 찾아간 것이겠다.
유대인도 헬라인도, 남자도 여자도, 그리고 주인도 노예도 주님 안에선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바울의 가르침(「갈라」 3,28)을 믿었던 탓일까. 어쩌면 그는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이미 매료되어 있었던 상태인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은 다 하느님의 노예입니다. 그런데 주(인)님의 노예인 인간들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해방된 노예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분은 노예를 해방시켜준 것만이 아니라 당신의 상속자로 입적시켜 주셨습니다.’(「갈라디아서」 4,1~7 참조) 노예인 오네시모로선,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복음, 기쁨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주인집에서 집회가 벌어지던 당시 그 복음을 들었을 것이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할 길이 없었다. 그는 남몰래 바울의 선포를 새기고 또 새겼다. 하지만 그의 현실은 자신이 노예라는 것. 노예가 해방의 복음을 이야기한다면,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반사회적 행위다. 그러니 그 감동을 속으로 새기기만 할 뿐. 간혹 아주 조심스럽게 다른 노예들에게 이야기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용이하진 않았다. 그를, 그에 대한 주인의 신임을 혹은 그의 자리를 시기하는 누군가가 그를 밀고라도 한다면,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도망을 결심한다. 그가 뭔가를 잘못했는지도 모른다. 주인에게 중대한 손실을 주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신상에 닥칠 위험을 예감했을 것이다. 물론 대개의 경우 잘못이란 개인의 책임으로 단순히 환원되지 않는다. 더구나 노예처럼, 인신적 종속이 전면적인 경우라면, 그 잘못은 주인-노예 관계의 경직성으로 인해 지불될 비용에 속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노예는 자유롭게 처신할 수 없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로 인한 책임은 노예의 몫이다. 그러니 노예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의 구조적 결함을 떠올리기보다는 징벌의 강도와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것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오네시모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닥칠 심각한 징벌을 예상할만한 것이었다면, 그가 도망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건, 도망노예가 주인과 절친한 사람에게로 갔다는 것이다. 오네시모가 주인집에서 중책을 맡고 있었다면, 그리고 훗날 바울의 동역자로서 많은 활약을 했고, 심지어 에베소 같은 유명한 교회의 최고 지도자를 역임했다는 경력은 그가 대단히 영리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어쩌면 교활하리만치 그는 대인관계에 능숙한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주인과 절친한 사람에게로 피신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바울이 선포한 신학에 지극히 매료되어 있었던 탓이겠다. 모든 가능성 가운데 이토록 무모한 듯한 방안을 선택할 만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바울을 도와 선교사역에 참여하고 싶었을 것이며, 그를 위해 목숨을 걸 각오도 되어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조건들이 밑바탕에 깔리지 않는다면, 그의 모든 바람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우선 바울이 자신의 신학을 생활 속에서 실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말과 행동이 다른 이중적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의 존재론적 한계 문제로 환원시킬 것이 아니다. 누구라도 급진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신념을 실행하는 우회로를 찾지 않을 수 없기 마련이다. 바울의 해방선언은 현실에선 전혀 실현될 기미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활동은 예수처럼 일탈적 떠돌이 예언자의 모습과는 다르지 않은가. 그는 끊임없이 체제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관계해야 했고, 그런 사람들의 도움을 기초로 해서 활동을 계속해야 했다. 그러니 혁신적 주장을 실행하는 우회로가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노예의 도망 같은 민감한 문제가 닥쳤을 때 우회로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한편 바울이 그를 위해 빌레몬에게 압력을 넣는 적절한 수단을 강구한다고 해서, 곧바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려면, 바울의 말을 빌레몬이 받아들여야 한다. 권고가 효과가 있으려면 설득력 있는 표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바울과 빌레몬, 두 사람의 관계가 문제 해결에 적절해야 한다. 노예 가격이 대단히 비쌌고, 특히 남성 가내노예의 경우 대개 중차대한 일 처리 능력을 가진 이였을 것이니, 결코 작지 않은 재산상의 손실을 감수할 만큼 빌레몬이 바울을 존경해야 할 것이다. 또 중대한 범법자를 관용하는 것은 다른 노예들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으로선 신중하게 대처할 문제다. 더구나 이웃 가문들의 이목을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문제는 노예의 해방 문제가 아니라, ‘도망한’ 노예의 해방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빌레몬이 바울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은 많은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즉 그 모든 것을 감수할 만큼 바울의 권고가 권위 있게 받아들여지는 관계가 필요하다. 빌레몬이 바울의 요청에 항거하거나 자신의 사정 이야기를 할 수 없게끔, 바울의 권위가 빌레몬을 압도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서신에서 빌레몬의 선행을 칭찬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그대를 기억하면서, 언제나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대가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며 주 예수를 참으로 믿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4~5절) 이 서신이 개인에게 읽히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공동체에서 낭독되는 회람의 효과 또한 유념하고 있다면, 이 말은 빌레몬으로 하여금 자신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언술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뒤에 바울은 자기가 옥에 갇혀 있음을 이야기한다(10절). 물론 그의 상황은 그리 심한 억류상태가 아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 충분한 교류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구금 상태를 강조하면서, 오네시모가 그런 자기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임을 이야기한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선포활동의 대리자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런 인물로 오네시모가 제격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그 일을 해야 할 사람이 바로 빌레몬 당신인데, 오네시모가 그 일을 대신하고 있다고 ......(11~13절)

하지만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낸다. 복음의 선포를 위해서 그가 꼭 필요한데도, 빌레몬의 승인을 얻어야 하겠기에 그를 돌려보낸다는 것이다(14절). 이 말 속에는 오네시모의 소유권은 ‘빌레몬 당신에게 있다’는 사실의 승인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선 모든 것이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차이가 바울에게서 승인되고 있다. 그는 노예 소유주인 자기 동료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에 필요한데도, 진정한 소유주인 하느님이 그를 요청하고 있는데도, ‘하잘것없는’ 현실의 관행에 의존해서 오네시모를 돌려보내겠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빌레몬과 그의 공동체의 사정을 존중해주는 것이 그에겐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빌레몬에게 최대한의 선택의 자유를 제공해주는 듯이 말한다. 하느님의 사역을 위해서 오네시모가 꼭 필요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대로하시오, 라고. 물론 빌레몬이 이 말을 사소하게 들을 수는 없으리라는 걸 그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말로는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하지만, 바울의 의중은 그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를 해방시켜 더 이상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16절)로 받아들이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것을 빌레몬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는 없을 것이다. 또한 공동체에서 읽힐 때, 빌레몬이 바울을 공공연히 무시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만약 그가 잘못한 것이나 빚진 것이 있다면 그것의 보상 책임을 자기 자신이 지겠다고 한다(18절). 이 말을 듣고 빌레몬이 바울에게 보상을 요청할 리는 물론 없다. 즉, 이 말은 사실상 모든 재산상의 책임에 대해 그를 사면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한 걸음 나아가 그는 거의 협박에 가까운 말을 한다. 자기가 구금상태에서 벗어나면 조만간에 빌레몬의 집과 공동체를 방문하겠다는 것이다(22절). 그것은 일의 처리 상태에 대해서 자기가 계속 관심을 갖겠다는 뜻이겠다. 이쯤 되면, 빌레몬이 바울의 청을 거스른다면, 아마도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게다가, 바울의 청이 하느님의 일을 위해 오네시모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니, 빌레몬으로선 명분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것이다.
빌레몬은 인격적으로 충분히 존중해줄 만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자신의 계급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민중주의적 메시지에 귀 기울일 만큼 열린 가슴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 사이에는 깊은 홈이 있다. 복음에 따르기엔 그는 너무나 복잡한 기득권 집단의 이해와 얽혀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것을 포기할 수 없다. 현상유지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자리를 잡아야 한다. 바울의 편지에는 그런 신분적 위치의 한계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담겨 있다. 그가 그렇게 존경해마지 않는 이가, 오네시모의 사면, 하찮은 종 하나일 뿐인 이를 친히 청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빌레몬은 이로써 그 하찮은 종 하나를, 그 하나에 대한 권리 행사를 통해 존경하는 스승 바울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든 노예에 대한 사면이 아니니, 그것을 선택하는 게 결정적으로 어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품격에 약간의 손상을 받을 것이 예상되며, 작지는 않지만 감당할만한 재산상의 손해만 감수하면 되는 것이다.
후대의 텍스트인 「골로새서」가 바울의 동역자로 오네시모를 거명하고 있는 것이나, 이그나티우스가 에페소의 감독으로 그를 언급하는 것을 감안하면, 빌레몬이 바울의 청을 받아들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빌레몬과 오네시모, 바울의 좋은 관계는 지속될 수 있었다. 그리고 빌레몬은 관대한 노예소유주의 한 사람이면서, 바울의 동역자이며 그리스도 교회의 한 지도자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한편 오네시모는, 앞서 시사했듯이, 훗날 대단한 인물로 성장한다. 만약 바울의 노력과 빌레몬의 관용이 없었더라면, 그런 입지전은 없었겠다. 하지만 노예 오네시모는 노예해방운동가가 된 것이 아니다. 복음이 그 모든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는 바울의 선포를 자신의 것으로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현실에선 그 문제에 접근하는 우회로를 찾는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동시대에 북아프리카 지역 등에서 일어난 급진적 해방주의 운동과 무관한 사람으로 남아있었고, 심지어 그런 점에서 반대 입장에 있던 것으로 보이는 「골로새서」에서 좋게 평가하는 인물로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노예신분이었던 이가 급진적 해방운동에 공공연한 지지를 표명하는 일은, 그가 교회의 최고 지도자라는 지위에 있는 한,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의 내심이 뭔지를 알 수 없고, 다만 그의 공적인 태도만을 추측할 수 있는 우리는 이에 대한 더 이상의 상상은 금물이다. 다만 편견으로 그를 판단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만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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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오네시모의 해방을 위해 결코 적지 않은 성의를 보였다. 그 결과 위대한 그리스도교 지도자 한 사람이 탄생했다. 그리고 빌레몬이라는 양심적인 자산가의 지지를 계속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서신은 결코 노예에 관한 그의 신학을 펼친 것이 아니다.
한편 바울을 전유한 후대의 그리스도교 교회는 「빌레몬서」에서 바울식 복음이 결코 정치적 위험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논변하는 근거를 찾아냈고, 그것을 증폭시켜 해석하는 데 몰두했다. 결국 복음은, 해방의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노예를, 현실의 억압당하는 이들을 해방하는 신학으로 다뤄지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의 모든 차별이 하늘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니 ‘인내’하는 게 미덕이라는 투의 신학의 발전으로 귀결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교 내에서 일어난 저항의 정치들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기능했다.

우리는 여기서 「빌레몬서」의 바울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노예제를 거론한 것이 아니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도망한 노예와 그 노예의 소유주가 모두 자신의 동료인 상황에서, 그 긴장된 상황을 무리 없이 해소되게끔 하는 지혜가 어떤 것인가에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서 현상유지의 정치학을, 그러한 신학적 일반 이론을 발견하려는 해석전통은 분명 바울과 관계가 없다.
한편 바울은 노예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노예에 대한 발본적인 문제의식이 그의 존재의 전체를 이루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가 주인-노예 관계를 이만큼 진취적으로 사고한 것도 그리 폄하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가능성이 한계로 도달한 지점에서 그의 승계자의 한 사람인 오네시모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오네시모의 바울 전유의 한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 자신의 가능성이 그의 한계를 넘어서기에 그리 유용하지 못했던 탓일 수도 있다.
오늘 우리는 계급적, 계층적 편견을 정당화하는 시각에서 바울을 보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전통 속에서 계급, 계층적 편견의 신학적 정당화를 강변하는 바울을 넘어서자 바울에 관한 역사적 진실이 발견되었다. 그는 노예제에 대한 옹호론자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바울의 진실이 이러한 사회적 편견으로부터의 탈주를 염원하는 오늘 우리에게 다시 한계로 남아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다시 바울 넘어서기를 시도하게 된다.

브리스카,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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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서신들은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하나의 논설이 아니라 구체적 현안들에 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던 실용적 글이다. 이런 류의 글쓰기는 흔히, 오랜 시간을 두고 성찰적 언술을 편 텍스트의 정교함이 결여되어 있다. 만약 이때 그가 지향하는 가치의 어떤 부분이 보편적 가치와 갈등을 일으킨다면, 그의 주장은 그 보편적 가치들과 일정한 타협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무의식적인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협약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바울의 서신들의 주된 소의 하나는 공격자들에 대한 자기 방어에 있다. 그 공격은 주로 사도로서의 자격에 관한 것이다. 박해자였던 경력은 그의 활동에 끊임없는 시비거리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하여 바울은 자신이 진리를 담지한 자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데 집착하게 한다. 그런데 진리란 대중의 공인을 필요로 한다. 대중이 공유하지 않는 주장은 그가 진리를 담지한 자임을 공인받는 데 결격사유가 된다. 즉 그는 진리를 공하는 대중의 감수성에 호소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글쓰기는 ‘의도적으로’ 대중의 감수성에 호소하게 된다. 요컨대 바울의 서신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지배적인 가치와의 공모의 흔적을 도처에 담고 있다.
‘성’(sexuality)의 문제는 바울의 텍스트에서 기성 가치와 타협이 가장 현저한 주제에 속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울의 텍스트에서 우리는 기성의 성적 가치를 혁명적으로 전도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이 그와 동료였던 여성 예수운동가들로 인한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이 글은 바로 그런 추정을 입증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바울의 가장 중요한 선교 동역자의 한 사람인 브리스카의 활동에 주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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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성적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집회 시에 여자는 침묵하라는 것과, 집회에서 여자는 수건으로 머리를 가리라는 훈계가 있다. 먼저 ‘침묵 훈계’에 대해 살펴보자.
침묵 훈계는 여자들이 집회 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현실의 반증이 된다. 그렇다면 여자들의 집회 참여 방식은 어떤 것일까? 「고린도전서」 14장을 보면, 바울 공동체에서 예배 상황은 매우 즉흥적이었다. 그것은 아직 예배가 제도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직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신앙의 한 분파이던 시절이다. 하여 디아스포라 회당 예배가 교회 예배의 기본 골격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도적 종교의 예전은 항상 위계질서를 함축하고 있다. 디아스포라 회당 예배의 모습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도 그러한 위계질서가 은연중 작동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내의 급진주의적 분파의 하나였다. 이들이 급진주의적 공동체인 한, 디아스포라 회당의 주류가 담지하고 있는 제도적 위계질서를 거부하는 저항의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남성 중심적 위계질서에 대한 도전도 포함한다. 

한편, 바울 이후 세대의 정전적 텍스트들인 「디모데전서」 2장 11~12절이나 여러 가훈 구문들(「골로새서」 3,18; 「에베소서」 5,22?24; 「베드로전서」 3,1?5)은 「고린도전서」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양자 간에는 중요한 차이를 있다. 「고린도전서」에서 예배는 즉흥적이고 일탈적인 경향을 가졌다면, 이들 문서들은 질서 형성적이라는 점이다. 이 문서들 시대인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에 교회는 자기 형성적인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었고, 그런 차원에서 디아스포라 회당종교나 다른 종교운동들처럼 어느 정도 제도화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아무튼 바울이 여성 예절에 관한 풍습으로 예배의 여자 참여자들을 규율시키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파급효과가 있었다. 그가 그 근거로 존재론적 설명을 가한 것은 그 효과를 더욱 절대화한다. 즉 깊이 성찰하지 않은 채 특정한 의도를 위해 발설된 이야기는, 여성은 남성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징표로서 해석될 수밖에 없는 언술 구조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를 혼돈스럽게 하는 것이 있다. 11장 11~12절에서 갑자기 여성의 예속에 관한 논술이 교정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성서에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고 기록한 바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이 먼저요, 그 다음이 신령한 것입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되어 있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습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과 같이, 흙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고,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의 형상을 우리가 입은 것과 같이, 우리는 또한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42~49